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조선)

 

1. 개요
2. 7살의 나이에 엄마가 되다
3. 여담
3.1. 비교 사례
4. 관련 문서

終丹

1. 개요


서기 1761[1]경남 산청~1767?전남 신안 흑산도
'''종단'''은 조선 영조 때의 인물인데,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최연소로 임신출산한 기록을 갖고 있다. 한국 나이로 7살에 임신하여 출산하였으니, 정확한 생년월일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나 만 5~6살이었다. 태어난 지 21일 후부터 초경을 시작했다고 한다.

2. 7살의 나이에 엄마가 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767년(영조 43년 윤7월), 경상도 산음현에서 7살 여자아이가 아들을 출산했다는 소식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아무리 조혼이 만연하던 조선이지만 혼인도 치루지 않은 7살 여자아이가 임신, 출산한 것은 전례가 없었기에 당시 국왕인 영조는 이 사건을 요괴에 비유하며 탄식했고 종단이를 임신시킨 게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사람(어사)을 보내 종단의 언니인 이단(以丹)을 심문했다. 이단은 소금장수가 종단이를 희롱하는 걸 봤다고 증언하였다. 그래서 소금장수 송지명(宋之命)을 잡아다 심문하니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실토하였다. 실록
영조는 종단과 송지명이 풍습을 문란하게 했다 하여 노비로 삼고 각각 다른 섬으로 귀양 보내버렸다. # 또한 종단의 어머니는 딸 간수를 못 한 죄를 물어 역시 노비로 삼아 섬으로 보내고, 당시 갓난아기였던 종단의 아들도 노비로 삼아 섬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산음현의 현감은 (첫 보고서가 날림이었다는 죄명으로) 사적에서 삭제[2]되고, 지명도 영조가 아예 바꿔 버렸다. 이렇게 해서 바뀐 이름이 현재의 산청군이다. 지명 탓에 일어난 일이라는 식의 언급과 함께.(山, 그늘 음자다. 음부, 음경, 음모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글자니 왜 지명탓을 했는지는 유추가 될 것이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종단은 엄연히 아동 성폭행 피해자인데, '''종단과 종단 어머니''' 모두 노비가 되어 귀양 가는 벌을 받았다. 당시 사회의 의식이 지금과 무척 달랐다는 걸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이야 큰 논란이 되는 내용이지만 당시 조선은 성종 이후의 종모법에 의해 노비의 자식은 노비일 수 밖에 없으며, 어린애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어서 같이 딸려간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법대로 한 것이다.[3] 하지만 이것이 마냥 실드가 될 수 없는 게 영조보다도 훨씬 이전 세대인 세종대왕의 경우, 여덟살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노예에 대한 사형 집행을 승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당대 군주가 누구인지에 따라 처벌이 달라지던 전근대식 법률 수준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종단과 그 아들은 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죽었다고 한다. 동서양 막론하고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라 성인 여성도 출산 후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고 영아 사망률도 높았는데,[4] 막 출산한 7세 여아와 갓난아기가 그 힘든 귀양길에 올랐으니[5] 신체에 큰 무리가 되었을 것이고 갓난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을 것이다.

3. 여담


사건에 연관된 관계자들에 대한 처벌, 공식 법률을 따지는 과정에서 요괴를 언급하는 등 여러모로 쇼킹한 사건 내용 뒤에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의 당시 조선의 사회 의식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783년 이덕무가 지은 《한죽당섭필》에는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와전되어 아예 종단이라는 요괴의 일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3.1. 비교 사례


18세기 카사노바는 '''11살짜리 애들을 수차례 강간했는데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자신의 일기에 무용담마냥 매우 자세하게, 빈번하게 적었다. 차라리 사기행각으로 유럽에서 이곳저곳 쫓겨다녔을지언정 아동성폭행이라는 죄목이 붙은 경우는 없었다. 심심하면 친구들과 비밀경찰 행세하며 민간인 집에 쳐들어가서 비밀로 하지 않으면 비밀경찰이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 놓고, 부녀자를 데리고 나와 윤간하고 재미 다 보면 길가에 버리는 짓을 여러번 하고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귀하신 분의 딸을 덮쳐 정략 결혼을 못하게 만들자 결국 수배되어 체포됐지만 이마저도 죄수들을 비싸게 먹이기 싫어 쉽게 탈옥할 수 있던 게 당대 유럽식 감옥 덕에 이탈리아에서 나와 유럽 타국에서 색마짓을 해댔다.
현재에도 아미쉬(Amish) 종교 공동체들에서는 나머지 미국인들과 따로 떨어져 살아 18세기 미국 기술과 문화를 아직도 보존하고 있어서, 중딩 뻘 남자애가 여동생을 강간하는 게 워낙 흔해 범죄라기보다는 중딩들 무용담으로 회자되는 수준인 곳도 많다. 엄마들은 자기 아들이 딸을 겁탈하는 걸 못 본체하며 자기들도 저렇게 당한 옛 기억을 억누르며 지낸다. 아미쉬 마을에서는 이런 일은, 특히 미성년자들의 일이면 그냥 덮어놓고 무시하거나, 성인들끼리 성범죄가 터져 그나마 문제시되면 마을 목사의 결정하에 마을 사람들이 2주 정도 죄인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Shunning) 이후에는 아무 일도 없던 듯이 행동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걸 또 따지면 "감히 하나님의 대변자이시자 마을의 중심이신 목사님이 내리신 결정에 토를 달지 마라!"며 면박을 준다.
20세기에 만 5살에 남자아이를 제왕절개로 출산한 페루리나 메디나(Lina Medina)와는 달리 종단이는 자연분만으로 아들을 출산하였다. 애아빠는 리나 메디나의 삼촌으로 추정되었지만 확실치 않다. 엄마와 아이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아들은 리나를 그냥 누나로 알게 하고 키워졌다.
카시아의 성녀 리타는 만 11세에 귀족 남성에 시집가고 임신해서 12세에 남자아이를 출산했다. 이후 수녀원에 들어가고 여러번 예수를 영접했다고 성인으로 추성되었다.

4. 관련 문서



[1] 서기 1767년에 7살이었다.[2]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삭제 = 조선시대 양반관료로선 굴욕 중 하나.[3] 조선의 후기에서 가장 흔한 양천간 결혼은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가 많았다. 자식까지 노비 신분을 대물려주기 싫었으므로.[4] 1800년대까지 4원소론에 억지로 짜맞춘 4체액설이 보편적이라 감기 고친다고 엉뚱하게 피뽑다가 죽을 수도 있는 곳이 유럽이었다. 국가 기관급이면 이런 구시대의 의학을 빠르게 고쳐도 근대 의학이 충분히 널리 뿌리내리기에 수십십년이 걸렸다. 특히 당대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 낙후된 나라라면 더욱 그랬다.[5] 귀양길 자체도 교통편이 열악했을테고, 말같은 교통수단 여비나 끼니는 대부분 본인이 해결했어야 했는데 일개 평민이 그런 걸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