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을호
전남 영광 출생, 중앙고보를 거쳐 서울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앙고보 때, 東武 李濟馬의 제자 崔承達에게 사상한의학을 공부하고 『동의수세보원』을 번역하여 최초로 사상한의학설을 체계화시켰다. 24세에 영광에서 한약국을 운영하면서 「조선일보」와 『동양의학』 논문집에 의학 및 약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27세에 영광체육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독립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2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접하고 한국실학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광복 후, 사재를 들여 영광민립남녀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39세에 광주의과대학 부속병원 약국장에 취임하였다. 49세에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후학을 양성하면서 정약용 연구에 전념하여 다산학을 체계화시켰다. 58세에 서울대학교에서 「다산경학사상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학 연구에 독보적 업적을 남겼다.
정년퇴임 후, 광주박물관장에 취임하고 호남의 유물, 유적을 발굴하여 호남의 사상과 문화를 새롭게 정립하는 한편 다산학연구원을 설립하여 실학정신으로 사회정화운동을 일으켰다. 다산학을 출발점으로 실학정신을 발굴하고 나아가 한국철학을 연구하여 한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사상적 독자성을 밝히고 한국 문화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여 현대 한국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저서로는 논문 등 수백 편을 모아서 펴낸 『이을호 전서』 24권 9책이 있다.
광복 후, 사재를 들여 영광민립남녀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39세에 광주의과대학 부속병원 약국장에 취임하였다. 49세에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후학을 양성하면서 정약용 연구에 전념하여 다산학을 체계화시켰다. 58세에 서울대학교에서 「다산경학사상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학 연구에 독보적 업적을 남겼다.
정년퇴임 후, 광주박물관장에 취임하고 호남의 유물, 유적을 발굴하여 호남의 사상과 문화를 새롭게 정립하는 한편 다산학연구원을 설립하여 실학정신으로 사회정화운동을 일으켰다. 다산학을 출발점으로 실학정신을 발굴하고 나아가 한국철학을 연구하여 한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사상적 독자성을 밝히고 한국 문화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여 현대 한국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저서로는 논문 등 수백 편을 모아서 펴낸 『이을호 전서』 24권 9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