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바 도시치
1. 개요
千葉十七(1885년 ~ 1934년)
안중근 의사의 간수를 맡은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일본인이다. 단, 이 사람이 유명한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2. 안중근 의사와의 인연
안중근 문서의 일본의 시각 항목에도 서술 되어 있듯이 당시 옥중에 있는 안중근의 고귀했던 성품, 대의 명분, 그리고 인성을 이를 가까이에서 본 일본인들은 그를 존경할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의 재판에 관련했었던 검사, 변호사, 그리고 뤼순 감옥의 간수들도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1]
지바 도시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는데 지바는 안중근이 사형되는 날 슬퍼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무리는 아닌것이 안중근 의사같은 사람이 중죄인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지바 도시치 본인도 몹시 괴로워했고 이에 안중근은 그를 위로하며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건 어쩔수 없는 일이고 또한 본분이니 자기의 임무에 최후까지 충실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위로해주었으니 지바 도시치 입장에선 그를 그렇게 보내야 하는게 슬픈일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안중근이 지바에게 유목이자 휘호를 써줄때도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다)였으며 지바는 이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으며 훗날 이 유목은 총 26점과 함깨 반환되어 안중근 의사 유목으로 지정되었다.
한마디로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보여주는 인물이라 볼수있다.
3. 안중근 신사
안중근을 존경했으며 지바 도시치는 간수일을 그만두고 철도원으로 일하며 살게 되었다는데 그래도 안중근의 성품과 인연이 헛되지 않았는지 지바는 대림사를 건립해서 안중근 의사를 기리게되었고 이는 자손과 후손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년 안중근 의사 탄신일(9월2일) 즈음 주말에 다이린지에서 추모법요(法要)가 거행되는데 초반에는 일본인들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4. 지바의 유족들
지바의 유족들도 지바의 증언과 안중근의 유품을 통해서 안중근을 존경한 것으로 보인다.[2] 물론 이들도 극우 성향 일본인들로 인해 고생이 많은 듯 하다.#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지바 도시치의 안중근에 대한 존경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게 사실 일본인으로서 안중근을 모시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3]
5. 여담
- 사실 안중근은 알려져있지만 이사람에 관에서 모르는 사람이 이사람 일화를 알면 신기해 하는 이들도 있는데 사실 상기했듯이 이게 가능했던 이유의 배경이 스스로 큰 대의를 품고 활동하는 이들을 지사(志士)라고 부르며 어느 정도 존중해 주는 당시 분위기까지 알고보면 그렇게 신기한 일도 아니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사람 이야기를 조금 각색해서 다루었다.
- 지바도시치가 안중근에게서 유목을 받을때 과정에 얽힌 일화를 보면 지바는 안중근의 간수를 맡는 과정에서 많이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안중근의 조언이 군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라며 격려이자 이해한다는 말을 해주었으니 지바의 업적이 상기했던바와 같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안중근의 사형집행도 슬퍼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말 다했다.
[1] 사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천황에 대해 적대시한 감정으로 이토를 사살한게 절대 아니었고 메이지 시대까지만 해도 스스로 큰 대의를 품고 활동하는 이들을 지사(志士)라고 부르며 어느 정도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있다 보니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 맞서 투쟁한 안중근을 좋게 보는 견해도 나올 수 있었다.[2] 안중근 의사 유목을 반환할 때 유가족들이 낙담해 하자 지바 가문과 아사히신문의 관계자 전원이 이야기를 나눠 반환 배경 일화를 기념으로 남기기로 했다고 한다.[3]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도시치 본인 역시 처음부터 그를 존경한게 아니고 안중근을 존경하게 된건 그의 성품과 인품을 직접 보고난 후의 일이다. 그러니 그의 가족들도 결코 쉽지 않았을 일이라는 건 당연했을 것이며 후손들 역시 힘들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히나 극우성향의 일본인들의 망언들을 보면 도시치 유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답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