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이반 투르게네프'''
'''Ива́н Турге́нев'''

[image]
''' 이름'''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Ivan Sergeyevich Turgenev)
''' 생몰년도'''
1818년 11월 9일 ~ 1883년 9월 3일[1]
''' 출생지'''
러시아 제국 오룔 현 오룔
(現 러시아 오룔 주 오룔)
''' 사망지'''
프랑스 공화국 부지발
(現 프랑스 일드프랑스 이블린 주 부지발)
''' 국적 '''
러시아 제국[image]
''' 직업 '''
산문, 시인, 극작가, 번역가
''' 활동 기간 '''
1834년~1883년
''' 학력 '''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 장르 '''
장르소설, 엘레지, 사실주의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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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제정러시아의 유명 작가이자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3대 거장'''이다. 러시아 발음은 뚜르게니프.

2. 생애


러시아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 출신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뒤, 알렉산드르 푸시킨 , 니콜라이 고골 등 대표적인 러시아 진보 지식인들을 만난 후 '서구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인 <첫사랑>, <루딘>[2] 등의 소설은 세련된 필체와 묘사로 유명하다. 중년기 이 후에는 로마노프 왕조의 구체제에 반대하는 소설을 다수 썼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에 <아버지와 아들>은 거의 항상 지명된다. 사실 원제는 <Отцы и дети> , 즉 복수형으로, <아버지들과 아들들>이다. 이는 이상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귀족 계층의 아버지 세대와 혁명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잡계급의 아들 세대들의 갈등을 다루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당대 러시아의 시대적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후에 염상섭의 <삼대>에 어느정도 영향을 준다.
어릴적의 투르게네프는 기병 장교였던 아버지가 일찍 죽고 난 뒤, 오렐 지방의 대지주 집안 출신이었던 어머니[3][4]의 양육을 받았다. 투르게네프의 어머니는 프랑스인독일인 가정교사를 불러와 투르게네프를 가르치게 했고 프랑스어로 말하게 했다.[5]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일상 생활에서도 프랑스어를 써야 했고 신에게 바치는 기도도 프랑스어로 해야 했다. 반면에 러시아어는 농노 하인에게서 배웠고 러시아어로 된 책은 8살 때 처음으로 보았다.[6] 그가 러시아의 대문호로 날리게 되는 미래를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가 따로 없었다.
투르게네프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은 러시아 농노 문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대지주였던 그의 어머니는[7] 농장을 관리하면서 사소한 잘못에도 체벌을 가하고 시베리아로 보내버릴 정도로 농노들을 무자비하게 징벌했다. 그리고 그녀는 농노들을 마구 후려쳤던 채찍으로 아들도 함께 때렸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다.[8]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어릴 적부터 이런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반감을 가졌고 1850년에 어머니가 죽자마자 물려받은 농노 약 천 명[9]을 해방시켰다. 투르게네프의 이러한 행동은 러시아 귀족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10]
농노를 해방하고 몇 년 후에 발표한 <사냥꾼의 수기>는 러시아뿐 아니라 서구권까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농노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렸다. 심지어 당국이 이 책 때문에[11] 그를 체포, 감금할 때, 러시아 전역에서 반대 여론이 거세게 들고 일어났을 정도. 이에 '대체 뭔 내용이길래 난리야?'하고 놀란 당시의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이 책을 읽고 1861년 2월에 농노 해방령을 발표하여 농노들을 해방했다는 엄청난 야사까지 있다.
그러나 말만 해방이지 농민들은 땅값을 다 치를 때까지 지주에게 봉사해야만 했다. 게다가 명목상 해방된 농민들은 지주에게 땅값을 갚아야 했으며 정부에 '상환금'을 내야했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불완전한 농노 해방을 단행한 것 때문에 귀족과 농민 양측으로부터 불만을 샀고, 과격단체의 폭탄 공격으로 끔찍하게 죽었다.[12] 당시 러시아 제국의 상황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알렉산드르 2세 항목 참조. 결국 러시아 정부로부터 추방당한 투르게네프는[13] 이후 파리에 살면서 러시아 농노제를 반대하는 각종 작품을 발표하여 서구권과 러시아의 인텔리로부터는 찬사를, 정부로부터는 공갈협박을 받았다. 그후, 1883년 친하게 지내던 비아르도 부인의 별장에 있는 별저에서 병사했다.
상당히 많은 지식인이 자신이 주창하는 사상이나 작품과는 별개로 실생활에서 상당히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투르게네프는 실제로 당대의 대인배로 알려져있다. 그는 젊고 가난한 작가들의 육성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농노 해방에 있어서도 실천적인 행동가였으며, 지식인의 '명예'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사생아 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 딸을 끝까지 책임지고 양육하며 교육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매일 노름에 빠져있던 톨스토이에게 돈을 빌려주고서, 돌려받지 않았다. 나아가 채무자인 톨스토이는 되려 투르게네프를 모욕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고, 실제로 이 문제로 둘은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결투로까지 이어질 뻔했다. 하지만, 투르게네프는 끝까지 톨스토이와의 우정을 멈추지 않았고 죽는 순간에도 톨스토이를 그리워했다. 지금 와서는 다소 호구같은 면모로 보일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투르게네프의 인성과 품격은 존경받아 마땅한 부분이다.[14]
투르게네프는 심각한 유럽의 면모가 있었고 특히 문학이나 사상 쪽에 있어서는 대책없는 프랑스였다고 한다. 사교계에서 매일같이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유럽의 선진국은 저런데 우리는 이래서 아직도 후진국이니 국내 도입이 시급합니다"(...). 다만 투르게네프가 유별난 인물인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당대 유럽 문학, 철학의 메카는 단연 프랑스였으며 19세기 러시아에서 서구 우월주의는 차다예프를 시작으로 러시아 사상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15] 더구나 마치 전근대 한국에서 상류층은 한글 대신 한문을 썼듯이 러시아 황궁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러시아어가 아니라 프랑스어가 일상용어로 쓰였다. 심지어 하급귀족의 아버지에게 태어난 '''블라디미르 레닌''' 또한 어렸을 때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서 프랑스어에 유창했다고... 참고로 사상계의 다른 한 축은 호먀코프, 키레옙스키, 도스토옙스키 등으로 대표되는 '''슬라브주의'''. '러시아는 유럽의 변방이며 서구 문명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서구 우월주의와 '러시아는 노쇠한 서구 문명을 대체할 젊은 문명'이라고 주장하는 슬라브주의의 논쟁은 19세기 러시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며 20세기, 21세기 현대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투르게네프의 서구지향적 성향은 단순한 이런 개인적 기호가 아니라, 비사리온 벨린스키, 알렉산드르 게르첸 같은 동시대 슬라브주의자들과 맞서 치열한 사상 싸움을 했던 지식인 파벌 중 일원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항상 레프 톨스토이에 밀려서 만년 콩라인 취급을 받으며 가끔은 '톨스토이와 좀 친하게 지냈던 19세기 소설가' 정도로 폄하되기도 한다. 이는 그들에 비해 특색이 떨어지는 작품성에서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에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존재하고, 톨스토이의 작품들에는 종교적인 인간에 대한 예찬이 두드러지는 반면 투르게네프의 작품들에는 딱히 특이점이 없다.
러시아 문학가들 중 가장 정석적인 작가로, 글에는 큰 특색이 없지만 그 정석적인 문체 덕분에 뭘 읽든 평균 이상은 간다. 특성상 번역으로 느낌을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산문시를 제외하면 번역을 크게 타지 않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일정 이상의 완성도가 담보되면서, 난해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고, 심오하지 않은 대중적이고 무난한 내용에 도스토옙스키처럼 고료 노리고 분량을 냅다 늘리지 않아서[16] 다른 작가들처럼 여러 출판사 번역본 놓고 머리 싸 맬 필요 없고 읽는데 시간이 많이 들지도 않는다.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생겼는데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방대한 분량과 이름 외우기도 버거운 수많은 등장인물에 질린 사람이라면 투르게네프가 좋은 선택이다.[17]
러시아에서도 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만들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곳곳에 존재하는 등 톨스토이 못지 않은 대문호 대접을 하고 있다. 문학적으로 진부하고 작품속 등장인물은 정상이 없다며 도스토옙스키를 굉장히 낮게 평가했던 나보코프는 러시아 문호들을 시험점수 매기듯 줄 세운다면 (선지자인 푸쉬킨과 레르몬토프는 제외하고) 톨스토이가 단연 으뜸이며 두번째가 고골, 세번째가 체홉, 네번째가 투르게네프라고 평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낙제해서 자기 사무실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거라고.
러시아인들의 투르게네프에 대한 존경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도 잘 나타난다. 제2차 세계 대전독일 국방군의 침략 때문에 화물칸 열차에 빽빽하게 피난민들이 탔는데, 그곳에는 독일군의 손에 훼손될까 봐 같이 옮겨지던 투르게네프의 소파가 있었지만, 아무도 그 소파에 안 앉았다고 한다.[18]
또한 투르게네프는 생전에도 매우 존경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투르게네프는 농노 해방령이 선포되었던 1861년에 오렐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한 적이 있는데, 두 명의 농민들이 자신을 찾아와 ''''러시아 모든 민중의 이름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러시아 방식'으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했던 일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는 이 순간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편 도스토옙스키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투르게네프가 동업자들을 싫어한 건 아니고 도스토옙스키가 투르게네프에게 열폭 + 정신승리 스킬을 시전하면서 사이가 나빠졌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도스토옙스키는 유형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슬라브주의를 표방하며 서유럽 문명을 비판했으니 서구주의자에 가까웠던 투르게네프와는 상극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투르게네프의 마지막 장편 처녀지와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다. 이 두 소설은 공통적으로 네차예프 사건을 기반으로 하지만 서구주의자들을 사정없이 몰아세우고 비판하는 악령과 달리 처녀지는 온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런데 정작 도스토옙스키는 글로는 그리도 투르게네프를 욕하면서도 돈이 급하면 그에게 와서 비굴하게 애원하며 돈을 빌려가곤 했다. 나중에 도스토옙스키가 독일까지 가서 원정도박하다 파산하자 도와주기도 했다. 뭐 투르게네프가 돈이 부족함 없이 부유한 경제적 환경에서 살았던 것도 있어서 도스토옙스키가 이에 대하여 질투하던 점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늘그막에 이른 도스토옙스키와 화해했고 마지막에서야 서로 글로 서로가 대작가라고 호평하며 죽기 전에 앙금을 깨끗히 씻었고 도스토옙스키 장례식에 투르게네프는 참가하여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2년 뒤 그가 죽자 도스토옙스키 유족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1] 공교롭게도 카를 마르크스와 생몰년도가 같다.[2] 현실의 변혁을 바라는 이상주의자이지만 막상 현실의 행동에서는 무력감을 나타내는 1840년대 '나약한 지식인' 루딘을 그린 소설. 중국의 문호 루쉰의 필명도 본작의 루딘의 이름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3] 투르게네프의 아버지는 굉장한 미남이었다고 전해지며 자신보다 10세 가량 손위인(6살 차이였단 말도 있다) 그의 어머니와 결혼했는데 여러가지 정황상, 사랑보다는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결혼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상황은 투르게네프의 소설인 첫사랑에서도 반영이 된다.[4] 그의 아버지,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투르게네프는 기병대 대령으로 수입이 상당했지만 사치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투르게네프의 어머니가 되는 바르바라 페트로브나 루토비노바가 가진 막대한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5] 러시아의 귀족 가문들은 대부분 이렇게 자녀를 양육했다. 외국인 가정 교사를 불러와 서구식으로 가르쳤으며 프랑스어로 말하게 하고 러시아어는 쓰지 못하게 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도 자녀가 러시아어로 말하는 것을 프랑스어로 교정해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톨스토이 본인도 학교로 가기 전까지는 푸쉬킨의 시를 몇 편 읽은 것 외에는 러시아 문학을 접하지 못했다.[6] 이것도 러시아어 책이 있는 방을 잠궈 놓은 것을 몰래 숨어 들어가서 읽었다.[7] 그녀의 대농장은 가족으로부터 상속받은 것이었다.[8] 그녀는 어릴 적에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는데, 어릴 적의 학대 때문에 성격이 망가진 것으로 보인다.[9] 5천 명 이상이라는 말도 있다.[10] 좋은 의미이기보다는, 이 때부터 정부에게 '사회 전복의 가능성이 있는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11] 명목은 극작가 고골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 불순한 내용을 적었다고 잡혔지만 시기도 그렇고 정황도 딱... 거기다 정부는 <사냥꾼의 수기>의 출판을 허가한 검열관도 잘랐다.[12] 팔과 다리와 몸 절반 가까이가 박살난 상태로 살아서 궁궐에서 죽고 싶다는 유언을 하여 궁궐에 도착하여 죽었다.[13] 정확히는 정부의 계속되는 압박에 '에라, 그냥 내 발로 나가고 말지' 식으로 출국.[14] 《지식인의 두 얼굴》, 폴 존슨, 을유문화사[15] 당시 미국 부유층도 이런 사고방식이 컸다. 짧은 역사와 유럽 각지에서 온 가난뱅이 개척민이 수두룩하다며 유럽인들에게 비웃음을 많이 받아서인지 유럽 명문 귀족 집안과 결혼하는 미국 부유층은 그걸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16] 첫사랑, 루딘, 처녀지, 사냥꾼의 수기 같은 대표작들은 단권으로 내기엔 분량이 모자라서 서로 묶이거나 다른 단편과 묶여 번역될 때가 많다.[17] 러시아 문학을 처음 읽는 외국인 독자에게 등장인물 이름은 생각보다 큰 장벽이다. 이름도 길고 생소한데 애칭까지 등장히기 때문에 처음 읽는 사람은 등장인물 파악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18] 출처는 리차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투르게네프가 쓴 <사냥꾼의 수기>가 러시아에서 농노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앞서 소개한 것처럼 농노 해방 과정에서도 한계나 어두운 면이 있었기는 해도) 농노 해방이라는 엄청난 역사의 변혁을 가져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부분 농노의 자녀 및 그 후손들인 러시아 국민에게 투르게네프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본인과 가족,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