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
1. 의식
2. 자기의식
2.1. 자기확신의 진리
2.1.1.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주인과 노예
2.1.2. 자기의식의 자유 스토아주의와 회의주의와 불행한 의식
3. 이성
3.1. 이성의 확신과 진리
3.2. 관찰하는 이성
3.2.1. 자연의 관찰
3.2.2. 순수한 상태에서 외적 현실과 관계하는 자기의식의 관찰 논리학적 법칙과 심리학적 법칙
3.2.3. 자기의식이 자신의 직접적인 현실과 맺는 관계, 인상학과 골상학
3.3. 이성적인 자기의식의 자기실현
3.4. 절대적으로 실재하는 개인
4. 정신
5. 종교
6. 절대지
1. 의식
1.1. 감각적 확신, 이것과 사념
"감각적 확신과 이것과 사념에"라는 장에서는 감각적 앎에대한 것이 일반적으로 다루어진다. 감각적 지는 외면상으로 보기에는 풍성한 진리지만 사실은 속이 텅빈 공허한 진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이 종이에 '지금은 낮이다' 라는 말을 써보다고하자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밤이 된다면 '지금은 낮이다'라는 진리는 폐기되고 부정된것 일반으로 남게되는것이다. 즉 시공간에 변화속에서 달라지는 진리의 양상을 볼수 있다. 또 다른 예를들어서 보자면 이것의 또다른 형식인 '여기'를 보자 '여기'를 나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이 진리는 '여기는 나무다'라고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표현하고 나서 뒤돌아본다면 '여기'는 이제 '나무'가 아니라 '여기는 집이다'가 된다. 이렇듯 감각적 확신의 진리는 곧바로 부정되고 폐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정성 가운데도 순수하게 남는것이 있으니 낮이든 밤이든 타자존재와 결부되지 않고 존재하는 순수한 이것의 사념이 존재한다. 즉 부정성을 통해 참다운 보편적 매개자를 찾게되는데 이것이 바로 순수한 '이것' 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가 나무가 아니든 지금이 낮이아니든 간에 이 부정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순수한 보편자로서의 지금과 이것이다.
1.2. 지각 '사물'과 '착각'
감각적 확신을 통해 순수한 보편자가 드러났다. 지각은 자기가 생각하는것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이에 대상에 대한 진리가 본질적인 것이되고 지각은 비본질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대상자체가 사태로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물에는 갖가지 성질이 삼투되어있다. 관찰을 통해서 갖가지 사물의 성질이 드러나게 되는데 여기서는 흰색, 짠맛, 매운맛 등등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성질들은 서로 무관한듯 보이지만 하나의 사물이라는 매개에대해서 '또 역시'라는 변증을 통해 사물 자체 내에 삼투되어있는 성질인 것이다. 여기서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대상을 그자체로 간주하고 탐구해야하는바, 즉 타자를 배제한체 성질을 탐구하고 그자체로서 고찰해야한다. 그러나 고찰 방식에 있어서는 타자를 배제해야하지만 고찰을 표현할때는 다시금 타자를 끌어들일 수 밖에 없는 한에서 이 변증속에서 하나의 사물과 대타존재의 차이점이 무구별적으로 바뀌게된다 즉 대상 자체로서의 독자존재와 대타존재는 통일성을 이루게되고 자기동일화를 이루게 되며 여기서 절대적 보편자가 드러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하나의 사물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 성질만을 탐구하기 위해서 다른 여타의 타자적인 사물과 성질들을 배제해야 하는 바, 그러나 여기서 드러나듯 이 사물의 성질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배제시킨 사물의 성질들을 다시 표현하고 끌어들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대타존재는 타자와 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직접적으로 단순하게 배제된채 다루어진 성질들을 언표하기 위해서는 그것과는 차별성을 언표하기 위해 또 표현하기 위해 자기가 배제시킨 사물들과 성질들을 문맥에 끌어들여야 하는데 여기서 통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1.3. 힘과 오성, 현상과 초감각적 세계
앞에서 등장한 절대적 보편자라는 것을 우리는 인식한다. 절대적 보편자는 의식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여기서 또 다시 부정이 발생하게 된다.
이 절대적 보편의 개념은 다시 두개로 나뉘게 되는데 이 나뉜 두 개념을 통일 시키는 것을 헤겔은 힘이라고 명명한다. 하나는 유발하는 힘이고 하나는 유발되는 힘이다. 그리고 이 두개의 힘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통일된 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헤겔은 오성이라고 명명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초감각적 세계(피안)이 드러나 보이고 이는 다시 제2의 초감각적 세계를 불러 일으킨다. 두개의 초감각적 세계는 다시 부정을 일으키고 이 부정을 통해서 처음 출반한 현상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고 이 무한한 자기동일화의 과정을 거쳐서 자기 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여기서 힘이란 두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유발하는힘이고 하나는 유발되는 힘이나 이 유발하는 힘이 인력이며 유발되는 힘은 본디힘으로서의 사물이다. 헤겔은 이 양자를 종합해서 인식하는 것이 바로 자연과학적 인식인 우리의 오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이 발생하게되는데 배후헤 있는 초감각적 세계가 발생하게 되고 이 초감각적 세계는 다시 부정을 일으켜 제2의 초감각적 세계가 발생하게 된다. 이 부정을 통해서 다시 처음 출발한 현상계로 반성하게 되고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됨에 따라 자기동일화 과정을 거쳐서 자기의식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반성의 이유는 초감각적 세계와 현상계가 상이하지 않음을 근거로한다.하나의 것이 다른 것과 다르지만 개념적으로는 통일되어 있고 이 통일성을 오성은 인식한다는 것이다.
2. 자기의식
2.1. 자기확신의 진리
진리를 찾아 떠난 여정 속에서 감각 지각 힘과 오성에 의해 자기 의식에 도달한다. 우리가 보편적 진리를 찾아 떠난 여정은 우리 의식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재미난 것이 보편적인 진리란 다른 어떤것과 매개되지 않은 채로 존재해야하는데, 그 진리라고 찾아 떤나 것이 우리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식은 출현하고 헤겔은 이를 진리의 본고장으로 들어선다고 말한다. 이 본고장에서 자아와 자기의식은 분열되고 그것을 통일 시키는 운동을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통일이 두번 이루어진다. 첫번째 통일은 자아와 자기의식이 같은 것임을 알게 되어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는 통일이며 두번째 통일은 개개의 존재를 너머 류를 이루는 통일에 다다른다고 한다. 이때 자기의식은 두개가 된다. 처음의 자기의식과 류안에서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헤겔은 의식이 행하는 행위들을 초라하다고 논한다. 이 초라함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피안의 힘을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헤겔이 제시하는 것은 현실의 행위자체가 존재자체가 되고 존재자체가 행위자체가 될 때 개별의식에게는 이성의 표상이 떠오른다고 한다.
2.1.1.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주인과 노예
주인과 노예가 존재한다. 주인은 물성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는 존재이며 노에는 물성에 종속된 존재이며 부자유를 누리는 존재이다. 여기서 주인과 노예는 상호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주인만이 물성에 종속된 노예에 의해서 긍정 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모순이 등장한다 주인은 자신이 인정하지 않은 노예에 의해서만 인정을 받기 때문에 모순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상호적인 투쟁상태로 돌입하나 이 투쟁상태가 결국 모순을 만들어 노예에게 인정받는 주인의 위치를 폐기하고 부정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노예적인 것만이 남게 되는데 이 노예는 타자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즉 노예로서의 일을 그만두고 자기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투쟁을 해도 인정을 못받는 주인과는 다르게 노예는 자기자신을 번혁시킬 수 있는 가능태를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이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사물에 종속된 노동만을 하는 입장인 노예를 인정하면 그와는 반정립되어 있는 자신의 위치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예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주인의 입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인의 절대권력으로부터 노예는 공포를 느끼게 되고 공포로부터 지혜가 발생하게 되며 자립성을 자각하게 된다. 이 자각을 통한 자립성으로부터 노예는 사물을 가공하는 지혜를 통해 자립하게 되며 주인에게 종속된 자신의 위치를 부정하게 되며 자유로운 위치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주인은 노예에게 인정받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노예는 노동을한다. 즉 주체는 자신인 것이다. 주인은 노예에게 인정받는 위치이며 그로 인해 절대권력은 폐기되고 파멸될 위치에 있다. 그리고 노예처럼 노동을 통해 지혜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주체로 발로하는 것은 바로 노예된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인 것이다.
2.1.2. 자기의식의 자유 스토아주의와 회의주의와 불행한 의식
스토아주의는 세계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기 내적인 것에만 몰두하는 이성#s-1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계 내부에만 칩거함으로써 '주인과 노예의 변증' 같은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을 지닌다. 즉 어떤 것에고 구속되지 않고 오로지 자기에만 몰두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 스토아주의에서는 특정 사물, 특정 생활에 매여 있는 의식, 감정 그 특정한 대상에 대한 욕구 등으로 나타나는 온갖 구별이나 또는 그 목적을 자기의 의식이 정립했든지 타인의 의식이 정립했든지 간에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자아 자체에서 직접 솟구쳐 나오는 사유 속에서의 구별만이 사실상 의미 있는것이 된다. 즉 자기 자신의 이성적 사유에만 몰두하는 것이, 다시 말해 단순한 사상의 본질로 돌아가 계속 칩거해 있는 것이 스토아주의이다. 회의주의는 스토아주의가 개념적으로만 했던 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시도한다. 회의주의는 양자적으로 분리된 주인과 노예의 상황을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려서 통일시키지 않으려는 사태를 보인다. 결국 여기에 반한 불행한 의식이 등장하여 양자를 합쳐놓는 것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이 양자를 합쳐놓은 것은 억지력에 의한 것뿐이라 승리감을 만끽하자마자 바로 패배를 하는 상황이 당도한다. 이 양자는 통일된 상태까지 이른 것은 아니다.
3. 이성
3.1. 이성의 확신과 진리
여기서 헤겔은 공허한 관념론과 절대적 경험론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칸트의 범주론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공허한 관념론은 의식이야말로 진리라고 여기며 의식에 대해서 드러나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헤겔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성이 온갖 실재라고만 주장하는 역시 순수한 단정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 경우에 이성은 모든 의식의 자기 의식에 호소하며 자아는 자아이다 ich ist ich 또는 나의 대상과 본질은 이룬느 것은 자아이다 라며 주장하며 어떤 의식도 이것을 부정할수 없다는 공허한 관념론을 비판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진리를 내세운다면 이와는 반대되는 나와 대치하고 있는 것은 나에게 타자이며 이런 자아의 타자가 나의 대상이며 본질이다. 라는 확신 또는 자아가 나의 대상이며 본질인 것은 나의 타자로부터 발을 뺴고 그와 나란히 또 하나의 현실로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역시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칸트의 범주론을 비판하며 오직 사유하는 정신만이 통일된 상태를 이루고 있는데 여기에 빈곤한 관념론은 물 자체를 대치시킨다고 한다.그는 범주속에 일정한 종별이 존재하게 하는 칸트의 범주론을 비판하며 이러한 범주로서의 구별은 그 자체가 구별과도 같지 않은 구별이라고 단정지으며 칸트의 범주론을 비판한다. 다수의 범주는 순수한 범주와 대치되는 것은 아니고 그 자체가 유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다수의 범주는 이미 그자체가 애매한 것이다. 다수의 범주는 그 수효가 많기 때문에 사실상 순수한 범주와 모순되므로 순수한 통일체인 범주는 다수성을 스스로 폐기하고 구별에대한 부정적 통일체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순수한 통일은 부정적 통일인 이상 예의 첫 번째 직접적인 순수통일 자체와 마찬가지로 구별 그 자체를 자기 밖으로 배제해버리고 개별성으로의 범주가 된다. 다시말해 그것은 배타적인 의식의 범주로서 의식에 대해 하나의 타자가 존재하는 것같은 상황에서 하나의 새로운 범주가 된다.
절대적 경험론은 사물에 대하여 사물이란 감각과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언함으로서 감각적인 악무한 속에 빠져들게 되고 만다. 즉 그들은 세계의 상을 지레짐작하고 단언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관념론 역시 이와 동일하게 순수이성적임으로 말할 것도 없이 오류이다 둘다 한 쪽 측면에 몰두하는 나머지 이성은 이렇다 할만한 작업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없는 악무한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3.2. 관찰하는 이성
이성이란 곧 존재는 곧 자기것임을 직관하는 것이며 대상을 타자 자체로 볼 뿐만 아니라 대상 자체가 곧 자기 자신임을 아는 의식이다. 곧 이성이란 온갖 실재란 것이다. 이성은 이전에 자각이나 감각수준에 머물러 있던 의식을 극복하는 가운에 이성의 지로서 발돋움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성이 지향하는 바는 사념이나 지각의 대상이었던 사물을 개념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즉 사물을 사물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사물의 의식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일이다. 이성이 세계로서의 타자를 탐구하는 것은 타자에게서 바로 자기 자신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이성은 결국 자기 자신의 무한성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성이 관찰하는 의식으로서 사물에 다가갈 때 이성은 사물의 진리가 오직 개념으로서만 얻어진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관찰하는 의식에게 사물로 보이는 것은 사실상 의식 그 자체이다. 의식이 전개하는 운동의 결과로서 마침내 의식의 참모습이 의식 자체에게 자각되는 것이다.
3.2.1. 자연의 관찰
관찰하는 이성의 파트는 기술일반, 징표, 법칙, 유기체의 관찰, 목적론, 내면과 외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차례대로 해쳐나가도록 하자
기술)
기술하는 행위는 한갓된 자기동일성에 대해서 무미건조하게 언표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즉 사상이 결여된 의식이 관찰과 경험이야말로 진리의 원천이라고 언명할때 오감 따위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을 관찰하는 것, 여기서 말하는 단순하 지각작용은 관찰이라고도 할 수없는 초라한 것이다. 즉 연필과 지우개가 함께 있다는 감각의 작용이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보편적인 성질의 것 즉 이성으로서의 개념적인 것을 포착해야하기 때문에 이러한 지각작용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찰작용에서 한계를 느끼게 되고 사상으로서 발전해야할 필연성을 느끼는 것이다.
징표)
헤겔은 여기서 징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표상이나 상징과도 합치하는 부분이 일결 존재한다. 사물을 관찰하고지각하는 데에는 단순한 지각작용이나 감각작용보다는 이러한 징표가 더욱더 중요한 것인데. 예를 들어 빨간 사과는 빨간색이고 구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작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과에 대응하는 징표이며 개념인 것이다. 즉 감각적인 대상의 감각성을 추상해버릴 수 있는 한갓된 징표가 독자존재로서 비본질적인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로소 작용하는 것이다. 즉 징표가 되는 보편적인 성질의 것이 보편적이지 못한 감각적 소여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칙)
하지만 우리의 이성은 이러한 징표나 기술행위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인 법칙과 존재에 더욱 더 집착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해결점으로는 중력 법칙을 시험하기 위해 각자의 돌을 떨어드려보고 개연성을 유추하는 방법론이 있는데 각기의 돌을 떨어뜨려서 이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돌을 낙하실험에 동원할 필요는 없고 몇개의 돌을 떨어뜨려 개연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그만 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추성은 진리를 말할수없다 아무리 큰 개연성이라 하더라도 진리의 비하면 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개념으로서의 법칙을 정립하고 그를 느끼게 됨으로서 법칙의 필연성을 실감하는 것이다. 여기서 법칙은 처음에는 감각물에 뒤섞인 불순한 것으로 나탄나다. 그러나 이 감각물에 뒤섞인 법칙은 탐구를 통해서 불순물이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기에 이르게 되는데 술어는 주어에서 폐기되는 법칙을 겪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낙하가 진리인 것은 돌이 무겔르 가지기 때문이며 지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음전기는 수지전기로 양전기는 유리전기로 불려왔지만 이러한 술어는 중요하지 않게되고 이제 남는것은 단순히 음전기와 양전기의 개념상의 내용일 뿐이다. 즉 이것을 법으로 나타내 보자면
대한 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본질만을 포착하자면 '~은 , ~이다' 만이 남게된다. 즉 주어에서 술어는 분리됨으로서 감각적인 불순물은 추상되고 마는 것이다.
유기체의 관찰)
탐구의 과정을 단순한 개념의 모습으로 갖추고 있는 대상이 ‘유기체’이다. 유기체는 절대적 유동성을 띠고 있으며, 그 속에서는 단지 타자에 대한관계로서나 있음직한 그러한 성질(이 성질은 무기물의 본질이다)은 해체되어 버진다. 무기물은 타자와 구별되는 성질을 그의 본질로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어떤 다른 것과 함께할 때라야만 비로소 개념의 요소가 제대로 갖추어지는데, (무기물은) 운동을 시작하면 스스로를 상실한다. 하지만 유기체에서는 타자와 어울릴 수 있는 온갖 성질이 단순한 유기적 통일체로 결합되어 있어서 그 가운데 어떤 하나(무기물의 성질)가 홀로 자유롭게 타자와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 일은 없다. 유기체는 타자와 관계하는 가운데 자기를 유지하는 그런 존재이다.
기체와 무기적 자연(공기, 물, 흙, 지대, 기후 등)의 관계는 엄격히 법칙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계는 내용면으로 볼 때 유기체의 모든 영역을 총망라한 것이 아니며, 관계되는 요소 각각이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어떤 필연성을 나타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산의 개념 속에는 알칼리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래서 필연적이지만, 두터운 모피와 북쪽 지방, 어류의 생태와 물, 그리고 조류의 생태와 공기의 관계는 유연한 것이어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법칙의 필연성이라고 언급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본질에 어울리는 내적인 필연성으로 이해될 만한 것이 아닌 경우에는 현실세계 속에서 관찰되지 않거나 이와 어긋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실재 세계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필연성은 목적론이라 불리는데, 사실 (개념과 실재?의 관계에서) 이러한 목적론적인 관계는 관계되는 것의 외부에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법칙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이다. 이러한 사고(목적론적인 사고)는 자연의 필연성에서 이탈하여 자연을 팽개치고 멋대로 활개치는 사고이다.
내면과 외면)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유기체는 두개의 것으로 연관되어 나타난다 하나는 목적개념 즉 내면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 즉 외면이다. 헤겔은 이것을 외면은 내면의 표현이다라는 말로 언표하고 있다.
내면. 내면은 유기체의 단일한 혼으로서 보편적인 힘과 목적개념을 지니고 있다. 유동적이며 현실의 행위나 운동이 힘으로서 스러저가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외면은 정지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내면과 외면을 관계짓는 법칙은 그 내용을 한편으로 보편적인 요소나 단일한 본질로 표현하며, 다른 한편으로 실현된 본질이나 형태로서 표현한다.
유기체는 감수성 반응성 재생능력이라는 세가지 범주로 구분된다. 감수성은 유기체의 자기복귀임과 동시에 외부에 탄력적으로 반응하는 유기체의 실상이고 재생능력은 감수성과 반응성이 전체적으로 표현되는 자체 내로 복귀하는 전체적인 활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자기보존 일반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재생성이란 유기체의 형식적 개념인 감수성을 나타낸다고도 하겠다. 본디 재생성은 유기체의 현실적 개념이자 전체의 개념이다. 이때 유기체로서는 자신의 각 부분을 재새함으로써 자기에게 되돌아가고 유로서는 개체의 재생을 통해 자기에게 되돌아간다. 여기서 감수성은 신경조직으로 반응성은 근육조직으로 재생성은 개채와 유의 보존기관인 내장으로 현존한다. (감수성은 수동적, 반응력은 능동적, 재생능력은 수동과 능동을 총합한 유기체의 전체를 의미한다.-임석진) 그러므로 결국 감수성과 반응력은 질적인 대립을 하게되고 이 대립은 재생능력을 통해서 지양되는 것이다.
유기체의 세요소 감수성 반응력 재생능력은 전체에 삼투된채 깃들어 있지만 이것을 사물을 고찰할 때 처럼 서로 따로따로 때어내어 다룰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세요소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개념과 운동의 요소를 이룰 때에만 비로소 유기체의 추상적인 이념은 이 세요소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기체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이 세갈래를 분리시켜 해부학에서처럼 고찰하는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분할로서 고찰되면 각 부분들은 더 이상 과정일수가 없는 것이다. 해부학에서 다루는 현실은 유기체의 이념을 드러내지 못한다. 오직 과정으로서의 유기체가 참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유기체를 다루는 해부학도 그러한 과정에서만 참다운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기체는 법칙이라는 표상아래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법칙은 대립을 정지해 있는 양면으로 파악하고 표현하려 하며, 이 양면에서 양자의 상호관계를 이룬느 일정한 성질을 파악하고 표현하려 한다. 사실 이 양면은 어디까지나 관계적인 것이다. . 보편적인 성질의 내면과 정지된 형태를 지닌 부분으로 이루어진 외면이 저마다 법칙의 양면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렇게 되면 양면이 분리되어 유기체로서의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법칙이라는 표상의 기본은 그 양면이 각기 독자적으로 존립하면서 서로에게 부합되는 이중의 성질을 띠고 관계한다는 것이지만, 이와는 달리 유기체의 내면과 외면은 온갖 특수한 성질을 해소시키면서 보편성을 일구어내는 단일한 힘이자 그런 해소의 운동 그 자체인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유기체의 외면이란 무엇이란 것이 남는다. 외면이란 그 자체만 보면 존재라는 장위에 온갖 형태를 띠고 분포되어있는 생명의 조직이면서 동시에 그 본질상 타자에 대해 있는 유기적 본질의 존재. 즉 자기 독자성을 간직한 대상적 존재다. 이때 타자란 일단은 유기체의 외부에 이는 무기적 자연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유기체는 어디까지나 독자적으로 존재하므로 무기적 자연에 대해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무기물은 주변에 것과 얼마나 조화하며 자신의 것을 잘 보존하고 유지할 수 잇는가에 달려있다. 무기물은 외계로서 유기물은 이것을 매개적 중심으로 포섭하는 유기적 실체이다.
현실의 형태를 띠고 발전해가는 개체, 그리고 유기적인 보편자인 유, 이 개체와 유 사이에는 보편적인 유를 여러 갈래로 분류한 종(種)이 개재한다. 현실존재는 보편적인 유의 부정성인데, 따라서 현실존재는 존재하는 형태의 온갖 부분을 따라서 경과하는 과정의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보편성이 종으로 나타날 때는 형식적인 보편성으로서이다. 형식적인 보편성이 아닌 참다운 보편성이 개체에 나타나면 이 개체는 살아있는 개체가 되고, 바로 그 내면의 힘에 의하여 종으로서의 한정성을 넘어서게 된다.
유기체의 세계는 삼중으로 연결된 추리적 형식을 띤다. 한쪽의 극은 보편적인 유의 형식을 지니는 보편적 생명이고, 다른 한쪽의 극은 개별적인개체 또는 보편적인 개체로서의 생명이다. 중심을 이루는 것은 양극의 합성물로서 한쪽으로부터는 종의 형태를 띤 한정된 보편적 존재가, 다른쪽으로부터는 본래의 개별적인 개체가 중심부로 합류하는 모습을 띤다. 이 매개하는 중간자는 현실의 운동 속에서 보편적인 생명의 본성을 표현하며 체계적인 발전의 과정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의식은 그런 방향으로 보편적인 정신과 그것의 개별 형태인 감각적 의식 사이에 매개하는 중간자를 마련해놓고, 온갖 의식형태의 체계를 전체적으로 질서 있게 하는 정신의 생명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체계가 바로 세계사로 대상화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유기체에게는 역사가 없다. 아직 우연성, 우연적 운동이라는 한계 속에 있을 따름이다.
3.2.2. 순수한 상태에서 외적 현실과 관계하는 자기의식의 관찰 논리학적 법칙과 심리학적 법칙
이제 관찰하는 의식이 자기에게 되돌아와 자유로운 개념으로서 현실적 개념에 눈을 돌릴 때 발견하는 것은 사유의 법칙이다. 사유를 떠맡는 개별자의 운동은 완전히 단일한 세계로 되돌아가는 추상적인 부정의 운동으로서 그 법칙은 실재하는 세계 바깥에 있다. 그 법칙이 아무런 실재성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그 법칙에 아무런 진리가 포함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유는 그 자체로 보편적인 것이며, 존재와 직접 부딪히면서 온갖 실재를 자기 것으로 삼는 지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유의 법칙이란 절대적인 개념을 나타내면서 형식의 본질과 사물의 본질을 불가분의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다.또한 그 개념의 내용은 형식과 모순되거나 형식과 분리된 것도 아니며, 오히려 본질상 형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은 오직 만물이 순수한 요소로 분화되어가는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식을 결여한 내용에 지나지 않는 것은 절대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없다. 사유법칙의진실은 다음과 같다: 개개의 법칙이 소멸되어가는 와중에서, 진리는 오직 사유운동의 전체를 떠안고 있는 지 그 자체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유의 부정적 통일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자각적인 대자존재이고 개체의 원리이기도 한데, 이것이 실현되면 행동하는 의식이 된다. 그리하여 관찰하는 의식은 당연히 법칙의 실재성을 맡아서 보증하는 행동하는 의식 쪽으로 이끌린다. 그러나 이러한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찰하는 의식에게 사유의 법칙은 어디까지나 한 쪽편에 가만히 있고, 그 반대편에 행동하는 의식이 법칙과는 또 다른 존재로서 새로운 대상으로 나타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결국 이 행동하는 의식은 타자존재를 부정하며 이 부정하는 자기의 힘을 직관하는 가운데 자립적인 현실 존재가 되는 것이다.
정신은 한편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기존의 관습 풍속 사고 방식에 적응하는 자세로서 현실세계에 확고한위치를 차지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대한 주체적인 자세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경향이나 정열에 따라 특별히 값어치 있는 것만을 현실에서 끌어내어 대상을 자기에 적응하도록 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개별존재로서의 자기가 부정되며 후자의 경우에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자기가 부정된다. 기존의 세계에 적어도 부분적인 수정성을 가하려는 경우 이것은 현실을 부정하며 대립하는 것이되고 이것이 곧 범죄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관찰하는 심리학은 개인이 나타내는 행동양식을 자신의 특수한 이론으로 이론화 시킨다. 이때 개인에게서는 다종다양한 능력, 경향,정열 등이 발견된다. 이때 수집된 요소를 다룰 때 자기의식이 통일돼 있다는 점도 충분히 감지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심라학은 이때 정신의 보따리속에 그토록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이 우연히 공존하고 있다는 것,더욱이 이들이 정지해 있는 죽은 사물로서가 아니라 불안정한 운동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 법칙의 내용을 이루는 무기적인 본성, 그가 놓인 환경, 처지, 관습, 풍속, 종교 등등이 있다. 이런 주변환경을 배경으로 진 면모가 파악된다. 여기에는 특정한 내용뿐만아니라 보편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동시에 현존하고 있다. 이 현존하는 것은 눈앞에 있는 관찰의 대상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형식 속에도 표현된다. 그런데 이 양면 사이의 이러한 관게의 법칙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환경이 개인에게 어떤 작용의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가이다. 아무 반항도 없이 풍속이나 관습에 눈앞에 현존하는 보편적인 것에 합류해 순응해 살아가는 보편적인 존재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보편성과 대립하여 오히려 이를 배척하거나 아예 개별자로서의 자기 위치에 머무르며 그것을 무시한채 영향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대립하는 존재이기도 한것이다. 만일 그러한 환경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개별자는 그런 개별자로 거듭나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개인은 선택이 가능한 존재임으로 그런 환경에 영향을 받을건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3.2.3. 자기의식이 자신의 직접적인 현실과 맺는 관계, 인상학과 골상학
심리학적인 관찰은 자기의식과 그것이 대립하는 현실세계의 관계에 대하여 아무런 법칙도 찾앙내지 못한 채 양자가 서로 무관한 위치에 있음을 알아 차리므로 결국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으로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면서 대자존재와 즉자존재의 대립을 절대적 관계로 맺어 주어 없애 버린느 실재적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규명하는 데로 되돌아간다. 이제 그러한 개인이 관찰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개인은 본원적, 즉자적이면서 또한 자각적, 대자적인 존재이다. 개인은 자각적인 존재로서 자유로이 행동할 뿐만 아니라 또한 본래 타고난 대로의,즉근원적인 한정된 존재이기도 하다. 이 양면의 관계는 개인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의식의 운동과 고정된 존재로 나타나는 현실 사이의대립적인 이중의 양상이 개인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타나나는 것이다. 앞에서 관찰되었던 보편적인 현실과 특수한 현실은 모두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지만, 이제 여기서는 개인의 현실로서의 타고난 육체가 나타나면서 행위가 자아내는 표현도 바로 육체 속에 나타난다. 특정한 개인 전체가 그대로 관찰의 대상이 되고 대립하는 양극이 제각기 개인의 전체에 걸쳐 있는 것이다. 외면의 전체를 이루는 것은 근원적 존재인 타고난 육체만으로 그치지 않고 내면의 활동에서 비롯된 후천적인 육체의 형태도 여기에 가미된다. 육체는 생래적인 면과 후천적인 존재의 통일로서 개체의 독자성에 삼투된 현실존재이다.
외면은 먼저 한낱 기관으로서 내면을 표상하는 것이다. 이때 기관 속에 나타나는 내면은 활동 그 자체이다. 말하는 입이나 노동하는 손 여기에 발 까지 더하면 모두가 일을 실현하고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여기에는 행위 그자체 또는 내면 그 자체가 간직 되어 있다. 그러나 기관을 통하여 내면이 얻는 외면적인 결과는 개인으로부터 분리된 현실적인 결과물이다. 말이나 노동이 외화된다면 더이상 개인은 자기를 그대로 보존하거나 소유할 수 없으며 여기서는 내면이 완전히 외화되어 타자의 손안에 넘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외면적인 결과는 내면을 과도하게 표현한다고 할 수도 잇껫고 반대로 표현이 미흡하다고 할수도 잇껫다. 외면과 내면의 대립이 완전히 소멸되면 외면이 단지 내면의 표현인데 그치지 않고 아예 내면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각기 내면의 표현이라고 해서 외면적인 것은 결합한다고 해서 새로운 법칙이 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점성술이나 수사학이 그러하다. 그리고 또 다른 예로는 빨래를 걷는 주부의 예와 동일하다. 따라서 이러한 여타의 것들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외면과 외면을 결합한것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는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외면 끼리의 결합을 두고서 내면과의 관계가 있다고 하거나 외면과 외면과의 결합을 두고서 이것이 새로운 지식이라고 우기는 사념에 지나지 않는다. 골상학과 인상학은 아무러 관련이 없는 내면의 표현인 외면을 실제적인 측면과 대응시켜 예를들면 여기에 나있는 혹은 살인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대응시키며 그 사람을 판단하지만 이러한 아무 상관없는 외면 끼리의 결합은 아무런 것도 나타내지 못하는 그릇된 지식에 불과한것이다.
인간의 진실한 존재는 오히려 행위 속에 있다. 이러한 외면의 결과가아니라 오직 행위 속에서만 진실이 성립할 수 있는 셈이다. 행위란 상정된 것을 두 가지 의미에서 극복할 수 있다. 먼저 정디해 있는 육체적 존재로서 상정된 것이 극복된다. 즉 행동의 와중에 있는 개인은 오직 존재를 극복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고 할 그런 부정의 힘을 지닌 존재이다. 다음으로 행위는 자기의식적인 개인에 관한 한, 당치도 않은 무한정한 사념 속에서 넋두리를 일삼는 데 대한 종지부를 찍는다. 행위가 달성되면 그런 악무한으로 치닫는 사념은 말살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