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세바스토폴
관련항목 : 군가, 군가/해외, 크림 전쟁, 대조국전쟁, 세바스토폴, 크림 공화국, 2014년 크림 위기
Легендарный Севастополь
례겐다르늬 셰바스또빨
작사 : 표트르 그라도프 (Пётр Михайлович Градов, 1925-2003)
작곡 : 바노 무라델리 (Вано Ильич Мурадели, 1908-1970)[1]
1954년에 발표된 된 소련의 군가이다. 1854년 크림 전쟁 당시 연합군의 세바스토폴 포위 100주년 기념과 1944년 세바스토폴 해방 10주년 기념을 위하여 작곡이 되었다. 세바스토폴은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무대가 되어 영웅적 방어를 치뤄낸 공적으로 소련으로부터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은 바가 있다. 소련 붕괴 후 2014년까지는 우크라이나 땅이었지만 러시아가 계속 빌려서 러시아 해군 흑해함대의 모항을 둘 정도로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흑해 함대 군사 위원회 위원이자 소비에트연방영웅인 해군중장 니콜라이 쿨라코프 제독의 요청으로 바노 무라델리가 이 곡을 쓰게 되는데 처음 가사는 알렉산드르 자로프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표트르 그라도프의 가사를 채택한다. 명곡이었던지 흑해 함대와 다뉴브 함대에서 군가로 사용이 되고 있다고 한다.
1954년 10월 17일, 연합군의 세바스토폴 포위가 이루어진지 100주년이 되던 딱 그 날짜에 이 곡이 시에서 연주가 되었는데 아마추어 가수들과 해군 장병들, 지역 주민들까지 입을 모아 이 곡을 다 같이 불렀다고 한다.
1994년 7월 28일, 이 곡은 세바스토폴의 공식적인 시가(市歌)로 지정이 되었으며, 2000년 작사자 표트르 그라도프는 그 공적을 인정 받아 세바스토폴시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작곡자 무라델리는 그 때 이미 명을 다해서 줄 수가 없었다고..
2006년 이 곡이 우크라이나 성가로 번안이 되자 작사, 작곡자의 가족들은 "허락도 없이 원본을 맘대로 우크라이나어로 바꾸고 원가사 존중 따위 안하나여?"라는 폭풍 비판을 날리고 지역 주민도 별로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2014년 크림 위기 후 약 두 달 뒤인 러시아 승리의 날 열병식에서 해군과 크림 공화국 관할 부대의 행진과 함께 행진곡으로 연주되었고, 2015년 승전 70주년 열병식에서도 해군(발트 함대, '''흑해 함대''')의 입장과 함께 연주되었다. 2013년 승리의 날에는 발트 함대 장병들의 등장 순간[2] 에 수병은 우리의 가족이다가 연주되며 우크라이나와의 갈등 같은 면은 없었는데 1년 후부터...
역시 세바스토폴을 노래한 노래가 있으니 바로 세바스토폴 왈츠. 그러나 군가는 아니다. 조금 시대를 옮기면 오스만 투르크에도 세바스토폴 행진곡이 있다. 이건 군가 맞다.
한글자막 표기 영상
러시아 해군 흑해 함대 예술단 공연. 세르게이 쇼이구 장관 등 높으신 분들의 모습도 보인다.
여성 솔로 버전. 해당 공연은 '''크림 공화국 러시아 편입 1주년 콘서트'''이며, 해당 가수는 '''세바스토폴 출신'''인 옐레나 막시모바(Елена Максимова)다.
유로마이단 이전, 축구팀 FC 세바스토폴의 경기에 앞서 진행되는 떼창. 상대는 샤흐타르 도네츠크.[3] 간주 없이 관중들의 떼창으로만 진행되는 후렴구와 관중들 사이에 등장하는 러시아 해군기를 보면 이 동네의 정서가 얼마나 친러적인지 체감할 수 있다. 그리고 합병 전인데도 русских моряков라고 부르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 노래를 우크라이나 사람들 앞에서 불렀다가는... 원래부터 분위기 얼어붙기 딱 좋은 노래이긴 했지만 2014년 이후로는 그냥 노래 자체가 돌직구가 되었기 때문에... '''착한 위키러는 따라하지 마세요!''' 농담이 아니다. 슬라브 민족 특유의 욱하는 다혈질을 생각해본다면 진짜로 죽빵을 맞을 것이다.
그래도 곡 자체가 명곡이고 영웅 도시 세바스토폴을 기리는 의미가 크기에 우크라이나어 개사 버전도 있다. 그러나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구스타프 열차포급의 '''비추 폭격'''을 받았다. '''Українських моряків'''라는 후렴구 가사가 압권.
Легендарный Севастополь
례겐다르늬 셰바스또빨
작사 : 표트르 그라도프 (Пётр Михайлович Градов, 1925-2003)
작곡 : 바노 무라델리 (Вано Ильич Мурадели, 1908-1970)[1]
1. 개요
1954년에 발표된 된 소련의 군가이다. 1854년 크림 전쟁 당시 연합군의 세바스토폴 포위 100주년 기념과 1944년 세바스토폴 해방 10주년 기념을 위하여 작곡이 되었다. 세바스토폴은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무대가 되어 영웅적 방어를 치뤄낸 공적으로 소련으로부터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은 바가 있다. 소련 붕괴 후 2014년까지는 우크라이나 땅이었지만 러시아가 계속 빌려서 러시아 해군 흑해함대의 모항을 둘 정도로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흑해 함대 군사 위원회 위원이자 소비에트연방영웅인 해군중장 니콜라이 쿨라코프 제독의 요청으로 바노 무라델리가 이 곡을 쓰게 되는데 처음 가사는 알렉산드르 자로프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표트르 그라도프의 가사를 채택한다. 명곡이었던지 흑해 함대와 다뉴브 함대에서 군가로 사용이 되고 있다고 한다.
1954년 10월 17일, 연합군의 세바스토폴 포위가 이루어진지 100주년이 되던 딱 그 날짜에 이 곡이 시에서 연주가 되었는데 아마추어 가수들과 해군 장병들, 지역 주민들까지 입을 모아 이 곡을 다 같이 불렀다고 한다.
1994년 7월 28일, 이 곡은 세바스토폴의 공식적인 시가(市歌)로 지정이 되었으며, 2000년 작사자 표트르 그라도프는 그 공적을 인정 받아 세바스토폴시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작곡자 무라델리는 그 때 이미 명을 다해서 줄 수가 없었다고..
2006년 이 곡이 우크라이나 성가로 번안이 되자 작사, 작곡자의 가족들은 "허락도 없이 원본을 맘대로 우크라이나어로 바꾸고 원가사 존중 따위 안하나여?"라는 폭풍 비판을 날리고 지역 주민도 별로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2014년 크림 위기 후 약 두 달 뒤인 러시아 승리의 날 열병식에서 해군과 크림 공화국 관할 부대의 행진과 함께 행진곡으로 연주되었고, 2015년 승전 70주년 열병식에서도 해군(발트 함대, '''흑해 함대''')의 입장과 함께 연주되었다. 2013년 승리의 날에는 발트 함대 장병들의 등장 순간[2] 에 수병은 우리의 가족이다가 연주되며 우크라이나와의 갈등 같은 면은 없었는데 1년 후부터...
역시 세바스토폴을 노래한 노래가 있으니 바로 세바스토폴 왈츠. 그러나 군가는 아니다. 조금 시대를 옮기면 오스만 투르크에도 세바스토폴 행진곡이 있다. 이건 군가 맞다.
한글자막 표기 영상
러시아 해군 흑해 함대 예술단 공연. 세르게이 쇼이구 장관 등 높으신 분들의 모습도 보인다.
여성 솔로 버전. 해당 공연은 '''크림 공화국 러시아 편입 1주년 콘서트'''이며, 해당 가수는 '''세바스토폴 출신'''인 옐레나 막시모바(Елена Максимова)다.
유로마이단 이전, 축구팀 FC 세바스토폴의 경기에 앞서 진행되는 떼창. 상대는 샤흐타르 도네츠크.[3] 간주 없이 관중들의 떼창으로만 진행되는 후렴구와 관중들 사이에 등장하는 러시아 해군기를 보면 이 동네의 정서가 얼마나 친러적인지 체감할 수 있다. 그리고 합병 전인데도 русских моряков라고 부르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 노래를 우크라이나 사람들 앞에서 불렀다가는... 원래부터 분위기 얼어붙기 딱 좋은 노래이긴 했지만 2014년 이후로는 그냥 노래 자체가 돌직구가 되었기 때문에... '''착한 위키러는 따라하지 마세요!''' 농담이 아니다. 슬라브 민족 특유의 욱하는 다혈질을 생각해본다면 진짜로 죽빵을 맞을 것이다.
그래도 곡 자체가 명곡이고 영웅 도시 세바스토폴을 기리는 의미가 크기에 우크라이나어 개사 버전도 있다. 그러나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구스타프 열차포급의 '''비추 폭격'''을 받았다. '''Українських моряків'''라는 후렴구 가사가 압권.
2. 가사
[1] 여담으로 2차대전 종전 직후 '위대한 우정'이라는 오페라를 발표했다가 스탈린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당시 문화계의 최고 권력자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에게 대놓고 까인 바 있다. 하지만 무라델리는 재빨리 자아비판을 하고 높으신 분들의 비위를 맞춰 주면서 그다지 심하게 까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 역풍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하차투리안 같은 다른 작곡가들이 다 뒤집어썼다.[2] 보통 주콥스키-가가린 공군사관학교 소속 공군 장병들 다음으로 등장한다.[3] 다만 얘네는 사태가 악화되며 도네츠크를 포기하고 서부에서 지내고 있다. 삐까번쩍했던 홈구장 돈바스 아레나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현재는 폴란드랑 가까운 리비우(러시아어로는 리보프)에 세들어 사는중이다.[4] 자살공격을 감행했다는 소리다. 실제 대조국전쟁 초기 소련의 전세는 심각한 상태였다. 당시 전투에서 온 시내가 개발살나고 갈 데까지 간 소련군은 군항 사수를 위해 자폭이고 뭐고 가릴 새가 없었다. 수병외투를 벗고 수류탄과 함께 죽음으로 나아갔다는 가사에 대해 좀 더 언급하자면, 이 시기 소련 해군은 일부 해역에서는 아예 보병대를 상설 편제로 편성하지 않다가 이후에 부랴부랴 증강해야 했기 때문에 이 전투의 기록(화)에서는 수병들이 세일러복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구르고 죽어나가는 묘사가 많고 이와 같은 가사도 나온 것이다. 해군 보병대가 확대된 것은 청색 작전 전후 지상군이 하도 부족해진 시기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해군 인원들이 대거 육전대로 편성(흑해/발트 함대 수병들이 먼저 소총을 들었고 그로도 부족하자 저 멀리 극동의 태평양함대 땡보(...)들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태워가며 싸그리 긁어모았다. 연해주에서 펜대 굴리다가 스탈린그라드에 강림한 전설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가 이런 케이스.)되며 육군식 짬뽕 복장, 독일군에게는 '''흑사병'''이라 불린 해군 보병대의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