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야 타케노리
1. 소개
糟屋/加須屋 武則
1562 (에이로쿠 5년) ~ ?
일본 전국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활동한 무장, 다이묘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명. 카스야 시네오 라고도 한다.
하리마 가코가와 성(加古川城)을 거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가마쿠라 시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무가(武家)로서 벳쇼 가문의 가신인 카스야 도모사다(糟屋朝貞)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 외에도 슈우죠, 무네시게, 가츠야, 무네타카 등이 타케노리의 본인의 별명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나이때 마다 다르므로 본인 이름인지 아닌지 정확하지는 않다.
1.1. 출신
본래 성은 시무라. 통설에서는 타케노리는 에이로쿠 5년(1562년)에 시무라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니는 코데라 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평민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 헤어지고 하리마 국의 시무라와 재혼하고 타케노리를 낳았다. 그 후 이 남편과는 사별했는데 타케노리를 이부 형인 카스야 쥬우죠에게 맡겼다. 카스야 씨의 당주가 되고 있던 쥬우죠는 이부 동생의 타케노리를 양자 겸 아우로서 양육했다. 이 은혜로부터 타케노리는 시무라 성을 버리고 카스야를 쓰게 됐다.
1.2. 다이묘에 입신
덴쇼 5년(1577년)에 하시바 히데요시의 하리마 공세 당시에 벳쇼 가문의 조정과 그 아들들과 함께 미키 성에 들어갔지만 코데라 요시타카의 설득에 의 의해서 퇴거하고 카코가와 성으로 돌아갔다.
그 해 타케노리는 요시타카의 천거에 의한 하시바 히데요시의 시동 우두머리가 됐으며 미키 전투에 참전했다. 그 지략을 다해서 노구치 성 공략작전이 그의 첫 출전이 된다. 또한 미키 성 공방전에서는 히데요시의 요충지를 지키고 포위망의 일익을 담당했다. 한편 그의 이부 형인 쥬우죠는 삼목의 경쟁의 대결인 히라이 산 전투(덴쇼 7년 (1579년) 2월 6일)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덴쇼 8년(1580년)에 타케 노리가 가독을 상속했다. 그 후도 전역에 종군했다고 하지만 덴쇼 10년 6월 2일 (음력 1582년 6월 21일)에 혼노지의 변때 타케노리는 히데요시의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6월 13일에 야마자키 전투에 참여했다. 10월 15일에는대덕사에서 열린 오다 노부나가의 장례에 필두중 한사람으로 참석했다.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가 일어나자 타케노리는 평상복 차림으로 사쿠마 모리마사를 만난다. 모리마사는 오타 고개 남쪽에 머문 사쿠라이 사키치와 싸우고 있었지만 사키치가 적들을 베어버린 곳에 타케노리가 돌진하고 다시 사키치를 돕고 칠본창을 도왔다. 이렇게 히데요시의 면전 앞에서 절개지 부근에서 분전하고 무공을 세운 타케노리는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들와 함께 맨 먼저 공을 세운 이치반야리가 되어서 6월 5일에 포상을 받았고고 8월 1일에는 하리마국 카코 군에서 영지 2,000석, 가와치 국의 가와치군에 1,000석 등 총 3,000석 남짓을 갖게 된다.
덴쇼 12년(1584년)에 벌어진 고마키·나가쿠테의 싸움에서는 군세 배치에서 다른 칠본창과 함께 우마 마와시 중으로 군사 150명을 이끌고 본진을 지키고 있었고 덴쇼 14년(1586년)에는 방광사 대불의 공사 책임자를 맡아 그 해 다섯 가로로 서임된다. 덴쇼 15년(1587년)에 벌어진 큐슈 정벌에도 병사 150명을 동원해서 종군했고 같은 해 3월에는 히데요시로부터 카코가와를 병력이 차질없이 도하 가능 하도록 할만큼 배의 조달을 명령 받고 있다.
그후 덴쇼 16년 4월 14일(1588년 5월 10일)에는 코메이 천황의 주라쿠 행차때는 천황의 행렬에 공봉하고 있었고 덴쇼 18년(1590년)에는 오다와라 정벌에도 병사 150명을 동원하고 참가했다. 또한 타케노리는 이들이 천하 통일까지 전역의 대부분에서 후발 주자로 히데요시의 주위를 지킬 생각으로 후방 지원에 나섰다. 덴쇼 19년(1591년)에는 오우미 국 켄지의 지배자가 되고 오우미 국의 사카타 군에 있는 히데요시의 직할령 구역인 1만 2,000석의 대관에도 임명되고 있었다. 이 밖에도 야마토 국 우다 군 지역, 히데요시의 영지를 관리 및 감독하는 대관을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분로쿠 원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카타기리 시치겐등과 함께 200명의 수병을 거느리고 나고야 성로 출병하고 오다 히데노부의 아홉번대 대장에 속하고 조선에 도강하였다. 현지에서는 카츠모토들과 함께 이시다 미츠나리들과 함께 조선의 영지에 자리 잡았고 점령지의 대관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 이외에도 신조 타다시등과 함께 조선인 도피 및 유민의 귀향을 촉구하는 훈령을 발포하기도 했고 진주성 공방전에 참여하고 활약하고 있다. 이듬해 강화를 위한 휴전으로 인해서 귀국했다.
귀국 후 분로쿠 2년(1593년)에는 히데요시의 자치령에 가까운 하리마 미키군의 히데요시의 영지인 1만석의 대관에 위촉됐다. 또한 실체는 정확하지 않지만 나카가와 시게히데의 아들인 나카가와 히데나리 입봉 후 미키 성의 역대 성주의 한 사람만 으로서도 타케노리의 이름이 알려졌으며 임란 3년(1594년)에는 후시미 성의 공사에도 참여했다.
분로쿠 4년(1595년)에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실각하자 히데츠구가 고야산 출발까지 준비하는 동안 후시미 타케노리의 저택에 히데츠구를 연금했다. 히데츠구 사건 직후인 그 해 8월 17일에는 전공을 마구 칭찬한다는 명목으로 하리마 국내에서 6,000석의 영지를 가증받아 카코가와 성주 1만 2,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게이초 3년(1598년)에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매우 슬퍼하였다.
게이쵸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때에는 360명의 병사를 이끌고 문치파를 중심으로 한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에 가담하여 같은 키노시타 일족과 함께 후시미 성 전투에 참여했다. 더욱이 세키가하라 본진 에서는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에 속하고 분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가독을 몰수당하고 개역되고 만다.
1.3. 만년
만년에 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한다.
타케노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개역되었고 게이초 7년(1602년)에 무사로 고용되어 500석이라는 녹봉으로 도쿠가와의 가신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느 설에서는 타케노리는 은거하고 아들인 하치베를 세우고 가문의 존속을 꾀하였지만 게이초 6년(1601년) 가을에 타케노리, 게이초 7년(1602년)봄에 하치베가 사망함으로 게이초 7년 9월 15일(1602년 10월 29일)에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 해 음력 10월 스루가와 이마가와 씨의 가신으로 있었던 동생·카스야 타지마 마모루의 아이인 슈우쵸가 이때에는 도쿠가와 가문을 섬기고 있었으므로 이 인물이 카스야 가문을 상속시키고 500석을 배수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한편 '''카코가와 시지''' 에 따르면 타케노리는 후시미에서 독에 의한 중독으로 이미 사망 했으며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아들인 무네타카가 이어 받은 다음에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으로 참여했지만 패하여 개역된다. 그리고 게이초 7년(1602년)에 영지를 1만 2,000석으로 회복 했지만 겐나 원년(1615년)에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전사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또한 카스야 씨의 사찰기에서는 무네타카는 겐나 9년 8월 14일(1623년 9월 8일)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설에서는 게이초 7년(1602년)로부터 게이초 15년(1610년)사이에 타케노리와 하치베가 빗추 쿠니요시 성에 입봉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