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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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기독교)
전도서(유대교)
애가(유대교)
<color=#ffffff>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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קהלת (qōheleṯ)[1]
'''그리스어'''
Ἐκκλησιαστής (Ekklēsiastēs)[2]
'''라틴어'''
Liber Ecclesiastes
'''영어'''
Ecclesiastes
'''한자(한국어)'''
傳道書
'''중국어'''
訓導篇
'''일본어'''
コヘレトの言葉
<color=#ffffff> '''기본 정보'''
'''저자'''
솔로몬
'''기록 연대'''
B.C. 931
'''분량'''
12장
1. 개요
2. 특징
2.1. 헛됨의 강조
2.2. 전도서로서의 특징
2.3. 다른 책과의 연관 관계
2.4. 형성 모델
3. 제목의 번역
4. 저자
5. 대중문화에서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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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 1:2 (공동번역)

들을 만한 말을 다 들었을 테지만,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는 말 한마디만 결론으로 하고 싶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전도서''' 12:13 (공동번역)

타나크에 실려있는 책으로, 욥기, 시편, 잠언, 아가와 함께 교회 공통 5대 성문서에 속한다. 잠언 뒤에 오는 책답게 잠언보다도 더욱 심도 깊은 교훈을 주려는 책이다.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용법을 초대형 트럭으로 한 트럭 끼얹고, 거기다가 한국어의 어렵기로 유명한 용언을 도금한 수준의 문장 난이도 때문에 손에 꼽는 고난도 책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개역한글 번역은 간지나는 문체의 향연을 보여주나, 읽는 입장에서는...
랍비 전승에 따르면 솔로몬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고, 저자는 익명의 인물로 자신이 솔로몬임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있다. 특이한 점은 1장에서 솔로몬을 지칭하는 문구와 2장에서 솔로몬을 지칭하는 문구가 다르다는 것이다. 참고로, 랍비 전승에 따르면 솔로몬이 한창 연애질하던 젊은 시절에는 아가서를 쓰고, 나라 다스리느라 머리 싸매던 장년기에는 잠언을 쓰고, 나이 먹어 허무해진 만년에 전도서를 썼다고 하니, 솔로몬 저작설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특징



2.1. 헛됨의 강조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이다.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 1장 1~2절

본서 도입부의 주제는 한마디로 '인생무상(人生無常)'. 그리고 '하느님을 따르는 것을 제외한 인생사의 허무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본서에서 논하는 인생무상은 정말로 험악하기 그지없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전도서 1장 3절

사람이 하늘 아래, 곧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이 결국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묻는다. 많은 돈을 모아도, 많은 지식을 얻어도, 많은 자식을 얻어도 그것이 대관절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되었냐는 것이다.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전도서 1장 4절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와도 땅은 여전히 있고, 그저 인생을 헛되다 말하며 죽을 뿐, 그 땅이 왜 있는지 모른다.

떴다 지는 해는 다시 떴던 곳으로 숨가삐 가고

전도서 1장 5절

해가 뜬 어떤 날 태어나고 해가 뜬 어떤 날 죽는다. 해가 빨리 떴다가 지고, 다시 뜨듯이 세월은 빠르게 흘러가고 남는 것은 헛됨 뿐이다.

남쪽으로 불어 갔다 북쪽으로 돌아 오는 바람은 돌고 돌아 제 자리로 돌아 온다.

전도서 1장 6절

바람이 이리 불고 저리 불다가 빠르게 돌아가 사라지듯이 인생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이 헛되며, 그 일의 동기와 계기 또한 헛되기 그지없다.[3]

웃음이란 얼빠진 짓이라, 향락에 빠져 보아도 별 수가 없었다.

전도서 2장 2절

사람이 웃고 떠들고 희락하여 무엇을 하겠는가?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인생은 죽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죽어 있는 자가 웃고 즐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왕위에 오르는 사람이래야 선왕들이 이미 한 일밖에 더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혜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이며 어리석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했다.

전도서 2장 12절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모든 일은 잊혀지고 말리라.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죽지 않는가!

전도서 2장 16절

저자는 심지어 지혜로운 것도 헛되다고 말한다. 자신도, 자신의 뒤에 올 자들도 그동안 인생이 해온 동일한 헛된 일을 할 것이란 것이다. 결국 지혜로운 자나 우매한 자나 영원히 기억되지 못하고 그들로부터 얻는 교훈 하나 없이 인생은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므로, 지혜자의 죽음과 우매자의 죽음에서 차이를 찾을 수가 없다. 지혜로우나 우매하나 영원한 천국의 삶을 얻지 못하면 그 죽음이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구나!" 하는 탄식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오기 전, 아직 젊었을 때에 너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여라.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기 전, 비가 온 다음에 다시 구름이 몰려오기[4]

전에 그를 기억하여라.

전도서 12장 1~2절

들을 만한 말을 다 들었을 테지만,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는 말 한 마디만 결론으로 하고 싶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

전도서 12장 13절

전도서의 결론. 삶을 아무리 즐겨도 결국 그것으로는 그 사람의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하니 젊었을 때에 하느님을 찾으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분은 하느님을 섬기며 그분에게 순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2.2. '''전도'''서로서의 특징


[5]인생이 가져야 할 소망임을 역설하는 책으로, 문자 그대로 기독교에서는 전도의 시작이 되는 책이다. 물론 후술하듯이 이 책의 전도자는 현자 혹은 섭리를 전달하는 자라는 뜻이지 포교자는 아니므로 이 책의 저술 목적이 포교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6] 겉보기엔 인생무상만을 반복하며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12장의 결론에서 말하듯이 헛된 인생을 지내기 위한 지혜를 저자가 여럿 작성하여 잠언에 담았고, 그러한 잠언을 통해 세상을 살며 헛되지 않은 영원함, 즉 천국의 삶을 추구하라는, 헛된 삶을 사는 것이 운명인 인생들에게 소망을 주는 가르침이 들어있는 책이다.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뜻이 중심이자 핵심이며 그것을 잊고 세상 일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지혜조차도 창조주의 뜻에 따라 사는 삶 앞에서는 헛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2.3. 다른 책과의 연관 관계


저자가 잠언의 저자이다 보니 잠언과의 연결이 매우 깊고, 잠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더욱 어렵고 깊은 가르침을 주는 내용이 가득하다. 대표적으로, 지혜마저도 헛됨을 역설하며 잠언 초반부의 나오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란 것을 또 한 번 강조한다. 아니, 애초에 12장의 마지막 구절은 솔로몬이 여러 잠언을 썼다는 자랑이 적혀있다.
전도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교만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이것은 잠언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기도 하며, 잠언 전체가 이 교만을 하지 말라는 법과 다름없다. 전도서의 가르침대로라면, 성경을 통해 진리를 깨우쳤다 "믿고" 주장한들, 길에서 죽어가는 이를 모른 체하거나, 권력에 부역하여 양심을 속인다거나 언어가 어쨌건, 실제 행동과 드러나는 결과가 모순적이라면 애써 자기최면으로 얻은 진리조차 헛된 것이다. 그리고 잠언과 전도서 모두가 경고하는 이 교만의 결과는 '''죽음'''이다. 이러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교만의 대표적 사례가 성경에 기술되어 있는데,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2.4. 형성 모델


④ 이 책의 모순과 긴장들을 설명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는 이른바 '''인용 이론'''이다. 이 이론의 단초들은 이미 멘델스존M.Mendelssohn (1771)과 히치히F. Hitzig (1847)에게서 발견된다. 레비L. Levy와 고르디스R. Gordis는 이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고, 로핑크[7]

그리고 특히 화이브레이R.N. Whybray와 미쉘은[8] 세분된 논증으로 뒷받침했다.

'''인용 이론'''은 코헬렛이 자기가 비판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견해들을 '''인용'''한다고 상정함으로써 긴장과 모순을 설명한다. 문학비평가들은 흔히 (종교나 지혜와 관련된) 정통적 관점에서의 부연敷衍으로 보는 것을, 인용 이론 주창자들은 대부분 코헬렛이 인용한 반대 견해로 판단하는바, 코헬렛은 이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판·배척한다는 것이다. 인용 이론이 자인하는 난제는, 인용문 대부분이 인용문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아서 식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화이브레이, 미쉘, 그리고 바크하우스는 인용문들을 밝혀내기 위한 세분된 기준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미쉘은 1,3-3,15에는 "의식적으로 통일체로 구상한 논설"이 들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에서 "표명된 근본 입장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은, 다른 견해들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바, 코헬렛은 이것들을 논박하기 위해 인용한다". 미쉘의 분석은 이렇다: 2,13-14a는 인용문, 2,14b-15는 코헬렛의 논평; 7,1-6a는 인용문, 7,6b-10은 논평; 7,11-12는 인용문, 7,13-14는 논평; 7,26.28은 인용문, 7,25.27.29는 논평; 8,2-5는 인용문, 8,6-8은 논평; 10,,8-10은 인용문, 10,11은 논평.

인용 이론은 코헬렛이라는 책의 이해에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두 가지 예만 살펴보자: (a) 7,1a의 언명("명성이 값진 향유보다 낫다")은 9,8b의 촉구("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여라")와 긴장 관계에 있으며, 7,3("근심이 웃음보다 낫다. 얼굴은 애처로워도 마음은 편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은 7,9("마음속으로 성급하게 근심하지 마라. 근심은 어리석은 자들의 품에 자리 잡는다")와 긴장 관계에 있다. 미쉘에 따르면, 7,1-6a의 염세주의적인 인간론적 언명들은 코헬렛의 견해가 아니라, 코헬렛이 인용하고는 7,6b-10에서 비판·일축하는 그의 반대자들의 견해다. (b) 7,26(나는 여자란 죽음보다 쓰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올가미, 그 마음은 그물, 그 손은 굴레다. …")은 9,9("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즐겨라. …")와 긴장 관계에 있다. 로핑크·미쉘·슈빈호르스트쇤베르거·쇼르스A. Schoors에 따르면, 7,26은 코헬렛이 인용한 여성 적대적인 견해이며, 이것을 그는 창조 기사를 재해석하면서(7,29) 일축한다.

⑤ 인용 이론과 연계되는 '''해석이론'''적rezeptionsorientiert 경향은 코헬렛의 긴장과 모순들을 논증 전략의 한 가지 의도적 방식으로, 즉 독자들을 텍스트 이해 구조에 참여시키려는 특별한 방식으로 여긴다(Th. Krüger).

해석이론적 경향과 연계됨으로써 인용 이론은 코헬렛 내부의 긴장과 모순들을 납득이 가도록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롬써 이 책에 대한 '''양식비평적 진단'''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진단은 코헬렛이 전통적 지혜와 비판적 관계에 있다는 관찰을 자체 안에 통합할 수 있다. 이미 레비는 코헬렛의 대화적 요소들을 '키니코스·스토아 학파의 '''디아트리베Diatribe[(가상적) 논전] 어법의 모방'으로 해석했다. 알가이어A. Allgeier도 이 책의 형식에서 디아트리베를 연상한다: "디아트리베에서는 코헬렛과 아주 유사하게 담론과 바론이 교체되며, 또 코헬렛에서처럼 언제 반론이 시작되고 언제 응답이 시작되는지 겉으로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Das Buch des Predigers oder Kohelet'', Born 1925, 11). 최근에는 로핑크와 슈빈호르스트쇤베르거가 이 책의 형식을 디아트리베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시도했다. 이런 담론의 기원은 학교 강의이다. 디아트리베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논의가 하나의 공통된 근본 사상에 부속되어 있다. 이 근본 사상은 흔히 작품 앞머리에서 강령처럼 개진되며, 이어서 일상생활의 다양한 상황에 적용되고 또 기존의 많은 전통적 주제와 모티브를 이용하여 설파된다. 이와 유사하게 코헬렛은 I부(1,3-3,22)에서 행복에 관한 자기 철학의 요강을 제시하며, 그 철학을 II부(6,10-8,17)에서 전철학적 행복관과의 대화를 통해 설명·심화하고, III부(6.10-8,17)에서 반대자들과의 가상의 대화를 통해 옹호하며, IV부(9,1-12,8)에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한다.

-루트거 슈빈호르스트쇤베르거Ludger Schwienhorst-Schönberger, "코헬렛",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2), 663-665쪽[9]

전도서의 형성 모델은 논쟁적인 주제이다. 특히 전도서에 등장하는 문장들의 상호 긴장 관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근래에는 전도서가 '인용 및 반대'의 구조로 쓰였으며, 이를 통해 디아트리베 어법을 펼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인용/반대 구조가 형성된다.

'''명성이 값진 향유보다 낫다'''(7,1a)

'''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여라'''(9,8b)

'''근심이 웃음보다 낫다. 얼굴은 애처로워도 마음은 편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7,3)

'''마음속으로 성급하게 근심하지 마라. 근심은 어리석은 자들의 품에 자리 잡는다'''(7,9)

'''그리하여 나는 여자란 죽음보다 쓰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올가미, 그 마음은 그물'''

'''그 손은 굴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만'''

'''죄인은 그에게 붙잡히고 만다.'''(7,26)

'''태양 아래에서 너의 허무한 모든 날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네 허무한 인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즐겨라.'''

'''이것이 네 인생과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너의 노고에 대한 몫이다.'''(9,9)


3. 제목의 번역


전도서는 시가서에 속하는 책으로 잠언 다음에 등장한다.
개신교 성경과 공동 번역 성서에는 '전도서'라고 되어 있으며, 가톨릭 성경에는 원래 뜻을 존중하기 위해 히브리어 '코헬렛'을 그대로 표기했다. 중국어 성경 이름은 전도서(傳道書)인데 이는 코헬렛을 ‘전도자’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전도자의 뜻에 오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정확히 하기 위해 영어로 중역하면 One who delivers providence, 즉 섭리(도)를 전달하는 자라는 뜻이 된다.
예전의 가톨릭 성경도 ‘전도서’였다. 중국어 성경 이름을 그대로 번역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기독교로 바뀐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최근의 ‘주교회의판’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을 따라 ‘코헬렛’으로 바꿨다. 이것은 그냥 이름 해석하느라 씨름하지 말고 원어를 때려 박자는 발상이었는데, 예를 들어, '보석'이란 필명의 작가를 후대에서 보배로운 돌, 귀한 돌, 디딤돌, 동시대의 배우 정보석이다, 그게 아니라 감옥에서 보증금으로 풀려난 범죄자다... 등 쓸데없이 복잡하게 해석하지 말고 그냥 '보석'이라고 읽으면 된다는 식이다. 작가가 코헬렛이라 적은 건 분명하니 그냥 그렇게 읽자는 것이다.
코헬렛의 어원은 카알(모으다)이다. 동사인 ‘카알’의 분사형태가 ‘코헬렛’이다. 직역하면 ‘모으는, 소집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다. 그렇다면 무엇을 모으고 소집하는 것일까? 문맥으로 보아 코헬렛의 목적이 되는 것은 ‘격언’이거나, 지혜를 구하는 ‘청중’이다. 이렇게 코헬렛은 차츰 ‘모으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모임에서 말하는 자’라는 의미로 발전했다. 히브리어 성경 이름이 ‘코헬렛’으로 정착된 것도 그런 이유다. 성경의 내용을 ‘코헬렛의 설교’로 받아들인 것이 바로 전도서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인 것.
그리스어 성경인 70인역에서는 ‘에끌레시아스테스 Ekklēsiastēs’라 했다. 직역하면 ‘불러 모으는’이란 형용사다. 원형은 에끌레시아 ekklēsia로 ‘소집된 모임’이란 뜻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서는 민중들의 모임인 ‘민회’를 ‘에끌레시아’라 했고 민회가 열린 장소를 ‘아고라 agora’로 불렀다. 후대에는 장소 뿐 아니라 모임 자체도 그렇게 불렀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라는 말 역시 엑끌레시아의 번역이다. ‘부름받고 나온 이들의 모임’이란 의미다.
원어, 그리스어, 한자, 그리고 코헬렛의 각종 해석을 합치면 "섭리를 전달하는 현자(지혜자)가 청중을 에클레시아로 불러 모으는 책" 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코헬렛을 전도자, 전파자, 조언자, 현자, 도인, 설교자, 발언자 등 무엇으로 해석하든 절대 "포교자"라는 뜻은 나오지 않는데, 전도라는 말이 사실상 포교와 동일어로 쓰이는 상황이라 전도서를 종종 포교서(...)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물론 전도서의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뿌리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섭리 전달의 시작과 같은 내용이지만, 이 책은 하느님을 믿으라고 조언할 뿐, 기독교나 유대교 같은 "종교"를 믿으라 포교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4. 저자


근본주의 계열이나 복음주의적 성향의 보수 신학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현대 신학자와 성서비평학자들, 고대근동학 전공자들은 전도서의 실제 저자는 솔로몬이 아닌, 솔로몬보다 훨씬 후대에 쓴 무명의 인물(혹은 현자)이라고 보고 있다. 혹은 솔로몬의 후대의 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도서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이 썼다고 되어 있으나 이스라엘에서 '아들'이라는 것은 '후손'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고, 전도서에서는 '솔로몬'이 썼다는 직접적인 서술이 없기 때문에 솔로몬이 아니라 다른 왕이 썼다고 해도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솔로몬이 무슨 이유로 이런 책을 썼겠느냐다. 못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파란만장하게 살았고 팔자 핀 신앙인이자 잘나가는 왕국의 왕으로서의 대표주자가 솔로몬이었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사람이 어째서 죽기 전에 허무주의자로 돌변했느냐는 것이다.[10]
둘째, 전도서 내부의 구절들은 당대 이스라엘 왕가의 부패를 숨기지 않고 속속들이 비판하는데 역시 왕이 했다기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11] 그리고 전도서의 주 내용은 허무주의가 아니라, 당대 그리스를 시작으로 소아시아에 팽배해 있던 쾌락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사후를 걱정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쾌락주의인데, 결국 그것도 죽을 때가 되면 남는 것이 없으니 허무한 것이라 비판하는 것이다. 전도서에서는 결국 그 해답을 '하느님을 믿으라'고 조언하고 있다.
사실 위의 두 근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서비평학과 고대 근동 역사학에서 중요시되는 문헌학적 근거다. 전도서에 사용되는 어휘나 표현 상당수는 솔로몬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정태현 <성서입문 하> (한님성서연구소, p. 343) 특히 많은 단어는 페르시아어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전도서가 바빌로니아에 의한 유다 정복 이후에 쓰였음을 암시한다. (Seow, C.L. "Ecclesiastes" Coogan, Michael D.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p. 944) 현대의 성서비평학자들은 전도서가 페르시아 시대에 쓰였는지, 헬레니즘 시대에 쓰였는지를 논의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솔로몬 저작설을 내세우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성서비평학이 아닌 보수주의 성서신학 같은 분야에서는 여전히 솔로몬 저작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 외에 전도서가 속한 케투빔의 특성상 꽤 오랫동안 정경으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솔로몬이 짓고 다른 사람이 후대의 언어로 엮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12] 물론 극소수 보수적 성서학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고대 근동학 전반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간혹 솔로몬 저작설을 부정하는 견해를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 정도로만 격하시키는 이들도 있지만, 위에서 언급된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은 성서학에 있어서 가장 최신의 권위를 담고 있는, 학문적으로 현재 가장 권위있는 주석 성서 중 하나이며, 총편집자인 마이클 쿠건은 말할 것도 없고, 저자들 대다수가 가톨릭, 개신교, 유다교를 대표하는 주류 학자들이라는 점 정도만 알아두자.

5. 대중문화에서


'''허무주의'''(?)로 대표되는 해당 내용을 알고 로저 젤라즈니의 중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읽어보면, 주제가 한 방에 이해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카더라(...).

허무주의적인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내용 때문에 60년대에는 미국의 포크 싱어 '피트 시거'가 전도서 3장에 곡을 붙인 〈Turn! Turn! Turn!〉을 발표했고, 밴드 버즈가 이 곡을 록 장르로 리메이크하여 유행시키기도 했다.
영화 플래툰의 첫머리에는

그러니 젊은이들아, 청춘을 즐겨라. 네 청춘이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겨라. 가고 싶은 데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아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재판에 붙이시리라는 것만은 명심하여라.

전도서 11장 9절

가 자막으로 나온다. 전체적인 영화의 전개와 내용을 함축적으로 은유한 단어로서 병사들이 자행하는 범죄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풀 메탈 패닉에 등장하는 베르팡강 클루조의 상관이었던 게일 매컬런 대위가 생전에 클루조에게 전도서의 한 구절을 자주 말해주었다. "그렇다. 사람이란 산 자들과 어울려 지내는 동안 희망이 있다. 그래서 죽은 사자보다 살아 있는 강아지가 낫다고 하는 것이다."(전도서 9장 4절) 무슬림이었던 클루조는 나는 이슬람교도라며 투덜댔지만 메컬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으며 그 뒤 클루조도 이 구절을 좋아하게 되었다.

6. 기타


다소 삐딱한(?) 신자들은 전도서를 보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전도서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솔로몬이 '내가 여자도 여럿 거느리고 돈도 왕창 써보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봤는데 의미없더라. 그러니 하느님만 섬겨라' 이기 때문.
바다와 땅에 대한 언급을 보면 용비어천가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다. 특히 용비어천가, 곧 중국 제왕들과 태조 이성계를 비교하며 진행되는 두 줄의 노래의 결론은 결국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전도서와 비슷하다.[13]
[1] 뜻이 애매하지만 전도자라는 뜻과 함께 지혜자, 곧 현자를 의미한다.[2] (교회로) 불러 모으는 자, 곧 전도자라는 뜻이 된다.[3] 1장 6절은 "바람 불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누군가 바람을 불어넣어 뭔가를 허겁지겁 하다가 그 동기가 어영부영 사라지듯 세상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다.[4] 노화를 상징한다.[5] 주의, 여기서 하느님이 인생을 개떡 같이 창조했다는 생각이 들어갔다간 영지주의로 전락한다.[6] 전도, 즉 섭리를 전한다고 하면 마땅히 따라와야 할 책이 이 전도서이지만, 실상 전도라는 말이 포교로 사용되는 현 시대의 상황에서 전도서가 자칭 "전도"에 사용되는 경우는 단 하나라도 없다 봐도 무방하다. 또한 전도를 하지 않는 유대교의 경전이라는 것만 알아도 알 수 있다.[7] Norbert Lohfink[8] Diethelm Michel [9] 굵은 글씨는 원문에서도 강조된 것이다.[10] 하지만 현대에도 부자들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허무를 느끼는 현상이 많이 알려져 있다. 삼한을 재통일하고 정치적인 이유였지만 하렘을 실현시켰던 고려 태조도 죽기 전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했다.[11] 그런데 이것은 유다 왕조실록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냥 교훈을 주기 위해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당대의 유다 문화였을 수 있다.[12] 실제로 잠언서도 잠언들을 모아 후대에 엮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잠언 자체도 솔로몬이 진짜로 손댄 부분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학자들이 많다. 애초에 성서에 기록된 솔로몬의 행적 자체가 대부분 역사적 사실성을 사회과학적으로 입증하기가 어렵다.[13] 유교적 업적을 많이 세워도 본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위업을 달성해도 그 본 목적은 어디 있느냐가 노래의 핵심이자 결말부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