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카와 다쿠보쿠

 


1. 개요
2. 일생
3. 작품
4. 대표 시
5. 대표 단카
6. 산문
7. 일기문
8. 반제국주의 성향
9. 기타


1. 개요


[image]
石川啄木( いしかわ たくぼく) [1]
일본의 시인, 문학평론가.
본명은 이시카와 하지메(石川一)이다. 필명인 타쿠보쿠(啄木)는 '나무를 쪼다'라는 의미로 딱따구리새를 가르킨다.
일본 나이 26세의 짧은 생애 동안 고향을 향한 그리움, 근현대 도시인이 겪는 생활인으로서의 슬픔과 서정,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과 민중적 자각, 삶의 회한과 냉소 등이 담긴 복잡다단하고 총체적인 성향의 문학 세계를 남겨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문학가로 평가받는다.

2. 일생


1886년 2월 20일에 이와테현에서 조코지 주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모리오카 중학교[2]에 진학해 평생의 친우인 언어학자 긴다이치 교스케(金田一京助)[3]와 만났다. 이후 중학교를 중퇴한 그는 기자가 되어 홋카이도를 방랑하며 지내다가 도쿄로 상경, 도쿄 아사히 신문에서 교정 일을 보게 된다. 낭비벽이 심하여 평생 많은 빚을 지고 경제적으로 불우하게 살다가 1912년 4월 13일에 결핵성 만성복막염에 시달리다 폐결핵으로 요절했다.[4] 향년 26세.

3. 작품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20살 때 첫 시집 <동경>을 발표하여 천재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문단에 데뷔했지만 상업적으로 실패한 후 소설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꾸준하게 여러 편의 소설을 썼다. 그러나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정작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소설이 아니라 단카였다. 그가 만든 단카집은 생전에 나온 유일한 단카집인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5])>와 사후에 그의 친구인 국어학자 도기 아이카가 편집하여 내놓은 <슬픈 장난감>의 단 두 권인데, 이 두 권에 담긴 단카들이 그가 죽은 후 말 그대로 대박을 쳤다.
원래 단카는 일본 고유의 시가문학으로 와카와 동일시됐으며 5행 5·7·5·7·7조로 구성된다(하이쿠가 여기서 뒤의 7·7을 빼서 만들어진 시가문학이다). 단카는 주로 귀족 계층에서 즐기던, 좋아하는 사람이나 좋아하고 아는 사람만 알던 폐쇄적인 문학 장르였다. [6]
다쿠보쿠의 단카는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 그 이유는 우선 5·7·5·7·7조를 유지하면서도 기존의 5행 구조를 과감하게 3행으로 바꿔서 서술의 자유로움과 단카의 전통을 동시에 확보했다는 점에 있다. 또한 생활에서 느끼는 솔직한 감성들을 도입함으로써 고답적이고 양식적인 기존 단카와 다른 민중적인 단카를 만들어 냈다.
<한 줌의 모래>에 실린 단카들은 그의 대표작인 만큼 다양한 내용들을 다룬다. 자살을 시도하러 간 바닷가에서부터 시상이 전개되어 도시인의 고독과 돈벌이의 괴로움,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계절에 대한 감회, 홋카이도 유랑 시절, 문학에 대한 애착과 회한, 프롤레타리아 운동 얘기, 죽은 아들을 그리워 하는 슬픔 등등 흡사 삶 자체를 체화하듯 의식의 흐름을 따라 압축적이고 세련된 시어로 구현해냈다.
그에 반해 <슬픈 장난감>은 어둡고 거칠고 단선적인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병에 걸려 죽어가는 소회(...)를 솔직담백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편집은 친구가 맡아서 했지만 원문에서 고친 게 거의 없어서 사실상 다쿠보쿠의 유작이 됐다.
그의 단카는 20세기 초반에 불었던 단카와 하이쿠 열풍의 중심에서 강력한 문학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이후 리얼리즘·프롤레타리아 문학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고향을 향한 그리움과 유랑 생활, 도시인의 삶을 소재로 한 서정성 또한 높은 평가를 받아 서정 시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혔으며 국민시인이라고까지 불리게 된다. 현재도 그의 작품들은 일본 국어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실릴 정도.



4. 대표 시


비탄하는 마음에, 말라붙은 영혼의 입술에,

물방울이 옥구슬 만드는 빛나는 샘물의 은혜,

향긋한 구름이 부는 성스러운 땅 푸른 꽃을

동경하여 쫓는 아이에게 하늘의 음악을 전하는

구제하는 주인이여, 가라앉은 종소리여.

아아 너, 존귀한 ‘비밀’의 뜻 따라 울리는가.

-「가라앉은 종」중에서[7]

희미하게 한밤중 감도는 종소리

생명은 깊숙한 환상, ―‘나’였노라.

‘나’야말로 진정 닿아도 닿기 힘든

흘러가는 환상. 그러니 사람들아 말하라,

시간에서 시간으로 흔적 없는 물거품이라고.

아아 그래, 물거품 한 번 떠오르면

시간이 있고, 시작이 있고, 또한 끝이 있는 법.

순식간에 사라졌구나. ―어디로? 그건 모르지,

흔적 없는 흔적은 흘러서, 사람들은 모르지.

-「나였노라」 중에서

시름 있는 날이면, 무척 슬퍼서

고니가 우는 소리 참기 어려워,

물가에 있는 새장 문을 열어서

놓아주니, 서글퍼, 희고 어여쁜

연꽃 같은 배 가는 모습이라니,

날갯짓 조용하게, 가을 향기가

맑아져 구름 없는 푸른 하늘을,

보라, 빛이 뚜두둑 떨어지는 듯,

새하얀 그림자가 떠도는구나.

-「흰 고니」 중에서

푸른 바닷물 멀리 저기 남쪽의

바다에도 없었고, 백 년의 세월

오래된 꿈속에도 없었던 것을,

어찌하여, 드높은 저편 기슭의

들여다보기 힘든 동산과 같이,

소식도 전혀 없는 두 해 동안을

안개 핀 저편으로 숨겨두었나.

-「떨어진 빗」 중에서


5. 대표 단카


동쪽 바다의 조그만 섬 바닷가 백사장에서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

나 울다 젖은 채로

われ泣きぬれて

게와 어울려 노네[8]

蟹とたはむる

이유도 없이 기차에 타고 싶다 생각했을 뿐

何となく汽車に乗りたく思ひしのみ

기차를 내렸더니

汽車を下りしに

갈 수 있는 곳 없네

ゆくところなし

일을 하여도

はたらけど

일을 하여도 아직 나의 생활은 편해지지 않누나

はたらけど猶わが生活楽にならざり

가만히 손을 본다

ぢつと手を見る

사람이라는 사람의 마음속에

人といふ人のこころに

한 사람씩은 죄수가 들어 있어

一人づつ囚人がゐて

신음하는 서글픔

うめくかなしさ

눈을 감아도,

眼閉づれど、

마음에 떠오르는 무엇도 없다.

心にうかぶ何もなし。

쓸쓸하게도, 다시, 눈을 뜨는 수밖에.

さびしくも、また、眼をあけるかな。[9]

언제까지고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いつまでも歩いてゐねばならぬごとき

심정이 끓어오른,

思ひ湧き来ぬ、

깊은 밤의 거리거리.

深夜の町町。


6. 산문


나는 어느 시골 소학교의 숙직실에서 뒹굴뒹굴하는 한 젊은 준(准) 교원을 상상했다. 그 사람은 진정 사람을 화나게 할 만한 거친 말 따위는 마음속에 하나도 지니지 않은 사람이다. 그저 막연하게 교과서에 있는 만큼의 자구(字句)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막연하게 자기 처지의 가련함을 시인하며, 막연하게 앞으로 단카를 많이 짓겠노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일찍이 자기 마음속 혹은 신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그 미치는 바가 얼마나 먼 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날마다 신문을 읽으면서도 우리 마음을 계속 바쁘게 만들고 날마다 새롭게 전개되는 이 시대의 진상에 대해 아무런 절실한 관심도 갖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이 사람이 인생에서 기분 좋게 입을 벌리고 웃을 기회가, 나의 그것보다 틀림없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슬픈 장난감>에 수록된 '단카에 관한 여러 가지' 중


7. 일기문


다쿠보쿠는 도쿄에 체제하던 시절 일기를 썼는데, 이것이 <로마자일기>다. 이름 그대로 일본어 발음을 로마자로 옮겨 글을 작성한 것으로, 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아내 세쓰코가 못 읽게 하려고(....).
다쿠보쿠의 시와 단카가 그의 서정성을, 산문이 정치적 견해와 문학평론가로서의 다쿠보쿠를 보여준다고 하면 일기문은 그의 데카당한 면모를 보여준다. 아내가 못 읽게 하려던 게 이해가 갈 정도로 솔직하게 자신의 막 나갔던 생활을 그대로 담았기 때문이다.[10] 아사쿠사에서 창기(娼妓)와 놀았던 경험도 솔직히 적혀있다. 그래서인지 죽기 전에도 일기를 태우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정작 아내는 '남편에 대한 애정 때문에 못 태우겠다'라며 긴다이치 교스케에게 일기를 넘겼고 그 결과 출판.....
그런데 막상 다쿠보쿠가 아내가 못 읽게 하려고 로마자로 글을 썼다곤 하지만, 아내도 당시 상당한 재원이었기에 정말 일기를 못 읽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다. 그리고 과연 못 읽게 하려는 단순한 목적 때문에 굳이 로마자로 폼을 들여 글을 썼을까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8. 반제국주의 성향


지도 위 놓인 조선국 강토 위로

地図の上朝鮮国に

새카매지게 먹을 칠하며 

黒々と墨を塗りつつ

갈바람 소리 듣네 

秋風をきく

누군가 나를

誰そ我に

피스톨 가지고서 쏴 주지 않으려나

ピストルにても撃てよかし

얼마 전 이토[11]

처럼 죽어 보여주련다

伊藤のごとく死にて見せなむ[12]

위와 같이 한일 강제 병합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담은 시를 짓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길 독려하는 산문을 발표하는 등 반제국주의적 성향을 지닌 일본인이었다. 위의 단카는 실제로 일본과 같은 색으로 표기된 조선 지도 위에 먹을 칠하며 지었다는 이야기도 그의 지인으로부터 전해진다. 천황 암살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 고토쿠 슈스이의 대역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을 보며 분노한 그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대해서도 '나는 조선인을 미워해야 할 까닭을 모르겠다' 라고 발언했으며, 대놓고 안중근 의사의 마음을 안다는 내용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딸을 '소냐'라는 러시아 이름으로도 불렀는데, 이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를 폭탄으로 암살한 무정부주의자 소피아 페롭스카야의 별명이기도 했다.

9. 기타


시인 백석이 이시카와의 시를 사랑하여 그의 이름 중 石을 따와 필명으로 했다.
도련님의 시대에서도 등장했는데,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와 함께 모든 권에 개근한 얼마 안 되는 인물이자, 3권의 주인공이다. 1~2권은 몇 장 안 남은 그의 실제 사진의 모습 그대로 그려졌지만, 3권부터 다니구치 지로의 화풍 변화와 함께 가벼워보이는 청년의 모습으로 역변했다. 동시에 그의 어처구니없는 낭비벽도 충실하게 묘사되었다.
러일전쟁 직후 개척기 홋카이도를 다루는 만화 골든 카무이에서도 만화 중반부에서 등장하는데 화풍은 많이 달라도 마빡 생긴거나 돈에 쪼들린거나 아무래도 도련님의 시대를 보고 그린 오마쥬 같다....
다쿠보쿠는 자신의 빚을 꼼꼼하게도 계산하여 기록해 뒀는데 총 63명에게서 1372엔 50전의 빚을 졌다. 이중 상환이 얼마나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대략 1400만 엔에 달하는 상당한 액수여서 정리를 끝내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시카와 다쿠보쿠가 탐정으로, 긴다이치 교스케가 그의 조수 역할로 활약하는 이이 케이의 추리 소설 딱따구리 탐정처(啄木鳥探偵處)가 애니화 되어 2020년 4월 13일에 공개되었다.
[1] 진나이 토모노리의 개그 '컨닝'에서 나온 말. 직역하면 '돌이나 솜이든 먹는 나'이다.[2] 미야자와 겐지가 다닌 학교이기도 하다. 겐지가 다쿠보쿠의 10년 후배. 둘 다 불교 집안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그래서 이와테현에서는 다쿠보쿠와 겐지를 세트로 묶어서 문학 행사를 열기도 한다...[3]긴다이치 코스케의 이름 모델[4] 그의 아버지와 아내, 와카야마 보쿠스이가 보는 앞에서 절명했다. 와카야마 보쿠스이가 이에 대해 수필로 남긴 바 있다.[5] 히토니기리노 스나가 아니라 음독으로 이치아쿠노 스나라고 읽는다. 원문 읽기[6] 단카는 헤이안 시대의 귀족 문화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속된 말을 사용하지 않아 서민들이 즐기기 어려웠는데, 이에 반발하여 단어 선택의 폭을 넓히고 서로 즐기는 놀이로써 발전한 것이 하이카이이다. 다만 하이카이는 문인들의 놀이에 가까워 문학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는데, 이를 안타까워한 마쓰오 바쇼의 하이카이 유파는 하이카이의 문학성을 높이는 시도를 했고 시대가 지나 하이카이에서 그 특유의 간결함과 문학성을 높인 것이 하이쿠.[7] 이하의 시들은 모두 <동경>에 수록된 시편들로 매우 상징주의적이고 탐미적이며 난해한 성향을 가졌던 다쿠보쿠의 초기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20세기 초 일본의 19살 작가에게서 쓰여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고 화려한 언어 유희와 다양한 지적 배경이 필요한 은유를 선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면모 덕분에 다쿠보쿠는 천재 시인이라는 호평을 받는다. 이후에는 그의 단카들이 보여주듯 리얼리즘적이고 직관적이며 현실 참여적인 작품들로 바뀌는 경향을 보인다.[8] <한 줌의 모래>의 맨 처음 단카로 워낙 유명하며, 이어령이 이 단카를 표본으로 하여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썼다.[9] 다쿠보쿠는 두 번째 단카집 <슬픈 장난감>에서 첫 단카집 <한 줌의 모래>에서는 전혀 쓰지 않았던 마침표, 쉼표, 느낌표, 들여쓰기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러한 구두점의 활용은 화자의 감정을 보다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문학적 장치로 쓰이며, 구두점의 유무를 통해 <한 줌의 모래>에 실린 단카인지 <슬픈 장난감>에 실린 단카인지를 구분할 수도 있다.[10] 세키가와 나쓰오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듯한 방탕한 생활, 시대를 객관적으로 관조하는 지성, 냉소적 관점과 희망적 관점이 뒤섞인 다쿠보쿠의 복합적인 면모가 예술가로서의 청년적 면모, 나아가 메이지 시대 자체가 갖는 청년적 면모를 표상한다고 봤다. 그가 스토리를 맡은 도련님의 시대에서 다쿠보쿠가 주요 인물이 된 이유.[11] 이토 히로부미[12] 1910년 10월에 간행된 문학잡지 <창작> 제1권 8호에 수록된, 이어지는 구성의 두 수의 단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