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기
[image]
인민해방군 군복이 바뀐 후에 새로운 인민해방군 육군 예복을 입은 모습.
(정체)趙南起; (간체)赵南起 [([[한어병음]])Zhào nán qǐ; 자오난치] (1927년 ~ 2018년)
1. 개요
본관은 풍양이다. 일제강점기 시기 조선 출신인 중국의 군인.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사실상 최고위 계급인 상장까지 진급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조선족으로는 가장 최고위직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또한 조남기는 '''외국군대에서 가장 출세한 한국계'''인사로도 볼 수 있다. 한반도의 해방전에는 구 일본 육군의 홍사익 중장, 중화민국군의 김홍일 육군중장, 미군의 김영옥 육군대령도 있지만 대장급까지 오른 사람은 조남기 상장이 유일하다. 중국에도 원수와 대장 직함이 존재하긴 하지만 1955년 이후 아무도 임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상장이 최고위 계급이 되었다. 국가주석은 통수권을 지니지만 군사 계급을 받지는 않는다. 북한처럼 대원수를 뿌리고 다니지는 않는다. 덧붙여, 중국에서 비 한족(漢族) 출신으로 최초로 상장에 진급한 인물은 몽골족 울란후(Ulanhu; 1906년 ~ 1988년)로, 1955년에 상장 계급이 수여됐다. 흥미롭게도 그는 1983년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자리에도 올랐는데, 이로서 소수민족으로는 가장 최고위직까지 올라간 인물이 된다.[2]
2. 생애
1927년 4월 20일에 충청북도 청주군 강내면 태성리(現 청주시 흥덕구)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에 풍양 조씨 집성촌이 있으며, 조남기 역시 풍양 조씨이다. 1939년에 중국으로 이주했으며 1945년부터 만주국이 망해 치안 공백이 나타나자 주변의 청년들을 모아 자위대[3] 를 결성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였고 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공산당 간부와 군인의 구분이 상당히 가라로 진행됐고 1947년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지원군 작전처 장교로 펑더화이의 통역을 맡았고, 러시아어 통역을 맡고있던 마오안잉과 같은 숙소에서 지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당시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이 귀국을 권유했으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한국에 왔을때 직접 "김일성 중심의 수직적인 북한군 체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다." 라고 밝혔다. 다만 김일성 자신도 평양에서 만주로 이민갔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조선족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조남기와 비슷한 처지이긴 했던지라 친분은 유지되었던 듯 하며, 이후 문화대혁명때 숙청되었을 때도 넌지시 북한으로 귀환하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덥썩 북한에 귀화했다면 역시...
1955년에 소교로 진급했고 1958년에 중교, 1962년에 상교로 진급했다. 1962년부터 중국군에서 계급이 폐지되면서 보직으로만 근무했다. 연변에서 근무하던 중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마오쩌둥을 비판하다 도리어 실각당한 펑더화이와도 인연이 있었던 조남기는, 대부분의 비 린뱌오파 장교들 처럼 보직에서 잘리고 사상재교육소로 끌려가서 모진 고생을 겪다가 1973년에 복직한다.
1988년 중국군이 계급을 부활시키자 상장 계급을 받는다. 이미 상장급 보직이었던 총후근부의 지휘관인 후근부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군수사령부가 합동참모본부와 동격인 셈이다. 1992년에 이임하면서 중국인민해방군군사과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원장을 지냈다.
1995년에 군에서 전역했고 1998년에 제9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의장이 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국회 부의장에 상당하는 직책이다. 2003년에 은퇴하였고, 2000년과 2004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2018년 6월 17일, 베이징에서 타계하였다는 기사가 나왔다. 향년 91세. 장례식에는 시진핑 국가주석,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을 비롯해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3. 비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닌 중국 공산당을 선택하여 종국에는 중공군으로 한국 전쟁 및 각종 전쟁에 참전한 것을 문제라서 조남기를 민족반역자의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주장에 내놓는 변명이 있다. 중공군 내 조선족 지원자들 중 상당수는 '일본군 잡으러 간다'라는 선전을 믿고 참전하였다.[4] 광복 이후엔 일제가 물러갔음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어떤 연락도 취하지 않은 체 중공군에게 의지하고 남아버렸으니, 종국에는 속아버린 셈이 되었다. 그래서 민족반역자는 물론 주인 의식도 함께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3.1. 반론
반론도 있다. 오늘날의 조선족 공동체는 한국전쟁 참전을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민족공동체를 팔아 일신의 안녕을 도모한 민족반역자 범주에 조남기를 포함한 조선족 참전자들을 끼워넣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다. 그래서 소괄적 적용해으로 한국전쟁의 배경과 남침, 북한군 및 중국군의 전쟁범죄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굳이 민족반역자 운운하지 않고 중국군 참전을 비판하기에는 충분하다는 의견이 있다.
4. 여담
조남기의 한국 방문 당시 민주당 장성민 의원이 주장하길 노무현 대통령과 조 부의장이 만난 자리에서, 노 대통령이 조선족들이 이중국적을 가질 수 있도록 중국 정부에 말해달라고 부탁했다라는 주장을 했으며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 그런 방침은 민족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기에 조남기 부주석은 상당히 언짢아 했다고 주장했다. 장 의원은 나아가서 노 대통령의 발언이 중국이 동북공정에 착수하는 원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관련기사
설사 위 에피소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도 어려울뿐더러 실제 있었던 일이라도 동북공정이 원인되었다는 게 좀 억지스러운게 동북공정을 시작하기 이전에 중국정부는 티베트나 위구르와 같이 현 중국 영토 내 소수민족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저것과 무관하게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장성민은 이후 보수성향 종편 TV조선에서 '시사탱크'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5.18에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방송을 하는등 여러 논란의 중심이 되는 사람으로, 당시 잔류민주당계와 열린우리당이 원수지간이어서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꺼낸 말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외국 동포에 대한 시선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조남기가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정권의 고위층에 올라간건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중국에 충성을 다하였기 때문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니, 민족전체를 위해, 반대편 입장에서 말한다면 한국을 위해, 일해줄 것으로 기대하는건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에서 출세한 여러 한국계 정, 관계 고위층 인사(빅터 차나 성 킴 등)들도 당연히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움직이므로, 이들이 미국 정부에서 한국의 이익을 위해 힘써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현실 감각이 전혀 없는 생각이다. 그래도 조남기 본인은 한국에서 남동생이 살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동포애(?)가 작용해서 한국과 교류에 신경을 쓴 축이었다고 하며, 한국 기업들에게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고 한다.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태성탑연로에는 램스토리라는 양고기 식당이 있다. 한국교원대학교 근처에 있는데, 이곳 사장이 '''조남기 장군의 조카이다.''' 음식점 안에 가면 조 장군의 사진들이 여럿 장식되어 있다. 사장님께 조남기 장군 이야기를 하면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1] 계급장은 3성이지만 대우는 대장(General)이다.[2] 영어 위키백과 [3]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시에는 'Defense Force'의 번역어로 자위대를 썼고 민병대에선 흔히 쓰이던 표현이었다. 대한독립자위대란 단체도 있었다. 근데 민병대 호칭을 준군사조직인 일본 자위대가 사용하면서 일본의 군사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제한된 것. 북한에서도 조만식이 자위대를 1945년에 창설했다.[4] 나치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똑같이 같은 사례를 들어 전쟁범죄를 변명한 것과 똑같다는 의견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치 범죄가 희석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