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베이 말름스틴
[image]
전성기 시절의 모습.
[image]
김기동으로 유명한 짤
스웨덴 스톡홀름 출신의 헤비메탈 기타리스트. 1963년 6월 30일 출생.
풀네임은 영어식으로 잉베이 조핸 말름스틴(Yngwie Johann Malmsteen, /ˈɪŋveɪ ˈmɑːlmstiːn/).[3] 스웨덴어식으로 '라르스 요한 윙베 란네르베크(Lars Johan Yngve Lannerbäck)'. '잉베이(Yngwie)'라는 이름은 스웨덴어 이름 윙베(Yngve)를 영어식으로 바꾼 이름이고, '말름스틴(Malmsteen)'이라는 성씨는 모친의 성씨였던 말름스텐(Malmsten)에서 따왔다. 그런데 국내에는 영어 발음을 대강 추측해서 옮긴 '''잉위 맘스틴'''이라는 잘못된 표기로 오랜 기간 통용되어 왔다. 잉위라니…[4]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이 통용 표기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원발음에 가까운 '''잉베이 말름스틴'''이라는 표기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5][6] 과거 그가 방한 기념으로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했을 때, 본인에게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면 되냐고 물어봤더니 직접 '잉베이'라고 불러달라고 답하기도 했다.
헤비메탈 기타계에 클래식적인 연주법과 작곡 방법을 대거 도입하고, 스윕 피킹 및 온갖 고난도 속주 테크닉을 선보여 헤비메탈과 기타 연주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7] 피킹의 터치감과 정확성/안정감이 지구상에서 최고 라인 중 한 명으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오버드라이브나 디스토션으로 가득 메꿔놓고 갈기는 기초가 안 잡힌 플레이어들에게는 그의 한 구절도 흉내를 못낼 정도... 이것을 테스트 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과거 레슨 영상 "Yngwie Malmsteen REH Video Hot Licks"에 첫 부분부터 따라해보면 알 수 있다. 아래 영상을 보면 기타 좀 친다는 웬만한 기타리스트들도 따라해보다가 한계를 절감하게 만드는 괴물 같은 플레이를 보여준다. 그것도 1984년에.
또한 바로크 메탈[8] (클래식적 선율에 속주 기타 연주를 중요시하는 장르)을 헤비메탈계의 주요 장르로 부각시키고 발전시킨 이 분야의 시조격인 인물이다. 또한 현대 속주 기타의 계보를 올라가면 이 사람 없이는 대화가 성립이 안 될 정도. 그러한 공적 때문에 80년대 뿐만 아니라 록 음악/헤비메탈 장르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있는 기타리스트 중 하나로 추앙받고 전세계적으로 그를 숭배하는 엄청난 팬과 추종 기타리스트들이 있다. 하지만 또 그 때문에 그런 팬들만큼 안티와 까가 많은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이건 후에 거론될 본인의 성격이 자초한 것도 있다.
80년대 그의 '''엄청난''' 속주 연주는 당시엔 그야말로 얼이 빠질 정도로 충격적이라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켜 그를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 기타의 신으로 추종하는 수많은 팬들을 만들었다. 특히 하드록 씬에 테크닉과 속도감에 굶주려있던 일본과 일본의 영향을 받았었던 대한민국 메탈헤드 사이에서는 서양에 비교해도 넘사벽 수준.Far Beyond the Sun 맛보기로 듣고 가자
기타리스트들의 테크닉이 극도로 상향평준화된 현재에 와서는 기타 좀 친다는 사람이면 잉베이 말름스틴 곡을 카피하는 게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속주였다. 솔로 데뷔 앨범 'Rising Force'가 나왔을 때 리치 블랙모어(Highway Star의 그 사람이!)는 ''어떤 할일없는 놈이 레코드를 빨리 돌리는 장난을 한줄 알았다"는 소감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 당시의 현역 기타리스트들 중에는 '이건 불가능한 연주다. 페이크다.'라고 단언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록 음악/헤비메탈 기타리스트들은 얼마나 빨리 속주를 할 수 있는가로 실력을 판정받기도 할 정도였다. 마치 1970년대 기타리스트들에게 Highway Star가 처음 발표 되었을때 만큼의 충격을 1984년에 다시 일으킨 것. 토니 매칼파인, 크리스 임펠리테리, 비니 무어, 마이클 안젤로 바티오, 폴 길버트[9] 등등의 내로라하는 기타리스트들 조차 이때는 잉베이 앞에선 명함도 못내밀 수준이었다. 속주를 딱히 내세우지 않아도 웬만한 기타리스트면 속주를 다 할 수 있지만, 이 중에서도 잉베이는 속주에 고유한 개성을 넣었다는 점이 독창적. 특히 일본의 어설픈 빠들은 그를 게리 무어, 에디 밴 헤일런과 함께 80년대 세계 3대 기타리스트로 얘기하기도 하고[10] , 더 오버한 멍청이들은 지미 헨드릭스, 에디 밴 헤일런, 잉베이 말름스틴을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일본 본토에선 잉베이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王者(왕자. 프린스가 아니다!)라고 일컬을 정도. 확실히 일본에서 인기는 언터쳐블이다. 까들의 인식과는 달리 북미, 남미, 유럽 등지에서도 수 많은 팬들과 추종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기타리스트 인기 투표 순위나 위대한 기타리스트 목록을 발표할 때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일이 가끔 있는 정도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헤비메탈이라는 장르에서 잉베이 말름스틴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속주 기타리스트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뮤지션이 바로 이 사람이니.
하지만 록 음악을 기타리스트들의 속주 묘기 대행진 서커스로 만들었다는 비판, 기타 연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들리고 곡 구조도 항상 뻔한 매너리즘의 극한이라는 비판, 엘리트 기타리스트들만이 부각되어 록 특유의 저항과 자유 정신이 함몰되어 버렸다는 비판들이 제기되어 차차 수많은 안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다른 기타리스트들의 실력을 깎아 내리기만 하는 그의 몇몇 부적절한 언행, 밴드에서 독재자로 활약하며 다른 멤버들의 연주를 억누르며 함부로 대하고 해고한다는 소문, 또 매너리즘에 젖어 수십년간 똑같은 음악만 한다는 비판 등등 때문에 최근엔 칭찬보단 안티성 글들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항상 타당한건 '''절대로''' 아니다. 어떻게 보면 얼치기 따라쟁이들과 개념을 탑재하지 않은 빠들의 피해자.(글쎄?) 자세한건 옹호 항목을 읽자.
최초로 락 기타리스트가 되고싶다는 꿈을 꾼건 TV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보았을 때라고 하며,[11] 나중에 "7살때 지미 헨드릭스가 죽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지미 헨드릭스가 죽은 그날, 기타리스트 잉베이 말름스틴이 태어난 것이다"[12] 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헨드릭스의 영향에 대해 지겹도록 질문을 받을 때 마찬가지로 지겹도록(…) 똑같은 답을 하는데 그가 주장하는 건 분명히 헨드릭스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보고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게 된건 사실이지만[13] 헨드릭스 본인의 연주나 음악적인 성향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건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 헨드릭스는 분명히 블루스, R&B에 강한 베이스를 둔 기타리스트이다. 하지만 잉베이의 곡 중에 나오는 돌출적인 비브라토나 클라이맥스로 이끌어가는 방식은 분명 지미 핸드릭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Far beyond the sun에서 클라이맥스 부분을 잘 들어보라. 단순히 장르의 구분을 가지고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말하긴 어렵다.
말름스틴은 록에서는 리치 블랙모어 [14] 와 울리 존 로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클래식에서는 바흐, 파가니니, 안토니오 비발디에게 영향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특히 바로크 메탈의 토대를 마련해준 리치 블랙모어 에 대해서는 무한한 존경심을 보낸다.
데뷔 초에는 리치 블랙모어 의 헤어스타일, 의상, 무대 퍼포먼스까지 모두 그대로 따라할 정도 였고, 96년 발매한 inspiration 앨범 트랙 10곡 중 5곡이 리치 블랙모어 의 곡이다. [15] 리치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지 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 출신 보컬들과 다 같이 밴드 혹은 프로젝트를 하엿다. 대표적으로 알카트라즈 시절 땐 레인보우 2대 보컬인 그레이엄 보넷, 개인 밴드 라이징 포스의 보컬은 조 린 터너, 그리고 프로젝트로는 로니 제임스 디오과 같이 작업을 했었다.
[image]
리치 와 잉베이
이미 10살때부터 Track On Earth란 밴드를 하기도 하며, 클래식 연주법에 대한 관심도 일찍 시작되어, 특히 속주로 유명했던 19세기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의 곡을 기타로 많이 카피했다고 한다.[16] 이 시절 활동하던 아마추어 밴드의 이름 중에 훗날 재활용되는 Rising Force가 있다.
1982년, 지금은 프로그레시브 메탈계에 매진하고 있는 유명한 락 제작자 마이크 바니에게 자신의 데모 테입을 보냈고, 마이크 바니[17] 는 그의 재능을 인정, 그를 미국에 불러들인다.
사실 잉베이는 어떻게 보면 모두가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이란걸 명확하게 이뤄낸 이민자이다. 마이크 바니에게 뽑혀서 미국으로 간 뒤에는 1주일만에 수퍼 스타, 초신성, 요주의할 신인으로 단 한번에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아메리칸 드림의 표본이라 할만 하다. 그래서 간혹 인터뷰에서 보면 미국을 거지 같은 나라라고 까는 이들한테 하는 말이 '이 나라가 얼마나 기회와 희망의 나라인지 인지못한다'라며 비판했다. 메탈계 거물급 프로듀서 마이크 바니가 스웨덴까지 와서 그의 기타실력을 보고 그를 데려갔으니 잉베이 입장에선 기회와 희망의 나라라고 할 법도 하다. 데뷔 후에도 하루에 3시간은 연습한다고[18] 밝힌 적이 있다.
잉베이는 처음엔 Steeler라는 밴드에 가입했지만 사실은 녹음이 다 완결된 뒤에 기타 파트만 오버더빙으로 들어간 것이라 정식 멤버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때문에 잘 들어보면 곡과 기타 연주가 따로 노는 경향이 강하다.
그 뒤 레인보우 및 MSG를 거쳐 온 명 보컬리스트 그레이엄 보넷 에게 오디션을 받고 알카트라즈(밴드)의 기타리스트로 가입, 밴드의 데뷔작인 No Parole From Rock N' Roll을 내면서 사실상 최초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다.
이 앨범은 매우 훌륭한 앨범인데, 완전히 속주에 함몰되지 않고 락적인 템포에 충실한 잉베이의 기타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데다가, 당시 최고의 기량에 도달한 그레험 보넷의 열차화통같은 쩌렁쩌렁한 파워풀한 목소리도 큰 매력을 말한다. 상쾌한 Island in the Sun, 박진감 넘치는 리듬파트와 솔로가 돋보이는 jet to jet 비장한 인트로와 소름돋는 솔로가 일품인 kree nakoorie , 구슬픈 분위기의 suffer me 등등 어느하나 버릴 곡이 없는 매우 훌륭한 앨범이다. 일본에서 라이브를 한 영상도 있는데, 잉베이의 팬이라면 84년 도쿄 라이브는 꼭 보자. 하지만 리더인 보넷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과의 의 불화로 잉베이는 두번째 앨범을 낸 뒤[19] , Alcatrazz 에서 쫒겨났다. 후에 잉베이는 인터뷰에서 Alcatrazz 공연이 끝나고 보넷이 "That kid stole my show" 라며 화를 냈다고 했다. 많은 밴드가 보컬이 리더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공연의 인기를 새파랗게 어린 기타리스트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인기를 독차지하며 무대를 장악하니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고 열등감도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그레이엄 보넷의 인터뷰는 다르다. 리치블랙모어를 연상케 하는 외모와 플레이, 모든 레인보우의 곡을 줄줄 꽤고 있는 잉베이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지만, 잉베이 자체가 너무 자의식 과잉이었다는 것이다. 무대에서 자기 파트가 아님에도 휘젓고 돌아다니고, 노래 부르고 있는데 의미없는 애드립을 남발하며 나대기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에게 여러번 경고 했지만 들어먹지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무대에서 잉베이 솔로중 기타코드가 그레이엄 보넷의 발에 걸려뽑히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실수라고 사과하는 리더이며 대선배인 그레이엄 보넷에게 불같이 대들다가 결국 잘렸다는 것이다.
사실 그레이엄 보넷은 그 후 임펠리테리 밴드의 리더가 아닌 멤버로서도 잘 지낸걸 보면 나이 어린 기타키즈에게 열등감을 가질만한 인물은 아닌것 같고, 잉베이의 선천적 무례함이 원인으로 생각된다. 어찌됐든 일찌감찌 이들은 무대 뒤에서 불화가 있었고 이후 잉베이는 자칭 탈퇴, 사실은 쫏겨나게 된다.
그 후 자신의 솔로 밴드를 결성하고 역사적인 앨범 Rising Force를 발매한다[20]
Rising Force의 발매는 전 세계 락 기타계를 뒤흔드는 쇼킹한 사건이었으며, Guitar Player Magazine에서 최고의 락 앨범 상을 수상하고, 그래미상에서도 최고의 락 연주부분에 노미네이트 된다. 그리고 올해 최고의 기타리스트에 선정되어 기타플레이어 표지에 반 헤일런과 더불어 최고의 기타리스트 모델로 장식되며 그의 이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황금시대가 개막된다.
전성기 시절인 1985년 Rising Force 일본 라이브. I'll See the Light Tonight[21]
오른팔을 2번 다친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해서 오른팔을 평생 못쓸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재활 및 복귀를 성공하였다. 그 다음은 첫번째 아내와 결혼 전, 아내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과 잉베이를 헤어지게 하기위해 경찰에 허위신고를 하여 체포되는 과정에서 또 한번 팔을 다치게 된다.[22][23]
역대 음반 목록은 '''잉베이 말름스틴/디스코그래피''' 하위 항목 참조.
인기도 많지만, 그만큼 싫어하는 사람도 매우 많다. 이는 단순히 잉베이의 매우 독선적인 성격과 거침없는 독설 뿐만이 아니고, 그의 연주 스타일 자체에 대한 불호 때문이다.
굉장히 많은 앨범을 만들어오면서 때론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일렉기타 연주가 클래식적 오케스트레이션에 그림 같이 녹아들어가는 앨범을 만들기도 하고, 때론 이전에 영향받은 락 선배들의 곡들을 리메이크하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고 매번 똑같은 매너리즘이 강한 음악을 쭈욱 해오며 지금까지도 그대로 활동하고 있다.[24]
잉베이는 제프 스콧 소토 같은 뛰어난 보컬리스트를 가끔 발굴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기 기타 연주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악기 파트의 역량을 억눌러 그의 앨범에선 기타 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한다는 얘기도 듣곤 한다. 사실은 리치 블랙모어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카리스마 뮤지션에게는 늘 따라붙는 이야기로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잉베이가 헤비메탈 씬에 남긴 또다른 업적[25] 중 하나가 바로 헤비메탈 키보드계의 신기원을 연 옌스 요한슨을 발굴한 것. 총 4년 동안 4장의 정규 앨범을 만들었는데, 이때 잉베이의 주요 트랙에는 옌스의 현란한 키보드 솔로, 심지어 잉베이와의 속주 배틀이 들어가는 트랙도 적지 않다. 베이스 또한 아주 잘 들리는 공연도 많다. 하지만 이 마저도 대 선배 리치 블랙모어와 존로드 가 60년대 말에 이미 선 보였던 것이기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상당히 개인적인 호불호를 표현하는 게 심한 사람이라 많은 존경을 받는 기타리스트들을 함부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조 새트리아니의 트랙을 듣고 쓰레기같다고 표현한 적도 있으며(물론 연주자가 새트리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들었을 때 이야기다.), 슬래시의 솔로를 듣고 벤딩의 음감이 형편없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 또는 제프 벡의 불후의 커버곡 'Cause We've Ended as Lovers'(스티비 원더 작곡)를 듣고 '훌륭한 곡이지만 기타리스트가 벤딩을 제대로 못해 빛나지 못한 곡'이라 한 건 충격과 공포. 특히 너바나를 위시한 얼터너티브 록/그런지 록 밴드는 영 심드렁해 하고 기타 연주를 장난으로 안다고 맹렬히 비난한다. 물론 얼터너티브/그런지 록을 싫어하는 건 잉베이 뿐만 아니라 올드 스쿨 메탈 뮤지션이라면 대부분 싫어하는 편.[26] 이러 저러한 다소 극단적인 감상 때문에 거만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다. 물론 까칠한 성격이라는 건 팬들도 인정하는 사실. -잉베이가 평가한 기타리스트들
처음엔 꽤 잘생긴 얼굴로 팬이 많았지만 요즘은 나이가 먹었는지 많이 뚱뚱해져서 뚱베이 말름스틴(혹은 뚱베이 살찜스틴(…))이라고 까이기도 한다. 99년 내한 당시 모 음악잡지에서는 '화이트 B.B. King'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너리즘의 진행과 함께 여러 가지 면에서 욕을 먹기도 했다. 우선 기타톤 자체가 제한적[27] 이고 사용하는 스케일과 모드[28] 가 언제나 그게 그거라는 것. 또한 프레이즈 역시 몇 가지를 돌려쓰는 감이 강하다.
한국과 일본에서 인기가 많고 특히 그 인기의 측면이 '속주'라는, 고음병과 같은 요소를 다분히 지닌 유치한 부분에 기인하다보니 여러 가지로 저평가를 당하는 측면이 있는데, 미국 쪽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으며 어느 지역에서 인기가 있다는 수준을 넘어 이미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기타 테크니션이다. 연주자 중에서도 잉베이의 테크닉에 한해서는 나쁜 평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2010년 중반 정도를 기점으로 누구도 부정 못하던 테크닉 부분에서조차 많은 비판을 듣는 중이다. 기타 테크닉도 피지컬이 관련되는 부분이라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예전만큼 속도가 안 나오는건 어쩔수가 없는 현상이며, 젊은 시절에 비해 테크닉적인 퇴보를 특히 뚜렷하게 보이는 기타리스트들이 있는데, 잉베이도 그 대표적인 한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속주실력은 여전하다듯이 전성기 시절과 똑같은 BPM으로 연주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예전만큼의 정확도와 깔끔함이 안 나와서 말이 많다. 최근 2019년의 콘서트 영상을 보면 냉정하게 말해 심각할정도로 망가져 있는 모습이다. 왕년의 테크닉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 동세대 비르투오소들도 있고 혹은 속도를 잃었다 해도 원숙미 있는 연주를 보여주는 기타리스트들도 있는데 이 사람은 여전히 매너리즘에 가까운 연주를 하면서도 테크닉마저 망가져서 아쉬운 부분이다.
말름스틴은 사실 여러가지 면에서 억울하게 욕을 먹는 면도 있는데, 20년이라는 기나긴 활동기간 동안 많은 루머와 반박되어 온 비판이 많다. 몇몇을 정리 하자면…
'''"말름스틴은 완급 조절을 모르고 연주에 필(Feel)을 가미할 줄 모르는 '싸구려 속주 기타리스트'다. 존경 받는 건 속주를 숭앙하는 한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일 뿐, 본토에서는 별로다."'''에 대한 반박.
시대가 지나고 말름스틴이 이러한 억울한 평을 받아 기타 좀 빨리 연주하는 돼지(…) 정도로 비웃음거리가 되는 때도 많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사람의 데뷔 앨범 Rising Force는 (물론 이쪽 바닥 한정해서)'''지미 헨드릭스의 Are You Experienced나 벤 헤일런의 Van Halen급으로 전설로 회자되는 혁명적인 앨범'''이라는 것이다. 기타 연주의 판도를 뒤집어 엎은 명반으로 속주 연주의 계보를 논할 때 이사람이 빠지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 될정도로 살아 있는 전설이다. 해외에서는 평이 아시아 만큼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헤비메탈계에서 잔뼈가 굵은 명인 기타리스트 잭 와일드가 말름스틴의 자서전에 썼던 평을 읽어보자.
또 말름스틴이 억울하게 욕 먹는 부분은 바로 필도 없고 무조건 빨리 연주하는 게 미덕인 줄 아는 기타리스트라는 평이다. 전혀 그렇지 않은게 1984년에 나왔던 데뷔 앨범 Rising Force만 들어봐도 Icarus Dream Suite, Evil Eye, Black Star 등등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멜로디가 아름다운 곡이 많다. 느릿한 멜로디를 연주하지 않는다고 해도 Brother 같은 곡을 들어보지 못 해서 그런 것.
그리고 이 '필'이라는 것도 상당히 애매한 개념인것이, 비판자들이 항상 말름스틴을 까면서 에릭 클랩튼, 비비 킹 등등 서정적이고 느릿한 블루스 연주에 강한 선배 기타리스트들을 들먹인다. 만약 그렇다면 필이라는 것이 클래시컬 선율을 하모닉 마이너 스케일로 속주 연주하면 없는 것이고 펜타토닉으로 느릿하게 연주하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프란츠 리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같은 초절기교 피아노 작곡/연주자들의 음악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필이 없는 것인지?
물론 록 자체가 클래식과 똑같은 기준을 지녔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에 즉흥성과 연주자의 개성은 제쳐두고 지나치게 빠른 속주,딱딱 떨어지는 정확한 기교만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태도또한 잘못된건 마찬가지다. 일단 록, 로큰롤의 근본적인 기원과 정신에 대해 생각해보자. 척 베리와 더불어 로큰롤의 전설중 한명인 로큰롤 피아노 연주자 '리틀 리차드'는 클래식과 로큰롤의 피아노연주는 다르다고 주장하며 피아노에 발을 올리고 쿵쾅거리며 거칠게 연주했다. 이들은 매우 빠르고 정확한 기교와 테크닉보다는 블루스적인 필(즉흥성과 개성)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 저항정신 등을 강조했다.
그러나 록의 관점에서 본 록 특유의 '필'이라는 개념이 즉흥성이나 연주자가 지닌 개성,창의력 등이 연주에 드러나는것이라면 잉베이는 엄밀히 말해 그닥 비판받을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비판 항목에 서술된 잉베이의 "프레이즈를 돌려쓰고 똑같은 톤 등 매너리즘에 빠진연주"가 위의 비판에 기름을 부었다고 볼수도 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잉베이가 상대적으로 약간 그런 경향이 있다는것이고, 사실 즉흥성,개성 면에서 잉베이는 보통 기타리스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뒤떨어진건 아니다. 그리고 위의 유년시절 항목에서 알수있듯 잉베이의 음악적 뿌리와 지향점은 블루스, 로큰롤보다 클래식에 심히 가깝다는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즉흥, 필,그루브 보다는 장인적인 정확성,테크닉과 멜로디를 좀더 중시하는게 잉베이로썬 오히려 당연한거다. 이는 동시에 굳이 '록 기타연주자'라는 테두리가 아닌 '기타연주자'라는 포괄적인 개념에서 보자면 잉베이는 분명 매우 훌륭한 기타리스트임에 틀림없다는 뜻도 된다. 어찌보면 잉베이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그의 표면적인 스피드와 기교만을 숭배하고 워너비하는 후배 기타리스트들의 행태가 이같은 부당한 오해와 까임을 만들어 낸것이라 볼수 있겠다.
속도적인 측면에선 최근엔 그를 능가하는 속주 기타리스트도 많이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의 능력은 외계인급이라고 얘기한다. 특히 그런 속주를 하는 와중에도 한 음도 빼먹지 않고 완벽하게 아르페지오를 플레이하고, 감정을 뒤흔들어놓는 미친듯한 비브라토를 가진 점에서[31] . 또한 라이브에서의 완성도가 매우 높으며, 이러한 부분은 대중음악보다는 클래식에 좀 더 가까운 장인적인 면으로 볼 수 있다. 락밴드의 경우 특정 장르[32] 이외에는 곡의 파워, 리듬감, 그루브를 중시하고 세세한 표현에는 신경쓰지 않거나 쓰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은데[33] 잉베이의 경우 밴드보다는 기타 솔로에 가깝다보니 아주 디테일하게 잘 맞는 연주를 수행할 수 있다. 그의 음반을 들을때는 세세한 것 하나까지 신경써야 참맛이 느껴진다.
'''"말름스틴은 자존심이 높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기에게 영향을 준 선배도 무시하고 동년배 기타리스트들도 함부로 깎아 내리는 오만불손한 인간이다"'''라는 비판에 대한 반박.
'''반쯤'''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와전된 소문이 너무 많다는 것. 우선 정통 메탈 계보에 있는 선배들에 대한 예우는 와전된 소문과 달리 아주 깍듯이 한다. 말름스틴은 분명히 딥 퍼플에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았다고 수 백번쯤은 인정을 했다. 유년기에 딥 퍼플 초기 앨범 fireball의 모든 곡을 카피 할 수 있도록 맹렬히 연습했다고 회고 할 정도. 실제로 리치 블랙모어가 말름스틴에 대해 평하길, "이상한 녀석이고 음악도 솔직히 난 잘 이해를 못하겠는데, 실력은 확실하고 나한테는 정말 깍듯이 대해줘서 아주 좋은 후배"라고 평할 정도로 선배에 대한 예우는 확실하게 하는 편이다. 실제로 지미 페이지같은 별 접점이 없을 거 같은 선배라도 테크닉은 부족했지만 헤비메탈의 사부님격 되는 분이라고 무한한 존경을 표현하며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고 말 할 필요도 없는 전설이야. 정말 위대한 앨범에서 아름다운 곡들을 쓰셨'다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랜디 로즈는 자서전에 자기 서명 까지 남길 정도로 극찬하는 편이고 밴 헤일런도 거의 숭배하는 수준. 심지어는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는 자기가 제일 존경하고 친하게 지내는 선배라고 인정하는 편. 더블 트랙 솔로에는 브라이언 메이 선배를 당해낼 수 없다고 인정한다. 지미 헨드릭스에 관해서는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고 당대 클랩튼이나 블랙모어도 디스토션 사운드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헨드릭스처럼 자유자재로 혁명적인 사운드를 낸 사람은 없고 단순히 기타 연주 뿐 아니라 굉장한 연출력, 천재 작곡가이기도 하다. 또 그는 짧은 활동 기간에 비해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음악들 들으면) 모든 걸 가진 반신의 영역에 계시다며 연신 그를 높게 평가했다. 이 말고도 마이클 솅커, 울리 존 로스 등등 여러 기타리스트에 대한 찬사를 남긴바도 있어, 흔히 말하는 살아 있는 기타리스트들은 다 까는 모두까기 인형이라는 이미지에선 몇 광년 쯤 떨어진 뮤지션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람한테 까인걸로 유명한 조 새트리아니도 사실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마음에 드는 새트리아니 곡에는 아주 칭찬을 하고 싫어하는 건 깠다. 이건 스티브 바이도 마찬가지이고.
다만 빈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지미 헨드릭스에 대한 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기가 그렇게 영향 받지 않았으면 대선배고 뭐고 "그렇게 영향 안 받았는데요?"식으로 솔직히 이야기 하는 편. 실제로 프랑스 매거진에서 한 블라인드 테스트 중 기타 자체를 시작하게 된 건 지미 헨드릭스지만 지금처럼 연주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리치 블랙모어의 연주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잘 모르는 밴드에 대해 인터뷰를 물어보면 보통은 자기가 최대한 아는 대로 좋게 좋게 말하는 뮤지션들이 많지만 말름스틴은 정말 "진짜 모르는데요?"라고 대꾸할 정도로 솔직하게 답한다.
위에도 언급됐듯이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라, 자기가 듣고 싶은 음악만 듣고 살아서 의외로 모두 다 아는 밴드를 자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없다는 경우가 많다.[34] 그 때문인지 싫어하는 건 '''엄청나게''' 싫어한다.
그 예가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잉베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표현이므로 오해 없길 바란다.
'''1. Ibanez(아이바네즈)나 Jackson 같은 슈퍼스트랫을 혐오한다:'''
우선 플로이드 로즈 브릿지를 기타의 고유의 음을 죽이는 최악의 발명품이라 싫어하고, 줄과 프렛 간격이 낮은 것도 싫어하며, 또 일단은 하이 게인 험버킹[35] 픽업을 기타의 바디에서 나오는 울림의 특징을 없앤다고 혐오한다. [36]
'''2. 기타리스트인 주제에 기본기가 부족하면 맹렬하게 깐다:'''
기타 연주로 밥을 먹고 사는 프로가 어떻게 벤딩 하나 음을 못 맞추는지 이해를 못한다. 또 속주 테크닉이 깔끔하지 않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다고 평하는 편. 슬래시같은 멜로디는 좋지만 기본기가 매우 심히 애매한 기타리스트들을 아주 싫어한다. 혹자는 이런 식의 논리라면 지미 페이지나 헨드릭스도 까야 하지 않나 싶지만 말름스틴에겐 그들은 하늘같은 선배님들이고(…) 슬래시는 분명히 자기보다도 후세대 기타리스트인 주제에 이런 전 세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안고 있어 맹렬히 깠다. 고음으로 보컬의 질이 결정되는 게 아니듯 정확한 테크닉만으로 기타 플레이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기본기와 테크닉이 부족하면 연주의 폭 자체는 제한되는 것이 사실이다. 자세한 건 슬래시 항목 참조. 사실 이것도 왕년에 제프 벡이 이미 했던 짓(그것도 상대는 리치 블랙모어!)
'''3. 스티브 바이나 톰 모렐로와 같은 아밍 주법이랑 이펙트 페달로 기타 고유의 소리를 왜곡하는걸 싫어한다:'''
이래서 스티브 바이의 음악을 처음에는 아주 혐오했다. 이런 노이즈가 어떻게 음악이 될 수 있냐면서. 게다가 스티브 바이는 말름스틴이 혐오해 마지 않는 아이바네즈 슈퍼 스트랫을 애용한다. 바이의 지인이 되고 그의 음악에 대해 좀 더 이해를 하고 나서는 그렇게 험한 소리는 안 하지만 꼭 '아, 이 친구는 그 아이바네즈랑 험버킹 픽업만 버리면 완벽한데 말이야!'라는 평은 곧 죽어도 한다(…). 2000년 중 후반으로 예상되는 프랑스 매체에서 한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도 '바이는 좋은 친구야' '그를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라며 동시에 '벤딩 자체가 너무 음정이 안 맞고 난 그게 싫어. 난 비브라토가 음정에 맞지 않은 솔로는 들을 수가 없어. 미안해 스티브' 라며 싫어하는 건 싫다 말했다.
그의 취미중 하나가 유명 기타리스트의 기타를 수집하는 것인데 스티브 바이 한테도 한대 받았다. 같은 모델이 아닌 직접 바이가 연주 하던 기타이며 그의 적절한 기타 보관 방법에 의 해 다뤄지고 있음.잉위의 기타 자랑
'''4. 얼터너티브/그런지/펑크 록 같은 악기 연주를 (본인 시각에서는) 대충 하는 것 같은 밴드를 혐오한다:'''
말름스틴만 이런 경향을 보인 것은 아니고 80년대 한 끗발 날렸던 헤비메탈과 하드 록계열의 밴드 대부분과 많은 솔로 기타리스트들이 보이는 특징이다. 본인들 입장에서는 악기를 형편없이 연주하고 파워 코드 3개로 음악을 만드는 게 어떻게 새로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37] 그게 어떻게 자신들의 음악을 몰아 냈는지 억울해 하는 입장이라 더더욱 억하심정으로 엄청나게 싫어한다. [38][39] 어떤 식으로 말하냐면, '요즘 유행하는'(그러니까 90년대 초중반 쯤) 음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좋게 말하는 힘들 것 같다"면서 운을 띄더니, "'펄잼이라는 그룹'의 기타리스트가 어디에 나와서 기타를 이렇게 치면 된다라며 레슨을 하는 걸 봤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잘못된 것이었다, 그 기타리스트는 누구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꼰대스러운 편견인 경우가 많으나 이는 다른 굳이 잉베이 뿐만 아니라 위에서 말했듯 다른 기타리스트들도 이런 발언 또는 주장을 했던 경우가 많으니 잉베이만 까대는건 무리가 있다.
그외에도 여러 가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게 확실한 사람이라 자기 코드에 맞으면 엄청나게 칭찬하고 안 맞으면 아주 싫어하는 성격. 이건 사실 '''건방지다'''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고집세고 까다롭다'''라는 평이 더 적절하다.
'''"잉베이 말름스틴은 독불장군이라 밴드 멤버를 하대하고 자기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싫어한다"'''라는 비판에 대한 반박.
이것도 2번과 같이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이건 잉베이가 가지고 있는 솔로 커리어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어느정도가 이해가 가능한 행동이다. 잉베이는 이것에 대해 이러한 인터뷰를 남긴 적이 있다.
"모든 곡이랑 편곡을 내가 하고, 베이스랑 드럼 라인, 보컬 멜로디도 사실상 내가 작곡합니다. 한마디로 내가 밴드 멤버에게 바라는 건 나의 지시를 잘 따라해 주길 바라는 거고 그렇지가 않으면 솔로 커리어의 의미가 없지요. 나는 몇몇 밴드가 작곡은 멤버 혼자 다 하지도 않으면서 밴드명은 멤버 이름 하나로만 해놓는게 좀 불공평하고 뻔뻔하다고 생각해요."
잉베이 밴드 출신의 연주자나 보컬들이 이후 그의 무대에 세션으로 서는 걸 볼 때, 그리고 인터뷰에서 공격적으로 잉베이를 공격하지 않는 점을 보면 멤버를 하대하는 내용은 약간 부풀려진 감이 있다. Rising Force의 보컬이었던 제프 스콧 소토와 조 린 터너의 인터뷰에 의하면, 잉베이의 성격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은 언론에 의해 부풀려 진 게 적지 않고 실제로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라고 한다. 단 제프 스콧 소토의 단독 인터뷰 중 하나를 보면 평소에는 젠틀하다가도 자신의 위치인 라이징 포스의 리더를 다른 멤버가 침범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고 한다. 85년 도쿄 라이브에서 제프가 마이크를 잡고 MC를 봤었는데 나중에 잉베이가 '리더인 내 역할을 침해하지 말라'고 엄청 화를 냈다고(…) 보컬로 지냈던 팀 리퍼 오웬스 또한 "자신에게 잉베이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내 입에서 '그 새끼는 아주 개객기야!!!'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잉베이는 적어도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 "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링크
한마디로 이 사람에게 있어서 솔로 커리어란 자기가 모든 걸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밴드 멤버는 일종의 세션이라고 보는 것. 그리고 밴드내에서의 지위와 발언권은 밴드에대한 기여도에따라 달라야한다는것. 이러한 차이 때문에 합작을 하는데 익숙한 밴드 멤버랑 불화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도 자기 솔로 데뷔앨범 Rising Force의 베이스는 말름스틴 본인이 쳤다.(…) 이건 많은 사람이 모르는 사실. 최근에는 이러한 성향을 잘 아는 멤버들을 만나 오랫동안 함께하고 있다.
그는 엄청난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빠이다.
시그니처 모델명은 "Duck"(오리)인데, 그 이유는 기타 헤드 부분에 도널드 덕의 스티커가 붙여저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스트라토캐스터 콜렉션은 엄청나며 그의 콜렉션중에는 진퉁 1954년 스트라토캐스터도 있다. 이런 펜덕후인 그지만, 넥에 흠을 파내는 스캘롭핑[40] 작업에 디마지오(이후 던컨)의 험버커형 싱글 픽업으로 교체한 스트라토캐스터를 써서 오리지널 펜더 스트랫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스트랫이 아니라고 질타 아닌 질타를 받고 있다.[41] 그러나 잉베이 말름스틴 시그니처는 락에 어울리는 험버커의 강한 사운드를 가지고 있되, 오리지널 스트랫 사운드 고유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느낌으로 제작되어 있기 때문에 펜더가 맞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42]
픽업은 커리어 중반까지는 디마지오의 HS-3를 사용했으나 HS-3의 음량 관련 문제로 던컨과 계약해서 시그니처 픽업인 YJM Fury를 개발, 사용하고 있다. 둘다 험버커형 싱글 픽업으로 깨끗하고 빈티지한 전형적인 스트랫 사운드는 아니지만 노이즈가 적고 하드한 락 사운드부터 유려한 클래시컬 솔로까지 소화할 수 있는 특징이 있으며, 두 픽업의 음색이 좀 다르기 때문에 잉베이 팬들 사이에서 선호가 갈린다. 아무래도 잉베이의 전성기인 1980~90년대를 대표하는 HS-3의 음색을 좋아하는 사람 쪽이 더 많은 편.
이건 그의 기타 월드지가 방문한 그의 집에서 나온 스트랫 콜렉션
[43]
수많은 스트랫 키드들에게는 군침을 흘릴 만한 꿈의 콜렉션이다. 이 영상의 백미는 5분 10초경에 나오는 1954년산의 오리지널 스트랫. 저 기타는 10만불은 가볍게 뛰는 포르쉐 한 대 값의 초고가의 명기다. 꿈의 기타지만 그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콰직 하고 쑤셔넣는다.(…) 과연 잉베이 답다.
여담으로 그가 주목받기 시작했을 무렵 '''Gibson]'''에서 엔도서 제의가 들어왔었으나, 잉베이 본인이 '''"난 펜더 기타만 써"'''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자 깁슨에서 "그렇다면 뭐든 만들어 줄테니 말만 해달라"고 하자 잉베이가 농담 삼아 '''"Stratocaster 하나 만들어줘"'''라고 했는데, 몇 달 뒤 자신의 집으로 '''깁슨 로고가 박힌 스트랫'''이 배달되었다고 한다(…). 그 기타는 잘 보관하고 있다고.
그의 기타의 역사 및 시그네춰 모델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블로그를 참고해 볼 것.
2001년 내한공연과 함께 사인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한국 팬이 사인을 받으러 가져간 펜더 USA 스트랫을 보더니 자기 기타와 바꾸자며 자기가 가져갔는데 나중에 집으로 택배가 와서 보니 미펜도 아니고 저가형 일펜 잉베이 시그네쳐를 줬다고 한다. 잉베이가 준 일펜 사용기
다만 인터뷰에서 본인 스스로 깁슨 기타를 딱히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다.[44] 다만 펜더 기타랑은 좀 다른 취급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깁슨 기타가 "좋은 악기"라면, 펜더 기타는 '''"몸의 일부"'''라고(...) 표현했다.
전성기 시절의 모습.
[image]
김기동으로 유명한 짤
연습은 하지 않는다. 나는 연주만 한다.[1]
[2]
1. 개요
스웨덴 스톡홀름 출신의 헤비메탈 기타리스트. 1963년 6월 30일 출생.
풀네임은 영어식으로 잉베이 조핸 말름스틴(Yngwie Johann Malmsteen, /ˈɪŋveɪ ˈmɑːlmstiːn/).[3] 스웨덴어식으로 '라르스 요한 윙베 란네르베크(Lars Johan Yngve Lannerbäck)'. '잉베이(Yngwie)'라는 이름은 스웨덴어 이름 윙베(Yngve)를 영어식으로 바꾼 이름이고, '말름스틴(Malmsteen)'이라는 성씨는 모친의 성씨였던 말름스텐(Malmsten)에서 따왔다. 그런데 국내에는 영어 발음을 대강 추측해서 옮긴 '''잉위 맘스틴'''이라는 잘못된 표기로 오랜 기간 통용되어 왔다. 잉위라니…[4]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이 통용 표기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원발음에 가까운 '''잉베이 말름스틴'''이라는 표기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5][6] 과거 그가 방한 기념으로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했을 때, 본인에게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면 되냐고 물어봤더니 직접 '잉베이'라고 불러달라고 답하기도 했다.
헤비메탈 기타계에 클래식적인 연주법과 작곡 방법을 대거 도입하고, 스윕 피킹 및 온갖 고난도 속주 테크닉을 선보여 헤비메탈과 기타 연주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7] 피킹의 터치감과 정확성/안정감이 지구상에서 최고 라인 중 한 명으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오버드라이브나 디스토션으로 가득 메꿔놓고 갈기는 기초가 안 잡힌 플레이어들에게는 그의 한 구절도 흉내를 못낼 정도... 이것을 테스트 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과거 레슨 영상 "Yngwie Malmsteen REH Video Hot Licks"에 첫 부분부터 따라해보면 알 수 있다. 아래 영상을 보면 기타 좀 친다는 웬만한 기타리스트들도 따라해보다가 한계를 절감하게 만드는 괴물 같은 플레이를 보여준다. 그것도 1984년에.
또한 바로크 메탈[8] (클래식적 선율에 속주 기타 연주를 중요시하는 장르)을 헤비메탈계의 주요 장르로 부각시키고 발전시킨 이 분야의 시조격인 인물이다. 또한 현대 속주 기타의 계보를 올라가면 이 사람 없이는 대화가 성립이 안 될 정도. 그러한 공적 때문에 80년대 뿐만 아니라 록 음악/헤비메탈 장르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있는 기타리스트 중 하나로 추앙받고 전세계적으로 그를 숭배하는 엄청난 팬과 추종 기타리스트들이 있다. 하지만 또 그 때문에 그런 팬들만큼 안티와 까가 많은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물론 이건 후에 거론될 본인의 성격이 자초한 것도 있다.
80년대 그의 '''엄청난''' 속주 연주는 당시엔 그야말로 얼이 빠질 정도로 충격적이라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켜 그를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 기타의 신으로 추종하는 수많은 팬들을 만들었다. 특히 하드록 씬에 테크닉과 속도감에 굶주려있던 일본과 일본의 영향을 받았었던 대한민국 메탈헤드 사이에서는 서양에 비교해도 넘사벽 수준.Far Beyond the Sun 맛보기로 듣고 가자
기타리스트들의 테크닉이 극도로 상향평준화된 현재에 와서는 기타 좀 친다는 사람이면 잉베이 말름스틴 곡을 카피하는 게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속주였다. 솔로 데뷔 앨범 'Rising Force'가 나왔을 때 리치 블랙모어(Highway Star의 그 사람이!)는 ''어떤 할일없는 놈이 레코드를 빨리 돌리는 장난을 한줄 알았다"는 소감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 당시의 현역 기타리스트들 중에는 '이건 불가능한 연주다. 페이크다.'라고 단언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록 음악/헤비메탈 기타리스트들은 얼마나 빨리 속주를 할 수 있는가로 실력을 판정받기도 할 정도였다. 마치 1970년대 기타리스트들에게 Highway Star가 처음 발표 되었을때 만큼의 충격을 1984년에 다시 일으킨 것. 토니 매칼파인, 크리스 임펠리테리, 비니 무어, 마이클 안젤로 바티오, 폴 길버트[9] 등등의 내로라하는 기타리스트들 조차 이때는 잉베이 앞에선 명함도 못내밀 수준이었다. 속주를 딱히 내세우지 않아도 웬만한 기타리스트면 속주를 다 할 수 있지만, 이 중에서도 잉베이는 속주에 고유한 개성을 넣었다는 점이 독창적. 특히 일본의 어설픈 빠들은 그를 게리 무어, 에디 밴 헤일런과 함께 80년대 세계 3대 기타리스트로 얘기하기도 하고[10] , 더 오버한 멍청이들은 지미 헨드릭스, 에디 밴 헤일런, 잉베이 말름스틴을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일본 본토에선 잉베이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王者(왕자. 프린스가 아니다!)라고 일컬을 정도. 확실히 일본에서 인기는 언터쳐블이다. 까들의 인식과는 달리 북미, 남미, 유럽 등지에서도 수 많은 팬들과 추종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기타리스트 인기 투표 순위나 위대한 기타리스트 목록을 발표할 때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일이 가끔 있는 정도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헤비메탈이라는 장르에서 잉베이 말름스틴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속주 기타리스트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뮤지션이 바로 이 사람이니.
하지만 록 음악을 기타리스트들의 속주 묘기 대행진 서커스로 만들었다는 비판, 기타 연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들리고 곡 구조도 항상 뻔한 매너리즘의 극한이라는 비판, 엘리트 기타리스트들만이 부각되어 록 특유의 저항과 자유 정신이 함몰되어 버렸다는 비판들이 제기되어 차차 수많은 안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다른 기타리스트들의 실력을 깎아 내리기만 하는 그의 몇몇 부적절한 언행, 밴드에서 독재자로 활약하며 다른 멤버들의 연주를 억누르며 함부로 대하고 해고한다는 소문, 또 매너리즘에 젖어 수십년간 똑같은 음악만 한다는 비판 등등 때문에 최근엔 칭찬보단 안티성 글들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항상 타당한건 '''절대로''' 아니다. 어떻게 보면 얼치기 따라쟁이들과 개념을 탑재하지 않은 빠들의 피해자.(글쎄?) 자세한건 옹호 항목을 읽자.
2. 유년 시절
최초로 락 기타리스트가 되고싶다는 꿈을 꾼건 TV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보았을 때라고 하며,[11] 나중에 "7살때 지미 헨드릭스가 죽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지미 헨드릭스가 죽은 그날, 기타리스트 잉베이 말름스틴이 태어난 것이다"[12] 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헨드릭스의 영향에 대해 지겹도록 질문을 받을 때 마찬가지로 지겹도록(…) 똑같은 답을 하는데 그가 주장하는 건 분명히 헨드릭스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보고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게 된건 사실이지만[13] 헨드릭스 본인의 연주나 음악적인 성향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건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 헨드릭스는 분명히 블루스, R&B에 강한 베이스를 둔 기타리스트이다. 하지만 잉베이의 곡 중에 나오는 돌출적인 비브라토나 클라이맥스로 이끌어가는 방식은 분명 지미 핸드릭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Far beyond the sun에서 클라이맥스 부분을 잘 들어보라. 단순히 장르의 구분을 가지고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말하긴 어렵다.
말름스틴은 록에서는 리치 블랙모어 [14] 와 울리 존 로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클래식에서는 바흐, 파가니니, 안토니오 비발디에게 영향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특히 바로크 메탈의 토대를 마련해준 리치 블랙모어 에 대해서는 무한한 존경심을 보낸다.
데뷔 초에는 리치 블랙모어 의 헤어스타일, 의상, 무대 퍼포먼스까지 모두 그대로 따라할 정도 였고, 96년 발매한 inspiration 앨범 트랙 10곡 중 5곡이 리치 블랙모어 의 곡이다. [15] 리치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지 리치 블랙모어의 레인보우 출신 보컬들과 다 같이 밴드 혹은 프로젝트를 하엿다. 대표적으로 알카트라즈 시절 땐 레인보우 2대 보컬인 그레이엄 보넷, 개인 밴드 라이징 포스의 보컬은 조 린 터너, 그리고 프로젝트로는 로니 제임스 디오과 같이 작업을 했었다.
[image]
리치 와 잉베이
이미 10살때부터 Track On Earth란 밴드를 하기도 하며, 클래식 연주법에 대한 관심도 일찍 시작되어, 특히 속주로 유명했던 19세기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의 곡을 기타로 많이 카피했다고 한다.[16] 이 시절 활동하던 아마추어 밴드의 이름 중에 훗날 재활용되는 Rising Force가 있다.
3. 음악 활동
1982년, 지금은 프로그레시브 메탈계에 매진하고 있는 유명한 락 제작자 마이크 바니에게 자신의 데모 테입을 보냈고, 마이크 바니[17] 는 그의 재능을 인정, 그를 미국에 불러들인다.
사실 잉베이는 어떻게 보면 모두가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이란걸 명확하게 이뤄낸 이민자이다. 마이크 바니에게 뽑혀서 미국으로 간 뒤에는 1주일만에 수퍼 스타, 초신성, 요주의할 신인으로 단 한번에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아메리칸 드림의 표본이라 할만 하다. 그래서 간혹 인터뷰에서 보면 미국을 거지 같은 나라라고 까는 이들한테 하는 말이 '이 나라가 얼마나 기회와 희망의 나라인지 인지못한다'라며 비판했다. 메탈계 거물급 프로듀서 마이크 바니가 스웨덴까지 와서 그의 기타실력을 보고 그를 데려갔으니 잉베이 입장에선 기회와 희망의 나라라고 할 법도 하다. 데뷔 후에도 하루에 3시간은 연습한다고[18] 밝힌 적이 있다.
잉베이는 처음엔 Steeler라는 밴드에 가입했지만 사실은 녹음이 다 완결된 뒤에 기타 파트만 오버더빙으로 들어간 것이라 정식 멤버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때문에 잘 들어보면 곡과 기타 연주가 따로 노는 경향이 강하다.
그 뒤 레인보우 및 MSG를 거쳐 온 명 보컬리스트 그레이엄 보넷 에게 오디션을 받고 알카트라즈(밴드)의 기타리스트로 가입, 밴드의 데뷔작인 No Parole From Rock N' Roll을 내면서 사실상 최초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다.
이 앨범은 매우 훌륭한 앨범인데, 완전히 속주에 함몰되지 않고 락적인 템포에 충실한 잉베이의 기타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데다가, 당시 최고의 기량에 도달한 그레험 보넷의 열차화통같은 쩌렁쩌렁한 파워풀한 목소리도 큰 매력을 말한다. 상쾌한 Island in the Sun, 박진감 넘치는 리듬파트와 솔로가 돋보이는 jet to jet 비장한 인트로와 소름돋는 솔로가 일품인 kree nakoorie , 구슬픈 분위기의 suffer me 등등 어느하나 버릴 곡이 없는 매우 훌륭한 앨범이다. 일본에서 라이브를 한 영상도 있는데, 잉베이의 팬이라면 84년 도쿄 라이브는 꼭 보자. 하지만 리더인 보넷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과의 의 불화로 잉베이는 두번째 앨범을 낸 뒤[19] , Alcatrazz 에서 쫒겨났다. 후에 잉베이는 인터뷰에서 Alcatrazz 공연이 끝나고 보넷이 "That kid stole my show" 라며 화를 냈다고 했다. 많은 밴드가 보컬이 리더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공연의 인기를 새파랗게 어린 기타리스트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인기를 독차지하며 무대를 장악하니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것이고 열등감도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그레이엄 보넷의 인터뷰는 다르다. 리치블랙모어를 연상케 하는 외모와 플레이, 모든 레인보우의 곡을 줄줄 꽤고 있는 잉베이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지만, 잉베이 자체가 너무 자의식 과잉이었다는 것이다. 무대에서 자기 파트가 아님에도 휘젓고 돌아다니고, 노래 부르고 있는데 의미없는 애드립을 남발하며 나대기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에게 여러번 경고 했지만 들어먹지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무대에서 잉베이 솔로중 기타코드가 그레이엄 보넷의 발에 걸려뽑히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실수라고 사과하는 리더이며 대선배인 그레이엄 보넷에게 불같이 대들다가 결국 잘렸다는 것이다.
사실 그레이엄 보넷은 그 후 임펠리테리 밴드의 리더가 아닌 멤버로서도 잘 지낸걸 보면 나이 어린 기타키즈에게 열등감을 가질만한 인물은 아닌것 같고, 잉베이의 선천적 무례함이 원인으로 생각된다. 어찌됐든 일찌감찌 이들은 무대 뒤에서 불화가 있었고 이후 잉베이는 자칭 탈퇴, 사실은 쫏겨나게 된다.
그 후 자신의 솔로 밴드를 결성하고 역사적인 앨범 Rising Force를 발매한다[20]
Rising Force의 발매는 전 세계 락 기타계를 뒤흔드는 쇼킹한 사건이었으며, Guitar Player Magazine에서 최고의 락 앨범 상을 수상하고, 그래미상에서도 최고의 락 연주부분에 노미네이트 된다. 그리고 올해 최고의 기타리스트에 선정되어 기타플레이어 표지에 반 헤일런과 더불어 최고의 기타리스트 모델로 장식되며 그의 이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황금시대가 개막된다.
전성기 시절인 1985년 Rising Force 일본 라이브. I'll See the Light Tonight[21]
오른팔을 2번 다친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해서 오른팔을 평생 못쓸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재활 및 복귀를 성공하였다. 그 다음은 첫번째 아내와 결혼 전, 아내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과 잉베이를 헤어지게 하기위해 경찰에 허위신고를 하여 체포되는 과정에서 또 한번 팔을 다치게 된다.[22][23]
4. 디스코그래피
역대 음반 목록은 '''잉베이 말름스틴/디스코그래피''' 하위 항목 참조.
5. 비판
인기도 많지만, 그만큼 싫어하는 사람도 매우 많다. 이는 단순히 잉베이의 매우 독선적인 성격과 거침없는 독설 뿐만이 아니고, 그의 연주 스타일 자체에 대한 불호 때문이다.
굉장히 많은 앨범을 만들어오면서 때론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일렉기타 연주가 클래식적 오케스트레이션에 그림 같이 녹아들어가는 앨범을 만들기도 하고, 때론 이전에 영향받은 락 선배들의 곡들을 리메이크하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고 매번 똑같은 매너리즘이 강한 음악을 쭈욱 해오며 지금까지도 그대로 활동하고 있다.[24]
잉베이는 제프 스콧 소토 같은 뛰어난 보컬리스트를 가끔 발굴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기 기타 연주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악기 파트의 역량을 억눌러 그의 앨범에선 기타 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한다는 얘기도 듣곤 한다. 사실은 리치 블랙모어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카리스마 뮤지션에게는 늘 따라붙는 이야기로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잉베이가 헤비메탈 씬에 남긴 또다른 업적[25] 중 하나가 바로 헤비메탈 키보드계의 신기원을 연 옌스 요한슨을 발굴한 것. 총 4년 동안 4장의 정규 앨범을 만들었는데, 이때 잉베이의 주요 트랙에는 옌스의 현란한 키보드 솔로, 심지어 잉베이와의 속주 배틀이 들어가는 트랙도 적지 않다. 베이스 또한 아주 잘 들리는 공연도 많다. 하지만 이 마저도 대 선배 리치 블랙모어와 존로드 가 60년대 말에 이미 선 보였던 것이기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상당히 개인적인 호불호를 표현하는 게 심한 사람이라 많은 존경을 받는 기타리스트들을 함부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조 새트리아니의 트랙을 듣고 쓰레기같다고 표현한 적도 있으며(물론 연주자가 새트리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들었을 때 이야기다.), 슬래시의 솔로를 듣고 벤딩의 음감이 형편없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 또는 제프 벡의 불후의 커버곡 'Cause We've Ended as Lovers'(스티비 원더 작곡)를 듣고 '훌륭한 곡이지만 기타리스트가 벤딩을 제대로 못해 빛나지 못한 곡'이라 한 건 충격과 공포. 특히 너바나를 위시한 얼터너티브 록/그런지 록 밴드는 영 심드렁해 하고 기타 연주를 장난으로 안다고 맹렬히 비난한다. 물론 얼터너티브/그런지 록을 싫어하는 건 잉베이 뿐만 아니라 올드 스쿨 메탈 뮤지션이라면 대부분 싫어하는 편.[26] 이러 저러한 다소 극단적인 감상 때문에 거만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다. 물론 까칠한 성격이라는 건 팬들도 인정하는 사실. -잉베이가 평가한 기타리스트들
처음엔 꽤 잘생긴 얼굴로 팬이 많았지만 요즘은 나이가 먹었는지 많이 뚱뚱해져서 뚱베이 말름스틴(혹은 뚱베이 살찜스틴(…))이라고 까이기도 한다. 99년 내한 당시 모 음악잡지에서는 '화이트 B.B. King'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너리즘의 진행과 함께 여러 가지 면에서 욕을 먹기도 했다. 우선 기타톤 자체가 제한적[27] 이고 사용하는 스케일과 모드[28] 가 언제나 그게 그거라는 것. 또한 프레이즈 역시 몇 가지를 돌려쓰는 감이 강하다.
한국과 일본에서 인기가 많고 특히 그 인기의 측면이 '속주'라는, 고음병과 같은 요소를 다분히 지닌 유치한 부분에 기인하다보니 여러 가지로 저평가를 당하는 측면이 있는데, 미국 쪽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으며 어느 지역에서 인기가 있다는 수준을 넘어 이미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기타 테크니션이다. 연주자 중에서도 잉베이의 테크닉에 한해서는 나쁜 평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2010년 중반 정도를 기점으로 누구도 부정 못하던 테크닉 부분에서조차 많은 비판을 듣는 중이다. 기타 테크닉도 피지컬이 관련되는 부분이라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예전만큼 속도가 안 나오는건 어쩔수가 없는 현상이며, 젊은 시절에 비해 테크닉적인 퇴보를 특히 뚜렷하게 보이는 기타리스트들이 있는데, 잉베이도 그 대표적인 한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속주실력은 여전하다듯이 전성기 시절과 똑같은 BPM으로 연주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예전만큼의 정확도와 깔끔함이 안 나와서 말이 많다. 최근 2019년의 콘서트 영상을 보면 냉정하게 말해 심각할정도로 망가져 있는 모습이다. 왕년의 테크닉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 동세대 비르투오소들도 있고 혹은 속도를 잃었다 해도 원숙미 있는 연주를 보여주는 기타리스트들도 있는데 이 사람은 여전히 매너리즘에 가까운 연주를 하면서도 테크닉마저 망가져서 아쉬운 부분이다.
5.1. 옹호
말름스틴은 사실 여러가지 면에서 억울하게 욕을 먹는 면도 있는데, 20년이라는 기나긴 활동기간 동안 많은 루머와 반박되어 온 비판이 많다. 몇몇을 정리 하자면…
5.1.1. 싸구려 속주 기타리스트
'''"말름스틴은 완급 조절을 모르고 연주에 필(Feel)을 가미할 줄 모르는 '싸구려 속주 기타리스트'다. 존경 받는 건 속주를 숭앙하는 한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일 뿐, 본토에서는 별로다."'''에 대한 반박.
시대가 지나고 말름스틴이 이러한 억울한 평을 받아 기타 좀 빨리 연주하는 돼지(…) 정도로 비웃음거리가 되는 때도 많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사람의 데뷔 앨범 Rising Force는 (물론 이쪽 바닥 한정해서)'''지미 헨드릭스의 Are You Experienced나 벤 헤일런의 Van Halen급으로 전설로 회자되는 혁명적인 앨범'''이라는 것이다. 기타 연주의 판도를 뒤집어 엎은 명반으로 속주 연주의 계보를 논할 때 이사람이 빠지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 될정도로 살아 있는 전설이다. 해외에서는 평이 아시아 만큼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헤비메탈계에서 잔뼈가 굵은 명인 기타리스트 잭 와일드가 말름스틴의 자서전에 썼던 평을 읽어보자.
말름스틴이 토니 매칼파인이나 크리스 임펠리테리, 반 헤일런 등과 함께 속주 기타의 시대를 열었고 또 속주 기타리스트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장인 건 맞고, 유니크한 기타톤과 플레이, 음의 배치가 중시되는 현재에 봐도 잉베이는 독보적인 부분이 많다. 프레이즈가 한정적이라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속주를 빼고 봐도 잉베이는 초고수 반열에 드는 기타리스트다. 2004년도 G3 공연 당시 조 새트리아니는 인터뷰에서 '솔직히 테크닉만큼은 우리 셋(스티브 바이, 조 새트리아니, 잉베이 말름스틴) 중 잉베이가 가장 뛰어나다'라고 했을 정도다.[29] 무엇보다, 그 정도로 기교가 요구되는 곡을 잉베이만큼 라이브에서 완벽하게 뽑는 기타리스트는 드물다. 그런 점은 사실 대중음악의 아티스트들 대부분과는 수준차가 나고, 클래식쪽의 전문 연주자와 비교되어야 할 정도다. 잉베이 본인 역시 클래식 연주자와 같은 대우를 받기를 원하고 있고...[30]"세상에는 좋은 기타리스트들이 많고, 또 위대한 기타리스트들이 있다. 하지만 그 위에는 '''판도를 바꾸는 이'''가 있다. 지미 헨드릭스와 에디 밴 헤일런이 그랬듯이, 잉베이도 그 중 하나다. 단순히 연주력의 완성도, 컨트롤, 장인정신의 이유가 그를 위대하게 하는게 아니다. 그의 프레이징, 비브라토, 톤, 그의 '''필링'''과 열정이 전체적인 음악성에 녹아들어 그를 특별하고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기타리스트들은 그저 빨리 연주하지만 무엇을 말하고자 하지 않지만, 잉베이는 다르다.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비발디와 파가니니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궁금하다면 그 이상 찾지말라. 그들의 모든 것이 잉베이의 음악에서 숨 쉬고 있고, 또 웃고 있다."
또 말름스틴이 억울하게 욕 먹는 부분은 바로 필도 없고 무조건 빨리 연주하는 게 미덕인 줄 아는 기타리스트라는 평이다. 전혀 그렇지 않은게 1984년에 나왔던 데뷔 앨범 Rising Force만 들어봐도 Icarus Dream Suite, Evil Eye, Black Star 등등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멜로디가 아름다운 곡이 많다. 느릿한 멜로디를 연주하지 않는다고 해도 Brother 같은 곡을 들어보지 못 해서 그런 것.
그리고 이 '필'이라는 것도 상당히 애매한 개념인것이, 비판자들이 항상 말름스틴을 까면서 에릭 클랩튼, 비비 킹 등등 서정적이고 느릿한 블루스 연주에 강한 선배 기타리스트들을 들먹인다. 만약 그렇다면 필이라는 것이 클래시컬 선율을 하모닉 마이너 스케일로 속주 연주하면 없는 것이고 펜타토닉으로 느릿하게 연주하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프란츠 리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같은 초절기교 피아노 작곡/연주자들의 음악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필이 없는 것인지?
물론 록 자체가 클래식과 똑같은 기준을 지녔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에 즉흥성과 연주자의 개성은 제쳐두고 지나치게 빠른 속주,딱딱 떨어지는 정확한 기교만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태도또한 잘못된건 마찬가지다. 일단 록, 로큰롤의 근본적인 기원과 정신에 대해 생각해보자. 척 베리와 더불어 로큰롤의 전설중 한명인 로큰롤 피아노 연주자 '리틀 리차드'는 클래식과 로큰롤의 피아노연주는 다르다고 주장하며 피아노에 발을 올리고 쿵쾅거리며 거칠게 연주했다. 이들은 매우 빠르고 정확한 기교와 테크닉보다는 블루스적인 필(즉흥성과 개성)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 저항정신 등을 강조했다.
그러나 록의 관점에서 본 록 특유의 '필'이라는 개념이 즉흥성이나 연주자가 지닌 개성,창의력 등이 연주에 드러나는것이라면 잉베이는 엄밀히 말해 그닥 비판받을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비판 항목에 서술된 잉베이의 "프레이즈를 돌려쓰고 똑같은 톤 등 매너리즘에 빠진연주"가 위의 비판에 기름을 부었다고 볼수도 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잉베이가 상대적으로 약간 그런 경향이 있다는것이고, 사실 즉흥성,개성 면에서 잉베이는 보통 기타리스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뒤떨어진건 아니다. 그리고 위의 유년시절 항목에서 알수있듯 잉베이의 음악적 뿌리와 지향점은 블루스, 로큰롤보다 클래식에 심히 가깝다는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즉흥, 필,그루브 보다는 장인적인 정확성,테크닉과 멜로디를 좀더 중시하는게 잉베이로썬 오히려 당연한거다. 이는 동시에 굳이 '록 기타연주자'라는 테두리가 아닌 '기타연주자'라는 포괄적인 개념에서 보자면 잉베이는 분명 매우 훌륭한 기타리스트임에 틀림없다는 뜻도 된다. 어찌보면 잉베이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그의 표면적인 스피드와 기교만을 숭배하고 워너비하는 후배 기타리스트들의 행태가 이같은 부당한 오해와 까임을 만들어 낸것이라 볼수 있겠다.
속도적인 측면에선 최근엔 그를 능가하는 속주 기타리스트도 많이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의 능력은 외계인급이라고 얘기한다. 특히 그런 속주를 하는 와중에도 한 음도 빼먹지 않고 완벽하게 아르페지오를 플레이하고, 감정을 뒤흔들어놓는 미친듯한 비브라토를 가진 점에서[31] . 또한 라이브에서의 완성도가 매우 높으며, 이러한 부분은 대중음악보다는 클래식에 좀 더 가까운 장인적인 면으로 볼 수 있다. 락밴드의 경우 특정 장르[32] 이외에는 곡의 파워, 리듬감, 그루브를 중시하고 세세한 표현에는 신경쓰지 않거나 쓰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은데[33] 잉베이의 경우 밴드보다는 기타 솔로에 가깝다보니 아주 디테일하게 잘 맞는 연주를 수행할 수 있다. 그의 음반을 들을때는 세세한 것 하나까지 신경써야 참맛이 느껴진다.
5.1.2. 선배도 무시하고 건방지다
'''"말름스틴은 자존심이 높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기에게 영향을 준 선배도 무시하고 동년배 기타리스트들도 함부로 깎아 내리는 오만불손한 인간이다"'''라는 비판에 대한 반박.
'''반쯤'''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와전된 소문이 너무 많다는 것. 우선 정통 메탈 계보에 있는 선배들에 대한 예우는 와전된 소문과 달리 아주 깍듯이 한다. 말름스틴은 분명히 딥 퍼플에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았다고 수 백번쯤은 인정을 했다. 유년기에 딥 퍼플 초기 앨범 fireball의 모든 곡을 카피 할 수 있도록 맹렬히 연습했다고 회고 할 정도. 실제로 리치 블랙모어가 말름스틴에 대해 평하길, "이상한 녀석이고 음악도 솔직히 난 잘 이해를 못하겠는데, 실력은 확실하고 나한테는 정말 깍듯이 대해줘서 아주 좋은 후배"라고 평할 정도로 선배에 대한 예우는 확실하게 하는 편이다. 실제로 지미 페이지같은 별 접점이 없을 거 같은 선배라도 테크닉은 부족했지만 헤비메탈의 사부님격 되는 분이라고 무한한 존경을 표현하며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고 말 할 필요도 없는 전설이야. 정말 위대한 앨범에서 아름다운 곡들을 쓰셨'다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랜디 로즈는 자서전에 자기 서명 까지 남길 정도로 극찬하는 편이고 밴 헤일런도 거의 숭배하는 수준. 심지어는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는 자기가 제일 존경하고 친하게 지내는 선배라고 인정하는 편. 더블 트랙 솔로에는 브라이언 메이 선배를 당해낼 수 없다고 인정한다. 지미 헨드릭스에 관해서는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고 당대 클랩튼이나 블랙모어도 디스토션 사운드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헨드릭스처럼 자유자재로 혁명적인 사운드를 낸 사람은 없고 단순히 기타 연주 뿐 아니라 굉장한 연출력, 천재 작곡가이기도 하다. 또 그는 짧은 활동 기간에 비해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음악들 들으면) 모든 걸 가진 반신의 영역에 계시다며 연신 그를 높게 평가했다. 이 말고도 마이클 솅커, 울리 존 로스 등등 여러 기타리스트에 대한 찬사를 남긴바도 있어, 흔히 말하는 살아 있는 기타리스트들은 다 까는 모두까기 인형이라는 이미지에선 몇 광년 쯤 떨어진 뮤지션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람한테 까인걸로 유명한 조 새트리아니도 사실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마음에 드는 새트리아니 곡에는 아주 칭찬을 하고 싫어하는 건 깠다. 이건 스티브 바이도 마찬가지이고.
다만 빈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지미 헨드릭스에 대한 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기가 그렇게 영향 받지 않았으면 대선배고 뭐고 "그렇게 영향 안 받았는데요?"식으로 솔직히 이야기 하는 편. 실제로 프랑스 매거진에서 한 블라인드 테스트 중 기타 자체를 시작하게 된 건 지미 헨드릭스지만 지금처럼 연주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리치 블랙모어의 연주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잘 모르는 밴드에 대해 인터뷰를 물어보면 보통은 자기가 최대한 아는 대로 좋게 좋게 말하는 뮤지션들이 많지만 말름스틴은 정말 "진짜 모르는데요?"라고 대꾸할 정도로 솔직하게 답한다.
위에도 언급됐듯이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라, 자기가 듣고 싶은 음악만 듣고 살아서 의외로 모두 다 아는 밴드를 자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없다는 경우가 많다.[34] 그 때문인지 싫어하는 건 '''엄청나게''' 싫어한다.
그 예가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잉베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표현이므로 오해 없길 바란다.
'''1. Ibanez(아이바네즈)나 Jackson 같은 슈퍼스트랫을 혐오한다:'''
우선 플로이드 로즈 브릿지를 기타의 고유의 음을 죽이는 최악의 발명품이라 싫어하고, 줄과 프렛 간격이 낮은 것도 싫어하며, 또 일단은 하이 게인 험버킹[35] 픽업을 기타의 바디에서 나오는 울림의 특징을 없앤다고 혐오한다. [36]
'''2. 기타리스트인 주제에 기본기가 부족하면 맹렬하게 깐다:'''
기타 연주로 밥을 먹고 사는 프로가 어떻게 벤딩 하나 음을 못 맞추는지 이해를 못한다. 또 속주 테크닉이 깔끔하지 않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다고 평하는 편. 슬래시같은 멜로디는 좋지만 기본기가 매우 심히 애매한 기타리스트들을 아주 싫어한다. 혹자는 이런 식의 논리라면 지미 페이지나 헨드릭스도 까야 하지 않나 싶지만 말름스틴에겐 그들은 하늘같은 선배님들이고(…) 슬래시는 분명히 자기보다도 후세대 기타리스트인 주제에 이런 전 세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안고 있어 맹렬히 깠다. 고음으로 보컬의 질이 결정되는 게 아니듯 정확한 테크닉만으로 기타 플레이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기본기와 테크닉이 부족하면 연주의 폭 자체는 제한되는 것이 사실이다. 자세한 건 슬래시 항목 참조. 사실 이것도 왕년에 제프 벡이 이미 했던 짓(그것도 상대는 리치 블랙모어!)
'''3. 스티브 바이나 톰 모렐로와 같은 아밍 주법이랑 이펙트 페달로 기타 고유의 소리를 왜곡하는걸 싫어한다:'''
이래서 스티브 바이의 음악을 처음에는 아주 혐오했다. 이런 노이즈가 어떻게 음악이 될 수 있냐면서. 게다가 스티브 바이는 말름스틴이 혐오해 마지 않는 아이바네즈 슈퍼 스트랫을 애용한다. 바이의 지인이 되고 그의 음악에 대해 좀 더 이해를 하고 나서는 그렇게 험한 소리는 안 하지만 꼭 '아, 이 친구는 그 아이바네즈랑 험버킹 픽업만 버리면 완벽한데 말이야!'라는 평은 곧 죽어도 한다(…). 2000년 중 후반으로 예상되는 프랑스 매체에서 한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도 '바이는 좋은 친구야' '그를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라며 동시에 '벤딩 자체가 너무 음정이 안 맞고 난 그게 싫어. 난 비브라토가 음정에 맞지 않은 솔로는 들을 수가 없어. 미안해 스티브' 라며 싫어하는 건 싫다 말했다.
그의 취미중 하나가 유명 기타리스트의 기타를 수집하는 것인데 스티브 바이 한테도 한대 받았다. 같은 모델이 아닌 직접 바이가 연주 하던 기타이며 그의 적절한 기타 보관 방법에 의 해 다뤄지고 있음.잉위의 기타 자랑
'''4. 얼터너티브/그런지/펑크 록 같은 악기 연주를 (본인 시각에서는) 대충 하는 것 같은 밴드를 혐오한다:'''
말름스틴만 이런 경향을 보인 것은 아니고 80년대 한 끗발 날렸던 헤비메탈과 하드 록계열의 밴드 대부분과 많은 솔로 기타리스트들이 보이는 특징이다. 본인들 입장에서는 악기를 형편없이 연주하고 파워 코드 3개로 음악을 만드는 게 어떻게 새로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37] 그게 어떻게 자신들의 음악을 몰아 냈는지 억울해 하는 입장이라 더더욱 억하심정으로 엄청나게 싫어한다. [38][39] 어떤 식으로 말하냐면, '요즘 유행하는'(그러니까 90년대 초중반 쯤) 음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좋게 말하는 힘들 것 같다"면서 운을 띄더니, "'펄잼이라는 그룹'의 기타리스트가 어디에 나와서 기타를 이렇게 치면 된다라며 레슨을 하는 걸 봤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잘못된 것이었다, 그 기타리스트는 누구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꼰대스러운 편견인 경우가 많으나 이는 다른 굳이 잉베이 뿐만 아니라 위에서 말했듯 다른 기타리스트들도 이런 발언 또는 주장을 했던 경우가 많으니 잉베이만 까대는건 무리가 있다.
그외에도 여러 가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게 확실한 사람이라 자기 코드에 맞으면 엄청나게 칭찬하고 안 맞으면 아주 싫어하는 성격. 이건 사실 '''건방지다'''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고집세고 까다롭다'''라는 평이 더 적절하다.
5.1.3. 잉베이는 독불장군
'''"잉베이 말름스틴은 독불장군이라 밴드 멤버를 하대하고 자기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싫어한다"'''라는 비판에 대한 반박.
이것도 2번과 같이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이건 잉베이가 가지고 있는 솔로 커리어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어느정도가 이해가 가능한 행동이다. 잉베이는 이것에 대해 이러한 인터뷰를 남긴 적이 있다.
"모든 곡이랑 편곡을 내가 하고, 베이스랑 드럼 라인, 보컬 멜로디도 사실상 내가 작곡합니다. 한마디로 내가 밴드 멤버에게 바라는 건 나의 지시를 잘 따라해 주길 바라는 거고 그렇지가 않으면 솔로 커리어의 의미가 없지요. 나는 몇몇 밴드가 작곡은 멤버 혼자 다 하지도 않으면서 밴드명은 멤버 이름 하나로만 해놓는게 좀 불공평하고 뻔뻔하다고 생각해요."
잉베이 밴드 출신의 연주자나 보컬들이 이후 그의 무대에 세션으로 서는 걸 볼 때, 그리고 인터뷰에서 공격적으로 잉베이를 공격하지 않는 점을 보면 멤버를 하대하는 내용은 약간 부풀려진 감이 있다. Rising Force의 보컬이었던 제프 스콧 소토와 조 린 터너의 인터뷰에 의하면, 잉베이의 성격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은 언론에 의해 부풀려 진 게 적지 않고 실제로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라고 한다. 단 제프 스콧 소토의 단독 인터뷰 중 하나를 보면 평소에는 젠틀하다가도 자신의 위치인 라이징 포스의 리더를 다른 멤버가 침범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고 한다. 85년 도쿄 라이브에서 제프가 마이크를 잡고 MC를 봤었는데 나중에 잉베이가 '리더인 내 역할을 침해하지 말라'고 엄청 화를 냈다고(…) 보컬로 지냈던 팀 리퍼 오웬스 또한 "자신에게 잉베이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내 입에서 '그 새끼는 아주 개객기야!!!'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잉베이는 적어도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 "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링크
한마디로 이 사람에게 있어서 솔로 커리어란 자기가 모든 걸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밴드 멤버는 일종의 세션이라고 보는 것. 그리고 밴드내에서의 지위와 발언권은 밴드에대한 기여도에따라 달라야한다는것. 이러한 차이 때문에 합작을 하는데 익숙한 밴드 멤버랑 불화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도 자기 솔로 데뷔앨범 Rising Force의 베이스는 말름스틴 본인이 쳤다.(…) 이건 많은 사람이 모르는 사실. 최근에는 이러한 성향을 잘 아는 멤버들을 만나 오랫동안 함께하고 있다.
6. 펜덕후
그는 엄청난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빠이다.
시그니처 모델명은 "Duck"(오리)인데, 그 이유는 기타 헤드 부분에 도널드 덕의 스티커가 붙여저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스트라토캐스터 콜렉션은 엄청나며 그의 콜렉션중에는 진퉁 1954년 스트라토캐스터도 있다. 이런 펜덕후인 그지만, 넥에 흠을 파내는 스캘롭핑[40] 작업에 디마지오(이후 던컨)의 험버커형 싱글 픽업으로 교체한 스트라토캐스터를 써서 오리지널 펜더 스트랫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스트랫이 아니라고 질타 아닌 질타를 받고 있다.[41] 그러나 잉베이 말름스틴 시그니처는 락에 어울리는 험버커의 강한 사운드를 가지고 있되, 오리지널 스트랫 사운드 고유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느낌으로 제작되어 있기 때문에 펜더가 맞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42]
픽업은 커리어 중반까지는 디마지오의 HS-3를 사용했으나 HS-3의 음량 관련 문제로 던컨과 계약해서 시그니처 픽업인 YJM Fury를 개발, 사용하고 있다. 둘다 험버커형 싱글 픽업으로 깨끗하고 빈티지한 전형적인 스트랫 사운드는 아니지만 노이즈가 적고 하드한 락 사운드부터 유려한 클래시컬 솔로까지 소화할 수 있는 특징이 있으며, 두 픽업의 음색이 좀 다르기 때문에 잉베이 팬들 사이에서 선호가 갈린다. 아무래도 잉베이의 전성기인 1980~90년대를 대표하는 HS-3의 음색을 좋아하는 사람 쪽이 더 많은 편.
이건 그의 기타 월드지가 방문한 그의 집에서 나온 스트랫 콜렉션
[43]
수많은 스트랫 키드들에게는 군침을 흘릴 만한 꿈의 콜렉션이다. 이 영상의 백미는 5분 10초경에 나오는 1954년산의 오리지널 스트랫. 저 기타는 10만불은 가볍게 뛰는 포르쉐 한 대 값의 초고가의 명기다. 꿈의 기타지만 그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콰직 하고 쑤셔넣는다.(…) 과연 잉베이 답다.
여담으로 그가 주목받기 시작했을 무렵 '''Gibson]'''에서 엔도서 제의가 들어왔었으나, 잉베이 본인이 '''"난 펜더 기타만 써"'''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자 깁슨에서 "그렇다면 뭐든 만들어 줄테니 말만 해달라"고 하자 잉베이가 농담 삼아 '''"Stratocaster 하나 만들어줘"'''라고 했는데, 몇 달 뒤 자신의 집으로 '''깁슨 로고가 박힌 스트랫'''이 배달되었다고 한다(…). 그 기타는 잘 보관하고 있다고.
그의 기타의 역사 및 시그네춰 모델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블로그를 참고해 볼 것.
2001년 내한공연과 함께 사인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한국 팬이 사인을 받으러 가져간 펜더 USA 스트랫을 보더니 자기 기타와 바꾸자며 자기가 가져갔는데 나중에 집으로 택배가 와서 보니 미펜도 아니고 저가형 일펜 잉베이 시그네쳐를 줬다고 한다. 잉베이가 준 일펜 사용기
다만 인터뷰에서 본인 스스로 깁슨 기타를 딱히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다.[44] 다만 펜더 기타랑은 좀 다른 취급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깁슨 기타가 "좋은 악기"라면, 펜더 기타는 '''"몸의 일부"'''라고(...) 표현했다.
7. 기타
- 펜덕후이기도 한 그는 페라리덕이기도 하다.
- 살이 엄청 쩟음에도 불구하고 리즈시절 때 입던 가죽바지라던가 바로크 풍의 와이셔츠[45] 는 절대 포기하지않는다, 심지어 앞가슴 부분의 단추는 다 풀어 놓고 다닌다(...).
- 공연때 양손에 반지나 팔찌, 시계 등을 엄청 끼고 연주하는데 이것이 잉베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보여준다. 반지의 경우 손가락 사이가 자유롭지 못하면 연주할 때 상당히 방해가 되고, 왼손은 지판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손목시계조차 연주에 부담스럽지만 잉베이는 이것이 상관없다듯 잘만 연주한다.
- 두번의 이혼 경력이 있다. 스웨덴에서 살던 시절 스웨덴의 팝 뮤지션 Erika Norberg와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미국으로 온 뒤에는 Amberdawn과 결혼했다가 결국 안 좋게 끝났다.[46] 현재는 April Malmsteen 사이에 아들 Antonio를 두고 잘 살고 있음.
-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에 따르면 2001년 내한 공연 당시 이태원동에서 롤렉스 짝퉁을 30개나 사가서 주위에 돌렸다고 한다. A급 짝퉁이었던지 선물받은 모두가 진퉁인줄 알고 감격했었다는 후문
- 1992년 2월 서라벌 레코드사 주최 내한공연 이 뉴키즈언더블록의 내한공연중 사망 사고로 인해 취소 된다.
- 2013년 5월 자서전이 나왔다. 링크
- 2015년 10월 10일(한국 시간) 자신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11월 10~11일 서울 한남동 언더스테이지에서의 내한 소식을 밝혔다! 실제 공연에서 김기동 짤방을 아는 이들이 김기동을 연호하기도 했다는 전설이...
[image]
- 2016년에는 스티브 바이가 초청해서 누노 베텐코트, 토신 아바시, 잭 와일드와 미 전역을 돌며 Generation Axe 투어를 다녀왔다. 그런데 팬들 기겁할 만한 장면이 있었으니...
[image]
- 그 유별난 펜더 꼰대가 아이바네즈, 그것도 젠트에서나 쓴다는 토신 아바시의 프로토타입 기타를 갖고 놀고있다(...)
8. 관련 문서
[1] '건방지다'는 이미지를 굳히게 된 발언이기도 한데, 발화의 의도가 잘못 전달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다른 인터뷰들에서의 대답들은 '딱히 연습시간을 정해놓은 것이 아니고, TV를 보거나 어디를 갈 때도 옆에 기타를 두고 수시로 '친다(play)''는 뜻이기 때문이다. 잉베이 밴드에서 보컬을 지냈던 팀 리퍼 오웬스의 언급처럼 악기를 항상 옆에 두고 연주가 직업이면서 취미 생활이라 그 모습을 봐왔던 사람들은 프로 연주자로서 잉베이의 노력에 대해서는 절대 폄하하지 않는다. 링크[2] 존 맥러플린과 함께한 인터뷰 중에서 나온 말로 인터뷰 마지막에서 9번째 앞부터 언급한다. 그말에 대한 맥러플린의 반응이 압권.[3] 영어의 L 발음은 초성을 제외한 자리에서는 설측 치경 연구개 접근음(또는 설측 연구개 접근음)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실제 Malmsteen의 영어식 발음을 들어보면 '''마음스틴'''에 가깝게 들린다. 필름의 영어식 발음이 '''피음'''과 가깝게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4] 그런데 꼭 잘못된 표기라고 하기도 그런 것이, 전설의 89년 레닌그라드 라이브에서 보컬인 조 린 터너가 '잉위 맘스틴' 이라고 부른다. [5]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윙베 요한 말름스텐'을 표준 표기로 정하고, 영어식으론 문서명과 같은 '잉베이 말름스틴'을 제시했다(2013년 4월 12일 진행 정부ㆍ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2013년도 제8차 실무소위원회 심의).[6] 근데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등에 올리는 영상들을 보면 본인 입으로 '잉위 맘스틴'에 가깝게 발음한다... [7] 그 이전까진 헤비메탈/하드 락 기타리스트들은 블루스 기반으로 한 스타일이었고, 기타에 클래식을 처음 도입한 건 딥 퍼플의 리치 블랙모어였고 그걸 완성시킨 인물이 잉베이 말름스틴이다.[8] 바로크 메탈이라는 표기는 잘못됐다. 일본에서 파워 메탈을 편의상 멜로딕 스피드 메탈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예. 단 바로크 메탈이라는 표현은 한국에서만 잘못 사용되고 있다. 당시 리스너들이 이것을 바로크 음악과 비슷하다고 표현해버려 이게 그대로 표현이 들어와 정착한 사례. 정확한 표기는 네오 클래시컬 메탈이라고 부른다. 다만 파가니니, 리스트나 쇼팽 등의 영향이 큰 다른 록커들과 달리 잉베이의 경우는 바흐의 영향이 워낙 두드러지므로 바로크라고 해도 크게 틀릴 건 없다. 뭐 바흐빠로서는 존 로드가 대선배이지만[9] 폴 길버트는 극한의 테크니션으로서 잉베이와 비슷한 이유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10] 원래는 마이켈 솅커. 잉베이의 등장 이후에 바뀌어 들어간 것이다. 또한 잉위 빼고는 매번 바뀐다(…). 조지 린치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음.[11] 정확히는 지미 핸드릭스의 부고를 알리는 방송이었고, 연주 장면은 그의 자료화면이었다.[12] 당시 영상. 1970년이라 그런지 화질이 좋지 않다.[13] 그 당시 어린 잉베이가 보았던 것은 이빨로 연주하고 기타에 불지르는 영상이었다. 잉베이도 공연에서 이따금씩 이빨 피킹을 선보이기도 한다.[14] 리치 블랙모어는 지미 헨드릭스 에게 동시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기타리스트이므로, 리치 블랙모어의 직계 후계자를 자처하는 잉베이 또한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15] 정작 리치블랙모어는 잉베이를 평가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항상 나에게 공손하고 예의를 표하고 나도 그가 인간적으로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대체적으로 나의 추종자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고 그 다운 대답을 하였다.[16] 바이올린 역시 주니어 콩쿠르에 나갈 정도로 연습했었다. 그러나 입상 경력은 없음.[17] 쉬라프넬 레코드사 사장으로, 제이슨 베커를 발굴해서 마티 프리드먼에게 소개시켜준 후 캐코포니의 앨범을 제작했고, 그 외에 그렉 하우, 크레이그 골디, 글렌 휴즈, 조지 린치, 비니 무어, 토니 매컬파인, 제이크 리, 폴 길버트, Racer X 등 7-80년대 메탈씬의 1/4은 그를 거쳐갔다.[18] 하루에 연습하는 3시간은 실전처럼 연습하는 시간으로 보인다. 보컬이었던 팀 리퍼 오웬스가 인터뷰(링크)에서 잉베이 주위에는 항상 기타가 있고 수시로 연주를 하며 자신이 지금까지 만났던 어느 기타리스트보다도 기타 연주 자체를 즐기는 사람으로 보였다고 말했다.[19] 라이브 편집반이므로 실제로는 앨범 한 장 만들고 나간 셈[20] 아마 시절 사용했던 밴드명[21] 옌스 요한슨의 인트로가 추가되어, 본 노래는 4분쯤부터 나온다. 보컬리스트는 이후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는 제프 스캇 소토.[22] 과잉진압이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이 어머니라는 작자가 잉베이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어 협박했었다고 신고했다. 그래서 경찰들은 무장을 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과잉진압을 한것[23] 첫번째 아내와 결혼은 하였지만 결국 이혼[24] 그의 매너리즘에 대한 지적에 대해, 인터뷰에서 '클래식 연주자들은 한 곡을 십 수 년간 다듬어서 월드투어를 하기도 한다'라는 말도 했다.[25] 사실 이런 것까지 업적이라고 표현하는건 어폐가 있다. 그렇게 따지면 로니 제임스 디오. 그래험 보넷을 보컬로 기용한 리치 블랙모어, 무명의 로버트 플랜트를 기용한 야드버즈 출신의 지미 페이지, 알카트라즈를 만들어 잉베이를 데려다 유명하게 만든 그래험 보넷 등이 훨씬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다.[26]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얼터너티브/그런지 록이 광풍이 휩쓸던 90년대에. 당시 이들은 얼터너티브 록/그런지의 요소를 따라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대부분이 제대로 된 융화를 하지 못하고 음악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실패한 앨범들이 부기지수였다. [27] 잉베이가 쓰는 스트라토캐스터는 이미 일반적인 스트랫이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 과도하게 개조되어서 본래의 소리가 많이 변형된 상태인데다가 저 톤을 찾고 카피하는데에 걸린 시간이 5-6년 정도 된다.[28] 간단히 말해서 자주 쓰는 음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29] 여담으로 G3 중 가장 '''어리다'''(…). 조 새트리아니 - 1956년생, 스티브 바이 - 1960년생, 잉베이 말름스틴 - 19'''63'''년생.[30] 그리고 본인의 매너리즘에 대해서 그렇게 변명하고 있다.(…)[31] 비브라토는 일정 수준의 오른 프로급 기타리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표현법이다.[32] 기교 자체를 매우 중시하는 프로그레시브 메탈, 아방가르드 메탈, 데스 메탈의 몇몇 하위 장르 등 제외.[33] 특히 펑크 쪽에서는 '못하는 게 컨셉'인 경우까지도 왕왕 있다[34]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다 듣지는 못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2013년에 드림 시어터의 보컬리스트인 제임스 라브리에가 존 페트루치와 함께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솔로밴드에서 이번에 낼 앨범은 최근에 유행하는 모던 멜로딕 데스 메탈과 메탈코어의 영향력이 물씬 느껴질거라면서 최근에 유행하는 밴드들의 이름을 줄줄이 말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존 페트루치가 끼어들면서 그거 밴드이름을 즉석에서 지어낸것이 아니냐며 잠깐 의문을 표하기도 했었다. 잉베이는 메탈 뮤지션 중에서 음악 편식이 상당히 심하고 빈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더욱 부각돼서 나타난다.[35] 애초에 험버커를 그렇게 썩 좋아하지 않는데 하물며 EMG나 디마지오에서 내놓는 하이 게인 험버킹은…[36] 그런데, 밑의 '펜덕후 항목'에 걸려있는 유투브 영상을 보면 그의 기타 컬렉션 중에 Ibanez 스티브 바이 시그너쳐 젬 기타가....[37] 펑크, 그런지, 얼터너티브 항목 참조[38]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영미권에서 헤비메탈의 시장이 축소됨에 따라 어떻게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이 자신들을 몰아냈는지 이들의 음악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얼터너티브 록의 사운드 포징을 헤비메탈에 씌우려는 당시의 시류에 편승하려는 시도를 했다.하지만 이러한 형식의 음악적인 시도는 대부분 음악적인 평가에서 죽을 쑤었고 더더욱 자신들의 전성기의 평가에서 멀어져갔다. 대표적으로 이 아저씨들의 앨범들[39] 근데 이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일부 펑크/코어 계열 밴드들이 80년대 스타일의 헤비메탈, 하드록 밴드들을 꼰대, 구닥다리,유행에 뒤쳐진 노친네들 취급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일부 메탈코어 밴드들에게 메탈 밴드 혹은 하드락 밴드라고 하면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40] 마치 빨래판처럼 프렛과 프렛 사이를 둥글게 깎아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파내고 프렛을 잡으면 줄이 흠을 파낸 안으로 더 들어가기에 음이 틀어지지만 잉베이의 경우는 이것을 이용해 프렛을 누르는 세기를 조절해 쾌속 비브라토를 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했을땐 원래 음대로 잡으려면 손가락을 허공에 띄운 채로 유지해야 했기에 익숙하지 않으면 매우 불편하다.[41] 더군다나 지금 잉베이가 주로 쓰는 스트랫은 아예 한 번 뜯어서 내부 배선과 코일까지 다 갈아치운 거라 바디만 스트랫...[42] 실제로 잉베이 말름스틴 시그니처로 연주를 해보면 다른 기타에 비해 게인이 안먹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43] 참고로 중간에 스티브 바이와 브라이언 메이가 선물한 기타도 언급되고 콜렉션 속에 섞인 것이 보인다.[44] 실제로 무대에서 플라잉브이 기타를 연주한 적도 있다.[45] 바로크 풍의 와이셔츠는 자기 가문에 내려오는 스웨덴 귀족 의상으로 잉베이가 미국에 갈때 어머니가 입으라고 준 것, 포기안할 만하다.[46] 마이크 베세라가 보컬로 있던 시절에 앰버가 베세라와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