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르반 4세/배경
1. 장문
2. 상아, 흑단, 벽옥
3.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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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 설정
4.1. 구 단문 배경
라이트실드 왕조의 자손인 자르반 왕자는 데마시아의 왕좌를 물려받을 후계자이다. 데마시아의 덕목을 대표하는 귀감으로 자라난 자르반 왕자는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큰 기대와 전선에서 싸우고 싶다는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다. 자르반 왕자는 가공할 만한 용기와 자신을 돌보지 않는 투지로 병사들을 고무시키며, 데마시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자신의 백성을 이끄는 미래의 지도자로서 진정한 힘을 뿜어낸다.
4.2. 구 장문 배경 1
속설에 의하면 라이트실드 사람들은 날 때부터 뼛속 깊숙이 녹서스에 대한 증오를 품고 태어난다고 한다. 라이트실드 혈통은 데마시아의 왕족으로서 수 세기 동안 데마시아의 윤리를 거스르는 자들과 전쟁을 벌여왔다. 리그 오브 레전드 시대에 태어난 첫 라이트실드 가문의 후예, 자르반 4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상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자르반 4세도 직접 데마시아 군을 이끌었다. 녹서스 군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 부상당하고 쓰러져간 동료, 아군들의 수는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자르반은 늘 그들과 함께 피를 나누고 고통을 직면했다.
자르반에게 있어 가장 참담했던 패전은 제리코 스웨인이 이끄는 녹서스 군과의 전투였다. 데마시아군은 스웨인의 작전에 휘말렸고, 자르반은 우르곳의 손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어릴 적부터 동고동락했던 친구 가렌의 정예부대가 그를 구출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그곳에서 처형당했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그의 측근들은 자르반 4세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예를 들어 신 짜오는 그를 두고 "누굴 마주 보고 있든, 그의 시선은 그 사람 너머를 향했다. 그의 시선은 한 번 목도하면 다시는 거둘 수 없는 그 어딘가를 향해 있는 것만 같았다"고 증언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자르반 4세는 소수의 데마시아 병사를 손수 선발해 '속죄'를 다짐하며 데마시아를 떠났다. 처음에 그는 발로란 북부에 있는 야수들과 도적들을 추적해 소탕하기 시작했다. 위험천만한 전투를 지속하던 그는 끊임없는 사냥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대장벽 남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아무도 그가 남쪽으로 향한 이유를 알지 못했고, 이후 거의 2년 동안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지만 자르반에게는 그 자신만의 사명과 이유가 존재했던 것 같다. 2년간의 공백을 뚫고, 자르반은 당당히 데마시아로 귀환했고 성대한 환영식이 열렸다.
그의 곁에는 함께 길을 떠난 병사 열둘 중 단 두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짐승의 뼈와 비늘로 장식된 그의 갑옷은 출전 당시에 입고 나갔던 그것과는 무척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두 눈은 자신의 나이보다 갑절은 더 성숙해 보였고 노장들의 현명함까지 감돌았다. 그를 보려고 몰려든 인파 속에서, 자르반 4세는 강철처럼 차갑고 침착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데마시아의 적들을 제 앞에 무릎 꿇리겠다고.
"세상에는 단 하나의 진실이 존재하며, 그 진실은 나의 창끝에 있다." - 자르반 4세가 실패로 돌아간 처형 전에 남겼던 '유언'
4.3. 구 장문 배경 2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자 자르반 4세는 데마시아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재목이지만,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사람들의 기대는 때로 그에게 버거운 짐이 되었다. 전장에서 자르반은 가공할만한 용기와 자신을 돌보지 않는 투지로 병사들을 고무시키며 지도자로서의 진정한 힘을 드러낸다.
원래 데마시아의 지도자는 최고 의회가 적합한 후보자를 추린 뒤 가장 뛰어난 인물을 선출하는 방식이지만, 지난 3세대 동안은 같은 혈통의 후예가 왕위에 올랐다. 현왕 자르반 3세의 유일한 후계자인 자르반 4세는 태어나자마자 이 전통을 이어가도록 키워졌다. 왕국 통치법을 배우는 것은 물론, 최고의 역사학자들을 스승으로 맞이했으며, 전쟁의 기술 또한 연마했다. 가문의 의도는 왕실의 의무부터 그의 이름까지 자르반의 삶 모든 곳에 투영되었다.
자르반은 격투 훈련을 받으면서 자주 가렌이란 이름의 어린 전사와 겨루게 되었다. 가렌은 다음 왕의 친위대장이 되기 위해 수련하고 있었다. 이 당시 자르반은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가렌의 용맹함에 감탄했고, 가렌은 왕자의 기민한 두뇌에 감복했다. 둘은 곧 때어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자르반 3세는 나이가 찬 아들을 영예로운 데마시아의 장군으로 임명했다. 자르반 4세는 그동안 전쟁의 전술과 전략을 수없이 공부했으며, 소드마스터 상대로 결투에서 승리할 수도 있었지만, 전선에 직접 서보기는커녕 타인의 목숨을 앗아간 적도 없었다.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자 했던 자르반 4세는 병사를 이끌어 겨울 발톱 약탈자 무리를 섬멸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부족을 공격했으며, 사악한 마법사들의 주둔지를 급습하기도 했다. 비록 병사들을 지휘해 대승을 거뒀지만, 자르반은 사방으로 자신을 지키는 호위대 때문에 전사로서 직접 나서지 못하는 것이 내심 아쉽기도 했다.
녹서스의 전쟁부대가 데마시아 국경 근처의 농지를 습격했을 때, 자르반 4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말을 타고 며칠을 달려간 피해 마을의 흔적은 예상보다 훨씬 참혹했다. 녹서스군은 마을 전체를 습격해 수백 명의 데마시아인들을 학살했고, 고작 몇 명만의 부상자들이 탈출에 성공하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할 수 있었다.
장교들은 왕자에게 후퇴하여 지원군을 부를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죽은 자들의 얼굴이 아른거려 심란한 자르반 4세는 차마 도움이 필요한 생존자들을 두고 등을 돌릴 수 없었다. 장교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는 다친 자들을 지키고 녹서스군의 퇴로를 막을 계획을 세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원군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다. 자르반은 당장 행동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자르반은 병력을 나눠 일부는 다친 민간인을 돌보도록 하고, 나머지 병력과 함께 진군했다. 데마시아군은 야밤을 틈타 녹서스군을 기습했으나, 전투의 혼란 속에서 자르반은 친위대와 멀어지게 됐다. 그는 맹렬하게 싸워 수많은 적을 베어냈지만 결국 압도적인 수에 밀려 포로로 잡혔다. 녹서스군은 자르반 4세를 쇠사슬로 구속한 뒤, 녹서스로 귀환하여 위대한 ‘불멸의 요새’에서 자르반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녹서스군의 위용을 과시하기로 했다.
벌써 몇 주째 포로가 되어 점점 멀어져가는 데마시아를 바라보는 자르반은 자신의 경솔한 판단 때문에 무고한 데마시아인들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상실감에 짓눌린 자르반은 왕위는 고사하고, 더는 데마시아에 살 자격조차 없다고 믿었다.
어느 달이 없는 밤, 가렌과 ‘불굴의 선봉대’로 알려진 용감무쌍한 정예병들이 녹서스 야영지를 공격했다. 데마시아 전사들은 자르반까지 닿지 못했으나, 자르반은 혼란을 틈타 탈출을 감행했다. 녹서스 병사들과 싸우며 포위망을 돌파하는 자르반의 옆구리에 화살이 박혔으나, 어린 왕자는 굴하지 않고 황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쓰러질 때까지 달린 자르반은 쓰러진 나무의 틈 사이에 숨어 상처에 열악하게나마 붕대를 감았다. 며칠 동안 그 자리에 누워 흐릿해지는 의식을 위태롭게 붙잡으며 죽음이 다가옴을 느꼈다. 꿈을 꾸는 건지, 깨어있는 건지도 모를 몽롱한 상태에서 불타는 눈과 보랏빛 피부의 여인이 그를 외딴 데마시아 마을로 들고 가는 모습이 각인됐다. 그곳에서 자르반은 약초를 아낌없이 처방하는 치료사들의 보살핌 아래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되찾았다.
데마시아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두 개의 산 사이에 평화롭게 자리 잡은 이 작은 산악 마을에서 자르반은 심신이 치유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왕실의 의무, 압박과 요구로부터 자유를 만끽하며 해방감을 맛봤다. 이방인임에도 그를 순수하게 환영해주는 마을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또한, 기묘한 보랏빛 피부의 은인을 만나 그녀가 같은 이방인인 것,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쉬바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포악한 용이 주변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풍전등화의 위기가 찾아왔다. 건물은 새까맣게 불타고 농지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만약 저 거대한 용이 이 작은 산악마을을 공격하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판단한 자르반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근처에 있는 렌월성으로 향했다.
그날 밤, 자르반은 쉬바나가 영지를 몰래 떠나는 것을 발견하고 저지했다. 그러자 쉬바나는 자신이 용과 인간이 섞인 하프 드래곤이라는 것과 그들을 위협하는 파멸의 생물이 자신의 어머니 이바라는 것을 고백했다. 이바는 쉬바나를 혈통의 수치로 여기고 극도로 증오했다. 그리고 쉬바나가 죽을 때까지 사냥을 멈추지 않을 것은 명백했다. 여느 데마시아인과 다름없이, 자르반은 마력을 가진 존재를 신뢰하지 않도록 길러졌다. 하지만 그는 쉬바나의 선량한 성품과 강력한 힘을 두 눈으로 직접 본 데다가 목숨의 빚을 갚고 싶었다. 무시무시한 적에 대항하려면 모두의 힘이 필요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용의 위협에 맞서 자르반은 데마시아 마을 사람들을 훈련하여 렌월 요새의 병사들과 함께 싸우도록 했다. 그리고 결전의 무대로 서쪽의 고대 페트리사이트 폐허를 선택했다. 과거 격변하는 룬 전쟁 시기에 지어진 고위 신전은 이제 흔적만 남아 있지만, 여전히 마법을 무효화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녔다. 이 돌들은 용을 상대로 최선의 방어책을 제공해줄 터였다. 자르반은 화살촉마저 뾰족한 페트리사이트로 덮었다. 저 극악무도한 짐승을 죽일 기회라도 노리려면 모두가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결전의 날, 자르반과 병사들은 폐허 곳곳에 몸을 감추고, 쉬바나는 공터의 가운데에 섰다. 자르반은 그녀가 용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감탄하며 지켜봤다. 쉬바나는 하늘 높이 불꽃을 뿜으며 어머니를 불렀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뒷걸음쳤지만, 자르반은 그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쉬바나는 진정한 적을 쓰러뜨릴 것이라 읊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실루엣이 태양을 검게 가리며 위대한 용 이바가 그들을 공격했다. 자르반의 지휘하에 병사들은 수십 개의 페트리사이트 화살을 용의 등에 발사했으며, 적중할 때마다 그녀의 힘은 차츰 약해져 갔다. 용은 고통에 하늘로 날아올라 사방으로 불꽃을 뿜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병사가 갑옷 속에서 숯이 되었지만 화살 공격은 계속되었고, 마력이 억제된 용은 폐허 중에서도 사방이 막힌 공간에 갇혀 날아오를 수 없게 되었다.
쉬바나와 이바는 대지를 뒤흔드는 힘으로 서로와 부딪쳤다. 자르반은 경외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용들은 너무 빠르고 맹렬하게 싸워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자르반은 친구가 다칠세라 궁수들을 뒤로 물렸다. 어느 순간, 쉬바나는 목에서 피를 흘리며 인간 형태로 돌아가 쓰러졌다. 자르반은 절망했으나, 쉬바나는 어머니의 눈을 노려보며 불타는 발톱으로 그녀의 심장을 공격했다.
이바가 죽으며 위협이 사라졌다. 자르반 4세는 드디어 집에 돌아갈 자격을 얻었다고 느꼈다. 진정한 데마시아의 가치는 단순히 승리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가 되어 단결하는 것에 있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쉬바나의 용맹에 보답하기 위해 자르반은 그녀에게 얼마든지 왕국에 머물러도 된다고 약조했다. 하지만 데마시아 왕국 자체가 아직도 마법을 굉장히 경계한다는 것을 알기에, 쉬바나는 자르반의 곁에서 싸울 때 그녀의 두 번째 본성을 드러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둘은 함께 용 이바의 해골을 들고 수도로 향했다.
왕자가 무사히 귀환한 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이 열광했으나, 다른 이들은 쉬바나를 친위대로 등용한 자르반의 판단을 의심했고, 녹서스군으로부터 탈출하고 즉시 수도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실제로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왕 자르반 3세는 대외적으로 아들을 왕실에 다시 반갑게 맞이했다. 자르반 4세는 왕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복귀하면서, 데마시아의 이상을 받들어 어떤 위협이 닥쳐와도 하나가 되어 대항할 수 있도록, 한 명의 국민도 빠짐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를 만들기로 다짐했다.
4.4.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
'''후보: 자르반 4세'''
날짜: CLE 21년 3월 21일
'''관찰'''
애초에 자르반을 맞이하기로 했던 데마시아의 수련 소환사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심판 당일 막바지에 부와 출세를 거머쥘 기회라면 절대 놓치지 않는 빌지워터 출신의 젊은 소환사로 대체됐다. 새로 배정된 이 청년은 자르반이 예정보다 빨리 심판을 받을 수 있게 해 준 것 같은데, 그를 평가할 이는 리그는 아닐 것이다.
자르반이 한껏 거만한 태도로 대전당에 들어선다. 제 아비를 딱 닮아, 다른 이들은 자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는 듯한 태도로 거들먹거리며 걷는다. 방어구는 호화롭기는 하나 전혀 실용적인 데는 없으며, 그간 해치운 야수들의 가죽을 주렁주렁 건 걸 보면 과시욕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라이트실드 가문의 개답게 튀어나온 턱을 보면, 권위보다는 몽둥이나 휘두르는 편이 훨씬 어울려 보인다. 안하무인인 데다 오만한 꼬락서니는 왕세자에게 바치는 대중의 찬사가 다 아까울 지경이다.
사육이 필요한 야수인 양, 자르반은 위풍당당하고 거칠게 문으로 당당히 나아간다. 입구를 지나고, 빛을 지나서… 이제 내 손아귀 안으로.
'''"환영한다, 자르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거든."'''
'''회고'''
왕족에겐 왕족의 특권이 있는 법이다. 아버지인 자르반 라이트실드 3세 왕의 침착한 목소리가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자르반 왕자의 귀에 들려왔다. 왕자가 항의했지만, 왕은 자르반이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신 짜오에게 리그에서 겪었던 심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라 명했다. 리그의 규칙에 반하는 일이었으나 자르반 3세는 이를 그저 ‘불가피한 위반’이라 말할 뿐이었다. 시험은 일단 술책만 파악하면 대단치 않을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 과거에 겪은 충격적인 장면들을 대면한 후 질문 한두 개에 대답하는 것뿐이니. 자르반은 시험을 정당하게 치러낼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 못내 씁쓸했다. 부하는 자기 힘으로 이겨낸 시험을, 속임수나 써서 극복하려는 왕자가 도대체 무슨 자격이 있단 말인가.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일국의 지도자가 지어서는 안 될 표정이었으나, 어둡고 조용한 이곳에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신 짜오는 회고의 방을 ‘심연 같은 어둠이 자욱한’ 곳이라고 묘사했으나 그건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이었다. 물론 어둡긴 했지만, 그 밖에는 평범할 뿐이었다. 빛이 없다고는 하나 어둠이 방 안에 있는 다른 존재의 모습을 숨겨주는 것도 아니었다. 자르반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전혀 다른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이 어리석은 연극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둔 채 한가로이 서서 기다렸다.
그 형상은 비좁은 대기실 반대편 쪽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자르반에게서 3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자르반은 그 존재에게는 별 관심 없이 환상이 시작되기만 기다렸지만, 기대했던 기이한 신기루에 휩쓸리는 대신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둠 속에서 돌연 공격이 시작됐다.
자르반은 아무 준비도 없이 허를 찔리고 말았다. 앞에 있던 형상이 칠흑 같은 날개를 넓게 펼치더니 앞으로 돌진해 왔다. 뒤로 물러나 방어 태세를 취하려 했으나 땅 아래서 솟아 나온 날카로운 발톱이 양다리를 붙잡아 그 자리에 붙박아 두었다. 주위로 검은 피조물들이 잔뜩 몰려와 드러난 살을 쪼아댔다. 고통이 전신을 꿰뚫었다. 그림자는 이제 위로 솟구쳐 오르더니 명백한 의도를 드러내며 자르반에게 돌진해 왔다. 피보다 더 붉고 타오르는 불덩이보다 뜨거운 여섯 개의 눈이 그를 노려보자, 주위 대기까지 증오로 들끓는 듯했다.
''스웨인이군.''
자르반은 살이 찢기는 고통을 무시하며 다리를 움켜쥔 발톱들을 거칠게 떼어냈다. 적의 심장을 노리며 창을 내지르자 창끝이 날개 달린 형상의 가슴에 닿아 깊숙이 파고들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을 정도로 오싹한 함성을 내지르며, 자르반은 스웨인을 번쩍 들어 넘겨 뒤쪽 벽으로 내던져 버렸다. 어렴풋한 실루엣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차가운 돌벽에 부딪치더니 털썩 땅으로 쓰러져 버렸다.
돌아서는 자르반의 눈에 원한이 가득했다.
“네놈 실력을 증명하고 싶었다면, 상대를 아주 잘 골랐군!”
자르반은 스웨인의 머리를 베려고 돌격했다. 이게 환영이든, 실제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한 발짝을 겨우 떼자마자 에너지 덩어리가 대기를 가르며 날아들더니 갑옷을 관통하여 몸을 태워 들어갔다. 광선이 몸을 훑자 온 방에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자르반은 고통에 휩싸여 자신이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방에 걸린 횃불이 방을 비추자,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온 스웨인이 아까 쓰러졌던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옆에서는 까마귀가 부리에서 에너지 줄기를 뿜어내며 허공을 맴돌았다. 스웨인의 가슴에는 짙은 주홍빛의 얼룩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난 증명할 필요 따윈 없다. '''왕자'''.”
스웨인은 맛있게 베어 먹던 고깃덩이에서 구더기라도 나온 양 역겹게 왕자라는 호칭를 내뱉었다.
“리그의 실수로 네가 ‘불운하게’ 서거한다면 꽤 만족스러울 텐데 말야. 그렇게 될 것도 뻔하고. 그럼 네 아버지가 그 조약이라는 걸 어떻게 할 지 궁금한데.”
스웨인이 주먹을 쥐자 그 안에서 밝게 빛나는 마법의 기운이 나타나 손안에서 흘렀다. 잠시 후 손을 펴자 마법 줄기가 앞으로 뻗어 나가 까마귀의 힘을 더욱 증폭시켰다. 격렬한 고통에 자르반이 눈을 부릅뜨더니, 이윽고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정말 답답할 정도로 멍청한 데마시아 인이군. 전략도 요령도 없이 달려들다니, 내 적수라고 하기도 역겨울 정도야. 널 얼른 처치해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는군그래. 그럼 좀 더 내게 걸맞는 상대가 네 자리를 차지하기라도 할 텐데.”
이 말과 함께 스웨인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자르반이 보는 앞에서 몸이 부풀어 오르면서 여기저기 늘어나더니 흉측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급기야 그 몸에서 까마귀가 솟아 나오더니 자르반에게 달려들어 살갗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새떼가 몰려들 때마다 방 안의 횃불이 깜박거리더니 하나하나 꺼져 갔다. 마지막 횃불마저 꺼지고 나니 보이는 것은 흉하게 일그러진 스웨인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는, 피에 굶주린 여섯 개의 점뿐이었다. 자르반의 시야가 흐려지면서 점들이 하나로 뭉치더니, 결국 모든 것이 어둠에 물들어 버렸다.
이제 자르반은 학회에서 멀리 떨어진, 전에 와 보았던 장소에 있었다. 삶과 죽음의 외로운 기로였다. 그곳은 영원한 평화의 절벽 끝, 끝없는 잠을 향한 관문이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 따뜻함을 느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언젠가는…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눈을 감은 그의 몸속에서, 아니 그보다 더 깊은, 영혼 밑바닥을 뚫고 내려간 존재의 한복판에서 어떤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소리는 넘실대며 퍼지더니 결국 심장에서 터져 나와 혈관을 데우고 근육까지 번져갔다. 이윽고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은 자기 살을 뜯어 먹고 있는 까마귀 떼만큼이나 강력하고 생생한 분노 그 자체였다. 조상들의 목소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데마시아 전사의 전투 함성이자 왕자로서의 외침이었다. 자신이 내지른 함성이 귓가에 울리자 자르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눈은 더이상 보통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눈에 깃든 불꽃이 야수의 탄생을, 제왕으로서의 각성을 알렸다. 이윽고 그 눈이 스웨인을 포착했다.
자르반은 자신을 움켜쥐고 있는 발톱들을 부러뜨리고 점점 더 죄어오는 부리를 산산조각내며 벌떡 일어서더니, 창도 버린 채 앞으로 뛰어들었다. 자르반이 한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공중으로 들어 올리자 스웨인의 눈에 놀라움이 비쳤다. 자르반은 스웨인의 몸뚱이를 벽에 내리치며 계속 움직였다. 움켜쥔 손가락 틈으로 어렵사리 지나는 부드러운 숨결에 그는 손을 더욱 단단히 그러쥐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날카로운 미소가 자르반의 입가에 떠올랐다.
“전략? 요령? 전쟁에는 승리와 죽음이 있을 뿐이다. 녹서스 인이여.”
자르반은 까마귀가 자신의 살덩이를 찢어 내어 스웨인에게 그 생명력을 날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눈이 서서히 흐릿해지는 것으로 보아, 죽음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르반은 스웨인의 불거진 눈에서 생명이 사그라지는 것을 볼 때까지는 절대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다짐으로 남은 온 힘을 손아귀에 집중시켰다. 서로 상대를 끝장내기 전엔 절대 먼저 죽지 않으려 뒤엉킨 둘의 밑에 피가 고여 웅덩이를 이뤄갔다.
“그만해 두세요!”
돌로 만들어진 학회의 전당에 쨍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르반은 알 수 없는 힘에 붙들려 스웨인에게서 멀리 휙 날려가 반대편 벽에 부딪히기 일보 직전에 멈췄다. 그리곤 허공에 뜬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인간 형상으로 돌아온 스웨인 역시 방 반대편 허공에 떠 있었다. 늘 함께 다니는 새 한 마리를 빼곤, 까마귀는 모두 온데간데없었다.
베사리아 콜민예 상임 의원은 뒤집어썼던 후드를 내리며 처음엔 자르반을, 그다음에는 스웨인을 쏘아 보았다.
“무슨 짓입니까, 스웨인? 여기는 신성한 곳입니다. 당신의 음험한 게임은 이곳에선 용납되지 않아요.”
그리곤 자르반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유 때문에 리그에서는 당신을 받아들일 겁니다만, 오늘 일에 대한 보복을 꿈꿨다간 정치적인 끈을 동원한다 해도 리그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겁니다.”
그녀는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오늘 여러분이 서로에게 선사하려 했던 운명이 차라리 낫다고 후회하게 될 거에요.”
베사리아가 손목을 획 젖히자 스웨인이 마치 헝겊 인형처럼 허공을 날아 훌쩍 방 밖으로 휩쓸려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베사리아가 넌더리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자르반은 여태 입은 상처로 고통스러워 신음하며 볼품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창으로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일어났지만, 리그로 향하는 문은 너무나 멀어 보였다. 그냥 죽음을 맞이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는 잠시 생각했다. 절룩이며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그러모으는 그의 머릿속에서, 부친이 일러줬던 말씀이 메아리쳤다. 그러자 겨우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왕족에게는 왕족의 특권이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