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수

 


1. 개요
2. 역사
3.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


傳奇叟[1]
조선 후기에 소설을 직업적으로 낭독하는 사람들을 일컫던 말.
한글소설을 주로 읽으면서 예로부터 전해져내려오는 설화와 역사이야기, 삼국지나 수호지같은 중국 고전소설도 같이 읽었던 경우도 많았다. 이야기의 중요한 장면이 진행되었을 때 말을 끊고 침묵을 지키다가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이야기를 다시 진행하는 식으로 읽어주었다. 물론 양반가로 들어가서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는 결말부분이 끝나면 돈을 받았다. 그야말로 조선시대의 BJ.

1분 이후 전기수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2. 역사


18세기에서 20세기 중반 사이에 활동했다. 비슷한 직업이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17세기 이후로 한글문학이 발흥하고, 책의 인쇄량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책값이 상당히 비싸서 빌려서 읽는 것이 보통이었고 원하는 책을 마음껏 빌려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데다가 문맹자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틈새를 노려서 전기수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에는 주로 각 마을이나 시장판, 양반집을 돌아다니며 글을 읽어주었다. 드물게 양반가의 부녀자들을 위한 여자 전기수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대에는 글공부를 해야 될 양반들이나 유생들이 엉뚱한 데에 빠지게 한다는 이유도 있었고 일부 전기수들도 유명세를 이용해서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인식은 그리 좋지는 못했다. 물론 그래도 들을 사람은 다 들었던 것을 보면 그만큼 인기가 높았다는 반증도 된다.
구한말과 일제시기를 거쳐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많은 직업들이 소멸한 것과는 다르게 전기수들은 196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해왔는데 우선 구한말과 일제시대때 영화와 레코드, 라디오가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영화를 보려면 상당히 부담이 가서 아무때나 볼 수 없었으며, 라디오는 구입은 물론이고 비싼 청취료로 인해서 유지에 큰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레코드야 음반을 일일히 구하는 것은 부유층이 아니고서야 꿈도 꿀 수 없었고, 다방 같은 데 가서 들어야되니 돈이 들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기수들은 시장판에 가기만 하면 볼 수 있었고, 듣는 가격도 비교적 쌌으며 문맹률은 70%-80%대를 넘나들 정도라서 소설책을 읽을 사람이 적었기도 했으니 전기수에 대한 인기가 여전했던 것이다. 이는 광복 이후로도 이어져서 도서관은 드물고, 라디오의 보급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대중화한 것은 아니었으며 텔레비전이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텔레비전 또한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던 사치품이라서 부자들이나 가질 수 있던 물건이었으니 전기수들은 값싸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전문적인 전기수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책을 팔려고 나온 책장수들이 책의 내용을 읽어주며 손님을 끌 때도 있었다. 어차피 당대에는 책을 살 수 있는 소비자층이 한정되어있었던 것도 있다. 하지만 1960년대 라디오가 대중화되면서 좀 더 다양하게 들을거리가 늘어나며 전기수들은 설자리를 잃었으며 1970년대 들어 텔레비전까지 보급되자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현대의 비슷한 직업이라 하면 동화구연가와 성우가 있다. 문화컨텐츠를 보여준다는 관점으로 보면 스트리머와도 비슷하다.

3. 기타


중국에서도 전기수와 같은 역할을 한 직업이 있었고, 설서인(設書人)이라 불렸다.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라쿠고가라는 직업이 있는데, 이쪽은 아직도 현존한다.
정조실록[2]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임경업전을 읽던 한 전기수의 연기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그를 임경업을 죽인 김자점으로 착각한 한 관중이 낭독중에 뛰어들어 풀베는 낫으로 그 전기수를 죽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해당 인물은 정명섭 저서에도 언급된 당대 인기 전기수였던 이업복이었다.
2018년 9월 9일자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

4. 관련 문서



[1] ''''''(손 수)가 아니라 叟(늙은이 수)를 쓴다.[2] 정조실록 31권, 정조 14년 8월 10일 무오 3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