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해몽어

 

1. 개요
2. 편찬배경
3. 내용


1. 개요


捷解蒙語. 조선 영조 13년, 1737년에 이세효(李世烋)가 편찬한 몽골어 교습서.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본 도쿄 도요문고(東洋文庫), 도쿄대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총 4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2. 편찬배경


조선 시대에는 몽골어가 꾸준히 학습되고 이를 바탕으로 몽골어 역관이 계속 배출이 되었다는 것이 역사적인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명나라가 막아주긴 했지만, 세력이 꽤 강성했던 내몽골이 신경쓰였고, 외몽골 즉 북몽골의 오이라트도 강성해 토목의 변으로 명 황제를 잡아가기까지 했었기에, 고려 시대 여원전쟁 패배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북방에는 특별히 신경을 쓴 편이었으며 북방의 언어인 몽골어, 만주어의 습득을 중요시했다. 그리고 명에 사신을 보낼때 이 북방 민족들의 언어 학습자료도 같이 구해오곤 했다.
조선 초, 1394년 11월에 사역원 제조 설장수가 올린 상소문에 사역원 제도의 개선책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부터 몽골어 학습과 관련된 제반 규정이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 당시 몽골어 학습과 역관 배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상소문에서 위구르족 출신 귀화인이었던 설장수는 통역관들이 대부분 미천한 출신이라 믿을 수가 없으니 사대부 자제들로 하여금 역관이 되게 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는데 그만큼 조선은 초기부터 몽골어만주어 심지어 위구르인이 쓰는 터키어 등 제반 외국어 전문 통역사들의 중요성과 질적향상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청나라만주족몽골인의 연합으로 들어서 사실 상 몽골 세력이 부활하였고, 병자호란에서는 내몽골 팔기인 몽고병들의 대규모 약탈로 큰 피해를 봐야 했다. 조선 대신들은 강화협상을 위해 청나라 측 인물을 접촉해 봤으나 이들이 익혔던 몽골어는 고려 시대에 쓰던 고대 몽골어로 차하르 및 투메드부 방언을 쓰는 청나라의 내몽골 왕공족들과 대화가 잘 되지 않았으며, 만주어도 고려시대 여진어라서 많이 달라져 있었다. 결국 말이 잘 통하지 않아 할 수 없이 현지의 조선인이나 한족들을 통역으로 써야 했으며 이는 만주어 및 몽골어가 유창한 매국노 정명수가 조선에서 사실상 권신으로 횡포를 부리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외국어 중시정책은 조선의 치세 후반기 들어 더욱 가시화 되었다. 이때 조선은 청나라를 사대국으로 모시는 형편이라 만주어를 중시하였고, 또한 몽골족은 고려시대부터 항상 두려움을 갖고 대했던 민족임은 물론 상국 청나라의 외척이 내몽골 왕공족인 보르지기트 씨족이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1732년 영조 8년 2월 13일 기록에 지평 남태량의 상소문에서도 알 수가 있다. 상소문에서 남태량은 몽골의 흥성을 걱정하며 역관들의 몽골어 실력이 미흡함을 우려하였다. 몽골은 그때 비록 청나라의 일부였지만 청을 등에 업고, 최후의 유목제국 준가르를 엎어버리고 외몽골 할하 부족들까지 복속시킨 주역인 내몽골 왕공들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그 다음 차례는 또다시 조선일 수 있다며 촉각을 곤두세운 상태였다.
이후 영조 13년, 1737년 5월 14일에 좌의정 김재로가 몽골족의 발흥과 관련 역관들의 몽골어 구사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지적하였고 동년해에 첩해몽어가 완성된다. 이후 오래된 몽골어 교습서인 몽어노걸대, 수성사감(守成事鑑) 등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게 된 다섯 책을 폐하고 첩해몽어가 공식 관찬 몽골어 교습서가 된다.
이렇게 몽골어와 만주어 등 북방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과 함께 천보총도 영조 때 박영준이 개발해 경군에 주로 배치되었다. 천보총 및 서양식 화포 홍이포, 불랑기포 등의 대대적 도입으로 조선은 몽골족 및 만주족의 기마궁수, 일본의 조총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으며 이는 19세기 서양 세력에 의해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약체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3. 내용


몽어노걸대, 몽어유해와 함께 몽학삼서(蒙學三書)로 꼽히며, 실제 현존하는 몽학서는 18세기 중엽에 간행되고 후반에 수정된 몽어노걸대와 첩해몽어, 몽어유해 이 세 종류 뿐이다.
몽골어 문장을 몽고 문자로 쓰고 그 옆에 한글로 발음을 표기하였으며, 문절이 끝나는 곳에 번역문을 싣고 있다. 정조 14년, 1790년에 방효언(方孝彦)에 의하여 몽학삼서가 모두 개정되는데 이때 몽어노걸대와 몽어유해는 자음(字音)만 수정하였고 첩해몽어는 자음과 어투(語套)를 아울러 수정하였다. 내용은 대체로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