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도

 



1. 개요
2. 가혹한 관리의 행적
3. 최후와 기타


1. 개요


사기열전의 혹리열전에 실려있는 인물 한나라 경제때 관료였다.
이 사람의 행적을 보면 알겠지만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다.

2. 가혹한 관리의 행적


이 사람 인생을 보면 엄청나게 가혹하기 짝이 없다. 그 사례를 들자면
  • 경제가 아끼는 애첩인 가희가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멧돼지가 화장실에 들어가 난동을 피웠다. 그러자 경제가 "네가 들어가!" 하고 보냈는데 가지 않자 경제가 직접 칼을 빼어들고 가려고 하자 질도가 엎드려 말하기를 "희 한명을 잃으면 다른 희를 구하면 됩니다. 어찌 천하에 가희같은 여인이 없겠습니까? 허나 폐하께서 잘못되시면 종묘는 어떻게 하며 태후께서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라고 했고 이에 황제는 발걸음을 돌렸고 다행히 멧돼지도 달아났다. 이에 태후가 질도를 칭찬하여 상을 내렸다.
  • 제남군의 한씨 문중은 전횡을 부렸기에 질도를 보냈는데 질도는 한씨 가족들 중에서 가장 난폭한 한 가족을 잡아와 다 죽였다. 이후론 한씨들은 얌전해졌다. 1년 후 제남군에서는 땅에 떨어진 물건조차 주워가는 이 없었다. 근방의 10개의 군의 태수들이 그를 경외하였다.
  • 편지가 오면 열어보지 않았는데 이는 편지의 내용이 청탁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심지어 아내의 간청도 무시했다. 그는 "이미 어버이를 등지고 벼슬살이하는 이상, 이 몸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고 절개를 지키다가 관직에서 죽을 뿐이다. 처자식도 돌보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 법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왕족,귀족을 가리지 않아 그들이 질도를 미워해 송골매라 불렀다.
  • 경제의 폐태자 임강왕 유영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필기구를 넣어달라고 하자 거절했고[2] 부하들에게도 먹을것과 마실것 외엔 넣어주지 말라 하였으나 경제의 외사촌인 위기후 두영이 몰래 필기구를 넣어주었고 임강왕은 그 필기구로 황제에게 사죄하는 글을 쓰고 자결하니 태후가 노하여 경제에게 질도를 처벌하라고 하자 경제가 면직했다.
  • 흉노족의 침공이 잦은 안문군에 질도를 보냈더니[3] 흉노족들이 그 명성을 듣고는 약탈을 포기했는데 흉노족의 대장들은 부하들에게 질도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기 위해 질도를 닮은 인형을 두고 활을 쏘게 했으나 다들 겁먹어서 활을 못쏘자 결국 그곳은 질도가 죽을때까지 쳐들어가지 않았다.

3. 최후와 기타


위의 사례를 보면 결국 정치적으로 적을 만들기 쉬운 조건이었고 결국 태후의 미움을 사 처형되고 만다. 이때 경제가 그는 충신이니 처형할 수 없다고 하자 태후가 "그럼 임강왕은 충신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라고 했다.
혹리열전에 실린 12명의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장탕과 함께 사마천이 제일 높이 평가한 인물인데다[4] 12명 중에서 가장 원칙적이었다. 나머지는 장탕을 빼면 뒷구멍으로 딴짓해본 인물들이었고[5] 장탕마저도 한번은 의혹을 살만한 일을 했다.
[1] 질도에 대해 기록한 사기 역시도 처음에는 죽간으로 된 책이었다.[2] 이 당시 필기구는 흉기로도 돌변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당시엔 종이가 없었고 대신 대나무를 이어서 만든 죽간에 글을 썼다.[1] 만약 글을 잘못 썼다면 칼로 긁어서 지웠기 때문에 필기구에 칼이 꼭 포함되어 있었다.[3] 이 일은 면직 직후 일어난 일이다.[4] 사마천은 혹리보다는 원칙보다는 좀 너그러운 순리를 더 좋게 평가했는데 무제디스를 위한건지 순리열전의 5명은 모두 진시황 이전 사람들을 꼽았지만 혹리열전의 12명은 죄다 한나라 시대 인물에 10명은 무제때 사람이었다.[5] 실제로 원칙주의는 편리주의로 흐르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