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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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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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시기에 영의정과 도체찰사[1] 를 지냈던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인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전황들을 기록한 수기.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한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이다. 영어로는 한국어 발음을 옮긴 Jingbirok이라는 표기와 함께 '징비'를 의역해서 'The Book of Corrections'라고도 쓴다.
2. 내용
'징비록'이라는 이름은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적혀 있는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자서에 "난중의 일은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적었는데, 스스로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내용은 전쟁의 배경, 전투 당시의 상황, 조선·일본과 명나라간의 외교 관계, 주요 맹장에 대한 묘사와 전투 성과, 이후의 백성들의 생활상 등의 임진왜란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다. 저자인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주요 직책을 역임한 덕분에 당시 보고된 문서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징비록의 집필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남인의 일원이었던 류성룡이지만, 징비록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특히 일관되게 '왜적(倭敵)'이라는 표현만을 쓰기보다도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무분별한 적개심 표현을 자제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전의 배경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여 '미리 살펴 전쟁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돌이켜 반성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2] 또한 명군의 원조를 중시하면서도 이순신과 조선 관민(官民), 의병의 공로를 특히 강조하여, 임진왜란에 있어서의 조선 중심 전쟁 사관을 확립하였다.
징비록이 저술되기 전까지는 중국과 일본 모두 임진왜란을 자국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전장부터 조선이었고, 조선 역시 엄연히 전쟁의 한 축을 담당했는데도. 명나라의 임진왜란 관련 기록인 '양조평양록'에는 "(당시 조선은) 정사가 해이해지고, 간신 류승총(柳承寵)(≒류성룡)과 이덕형이 국왕에게 아부하니"(…) 운운하는 기록이 버젓이 남아 있었다.[3]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 목적에 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굳이 드러내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조선이 그 자체적인 문제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막지 못했으며, 명은 다만 도의적인 차원에서 조선을 도왔을 뿐이라는 식으로 서술되었다. 조선을 바라보는 이런 왜곡된 시각은 일본에까지 여과 없이 전해졌다. 일본 입장에서는 명이 조선의 상국이므로 어련히 잘 알고 썼겠거니 해서 의심하지 않았던 것. 이러한 중국과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시각이 균형감각을 갖추도록 한 종합적 기록이 바로 징비록이었다. 징비록은 일본에 전해진 뒤 청나라 학자 양수경에게도 전해져, 현대 중국의 임진왜란 연구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아래 '해외 전래' 절 참고.
한편, 이순신을 강조한 대목과 관련해서는,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류성룡 자신이었으므로 그를 일정 부분 띄울 필요성도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애초에 둘은 절친이기도 했고. 물론 그렇다고 이순신의 공이 바래는 것은 아니겠지만.[4] 사실 이 때문인지 조정의 이순신 모함에 휩쓸려 자기도 가세했던(...) 사실을 적지 않았다. 물론 다른 시각으로 보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후술된 비판 항목 참조.
징비록의 서술 목적 중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류성룡 자신이 속한 남인의 반대 당파인 북인의 정치 공세에 의해 자신에게 덧씌워진 '주화오국(主和誤國)'[5] 의 오명을 씻는 것이었다. 징비록에는 류성룡 자신이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에[6] 반대하였다는 내용의 적극적인 자기 변호가 실려 있으며, 이는 대체로 사실이기도 하다. 북인계에 가까운 데다가 의병 활동을 했던 곽재우 역시 전후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한 바 있다.
반성도 반성이지만 다른 기록과 함께 자기에 행적과 업적을, 사실을 표현해 두기 위했던 기록이기도 하다. 간첩 김순량을 잡은 일이라든가 스스로의 우국충정, 명나라 측 인물들을 상대하느라 겪었던 고충 등을 기록해 두었다. 물론 대부분 '하늘 덕', '전하 덕' 등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당대 사대부들의 의례적인 겸사로 해석된다. 징비록을 저술함으로써 남긴 전쟁사적 기록 여부를 제외하더라도, 전시재상으로서 류성룡이 남긴 업적은 상당하다.
3. 판본
징비록은 류성룡 개인이 저술한 초본과, 나중에 인쇄로 간행된 간행본이 남아있는데 간행본은 일부 내용을 수정 추가하고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특히 초본에 남아있는 국왕에 대한 비판적인 사실들은 상당수 수정되었는데 공문서인 실록 기록은 초본 기록에 가깝다. 예컨대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몽진할 당시 초본에는 선조가 몽진 의사를 갖고 이를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간행본에서는 그냥 조정 내에서 몽진에 대한 논의가 돌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칠천량 해전의 패전 소식이 전해진 후 이순신 재기용에 대해 초본에는 선조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며 비변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다가 이항복 등이 이순신을 재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렸다고 적었으나 간행본에서는 신하들이 권하니 선조가 그냥 따랐다고 적고 있다. 원균에 대한 비판도 초본이 훨씬 강도가 높다.
초본과 간행본의 차이를 알 수 있는 한 포스팅 내용. 초본 내에서도 '上欲誅之(임금께서 그를 죽이려고)'라고 썼다가 이를 취소선으로 지우고는 '命(명하여)'으로 고쳐 이어나간 부분이 확인된다고.
4. 해외
징비록은 이후 일본에 유출되어 큰 인기를 끌었는데[7] 언제 처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683년의 쓰시마 번주 서적 재물 조사 목록에 이미 '징비록'이 보이고, 1687년에 간행된 다른 책에서도 징비록이 인용된 흔적이 있다. 1693년에는 중국과 한국 문헌상의 일본 관련 기록을 모은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8] 에 징비록의 내용이 일부 인용되었으며, 1695년(숙종 21년)에는 징비록 전체 내용에 조선의 행정 구역표, 조선 지도가 첨부된 '조선징비록'이 간행되었다. 이 '조선징비록' 출간 사실이, 17년이나 지난(…) 1712년에서야 조선에 알려져 국가 안보 문제가 대두되는 한편, 서적 수출이 금지되고 조일 외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이미 퍼질대로 퍼지기는 했지만. 한편 19세기 말에는 이 일본판 조선징비록이 일본에 체류했던 중국 학자를 통해 청나라에도 전해졌다고.
일본에서 간행된 '조선징비록'의 경우, 원서에서 비하적으로 쓰인 '관추(關酋)'가 본래의 관직명인 '관백(關白)'으로 수정된 정도 외에는 원서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다. 참고로 '추(酋)'는 '두목, 추장' 등의 의미로, 미개한 종족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바, '누르하치(奴兒哈赤, 努爾哈赤)'에 대해서도 조선에서 '노추(奴酋)'라고 쓴 바 있다. 원 저자인 류성룡의 입장에서는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결코 좋게 좋게 '관백'이라고 제대로 써 주고 싶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판 조선징비록에 일본인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9] 이 쓴 서문에는 "전쟁을 너무 좋아하는 것과 전쟁을 잊는 것 모두 경계해야 한다"면서, "도요토미 가문은 전쟁을 너무 좋아했기에 망했고, 조선은 전쟁을 잊었기에 망할 뻔 했다"고 되어 있다. 이어 재상 류성룡이 징비록을 쓴 것이 지당하다는 찬사와 함께 "이 책은 기사가 간결하고 말이 질박하니 과장이 많고 화려함을 다투는 세상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조선 정벌을 말하는 자는 이 책을 근거로 삼는 것이 좋다. ... (가히) 실록(實錄)이라 할 만 하다."고 쓰여 있다.
현대의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나 당대 일본인들에겐 대단한 관심거리였고 징비록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이와 연관되는데, 이는 비록 실패했지만 임진왜란이 당시 일본에서 몇 안 되는 일본의 대규모 해외 원정 사례였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거기에다가 당대의 외교비사들이 가득 실려있기까지 하니 더더욱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선 징비록을 토대로 각종 전쟁 소설들도 만들어졌는데, 자료 부족으로 소설 내 삽화의 조선인들이 중국인 복장을 하고 있다. 한 일본인 작가가 뒤늦게 조선의 민화를 입수하여 그에 맞게 고증을 하기도.(#) 의외로 적군인 조선군 장수들을 띄워 주기도 했다.
5. 비판
일부에선 징비록에 정작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나 저자 자신에 대한 자성의 내용은 부족한 것 아니냔 비판도 한다.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懲毖錄)》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하였다.
이를테면 류성룡 자신에 대한 반성이 일정 부분 결여되어 있는 점이 대표적인 예. 류성룡은 의외로 우유부단한 면이 좀 있어서, 이순신의 2차 백의종군을 부른 어전 회의에서 왕의 원균에 대한 편애와 당시 조정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순신 모함에 가담한 일이 있었는데,[10] 가장 반성해야 할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정작 기록이 별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이순신을 살리기 위한 교책이었다는 반론도 있는데, 당대에도 류성룡이 이순신과 친밀하다는 사실은 유명했으므로 이순신을 증오한 선조 앞에서 잘못 두둔했다가는 진짜 이순신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랬다는 것.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이 설을 채택했다.[11] 이후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하자 손절하지 않고 이전처럼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또한 류성룡은 임진왜란 전에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원균을 추천하였는데, 원균은 경상 우수사가 되기 전 더 낮은 직위를[12] 받았을 때도 평이 좋지 않아 취소된 상황이었다. 이후 전쟁 기간 동안 원균의 잘못된 전쟁 수행으로 얼마나 심각한 손해가 생겼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 이런 인사상의 오점에 대해서도 별다른 기록이 없다. [13]
한편 익히 알려져 있듯 1591년 황윤길과 김성일이 사신으로 다녀와 왜군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일 때, 류성룡은 '침략할 리가 없다'는 김성일 측 의견을 지지했다. 여기까지는 김성일이 나중에 '황윤길의 말이 지나쳐 일부러 반대로 말했다'고 했더라는 식으로 적고 있다. 문제는 히데요시가 보낸 국서 내용[14] 을 명나라에 알릴지 말지에 대한 논의에서, 실제로는 알리지 말자고 주장하며, '무조건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 윤두수와 대립각을 세웠는데, 징비록에는 '이산해 등이 보내지 말자고 했고 나는 무조건 알려야 된다고 했다'는 식으로 적어 놓았다.
즉, 반성을 주제로 하였으면서도 스스로의 과오는 숨긴 부분이 존재하는 기록물이니, 일정한 교차 검증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류성룡의 과오·판단 착오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 당시의 시대상이나 문화 풍토를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곤란한 측면이 있기 때문. 다만 이후 조선에선 징비록이 군사 기밀 유출을 이유로 금지되었고 일본 쪽에서도 활발히 간행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할때, 류성룡 본인과 직접 관련된 서술이 아닌 부분의 신뢰도는 높다고 간주할 수 있다.
6. 기타
- 류성룡의 13대 직계손인 유시민 작가는 징비록에 근거로서 열거된 각종 장계들에 대해 “퇴직하면서 공문서를 들고 나왔다”(...)는 아찔한 평을 남기기도 했다.
- 당대 국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인물이 쓴 전쟁 관련 증언이라는 점에서, 윈스턴 처칠의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과도 비슷한 성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7. 바깥고리
8. 국보 제132호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이것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유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징비록』은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1647)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1695) 일본 경도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었으며, 1712년에는 조정에서『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았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난중일기』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