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배경

 


1. 장문 배경
2. 돌아온 소녀
3. 괴물


1. 장문 배경


두려움을 모르는 공허의 사냥꾼 카이사에게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이라면, 그녀가 처음에는 눈에 전혀 띄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리라. 카이사는 대대로 전사를 배출한 부족 가문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슈리마의 대지 아래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위협에 맞서 싸우기 위해 머나먼 곳에서 소환된 것도 아니었다. 카이사는 평범한 소녀에 불과했다. 혹독하기 짝이 없는 기후의 남쪽 사막을 고향으로 삼은 부모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고, 낮에는 친구들과 놀며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어른이 되었을 때의 삶을 상상했다.
소녀 카이사의 운명이 완전히 바뀐 것은 태어나서 열 번째 여름을 맞이한 무렵이었다. 카이사는 너무 어렸기에 그해에 마을을 휩쓴 이상한 사건들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낯선 존재들이 떠돌아다니며 땅 아래 도사린 어둠의 힘에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한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파다했다. 어머니는 카이사에게 집 밖에 나가 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카이사와 친구들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지만, 어느 날 저녁 카이사는 마을 주민들이 제물로 바치려고 유목민에게서 염소 무리를 사들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카이사는 여덟 살 생일 때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칼로 염소들을 묶은 밧줄을 자르고 가까운 협곡에 풀어주었다. 어린아이의 악의 없는 장난쯤으로 넘어갈 일이었지만, 곧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땅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고, 번뜩이는 빛줄기가 하늘을 그슬렸다. 아이들은 죽음을 피해 마구 내달렸다.
공허가 깨어난 것이었다. 거대한 균열이 발생하여 지반을 쪼개버렸고, 카이사의 마을과 주민 전체를 집어삼켰다. 마을이 통째로 사라진 자리에는 칠흑처럼 새까맣고 이리저리 뒤틀린 기둥이 우뚝우뚝 솟은 모래벌판만이 남았다.
카이사는 땅밑 세계에 갇힌 상태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 때문에 질식할 지경이었으나 아직 희망은 있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이 외치는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려왔던 것이다. 주민들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되풀이해 불렀다. 마치 그 이름들이 주문이라도 되는 듯. 하지만 사흘이 지나자 그 목소리들도 잦아들었고, 이제 카이사의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목소리뿐이었다. 친구도 가족도 모두 죽어버린 것이었다. 소녀는 어둠 속에 홀로 남았다.
그렇게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무렵, 카이사의 눈에 저 멀리 아련한 빛이 보였다.
카이사는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헤지긴 했지만 물이 약간 남은 가죽 부대와 다 썩어가는 복숭아 등, 마을이 붕괴된 자리에 남은 보잘것없는 먹을거리 덕분에 간신히 굶어 죽지는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는 또다시 굶주림보다 더 먹먹한 두려움에 직면했다. 소녀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동굴로,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보라색 불빛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동굴 안에는 카이사보다 크지 않은 체구에 끔찍스러운 형상을 한 생명체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중 한 놈이 이쪽으로 다가왔고, 카이사는 양손으로 칼을 쥐고 놈의 공격에 대비했다. 놈이 달려들어 카이사를 땅바닥에 쓰러뜨렸지만 카이사는 칼을 휘둘러 놈의 급소를 정확히 공격했고 둘은 더 깊은 심연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처음 그녀에게 달려든 괴물은 이미 죽은 듯했지만, 기이하게도 놈의 시커먼 겉껍질이 카이사의 팔에 착 들러붙었다. 껍질에 감싸인 팔 부분은 따끔거리고 얼얼했으며, 손으로 만져보면 강철처럼 딱딱했다. 카이사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칼로 껍질을 뜯어내려 했지만 칼은 부러져 버렸다. 곧이어 덩치가 더 큰 괴물들이 다가왔고, 카이사는 어쩔 수 없이 껍질로 싸인 팔을 방패처럼 사용하여 간신히 도망쳤다.
카이사는 깨달았다. 이 껍질은 이제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매일 매일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간은 이윽고 몇 년으로 늘어났고, 껍질도 점점 더 넓어졌다. 카이사의 다짐도 더욱 굳어졌다.
이제 그녀에겐 희망뿐만이 아니라 계획이 있었다. 악착같이 싸워서 살아남자. 그래서 돌아갈 길을 찾자.
카이사는 더 이상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던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모르는 생존자가 되었다.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변모한 것이었다. 카이사는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두 세계의 틈에서 살며 두 세계가 접촉하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공허의 굶주린 생명체들은 슈리마 곳곳에 흩어진 마을들뿐 아니라 아예 룬테라 전체를 먹어치우려 한다. 카이사는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카이사는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공허 생명체를 물리쳤지만, 그녀가 그토록 기를 쓰고 보호하는 인간들은 그녀를 괴물로 취급하기 일쑤다. 카이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제 그녀의 이름은 전설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고, 불운한 이케시아를 떠도는 고대 공포의 괴물들을 상기시키게 되었다.
“카이사”는 이제 공허의 이름이 된 것이다.

2. 돌아온 소녀


“내 말 잘 들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어린 소녀에게, 나는 말을 걸었다. “시간이 많이 없어. 귀담아들어야 해.”
소녀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눈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말해줘요.”
이 애 마음에 드는데. 내 얼굴 근육이 움직이더니 미소라고 할 만한 표정을 만들었다. 대체 얼마 만에 웃어보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일단 이건 아니야.” 나는 소녀가 한 손에 든 화살을 가리켰다. 아이는 그걸 마치 창처럼 쥐고 있었다.
공허가 나를 내 가족에게서 갈라놓을 때, 나는 아직 어린아이었고 그래서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무지한 데다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제물이든, 공물이든, 희생양이든,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그것에는 어차피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신이 아니기에, 뭘 바친다거나 기도를 한다고 달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전 세계를 집어 삼키고 싶어 할 뿐이다.
“그걸 처치하고 싶니? 박살 내 버리고 싶어?” 내가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굶겨 죽여야 해.”
그러자 마치 내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내 살갗을 파고드는 무수한 바늘 같은 감각이 더 심해졌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우리 주변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는 나의 두 번째 피부가 된 겉껍질이 활시위를 당기듯 팽팽하게 죄어들었다. 내가 크게 숨을 들이켜는데, 놈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선명해졌다.
발밑의 모래사장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잔주름이 잡혔고, 모래시계 속 모래알처럼 밑으로 가라앉았다. 으스스하게 고동치는 빛줄기가 뻗어 나가 하늘에 스며들었다. 공허 생명체들이 슈리마의 밤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울부짖으며, 역겨운 침을 줄줄 흘리면서.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깨 주머니 안에 에너지를 충전했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가 풀었다.
열기와 고통이 환하게 피어나며 재빠르게 표적을 찾았고, 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생명체들을 막아섰다. 놈들은 바람을 만난 낙엽처럼 사방으로 내팽개쳐졌다. 신맛이 느껴지는 악취와 겉껍질이 녹아내리는 쉬이이익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이제 곧 저들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 나는 무수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가시기를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녀는 내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만반의 태세를 취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거, 아픈가요?” 소녀는 낮게 물으며, 한 손을 뻗어 내 팔에서 은은한 빛을 내는 껍질을 만지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뺐다. 하지만 소녀는 전혀 주춤하지 않았다.
“뭐 가끔.” 나는 수긍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소녀가 사는 마을은 아직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오직 이 어린 소녀만이 호기심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소름 돋게 무서우면서도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환상적인 이야기와 동화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공허충 야수들이 나타나 사냥을 하고 더 많은 공허 생명체를 불러낸다는 민담을 확인하고 싶어서.
소녀는 전설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저 바위산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마을 어른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공경하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내 살갗이 다시 조여들기 시작했다. 무수한 바늘들, 끊임없이 쿡쿡 쑤시는 감각…
나는 눈을 깜박였다. “미안한데, 네 이름을 아직 못 들었구나.”
소녀는 자부심 넘치는 몸짓으로 어깨를 펴더니 화살을 휘둘렀다. “난 일리라고 해요. 우리 가족을 저 괴물에게서 지키려고 온 거예요.” 소녀는 고작해야 열 살 정도로 보였다.
“그래, 일리… 하지만 도망치는 게 최선일 때도 있어.”
“당신은 도망치지 않잖아요.” 소녀는 인상을 쓰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 그런가요?”
아주 영리한 애야. “음, 더 이상은.” 나는 인정했다.
“그럼 나도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일리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게다가 용감하기까지 해.
하지만 이 애는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전혀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물을 바친다 어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부 놈들에게 우리가 여기 있으니 먹어치워 달라고 알려주는 꼴일 뿐.
“일리, 네가 사람들한테 알려야 해. 어른들을 설득시키는 거야. 초승달이 뜰 무렵 춤을 추는 것도, 말뚝에 가축을 묶어놓고 공물로 바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말이야. 공허는 그렇게 제물을 바친다고 자비를 베풀지 않아. 삼켜버리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야.”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던 날, 내게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아마도 그래서 내가 지금껏 살아남은 것인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죽어갔지만.
하지만 생존자는 생존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지. 이 세계로 돌아오는 길을 발견한 날부터 지금까지 그 대가를 치르고 있고…
“저기요.” 소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날 찾아서 이리로 오고 있어요.”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마치 본능처럼, 공허의 껍질이 목을 타고 올라와 얼굴을 뒤덮기 시작했다. 일리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서워하지 마.” 하지만 내 목소리는 이미 기이하게 뒤틀려 있어서 말뜻과는 정반대로 들렸다.
“무서워해야 하나요?” 일리가 당돌하게 반문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지만 일리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 이런 모습, 껍질인지 뭔지가 내 전신을 덮은 모습을 본 사람은 몇 명 없다. 그리고 그중 두 명을 빼고는 모두 죽었다.
일리의 마을 주민들은 꽤 능력 있는 사냥꾼들이겠지. 여기선 능력이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 이제야 일리가 이렇게 용감한 아이인 이유가 짐작이 갔다. 소녀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쳐든 횃불이 밤의 어둠 속에서 너울거렸다.
“아빠!” 일리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내가 찾았어요! 돌아온 소녀를 찾았다고요!”
마을 주민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갖가지 무기를 단단히 틀어쥐고, 눈에는 분노의 불길을 담은 채. “일리!” 아이의 아빠가 외치며, 화살 하나를 시위에 메웠다. “그… 그 괴물한테서 떨어져!”
아이는 아빠의 말에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기야 일리만 한 나이의 소녀라면 열에 아홉은 나를 보자마자 달아나 버렸겠지.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안다. 마을 토담에, 협곡의 바윗돌에, 사람들이 새겨 놓은 공포심을 읽었으니까.
괴물이 되어 돌아온 소녀를 조심하라.
하지만 저들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나는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존재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막연한 어둠이 형체를 갖추고 돌아다니며 싸우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 이름을 입에 올리기를 그렇게 주저하는 것이겠지.
10년 전에는 나도 일리처럼 평범한 소녀였다. 밤하늘을 장식하는 수많은 별처럼 아름답고 다채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하지만 공허가 나를 집어삼킨 그 날, 그런 미래는 사라져 버렸다.
무수한 바늘로 찔리는 감각이 다시 돌아왔다. 내 양팔에서 음산한 빛을 뿜는 무기들이 생겨나는 바람에 일리는 내 손을 놓았다. “어서 가.” 내가 말했다. “아빠한테 가야지.”
“일리, 어서 도망쳐!” 소녀의 아버지가 애처롭게 외치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싫어요!” 일리가 소리를 지르며 내 쪽으로 돌아섰다. “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일리에게 그쪽으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아니야, 일리. 넌 전사의 자질을 타고났어. 저 사람들한텐 네가 필요해.”
일리는 몇 걸음 옮기다가 되돌아왔다. “사람들한테 뭐라고 말할까요?”
“사람들한테… 대비를 하라고 말해.”
공허는 내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나는 내 전부를 빼앗기는 것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바로 이런 순간들, 다정함과 인간다운 애정이 빛을 발하고, 천진무구함과 신뢰가 공포심을 누르는 순간을 겪을 때마다, 내 마음에는 희망이 차오른다. 이 세계의 발밑에서 끝없이 흐르고 있는 치명적인 독의 물결을 우리가 막아낼 수 있다는 희망이.
처음으로 공허의 심연을 벗어날 수 있었던 날, 나는 그 일을 혼자서 해냈다.
저들도 언젠가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3. 괴물


[image]
만약 어디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고 있다면...
땅속에도 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빛이 없어도 볼 수 있었다.
내 눈은 오직 어둠만을 봐 왔지만, 지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색들이 색조와 음영을 통해 괴물들을 막고 있는 벽을 드러냈다. 벽은 전혀 단단하지 않았다. 마치 연극 무대에 쳐 놓은 배경막처럼 얇았다.
이렇게 보이는 세상이 싫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적응하지 않았다면 난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다.
가끔은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뒤에 있는 남자는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사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광원이라곤 희미하게 반짝이는 내 어깨 주머니뿐이었으니까.
그 정도 빛만 가지고 인간은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겁을 먹은 남자는 움직일 때마다 발을 헛디뎠다.
이곳 지하에서는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지상에서 그는 사막 정착지의 지도자였다.
이자를 데려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지하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줘야 주민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남자를 반쯤 업다시피 한 채로 끌고 갔다. 하지만 생체 갑옷 덕분에 힘들진 않았다.
갑옷은 내 피부 전체에 밀착되어 있었다. 마치 수천 개의 작은 바늘이 살 속에 파고든 듯했다. 울퉁불퉁하고 뻣뻣한 그 갑옷은 내 몸과 더 이상 구분하기 어려웠다. 고통스러웠던 적도 있다.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마치 고양이 혀 같은 그 느낌이 싫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갑옷이 몸 위로 번져나갈 때, 그것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고통과 고독으로 미쳐버리지 않으려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게 내 목소리이길 바랐다.
발아래의 바닥은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녹은 바위가 흐르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땅속 깊은 곳의 '존재들'이 마치 썩은 꿀열매 속을 헤집고 다니는 벌레처럼 위로 올라오면서 만든 길이었다.
이러한 현상과 그 '실체'를 보고 위쪽 사람들은 지하 세계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공허'.
하지만 공허라는 이름은 이 암흑세계의 '진짜' 위협과 공포를 담아내기엔 부족했다.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땅 위로 올라가 살육을 일삼는 괴물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아래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누구도 한때 이케시아 왕국이 존재했던 이 지역에 가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었다. 과거의 공포는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고, 피와 고통으로 깨우친 교훈은 여행자들이 모닥불에 앉아 풀어 놓는 괴담이나 민간 신화로 전락했다. 그저 달빛 진주를 난로 위에 달고 나서스에게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거나, 굶주린 괴물들의 허기를 달래 줄 염소를 바깥에 매어 두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공허의 생명체들은 일반적인 포식자들과 달랐다.
어렸을 때, 크미로스 한 무리가 다친 스칼라시를 사냥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거대하지만 온순했던 그 동물이 죽는 걸 보고 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지만, 크미로스를 미워하진 않았다. 먹기 위해 사냥하는 것은 동물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크미로스는 악하지 않았다. 그저 굶주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허 태생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인다.
"부탁입니다."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어버렸을 때쯤, 남자가 애걸했다. "제발 날 좀 풀어 주시오."
이동을 멈추고 남자를 벽으로 강하게 밀치자, 그는 꼴사납게 훌쩍이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을 죽이리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놓아 주리라 생각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내 손의 칼날이 치명적인 보라색 빛을 내며 부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전환되며 남자의 몸속을 흐르는 피에서 빛나는 마력 줄기가 보였다.
남자가 숨을 헐떡이고 눈물을 흘릴 때마다 마력 줄기는 공중으로 퍼져갔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지만, 공허 포식자들이 냄새를 맡고 마치 배설물에 이끌린 모래파리처럼 몰려들기에는 충분했다.
생체 갑옷이 남자를 먹어 치우길 원했다. 나는 움찔했다. 내 마음속에서도 같은 욕구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지상의 인간 모두가 그렇듯 남자는 나약했다. 어쩌면 지하의 괴물들에게 영혼이 '해체'되기 전에 내 빛의 칼날로 숨통을 끊는 것이 더 자비로운 일인지도 몰랐다.
'안 돼! 난 그들을 보호해야 해. 그래서 다시 돌아간 거잖아.'
나는 갑옷의 살인 충동을 억눌렀다. 그러자 뻣뻣해진 손가락에서 빛이 희미해졌다. 나는 몸서리치며 심호흡을 한 뒤, 주먹을 쥐었다.
시야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내가 생각했던 장소가 아니었다.
우리는 예상보다 지면과 더 가까웠다. 따라서 눈앞의 광경이 나타내는 심각성은 더욱 컸다. 터널은 마치 지하 호수를 품은 동굴처럼 빛을 받아 일렁였다. 그 빛은 지상의 인간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그곳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가장자리였다. 마치 조안사의 모래 바다와 같이 두 세계의 경계는 밀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어지러운 빛을 받아 빛나는 바다처럼 소용돌이치며 끝없이 흐트러졌다가 새로워졌다. 그곳은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어, 잠수한 레비아탄이 머무른다는 이야기 속 그곳처럼 가끔 기괴한 형태로 변했다.
이렇게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지만, 남자는 이 광경을 꼭 '봐야' 했다.
영혼이 없는 검은 눈들이 합쳐지더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물질의 소용돌이가 흉측한 모습을 갖추었다.
구부러진 척추가 펼쳐지고 탐욕스러운 팔다리가 길게 늘어나더니 갈고리발톱이 액체 속에서 만들어졌다. 반투명한 육체를 지닌 괴물들이 광기 어린 진화를 거친 후 날카로운 괴성을 질렀다.
'놈들이 왔다...'
"눈을 떠."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갑옷의 마스크 때문에 목소리가 왜곡되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동물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남자는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마치 목구멍에 뭔가 엉긴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갑각 투구를 뒤로 젖혔다. 투구는 마치 곤충이 등딱지 안으로 날개를 접듯 접혀 들어갔다.
"눈을 떠." 다시 말하자 남자가 알아들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나를 보고 남자는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예전과 많이 다를까? 공허에 더 '어울리는' 존재처럼 보일까?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확인한 건 오래전 일이었다. 아직 기억 속 모습 그대로이면 좋겠는데.
빛이 차오르자 남자는 고개를 돌려 심연을 바라봤다.심연 속 생명체들이 떼를 지어 위로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마침내 내 의도를 알아차린 남자는 공포에 사로잡혀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의 중심과 그 너머까지 뻗어 있는 광기의 바다에서 올라온 수천 마리의 괴물들이 그곳에서 떨고 있었다. 진짜 정체가 뭔지,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세상을 파괴하려는 끝없는 충동을 지닌 이 괴물들이 지상으로 올라가면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이었다.
괴물들이 기세를 더하고 있는 지금, 악몽을 막을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남자에게 몸을 숙이며 물었다. "저놈들이 보이나? 무슨 상황인지 '이해'돼?"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놓아주었다.

나는 지상의 빛을 향해 기어오르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바위를 긁는 발톱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팔이 심연의 가장자리에 걸쳐 있었다. 그 뒤로 삐걱거리는 갑옷과 돌출된 뼈, 죽음의 빛을 내는 살점을 지닌 끔찍한 괴물이 기어 올라왔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여전히 축축하고 번들거렸지만, 상체 갑각에 달린 검은 눈에서는 무한한 악의가 느껴졌고 해쓱한 배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팔다리가 달려 있었다. 입술이 없는 입에는 하얗게 빛나는 송곳니가 나 있었고 그 사이로 체액이 흘러내렸다.
곧이어 다른 괴물들이 올라왔다. 크기는 작았지만, 사납기는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존재만으로도 공기를 뒤틀리게 했으며, 발톱 아래의 땅은 검은 연기를 내며 녹아내렸다.
놈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끔찍한 악취가 진동했다. 나는 몸에 열기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위협을 감지한 팔다리에서 힘이 차올랐다.
예전에는 이런 충동을 애써 떨쳐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가 죽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힘 때문이었다.
갑각 투구가 내려와 내 얼굴을 가렸다. 시야도 다시 전환되었다.
한때는 이 변신 과정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반가웠다.
나는 빛을 통해 사냥감의 약점을 파악했다. 나는 다시 포식자가 되었다.
어깨에 붙은 갑옷의 형태가 바뀌었고, 주머니가 열리며 눈부신 빛을 드러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괴물들을 향해 작열하는 미사일을 연사했다.
몸집이 작은 괴물들이 보라색 체액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내 몸에 놈들의 액체가 튀자 곡선형의 갑옷이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흡수된 피는 영양분이 되겠지만, 나는 역겨움에 속이 뒤틀렸다.
나는 팔을 뻗으며 앞으로 달려가 빛의 칼날을 손에 장착한 후, 터널 벽을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거대한 괴물을 향해 보랏빛 불꽃을 발사하자 괴물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며 시커먼 체액이 쏟아져나왔다.
놈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기이하게 뒤틀린 팔을 휘둘렀다.
나는 착지해 몸을 구르며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쪼그려 앉은 채 또다시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은 맹렬한 빛을 내며 괴물의 살을 불태웠다. 동족이 만들어낸 불꽃보다 공허 생명체에게 더 치명적인 것은 없었다.
괴물이 쓰러지려 하자 나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직 죽은 건 아니었다. 공허 태생에게 '죽음'은 그 의미가 달랐다.
놈은 팔다리를 통해 작은 괴물들의 피와 정수를 빨아들였다. 마치 찢어진 담요를 꿰매듯이, 빛줄기와 꿈틀거리는 물질이 놈의 살을 다시 기워 붙였다. 거대한 몸통은 경련을 일으키며 상처를 아물게 하고 약점은 더욱 보강하며 새로운 팔다리를 만들어냈다. 갈라진 살 사이로는 작열하는 검은 광선이 솟아 나와 마치 채찍처럼 지면을 때렸다.
딱딱한 돌바닥이 마치 밀랍처럼 녹아내렸다. 그때 광선 줄기 하나가 무릎을 스치자 나는 비틀거렸다. 갑옷의 일부가 검은 연기로 변하며 사라졌다.
나는 갑옷 안에 숨겨져 있던 살갗을 보았다. 마치 바위 아래로 숨는 사막의 파충류처럼 내 피부에서는 생명력이나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왠지 속이 메스꺼웠다. 죽어버린 듯한 내 피부를 봐서인지, 아니면 예전 내 모습이 떠올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탓에 몸놀림이 둔해졌다.
비록 찰나였지만, 공허충과 사냥꾼들이 몰려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 몸집의 두 배나 되는 괴물이 발아래에서 나를 집어삼켰다. 발톱이 가슴팍을 할퀴었고, 머리 위로 이빨이 닫히며 내 투구에 구멍을 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요동치는 목구멍에는 이빨이 빽빽이 솟아나 있었고, 괴물의 혀는 들어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나는 괴물의 몸에 주먹을 박아 넣고 보랏빛 불꽃을 발사했다. 그러자 괴물의 몸이 폭발했고 살아 있는 갑옷은 그 에너지를 흡수했다.
발톱과 이빨이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옆으로 굴러 공격을 피하며 손에서 보랏빛 불꽃을 계속 발사했다. 하지만 심연 속에서 끝없이 괴물이 쏟아져나왔다. 놈들이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했다.
갑각과 발톱으로 무장한 적들이 맹렬한 기세로 몰려들었다.
어깨 주머니에서 강렬한 불꽃이 분출됐지만, 적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허에 증오라는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놈들은 나를 적잖이 싫어하는 것 같았다. 놈들은 나를 같은 공허 태생으로 여기면서도 동시에 처치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상의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보고 있을까?
나는 괴물들에 둘러싸인 채, 과거 크미로스가 스칼라시를 사냥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내게는 맞서 싸울 힘이 있었다.
나는 발뒤축으로 회전하며 불타는 주먹을 휘둘러 내 주변에 보랏빛 불꽃으로 고리를 만들었다.
불꽃의 위력에 괴물들이 물러서자 여유가 생겼다. 나는 탈출 경로를 확인한 후 적들 사이를 헤집으며 이동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나는 초자연적인 속도로 움직이며, 망연자실한 듯 어슬렁거리는 괴물들을 불꽃과 검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포위에서 벗어났다.
나는 뒤돌아서 심연으로부터 멀어졌다.
놈들과 거리를 유지하되 아예 멀어지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잊어버렸다.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종종 그렇게 된다.
가끔 태양의 모양이나 그림자로 시간을 알아내는 법을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뜨거운 사막 지대 출신으로서 태양을 잊어버릴 때면 나는 울고 싶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 하늘에 떠 있는 황금색 눈, 숨 쉴 때마다 가슴에 차오르던 기쁨의 열기는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기억들은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직접 알고 느낀 게 아니라 마치 누군가 말해준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을 밀어냈다.
기억에 정신이 팔리면 둔해진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나는 작은 소녀였다. 그 아이는 옛 기억을 들추고, 예전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심연의 괴물들은 여전히 나를 쫓고 있었다. 놈들은 비명을 지르며 발톱을 세운 채, 터널을 가득 메웠다. 나는 남자를 놓아준 곳과 먼 곳으로 괴물들을 유인했다. 더 깊은 사막으로, 놈들이 탄생한 잊혀진 땅을 향해 이동했다.
전부터 수없이 해왔던 일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나는 포위되지 않도록 싸우다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마치 춤과 같았다.절대 끝나지 않는 춤.
괴물들은 명백히 굶주려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죽여도 줄어들지 않았다.
놈들의 수가 무한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간 내 의지가 꺾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지상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계속 싸워야 했다.
태양처럼,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점점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여전히 위에 있었다. 나는 하늘이 어땠는지 잊어버렸거나 악의로 가득 찬 공기가 지겨워졌을 때 가끔 지상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올라갔던 건 오래전 일이었다.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수록, 그 공기는 내게 점점 뜨겁게 느껴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나를 지상 세계가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인지 두려웠다.
위에서 만난 한 소녀가 생각났다.
예전의 내 모습 같았던 어린 그 소녀는 날 싫어하지 않았다. 나를 보고도 겁에 질려 도망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변하기 전의 내 모습을 그 소녀는 보았다.
내 갑옷을 본 사람들은 그 안에서 끓어오르는 파괴 본능을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난 그들을 원망하진 않았지만, 마음이 아팠다.
과거의 나는 그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은...
나도 모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존재로 변하여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어도 여전히 인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작은 소녀였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면 내게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을 뭔가 고귀한 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도 점차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 소녀마저도 잊어버리면 난 어떻게 될까?

공허 생명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목적이 바뀌었다는 것을 난 즉시 느낄 수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를 향한 추격이 시들해졌다. 마치 내게 관심이 없어진 듯했다.
놈들의 파괴 본능을 충족시킬 더 나은 표적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괴물들에게서 벗어났다.
갑옷의 힘으로 놈들보다 빠르게 구부러진 비밀 통로를 통해 터널을 돌았다. 계속 움직이면서 추격의 강도가 약해진 것을 확인한 후, 긴장으로 가득한 지상 세계로 올라갔다.
나는 그동안 지상의 정착지에서 먼 곳으로 괴물들을 유인했다. 하지만 뾰족한 바위탑의 숨겨진 틈으로 빠져나와 햇빛을 받는 순간, 내 생각이 얼마나 틀렸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내가 괴물들을 유인했다고 정말 믿고 있었다.
바위탑 꼭대기에는 거대한 머리뼈가 표지판처럼 놓여 있었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타내는 경고였다.
확실했다. 내가 놓아둔 것이기 때문에 잘 알았다.
나는 머리뼈에 한쪽 발을 올리고 사람들로 가득한 정착지를 내려다봤다.
제대로 보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아래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정교하게 지은 건물 사이로 정돈된 거리가 뻗어 있었다. 정착지 남쪽 끝에는 비단 차양으로 덮인 북적이는 시장과 신전인 듯한 건물 지붕에 달린 황금색 원판이 보였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바위탑까지 들려왔다.
구운 고기와 가축의 분뇨, 자극적인 향신료의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지상 세계의 '삶'이자 일상의 냄새였다.
잠깐이지만 나는 반쯤 잊어버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모래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가 떠올랐다.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심장이 요동치면서 숨이 가빠졌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험을 알고 있을까?
갑옷의 안쪽 면이 몸을 강하게 옥죄자, 나는 고통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갑옷은 굶주려 있었다. 나 자신과 갑옷, 어느 쪽이 내 행동을 더 많이 결정하는지 나는 궁금했다.
나는 감각을 곤두세워 공허의 존재들을 탐색했다.
놈들은 아주 가까운 사막 아래에서 지면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놈들의 공격이 임박한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나는 다시 투구를 쓰고 시야를 전환해 빛과 열의 형태를 확인했다.
정착지 쪽을 바라보자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나는 정착지 끝의 연병장으로 눈을 돌렸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수십 명의 사람이 무장한 채 정렬해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그들을 바라보다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전투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큰 소리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용기를 불어넣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 남자의 얼굴은 마치 눈앞에 있는 듯 뚜렷했다.
그는 내가 지하에 데려갔던 그 지도자였다.

나는 바위 사이를 뛰어내리며 정착지 쪽으로 내려갔다.
근처에 공허 생명체가 있어서인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머지않아 이곳에 들이닥칠 기세였다.
우리 안으로 뛰어들자 내 냄새를 맡은 가축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정착지 주민들은 처음엔 날 알아보지 못했지만, 곧 갑옷과 결합된 내 몸을 보고 하나둘씩 비명을 질렀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지도자에게 곧장 달려갔다.
내가 보여줬는데!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지?' 지하 괴물들을 보고 느낀 공포를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해 줬어야지!
하지만 결국 나는 그의 저항 의지를 북돋운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서 누군가 죽는다면 전부 내 잘못이자 내 책임이었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고 싶었지만, 결국 나 때문에 이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람들은 무기를 쥐고도 내 모습에 겁에 질려 흩어졌다.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전의 그는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지금 증오로 변해 있었다.
이자는 내가 자신을 죽이러 온 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투구를 벗고 남자 앞에 섰다.
"왜 아직 여기에 있지?" 난 소리를 질렀다. 뜨거운 사막 공기와 정착지 아래에 있는 공허 생명체의 냄새가 느껴졌다. 마치 구리 동전을 입에 넣은 느낌이었다. "어서 가!"
"꺼져라, 이 악마!" 남자가 소리쳤다. "너는 재앙의 전조일 뿐이야!"
나는 잠시 후에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괴물들을... '불러온다고' 생각해?"
"네 정체는 잘 알고 있다." 남자는 내게 다가서며 말했다. "너는 공허의 딸이야. 네가 어딜 가든 괴물들이 뒤따르지."
난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부인하려는 순간...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든 항상 공허 태생의 생명체들과 마주하고 싸웠으니까.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머리카락처럼 가는 보라색 광선이 갑옷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이 힘을 내 몸의 일부로 보았다. '내'가 이 '능력'을 통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면? 나는 곧바로 확인했다. 빛줄기가 내 의지대로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사실일까? 공허의 생명체들이 나를 따라오는 것일까?
아니, 그랬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다. 내가 놈들을 밖으로 끌고 나왔다면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 마음속 의문은 분노로 변했다. 손에 달린 빛의 칼날이 번득였다.
"난 이미 너를 한 번 따돌렸다." 남자가 칼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 네가 이끄는 괴물들과 맞서 싸우겠다."
"날 따돌렸다고?" 기가 막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남자는 칼을 휘둘렀지만,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다. 검술이 뛰어나진 않았기 때문에 나는 손쉽게 공격을 피했다. 남자가 계속해서 칼을 휘두르는 동안 정착지 주민들이 몰려들어 나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남자의 공격과 주민들의 적대심에 살아 있는 갑옷이 반응하기 시작했고, 내 몸에서는 전투 본능과 '살인 충동'이 끓어올랐다.
사람들은 내 두 번째 피부를 보고도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이들에게 가장 위험한 건 공허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이들은 갑옷 밑에 숨어 있는 소녀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으려 했다.
이들에게 괴물은 바로 나였다. 그렇게 믿는 게 더 편했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인해 내 가슴은 냉담해졌다. 왜 이들을 구해야 할까? 상실감 때문에 상처가 될 뿐인데, 왜 인간성을 지키려고 싸워야 할까?
그냥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괴물이 되어 버릴까?
그러는 편이 더 쉽지 않을까?
그때 나는 분노로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직접 지은 집 문간에서 지켜보고 있는 노인들,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들,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사랑과 작은 친절이 이 세상에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내가 괴물들과 싸우는 이유였다.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해서 싸웠다. 나처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을까?
그저 방관한다면, 내 안에 남은 소녀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난 이미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이번 역시 내가 나서야 했다. 비록 피를 흘리는 건 내가 아니겠지만, 그 짐은 내 몫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주민들이 의지하는 사람이자, 이들이 정착지에 머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이기거나 타협할 수 없고, 살육과 함께 더욱 강해지는 적과 싸우도록 용기를 불어넣는 존재였다.
주민들의 몰살을 막으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남자의 어설픈 공격을 쳐낸 뒤, 안으로 파고들어 손에 달린 빛의 검을 휘둘렀다.
작열하는 에너지가 몸속으로 들어가자 남자의 혈관과 신경, 뼈가 눈부시게 빛나더니 곧 큰 폭발이 일어났다.
마음이 아팠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속이 뒤틀릴 정도로 공허의 습격이 임박해 있었다. 공기의 질감도 급격하게 바뀌었다. 공허 괴물들이 지상으로 기어 올라왔다는 뜻이었다.
놈들은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모랫바닥 위로 남자의 시체가 떨어졌다. 나는 겁에 질려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서 어깨 주머니에 광선을 충전했다. 그대로 발사하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에서 들끓었다.
나는 나선형의 광선을 발사해 버려진 곡물 저장고를 박살 냈다. 씨앗과 바구니들이 불붙은 채 쏟아져 내렸다. 곧이어 시장에 불꽃을 발사하자 비단 차양이 사막 쾌속선의 돛처럼 불타올랐다.
밝은 보라색 불길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정착지의 집들을 파괴하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들은 나를 끔찍한 괴물로 보았다.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투시경으로 확인한 후, 사람이 없는 건물만 파괴했다.
사람이 없는 장벽과 방어벽 등, 공허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줄 만한 구조물은 모조리 무너트렸다.
난 그들을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도망치길' 바랐다.

바위탑에서 불타는 정착지를 내려다보는 사이 밤이 찾아왔다. 나는 경고의 표시로 놔둔 머리뼈에 한쪽 발을 올리고 있었다. 공허 태생의 괴물 무리가 송곳니를 드러낸 채 기이한 모양의 팔다리를 휘저으며 아래에서 기어 올라왔다.
그 소리는 마치 추수철 곡식을 휩쓰는 곤충 떼 같았다.
수를 세기는커녕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빨과 발톱이 큰 덩어리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파괴력을 내뿜었다.
놈들은 내 위치를 감지했지만, 난 도망치지 않았다.
적어도 놈들이 나를 쫓는 동안 정착지 주민들은 안전할 테니까.
지평선 위로 소름 끼치는 불빛이 일렁였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밝은 보라색 광선이 사막 깊숙한 곳에서 갈라지며 솟아났다.
정착지 주민들은 이미 도망간 뒤였다. 그들은 가축이 묶인 형형색색의 수레에 필요한 살림을 싣고 떠났다. 고대의 도르문 기수처럼 길게 줄지어서 서쪽으로 멀리 벗어났다.
그들은 새로운 강을 찾아 다시 정착할 때까지 모랫길을 따라 이동할 것이다.
내가 바라던 대로 됐다. 다시 정착하려면, 우선 '살아 있어야' 했다.
집을 떠나던 주민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바위탑 위에 있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저주했다. 공포와 증오가 가득했던 그 표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계속 날 증오하며, 괴물이 되어 버린 버림받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를 죽이고 마을을 파괴한 그 날을 묘사할 것이다. 그리고 슈리마 제국의 전설처럼 내 이야기는 점점 과장되어, 나는 여자와 아이들을 죽인 무정한 살인마로 둔갑될 것이다.
선두의 괴물들이 절벽 위로 올라왔다. 나는 갑각 투구로 얼굴을 덮고 손에서 보랏빛 불꽃을 발사했다. 그리고 몸이 점점 뜨거워지며 익숙한 흥분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라도 그들을 지킬 수 있다면, 난 상관없었다.
그런 짐이라면 기꺼이 질 수 있다.
'내가 그들의 괴물이 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