콥트어
1. 설명
콥트어는 후기 이집트어이다.
고전 이집트어의 직접적인 후계 언어이며 이집트가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로도 제2언어로 오랜기간 동안 쓰였지만, 12세기를 기점으로 점차 아랍어(이집트 아랍어)로 대체되면서[1] 18세기부터는 콥트 정교회의 전례 언어나 학술언어로만 쓰이고 실생활에서는 사실상 사어가 되었다.
2. 콥트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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콥트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이집트어 특유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한 6-7개의 보충문자가 쓰였다.[2] 이집트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역에 포함된 이래 7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고, 이슬람 정복 후에도 12세기까지는 기독교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그리스어에서 빌려온 단어들이 많다.[3] 콥트어는 아니지만 현대 아랍어 이집트 방언에서도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은 단어들이 상당 부분 남아있다.
기본적으로 코이네 그리스어 시절의 그리스 문자를 가져왔기 때문에 중세, 현대 그리스 문자와는 독음법이 조금 다르다. 특히 Η/η 가 중세 및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i 음가로 통합된 반면에 콥트 문자에서는 e와 i의 중간으로 나타나며, Φ/φ의 경우도 중세 및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f 음을 내지만 콥트 문자 도입시기에는 ph 로 발음되었기 때문에 콥트 문자에서 f 음가를 가진 글자가 추가되었다. 하지만 현대 콥트어에서는 두 글자가 모두 f 음가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 뒷부분에 붙은 Ϧ 와 ϩ는 아랍어의 가래끓는 h음과 목젖에서 내는 강한 h음을 나타내며 각각 아랍 문자의 خ와 ح 에 대응된다.
3. 오늘날의 모습
19세기부터 이집트에서 콥트어 부활 운동이 불어서 현재는 콥트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종교 언어로 쓰이고 있다. 당장 옆나라인 이스라엘부터가 완전히 사어가 됐던 히브리어를 어거지로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듯이 콥트어 부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집트도 하려면 못 할 것 없다는 생각인 듯 하지만, 기독교도들이 사회적으로 소수인 데다가 콥트어를 배운다 해도 취업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4]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의 주요 외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서 부활 운동이 영 동력을 얻지 못한다[5] . 학계에서 종사하거나 교육이나 출판 관련업계에서 일하거나 아예 콥트교 성직자가 되지 않는 이상 콥트어 써먹을 데가 별로 없다. 한국에서 한문 교과목이 별로 인기가 없는 이유와 일맥상통하다.
이집트 기독교도들조차도 이집트 아랍어를 구어로 사용한다. 이는 이집트가 아케메네스 왕조에게 정복당할 당시만 해도 자국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강한 자긍심이 있었으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벌당한 후 여러 차례 외국 세력의 지배를 받아가면서 서서히 그 자긍심과 근성을 잃어버렸던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한다. 끝까지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를 고집했던 이란이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는 모습과 자신들의 언어를 잊어버리고 아랍어를 쓰는 이집트의 모습이 참 대비되는 대목이다.
- 다만 콥트어의 사멸(전례어, 또는 연구자들을 위한 언어로의 전락)과 달리 페르시아어는 현대까지도 상용되는 공용어로 살아남은 것을 '자긍심'이나 '근성'과 같은 정신론적인 차원에서만 설명하려 드는 태도는 옳지 않다. 일단 이슬람 제국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어가 살아남은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는 당장 그 이슬람 제국 내에서 페르시아어가 제 2 공용어(행정, 군사 분야의 공용어인 아랍어에 비해 문화 분야의 공용어인 페르시아어)에 가까운 강력한 지위를 차지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 사막의 유목민들인 아랍인과 아랍 문화를 모태로 한 이슬람 제국은 탄생 초기에는 아직 충분한 문화적 역량을 축적하지 못한 상태였던 데 비해, 사산 왕조 페르시아(이란) 제국은 군사적으로는 아랍인들에게 정복되었을지언정 문화적 역량에서는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에 이후 전성기를 맞은 이슬람 제국의 문화는 상당부분 페르시아의 문화적 유산을 모태로 성립되었으며 이로 인해 국제적 제국으로 성장한 이슬람 제국 내에서 페르시아어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콥트인들의 경우, 물론 콥트인들의 전 모국이었던 동로마 제국 자체는 이란 제국 이상의 문화적 역량을 갖춘 문명국가였으나 이란 제국 내에서 철저히 주류였던 페르시아인들에 비해 콥트인들은 동로마제국의 주류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슬람 제국에 정복당한 후 제국 내에서 발휘할 수 있던 문화적 역량의 수준이 페르시아인에 비해 크게 모자랄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사실상의 제 2 공용어로 자리잡은 페르시아어에 비해 콥트어는 지방 언어의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당장 이슬람 제국-이슬람 세계 내에서 이름을 떨친 학자나 관료, 문인들의 숫자만 보더라도 페르시아어 사용자와 콥트어 사용자는 말 그대로 자릿수가 다르다.)
또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싶다면 페르시아인과 콥트인들이 아랍인들에 의해 지배받은 기간 역시 완전히 다르다는 점도 함께 감안해야 한다. 중세 이슬람 제국의 심장부는 기본적으로 레반트(시리아)+이집트+메소포타미아였고, 이란 지방은 그 융성함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제국의 중심부를 기준으로 보면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변방' 이었다. 이 때문에 아랍-이슬람 제국이 페르시아를 직접적으로 지배한 기간은 정통 칼리파 시대~우마이야 왕조~압바스 왕조 초기, 즉 중세 전기에 한정되고, 중세 성기에 들어서면서 이슬람 제국의 영향권에서 이탈했다가 결국 유목민인 튀르크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 물론 유목민인 튀르크인들의 지배가 페르시아의 문화적 역량에 타격을 입힌 바도 상당하지만, 반대로 아랍인들보다 더 문화적 역량이 부족했던 튀르크인들은 페르시아를 지배하게 되면서 그나마 자신들의 언어를 강요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냥 페르시아화 수순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당장 서아시아를 제패했던 셀주크 제국의 공식 궁정-행정 언어는 페르시아어였고, 이후 또 서아시아와 동유럽까지 제패한 오스만 제국에서 사용한 오스만어 역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모두 강하게 받을 정도였던 것[6] 결국 페르시아어는 중세 전기의 비교적 짧은 아랍어 지배기간을 거친 후 튀르크인들에 의해 다시 주도언어의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고, 당연히 중세 중기부터 현대까지 페르시아 지방의 공용어라는 지위를 누려왔다. 이슬람 세력의 중심부로써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랍어의 강력한 지배력이 유지되었던 이집트의 콥트인과 같은 수준에서 비교할 문제가 아닌 것. 이런 정세적 차이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문화와 자긍심을 잃은 콥트인> 과 <끝까지 자신들의 언어를 고집한 이란인>의 구도를 대비시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콥트어를 배우는 사람은 주로 역사학도나 고고학도 학생들이 주 대상이며, 콥트교도 수가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다 보니 수요가 나름대로 있는 편이다. 다른 나라의 역사학자들이나 고고학자들도 이집트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콥트어를 배우기도 한다. 특히 고대 이집트어의 직계후손격 언어다보니 이집트 문명 당시의 이집트어를 재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다만 정작 본국 이집트 내에서는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등의 외국어에게 밀린다는 것이 슬픈 현실(...)4. 간단한 회화
비록 현재는 교회 전례에서만 쓰이고 있지만 간간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상이집트의 아시우트의 경우 1860년대까지도 콥트어만 쓰는 마을도 있었다고 하며, 여전히 상이집트에는 콥트인이 많이 산다.
5. 들어보기
콥트어 주님의 기도
콥트어 성가 '평화의 임금' (Επουρο; 에포로). 이 성가에서는 반주악기로 시스트럼이라는 악기를 사용한다. 고대 이집트 때부터 사용되어 온 유서 깊은 악기로 오늘날에도 콥트교회 전례에서 쓰인다.
콥트어 시편(148, 149, 150편) 독송. 영상에 콥트 이콘과 더불어 콥트어가 적혀있기 때문에 발음 대조하기에 용이하다. 거의 절반은 그리스어와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콥트어로 부르는 이집트 국가.
콥트어 일요일 찬송가
[1] 아랍어라고 해도 이집트 방언은 콥트어의 영향과 시대상에 따른 변화로 표준 아랍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2] 이 보충문자는 이집트 민중문자로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에 결정적인 힌트가 되었다.[3] 의외로 이슬람화 이후로도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이집트에서 그리스어가 학문용어 등으로 쓰여왔다. 그래서 이슬람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중세 시기에 고대 그리스 서적들을 아랍어로 대거 번역할 수 있었고, 아랍권의 문화와 과학기술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아랍어로 번역된 서적은 서유럽으로도 수출되어서 서유럽의 과학기술 발달이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4] 참고로 이집트는 관광업 비중이 상당히 큰 데다가 청년실업률이 40-50%대를 넘나드는 상황이기 때문에 콥트어를 배우는 것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5] 애초에 콥트어 부활 운동의 중요한 전범으로 꼽히는 히브리어의 부활이 성공한 배경에는 현대 국가로써 이스라엘의 탄생이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언어(유대 제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이 새로 건국된 이스라엘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중립적인 공용어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 공용어로써 (부활 운동의 성과가 상당히 축적되어있던) 히브리어가 채택되면서 공용-상용 언어로써 히브리어의 부활이 이루어진 것. 즉, 하나의 국가와 그 국가 단위의 필요성이 히브리어 부활에 강력한 동력을 공급한 것이다. 이 정도의 동력을 공급해줄 주체나 계기가 없는 이상 콥트어의 부활 운동은 힘든 과제일 수 밖에 없는 것.[6] 호라산의 발흐 출신인 잘랄 웃 딘 루미가 튀르크어는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도 페르시아어만 가지고 터키(아나톨리아)의 콘야에서 재판관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페르시아어는 중세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