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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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潤基
1947년 5월 3일 ~ 2010년 8월 27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소설가, 번역가, 신화학자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딸 이다희도 번역가이다. 큰아버지가 조총련에서 활동하는 바람에 이윤기의 집안까지 엮여 굉장히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장편 하늘의 문은 그러한 어린시절의 경험이 녹아든 자전적 작품이다.
2. 활동 내역
이윤기는 1947년 5월 3일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두북2리[1]#에서 7남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할머니 밑에서 10살 때까지 자랐는데, 이때 할머니로부터 4살 때부터 천자문·<동몽선습>·<채근담>·<명심보감> 등을 익혔고 <숙영낭자전>과 <옥루몽> 같은 소설을 접했다.
할머니가 별세한 후 그는 다시 어머니 품으로 돌아왔고 17살 연상인 형의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허기진 듯 달달 외웠다. 대구 칠성초등학교 5학년 때는 부잣집에 입주과외를 들어가 돈도 벌어 당시로선 드문 바이올린까지 배웠고, 경북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도서실 사서로 일하며 많은 책들을 두루 섭렵했다. 그러다가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입학한지 3개월 만에 중퇴하였다.
고등학교 중퇴 후에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짓기도 했고 제분소 등 공장에서 일도 하다 검정고시를 보고 고졸 학력을 얻었다. 이에 1967년 성결대학교 신학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이 역시 중퇴하였다.[2] 이후 유학 자격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유학 자격을 얻었으나 재일교포였던 큰아버지가 조총련계로 재일교포 북송단 모집책이었던 탓에 연좌제에 걸려 포기해야만 했다.#
그후 영장이 나와 입대하였으며 1971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참가, 전투병으로 맹활약하며 훈장까지 받았다. 말년에는 영내 도서관에서 사서 노릇을 하며 번 돈으로 영어 원서를 구입하곤 했다. 군대 전역 후에는 다시 공사판을 전전하다 1975년 청소년 잡지 <학원>의 기자가 됐다. 그곳에서 미술 전공으로 편집기자로 일하던 아내를 만났다.#
그러다 베트남 전쟁 참전 당시의 경험을 단편 <하얀 헬리콥터>로 써낸 것이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여 문단에 발을 들였다. 동인문학상까지 받아본 실력있는 소설가로 단편소설을 주로 집필했다. 한자가 섞이고 호흡이 좀 긴 예스러운 문장을 선호하는 특징이 있다. 이른바 '화려한 문어체, 만연체'. 특히 그리스 신화를 스스로 해석해 한국어로 소설화한 <뮈토스>는 신화라는 소재와 특유의 문어체가 정말 멋드러지게 어울린다.
2000년대 이후론 번역가로서의 명성이 훨씬 높았다. 베트남 때 작전에 투입되지 않을 때는 미군이 보던 영어 페이퍼백을 읽으면서 보냈고, 이때 쌓은 내공이 이후에 번역가가 되는데 크게 밑거름이 되었다. 주로 영어로 된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했하며 틈틈이 자신의 소설을 발표했다. 번역계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많이해서 그전에는 한국에 없던 작품들을 들여와 물꼬를 터주었다. 번역에 있어서는 직역보다 의역을 추구했다. 이윤기만이 아니라 1세대 번역가들 다수가 공유하는 특징인데 뒷세대 번역가들보다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한국어 구사능력이 월등했기 때문에 유려한 의역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번역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영어번역자라서 이탈리아어 원문이 아니라 영어중역본이고, 번역자가 중세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없어서 초판은 번역의 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점은 두고두고 지적받았으나, 과감히 번역에 나서 이 명작을 한국에 최초로 소개했음에 의의를 둬야 한다. 1986년 당시에는 일본보다도 빠른 번역출판이었다. 이윤기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번역이 되었겠지만 10년은 늦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자신의 오역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지적을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개정판을 발매했는데 초판 발매 6년 뒤인 1992년에는 미국과 일본에서 발매된 장미의 이름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500개에 달하는 각주를 포함시켜 개정판을 냈고 2000년 철학박사 강유원 교수가 "장미의 이름 고쳐 읽기"라는 제목으로 원고[3] 를 보내 약 300여 개의 부적절한 번역과 첨가 또는 삭제해야 할 부분을 알려주자 강유원의 동의를 얻어 2000년에 새롭게 개정판을 내고 책 말미에 강유원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이후 에코의 다른 작품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을 번역했다. 푸코의 진자는 푸코의 추로 냈고 이후 완전히 새로 번역해 개정판을 내놓았다.
또 다른 유명작품은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들이다. 고려원 편집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카잔차키스 선집을 기획해 번역가 안정효와 함께 영어 중역본이나마 카잔차키스의 작품들을 번역해 한국에 들여왔다. 이때 번역한 작품들이 그리스인 조르바, 미할리스 대장, 돌의 정원.[4]
그리스 로마 신화도 유명한데 전문적으로 영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서 영문학적 컨텍스트를 잘 모르고 오역을 하기도 했으며, 영문학자들에게 이점을 수차례 지적받았다. 특히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길 잃은 태양마차'의 경우 원전에 충실하지 않고 아예 각색을 했다며 영문학자 이재호 교수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단, 원래 남이 해놓은 일에 잘했다 못했다 훈수를 두는 건 쉽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영문학 교수들이 성경과 더불어 서양 문학의 양대 원천인 ‘그리스로마신화’를 이윤기보다 훨씬 늦게 번역했다는 것 자체가 교수로서 직무유기 수준이다.
번역가로서의 이윤기의 장점은 첫째, 빼어난 한국어 문장. 번역이란게 해당 국가의 언어와 작가에 대해서 잘 안다고 되는게 아니라 한국어 구사능력이 굉장히 중요한데 문어체를 지루하지 않게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윤기는 그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시켰다. 둘째, 지적에 대한 수용과 노력. 대학을 못나오고 독학으로 번역가가 되었기 때문에 기틀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아 오역을 많이 했는데 스스로를 성수대교에 비유하며 지적을 수용, 지속적으로 개정판을 내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평생 철학, 신학, 미학등을 독학했다.
단점은 전술한 대학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데서 오는 학문적 기반의 부재. 이거 때문에 대표작인 에코의 작품들과 그리스 로마 신화 모두 오역이 많았다. 에코의 저작들은 전술한대로 지속적으로 개정판을 내어 보완했으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서는 지적을 받아도 자신만의 해석이라며 듣지를 않아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번역할 때만 다른 귀신이 들어오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만화가 허영만과 동갑내기 친구였기에 식객 16권, 27권을 비롯한 만화에서 종종 나오곤 했다.
2010년 8월 27일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때가 향년 63세. 마지막 번역작은 섬앤섬 출판사에서 출간한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 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