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수(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최용수
崔龍洙'''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65년 10월 12일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읍 남산정
<color=#fff> '''사망'''
1926년 8월 27일
경상북도 김천군
<color=#fff> '''종교'''
개신교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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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용수는 1865년 10월 12일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읍 남산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김천 황금정교회의 장로로, 1919년 3월 8일 이 교회의 목사 김충한(金忠漢)과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 김수길(金壽吉)과 만나서 김천읍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다음날 밤, 그는 다시 교회에서 김수길·김충한·[[한명수(독립운동가)|한명수]·주남태(周南泰)·김원배(金元培)·박태언(朴泰彦)·차경곤(車敬坤)·김성집(金聖執) 등과 만나 구체적인 전개 방법을 협의하였는데, 김수길·김충한이 작성한 경고문에 김충한과 함께 대표자로 연명하기로 하고, 김수길·박태언과 그는 인쇄를 담당하였다.
또한 김수길은 비단으로, 주남태·김원배는 종이로 각각 태극기를 제작하기로 하고, 거사일시와 장소는 김천읍 장날인 3월 11일 오후 3시 욱정(旭町)의 감천교(甘川橋) 부근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3월 10일 자기의 집에서 경고문 3백여매를 등사하는 등 사전준비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이튿날 오전 11시 일경에 의하여 사전에 발각되어 4명의 주동자가 체포됨으로써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6년 8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최용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