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 전차 티거
1. 소개
- 영국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독일 전차의 완성, 타이거' 편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이 개발/운용한 중전차이다.우리 전차병들은 티거 전차의 성능에 완벽히 만족했으며 우리 보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전차를 가지고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의 힘겨운 방어전투에서 살아남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평화를 누리는 티거 전차병 출신이라면 마땅히 이 '명품 전차'에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 오토 카리우스, '진흙 속의 호랑이' 中
정식 명칭은 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H (6호 전차 H형)이었다가 1943년 3월 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E (6호 전차 E형)으로 재명명됐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식 명칭보단 역시 Tiger I[4] , 티거라는 별칭으로 불렀고(어원은 호랑이) 1944년 2월 히틀러의 명령으로 정식명칭에 Tiger가 들어가서 Panzerkampfwagen Tiger Ausf. E가 됐다. 연합군에서는 영어 발음을 따서 타이거 탱크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워낙 강한 포스를 보여준 덕분에 티거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지상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아이콘 격의 존재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만큼 관련분야에서 유명하고 인기도 많다.
형식번호상 6호 전차라곤 하지만 5호 전차 판터보다도 앞서 개발되고 배치됐기에 대전 후기에 대세를 탄 경사장갑이 아니라 전통적인 대전 초기 독일군 전차의 특징인 수직방향 장갑을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티거를 보면 상자곽 혹은 꼭 책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5]
1942년 초반에 생산을 개시하여 1942년 9월 23일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첫 데뷔하게 된다. 총 4대가 투입되었으나 초기불량 문제에 소련군의 화망에 걸려 전부 주저앉아 버리는[6] 굴욕을 겪는다. 투입된 전장도 소련군이 이미 정조준하고 노리고 있는 좁은 곳인데다가 티거에게는 걸맞지 않은 늪지대나 연약지반이 많아서 이렇게 영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때의 경험으로 티거는 몇 가지 결함이 수정되며 운용교리가 정립된다.
하지만 티거의 진가가 드러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42년 12월 20일, 튀니지의 레조 디 칼라브리아 항구에 도착하여 북아프리카 전역에 투입된 티거를 장비한 1942년 5월에 창설된 501 중전차대대는 이미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군이 신나게 밀리는 상황에서 부대 자체도 티거를 완편 장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7] 11월 8일에 알제리로 상륙한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이후 3월 13일에 추가로 지원온 504중전차대대 1중대가 합류되면서 5월 17일까지 150여 대의 미군 전차를 날려버리더니 카세린 전투에서 미1기갑사단을 격파하며 10대의 피해만 입는 대활약을 펼쳤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항복할 때까지 티거는 총 7대의 전투손실을 입었으며 그동안 300대가 넘는 영연방군과 미군의 전차를 격파했다.[8] 티거의 볼썽사나운 데뷔전을 기록했던 502중전차대대는 1942년 말부터 계속된 레닌그라드를 해방시키려는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독일 중전차 대대 중에서도 특출난 활약으로 수백 대의 소련군 전차를 날려버리며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거기다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선 중대 단위로 투입된 티거가 하르코프 북방에서 펼쳐진 소련군 기갑부대의 반격을 분쇄해내며 티거의 위력을 톡톡히 보였고[9] 여기서 티거는 설원에서의 기동전까지 수행해 내는 능력을 보였다. 한 예로 이 무렵 티거 2대가 T-34 수십여 대와 교전하여 16대를 격파하자 나머지 소련 전차들이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이들을 추격하여 18대를 추가로 격파했다.
그리고 전쟁 중반기 이후 각 전선의 독일군이 끝없이 패퇴하던 무렵에도 노련한 전차병의 경험과 맞물려 다대한 전과를 기록했다.
티거는 대전기간 내내 우수한 방호력으로 승무원들을 지켜주며 무수히 많은 전차 에이스들을 배출했다. 요하네스 뵐터 139대 이상[10] , 오토 카리우스 150대 이상, 쿠르트 크니스펠 168대 이상[11] , 미하엘 비트만 138대 이상[12] , 마르틴 슈로이프 161대 이상[13] , 알베르트 케르셔[14] 100대 이상 등, 티거는 100대를 넘는 격파수를 찍은 에이스를 10명 이상 배출했다.[15]
물론 그렇다고 무적의 전차까지는 아니었다. 특히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연합군도 티거의 유명세만큼이나 대응책을 고민했기 때문. 서부전선에서는 M4셔먼의 76mm HVAP탄은 논외로 치더라도[16] , 76mm M62 피모철갑탄이나 M79 경심철갑탄에는 900야드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면 관통될 위험이 있었고, 측면이 노출될 경우 그보다 더 먼 거리에서도 뚫릴 위험이 높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90mm 대전차포 혹은 그것을 장비한 M36 잭슨은 원거리에서도 17파운더보다 더 정확하고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영국의 경우 17 파운더 대전차포나 그것을 장비한 셔먼 파이어플라이 경우는 명중률로 까이는 APDS 말고도 그럭저럭 쓸 만한 명중률을 보인 APCBC탄으로도 멀리서 티거를 거꾸러트릴 능력이 있었다. 동부전선으로 가면 SU-85와 T-34의 85mm APCR이 근거리에서 티거의 정면을 관통 할 수 있었고 SU-100의 100mm나 IS-2, ISU-122의 122mm는 장거리에서 티거를 잡을 수 있었다. SU-152, ISU-152 의 주포이며 일반 견인포로도 사용된 152mm ML-20 곡사포의 무지막지한 고폭탄의 위력 때문에 차체 자체가 뭉개진다.[17] 더불어 운용하는 지휘관이나 승무원이 미숙한 판단을 내릴 경우 502 중전차 대대의 볼썽사나운 데뷔전만 되풀이 될수 있음은 덤이다.[18] 물론 독일은 이 시점에서는 더 우수한 방어력의 티거 2나 판터로 생산라인을 변경하고 있었다.
티거의 자세한 내·외부 모습을 보고 싶다면 보빙턴 전차 박물관의 131호 차량에 대한 시리즈가 참고할 만하다. 인트로 외부 정비 내부(차체) 내부(포탑) 영상이 상당히 알차고, 특히 쉽게 보기 힘든 티거의 자세한 '''내부''' 모습과 각종 세세한 디테일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시리즈이니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볼 수 있다. 보다보면 정말 세세한 부분에서 신경을 많이 쓴 전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1. 표기법
잡설이지만 한국 매체에서는 이 전차 이름의 한글 표기를 놓고 좀 혼동이 있다. 일단 원어 발음은 티이거에 근접하지만 한글의 외래어 표기법상 장음 표기는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티거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긴 하다. 정확히 하자면 티거와 티이거의 중간정도.[19]
1980년대까지는 영어 발음인 '타이거'로 많이 불리다가 1991년 등장한 호비스트에서는 '오리지널 독일어 발음'이라면서 '티이거'라고 불렀다. '티이거' 표기는 호비스트에서 싸우고 뛰쳐나와 만든 사람들이 만든 책인 모델러2000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2006년 호비스트에서는 표기법을 '티거'로 바꾸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형 메이커인 아카데미과학에서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자사의 해당 전차 모형 상품명에 타이거 표기를 고수하고 있다.
그리하여 2010년대에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타이거', '티이거', '티거' 3가지 표기가 쓰인다.
1.2. 개발
티거 개발의 시초는 193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5년 7월 쿠머스도르프 기갑훈련 종료 후 결과 분석에서 15톤급 주력전차, 20톤급 지원용 중형전차, 30톤급 적 전선 돌파용 중전차의 개발요구가 제시되었는데 이 중 15톤급 주력전차 계획안은 3호 전차, 20톤급 중형전차 계획안은 4호 전차, 그리고 마지막 30톤급 중전차 계획안이 바로 티거의 개발 프로젝트가 된다.
처음 제시된 30톤급 중전차 개발 계획은 DW(Durchbruchswagen, 두어히부룩스바겐: 전선 돌파차량) 계획이란 이름으로,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3호와 4호로는 접근 자체가 어려운 요새화된 방어선에 두터운 방어 장갑으로 둘러친 견고한 방어력을 기반으로 적의 십자 포화를 맞으면서 밀고 들어가 진격로를 개척하는, 중전차로서의 개념이 처음으로 제시된 프로젝트였으며 1939년 초 VK 30.01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화력과 장갑의 부족으로 같은 해 새로이 VK 65.01 설계와 80톤급 '포전차'의 설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1940년 프랑스 전역의 전훈을 받아들여 두 프로젝트가 모두 폐기되고 대신 '포전차'의 10,5cm용 포탑을 경량화하여 장갑을 증강한 VK 30.01 차체에 올리는 VK 36.01 계획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0,5cm 주포는 본디 곡사포로 대전차화력은 의심스러웠으며 이에 게라트 725 7.5cm 구경 감소포[20] 의 탑재를 고려했다.
동시기, 독자적으로 VK 30.01 설계에 참여한 포르쉐사는 1941년 8,8cm 주포를 탑재한 VK 30.01 (P)를 완성시키고 성공적으로 시험운행했다. 두 차량은 차기 중전차후보를 놓고 실질적으로 경합하는 처지가 됐는데, 1941년 5월 히틀러가 구경감소포 탑재에 딱지를 놓으면서 일단 포르쉐사의 손을 들어주는 한편 양사에 현 설계의 장갑을 늘리도록 주문하면서 45톤급 중전차 VK 45.01의 설계를 놓고 양사의 경쟁이 다시 시작됐다.
바르바로사 작전과 모스크바 공방전의 전훈에 따라 VK 45.01의 최종 설계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요구사항들이 반영되었다.
1. 요새화 된 소련군의 전선 돌파를 위하여 ZiS-3 대전차포에 대하여 전방위 지근거리에서 생존가능한 방어력을 확보할 것.[21]
2. KV-1, T-34전차는 물론이고 콘크리트 벙커도 일격에 격파할 수 있도록 88mm 대공포를 올릴 것.[22]
3. 모스크바의 눈밭과 열악한 소련의 도로 사정을 고려하여 접지압 분산에 충분히 신경 쓸 것.
4. 45톤의 중량은 독일 공병의 표준 부교 가설능력이나 유럽의 일반적인 교량 제한 하중을 까마득히 넘어버리므로 수심 4m의 도하 능력을 갖출 것.
결국 1942년 4월 20일 히틀러의 생일을 최종 기한으로 양사의 시제품의 경합테스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때의 시제품 개발 일정은 매우 가혹했던지라 헨셸사는 도저히 무리라고 징징댔고 그 결과 포탑은 포르셰사에서 설계한 것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으로 차체만 경합 테스트 하게 된다. 포르셰사 역시 기차역에서 최종 조립을 할 정도로 준비는 촉박하게 진행되었다. 경합이 시작되고 헨셸사의 VK 45.01 (H)는 주행 중 엔진에 화재가 일어났다. 반면 포르셰의 VK 45.01(P)의 경우도 널리 알려진 문제였던 야지 기동은 성공했지만 오히려 도로 주행에서 퍼져버렸다고 한다. 하중 분배에 실패한 VK 45.01(P)와 비교하여 VK 45.01 (H)는 탁월한 조향능력과 험지 기동 능력을 선보이며 최종적으로 군부는 헨셸사의 VK 45.01 (H)에 손을 들어주었다. 독일어 위키피디아의 최신 갱신내용에 따르면 포르셰 박사는 히틀러에게 양사의 테스트가 박빙이었고 하이브리드 기관의 완성을 장담하여 양사의 프로젝트를 모두 양산하자고 히틀러에게 건의하고 히틀러는 하이브리드 기관의 완성까지 3개월을 주고 동시에 여름 안으로 헨셸사에 45대, 포르셰사에 90대의 양산을 명령했다고 한다.[23] 이와는 다르게 워게이밍의 문서에 따르면 히틀러는 전차가 급히 필요했으므로 양사 모두 양산하라 명령했다고 한다. 포르셰 박사의 하이브리드 파워팩이 당면한 결점들은 끝없이 평평한 초원과 사막이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며 사막환경에서의 내연기관은 공기 흡기시 모래 유입으로 인하여 고장이 심할 수 있는 반면 모터 기관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기대하여 북아프리카 전선은 포르셰사의 티거를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포르셰사의 티거는 양산납기였던 9월까지도 하이브리드 기관 안정화에 실패하여 10월 중 알베르트 슈페어가 재심사 후 발주를 취소한다. 덩달아 준비 중이던 3개 대대의 무장을 헨셸사의 티거가 홀로 도맡아야 했으므로 초창기 중전차대대들은 궁여지책으로 3호전차 N형을 혼성편성하게 된다.
VK 45.01의 개발도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주포 탑재 문제가 이유였다. 대공포를 전차포로 전용한 8.8cm 주포는 당시로서는 독일군이 보유한 대전차 화기 중에서도 손꼽히는 관통력을 자랑했지만, 독일군이 원하는 수준은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라인메탈 사에선 7.5cm 장포신 전차포를 개발 중이었고, 독일군 상층부는 이 주포에 눈을 돌려 티거에 탑재할 계획을 세운다. 7.5cm 주포에 맞춘 새로운 포탑도 설계했다.
이러한 선택엔 이유가 있었는데 일단 개발 당시 8.8cm 56구경장 포와 7.5cm 70구경장 포는 관통력 차이가 거의 없었던데다[24] 7.5cm은 구경이 작기 때문에 더 많은 탄약을 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행양산분에만 8.8cm 주포를 탑재하고 이후 본격적인 양산형에는 새로이 설계한 라인메탈 포탑과 7.5cm 주포를 탑재하여 출고하기로 계획하기에 이르나 8.8cm 주포용의 신형 철갑탄이 개발돼 상기한 관통력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포/포탑 교체안은 없었던 것이 된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VK45.01은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저 70구경장 7.5cm주포는 후에 판터의 주포가 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티거는 당초 계획이었던 45톤에서 크게 벗어난 57톤의 무게를 갖추게 되었다.
2. 성능
2.1. 방호력
차체전면 100mm, 포탑전면 120mm, 측면과 후면 80mm, 차체 측면 하부 60mm, 상하 장갑은 초기형 25mm, 후기형 40mm의 장갑을 골고루 둘렀으며 마레이징 강판을 교차로 끼워 용접하여 장갑이 쉽게 깨지는 일이 없었다. 영국군은 북아프리카에서 노획한 티거의 차대로 실험한 결과 티거의 장갑은 동급의 영국 장갑보다 1~7%가량 우수하다고 판단했다.
허나 티거의 상자 같은 수직형 장갑은 티거의 방호력을 낮추는 요인 중 하나였다. 이는 여전히 경사 장갑의 이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독일 육군 수뇌부의 실책이었다. 월드 오브 탱크 기술자문 니콜라스 모런에 따르면 당시 독일 설계자들은 10도의 경사각과 변속기 쪽 급경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하며[25] , 실제로 티거 전면 장갑은 100mm 10도, 4호 전차는 50mm 10도, 3호 전차는 50mm 12도 장갑이다.
오토 카리우스의 자서전인 진흙 속의 호랑이를 보면 티거가 실전 배치될 때 수령하러 간 카리우스가 생각하길 전쟁 전에 소련에 독일이 유압 프레스기를 넘겨주고 소련은 그걸로 멋진 경사장갑을 가진 T-34나 T-43(T-34(1943))을 만들었는데 우린 왜 수직 장갑이냐고 생각하는 부분이 나온다.
독일이 이러하게 생각한 이유는 경사 장갑의 이점을 과소평가하고 단점을 더 큰 문제로 봤기 때문이다.[26] 경사 장갑의 가장 큰 단점은 같은 면적을 덮는데 좀 더 많은 장갑재가 필요하여 소모자원과 무게가 늘어나고 경사 장갑 안쪽이 비게되는 공간을 활용할 수 없다는 점인데, 독일은 이러한 부분들에 좀 더 중점을 두게 되었다. 수직 장갑을 대폭 채용한 4호 전차 이전 전차와 6호 전차는 모두 2차대전이 터지기 이전 전간기 중에 개발되었던 전차들이였는데 이러한 현대식 전차 개발 자체가 새로운 분야였고 수직 장갑과 경사 장갑의 이점과 문제점을 실전에서 아직 검증하지 못했던 단계였기에 이러한 식으로 경사 장갑의 이점을 과소평가한 경향이 있었다. 또한 트랜스미션은 어차피 자체전면 장갑 아랫쪽에 위치해야되는 점을 이용하는(M4 셔먼) 식으로 공간낭비를 최소화하면서도 경사 장갑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디자인을 생각하는 발상 혹은 설계 노하우의 부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후 다양한 실전을 치르고 타국 전차 설계들을 목격하여 경사장갑의 엄청난 이점을 깨달은 독일은 티거 이후로 경사 장갑을 매우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판터 전차, 헤처, 티거 2, 심지어는 마우스 전차까지도 경사장갑 설계를 선택했을 정도이다. 프로토타입이나 설계도, 혹은 차체밖에 없던 E-100, 7호 전차 뢰베 또한 경사 장갑을 채택했으며 티거2의 개수형인 야크트 티거까지도 전면을 경사 장갑으로 처리했고, 대전차전 용도가 아닌 정찰전차 VK 16.02조차도 경사장갑으로 설계했을 지경이다.[27] 단, 이것은 독일이 경사 장갑이 수직 장갑에 비해서 압도적인 우수함을 가졌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각 장갑의 장점과 단점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체감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이후에 경사장갑을 채용한 전차들은 대부분 좀 더 높은 방어력이 필요한 전면에 집중되어 있으며, 측면장갑은 거주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수직에 가까운 얕은 각도를 보인 형상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비단 독일만의 변화가 아니며, T-34 시절에는 측면 장갑도 경사장갑으로 도배했던 소련도 세월이 지나서 측면 경사장갑의 공간적 불리함을 인지하고 T-44와 그 이후 전차들은 측면 경사장갑을 사실상 폐지하는 식으로 디자인을 변경한다.
영국 제2작전연구과가 1944년까지의 통계를 정리한 보고서에 따르면 티거는 전투불능이 되기까지 평균 2.6발의 관통탄을 맞아야 했다. 이는 판터의 1.9발, 4호전차 1.2발, 셔먼 전차 1.55발과 비교해 높은 수치였다. 다시 말해 관통탄을 맞고도 전투에 필요한 핵심 장비들이 망가지거나 승무원들이 사망하는 확률이 매우 낮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는 방호력 보다는 탈출해치나 넓은 내부공간에 더 좌우되는 사항이기 때문에 중전차와 중형전차의 태생적인 차이로 보아야한다.
1942년 9월 등장 시점에는 각국의 주력 대전차포로는 티거를 격파하기에 역부족이었는데, 소련은 티거를 거뜬히 관통할 수 있는 F-22[28] 대전차포를 죄다 독일에게 노획당했으며, 57mm ZiS-2 대전차포는 빈약한 대보병능력이 마음에 안들어 소량만 생산하여, 영거리에서도 티거의 전면을 뚫을 수 없는 ZIS-3를 주력 대전차포로 사용되는 상황이었고,
영국은 윈스턴 처칠 수상의 판단으로 신형인 6파운더의 등장이 늦어졌고, 생산설비의 부족으로 단포신 사양을 한동안 사용해야했으며, 거기에 더해서 미국과 영국의 초기형 철갑탄의 탄자붕괴현상으로 인해 대전차전에서 골머리를 썩으며, 현지 병사들의 임기응변으로 해결하는 상황이었다.[29]
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1943년도 부터는 티거에게도 점점 위험요소가 증가하게 되는데, 소련은 57mm ZiS-2 대전차포와 SU-122, SU-152, SU-85 등의 대구경 자주포들의 생산을 시작하고, 영국과 미국은 탄자붕괴현상을 완전해결했으며, 6파운더는 장포신이 생산되며, 17파운더의 생산도 본궤도에 올랐다. 또한 미국이 참전하면서 3인치 대공포를 장착한 대전차자주포가 전선에 대량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은 APDS를 생산하였으며, 76mm M1A1로도 별 성과를 못낸 미군은 90mm 대공포를 전차포로 개량하고, 소련도 100mm대전차포를 배치한다. 이로써 연합군은 티타임을 잡은 티거도 원거리에서 쉽게 격파할 수 있었고 이때 독일군도 티거의 생산라인을 티거 2로 변경, 생산을 종료했다.
2.2. 화력
포 자체의 위력에 대한 정보는 8,8cm FlaK 참고. 티거의 주포는 사실상 FlaK 36의 포를 거의 그대로 얹은 물건이라 구경장(L/56)까지도 같다. 대충 등장 당시인 1942년 기준으로, 표준 교전거리 이내(종종 그 이상에서도)에서는 연합군의 모든 전차를 각도에 상관없이 일격에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진 포였다.
1944년 후반 쯤 되면, 연합국에 IS-2 같은 중전차들이 튀어나오면서, 슬슬 티거의 포가 먹히지 않게 되나[31] , 이 시기 쯤엔 티거가 거의 소진되고 티거 2 같은 후속 전차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포의 위력과 별개로 사격 능력도 뛰어났다. 고성능 머즐 브레이크, 안정된 무게중심의 고중량 차체와 서스펜션 덕에 오히려 원본보다도 훨씬 안정적인 사격이 가능했으며, 88mm라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구경의 일체형 포탄으로 장전 속도도 빠르고 휴행탄수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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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장치된 칼 자이스 TZF9b 광학 조준기의 품질도 우수했는데 초기형이 2.5배, 후기형은 5배까지 줌이 가능했고 독특하고도 쉬운 거리 측정 방법으로 장거리에서도 정확하게 목표를 타격할 수 있었다. 덕분에 1~2km 밖의 적 전차를 저격한 사례도 제법 있는 편이다.[32]
사실 TZF9b 조준기의 가장 무서운 점은 비례법을 이용한 거리측정에 산술계산을 정확성을 유지하며 추상화시킨 부분으로 조준기 안의 적 전차 차종을 식별했고 그 차종이 야전교범을 뒤질 필요가 없는 대량생산으로 쏟아져나와 이미 익숙한 차종이라면 곱셈 암산 한 번으로 포수의 거리 측량 속도가 거의 0에 수렴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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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4월 21일에 영국군은 제펠자파[33] 에서 거의 손상되지 않은 501 중전차대대의 3소대 소속의 131호[34] 티거를 노획한다.[35][36] 영국군이 이 차량을 분석한 결과 티거의 명중률과 기동간 사격 등에서 극찬을 내렸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오토 카리우스가 사망하기 얼마전인 2014년 말에 했던 인터뷰에서 "기동간 사격은 명중률이 너무 떨어지기도 했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거든요."라며 티거의 기동간 사격 능력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부무장으로 포탑 정면에 MG34 동축 기관총, 그리고 무전수 위치에도 차체 기관총으로 MG34를 장비했다. 장탄수는 각 4,500발. 차내에는 비상상황을 대비하여 M24 슈틸한트그라나테(막대형 수류탄)과 MP40 기관단총이 상시 비치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S마인이라는 도약식 대보병지뢰를 발사할 수 있었는데 대보병 효과는 만점이었으나 적의 소화기 집중사격 등으로 오작동하기가 쉬웠기 때문에 중기형부터는 폐지되었다. 이 장치가 오작동할 때 옆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폐지한 이유가 쉽게 납득이 갈 것이다.
2.3. 기동력
티거에 채용된 마이바흐-HL210 P45엔진은 V12에 최대출력 650PS으로 당시에는 세계최고 출력의 가솔린 엔진[37] 이었지만 전투중량 57톤의 거구를 움직이기엔 충분치 않았다. 중기부터 HL230 P45엔진으로 교체 최대 출력은 700PS으로 증가한다. 최초 투입되었던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엔진의 화재결함이 발견 되었고 티거는 최대속력을 내지 말고 다른 차량을 견인하지 못하는 조치가 취해진다. 또한 최초로 온도 센서에 전압으로 접점 동작을 시켜 소화분말을 분사하는 자동소화장치를 장착하였다. 유압식 조향장치, 전진8단 후진4단의 반자동변속기도 최초로 탑재되었다. 이 변속기는 운전이 쉽고 선회반경도 놀라울 정도로 작고 제자리 선회도 가능했지만, 티거는 궤도 장력을 유지하는 유동륜이 보기륜보다도 작고 낮은 위치에 있어서 함부로 움직였다간 잘 빠졌다고 한다. [38][39] 경사면 주행시에도 고장이 심해 운전자에게 세심하고 부드러운 조작이 요구되었다.[40]
티거 전차는 근본적으로 1935년에 시작된 전선돌파차량 설계의 확대 및 계승형이며, 이 설계의 화력과 방어력을 개선하면서 30톤 급 설계에서 36톤급 설계로, 그 다음엔 45톤으로 불어나고 종국에는 완비 중량 57톤으로 계속 덩치가 커졌다. 그러나 이를 추진할 구동계는 그에 걸맞은 상태가 아니었는데 동부전선의 수요가 매우 급했던 까닭에 신형 중전차를 서둘러 배치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40톤밖에 못 버틸 구동계[41] 를 무려 57톤짜리 전차에 얹고 시운전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제식도입하여 곧장 전장으로 내보냈던 것이다. [42] 생산을 지속하며 개량을 했지만 본디 30톤이었던 것을 57톤으로 비대하게 키웠던 데서 발생한 한계는 벗어나지 못했다.
이 문제는 군수지원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났는데 독일의 군수지원체계가 60톤에 육박하는 무게를 가진 장비를 운용하기 위한 프로세스를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고장이 나버리고 전용구난전차가 제때 오지 않으면 전황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는 버리고 나가야 했다. 물론 전후 전차인 M48, M60, M1전차도 엔진이 잔고장이 많이 났지만[43][44] 해당 무게의 장비를 운용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갖추고 있었기에 운용할 수 있었다.
티거의 중량 문제로 교량통과가 어려워 도하를 위해 차체는 전부 방수처리되었다. 슈노켈을 장착하면 도하는 4m까지 가능했다. 이 방수처리와 수압 테스트 과정에서 티거 개발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상승했다고 알려졌으며 잠수능력을 포기한 중기형부터 제작속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였다. 어차피 야지에서 도하를 한다는 것이 이런저런 준비시간도 많이 걸리고[45] 위험했기[46] 에 잘 쓰이지 않았다. 방수처리를 포기한 티거도 1.6m의 수심까지는 그럭저럭 도하가 가능했다고 한다.
티거의 중량문제는 교량뿐 아니라 그동안의 다른 기갑차량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들이 야기 되었다. 바로 지반 자체가 티거의 중량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지반이 영 좋지 않은 동부전선은 물론이고 둑길, 제방, 지하실이 많은 주로 프랑스의 도심 및 작은 마을들에서 지반 붕괴로 손실된 티거의 수도 적지 않았으며 티거 승무원들은 기동 중에 이러한 위험들에 대해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47]
독일은 전차용 토션바 서스펜션을 3호 전차에서 완성하고 티거에 채용된 토션 바 서스펜션 구조를 채용하였으며, 이때 완성된 토션바는 오늘날까지도 이용되고 있을 정도로 선진적 구조였으며 특히 충격 흡수가 뛰어났다. 또한 무거운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로드휠은 3개를 교차하는 식으로 배치하고 광폭의 궤도를 장착하였다. 이 때문에 티거는 우수한 접지압과 함께 하부 방어력이 증대 효과를 보았다. 참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4호 전차(28톤)보다 오히려 더 기동성이 좋은 면도 많았고 처음 T-34와 동계전투에서 교전한 전차병들은 심지어 T-34보다도 기동성이 좋다고 느꼈을 정도다.
하지만 하중 분산이라는 장점에 비해서 단점이 너무 치명적인데. 교차식 로드휠은 하중 분산에는 좋은 설계지만 바퀴가 너무 많아서 이물질이 잘 끼이는 것이 문제이다. 흙은 당연히 끼이고 진흙이나 돌, 얼음이 끼면 상당할 정도의 기동성에 제약을 받아서. 이 상태에서 전투기동을 하다 재수가 없으면 트랜스미션이 버티지 못하고 고장이 난다 그리고 전차병들의 책임도 큰데 포탑을 돌리는 대신에 돌격포나 구축전차처럼 차체를 돌려 포를 맞추어서 변속기 수명을 왕창 까먹었다. 포탑 회전 속도가 느렸으면 모를까 360° 회전 속도는 당대 최고였던 19초였는데도 말이다.[48] 그러면 정비를 받아야 하는데, 정비 시 고장난 한 개 이상의 로드휠 때문에 나머지 수십개의 로드휠들이 모두 정상이라도 몽땅 떼야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정비 비용 + 난이도 + 시간이 모두 기하급수적으로 올라 버렸다. 또 전면 변속기를 수리하려면 포탑에다가 차체 상부를 모두 들어올려야 해서 그야말로 T-34, 셔먼 잡는 것에 비례해 유지 및 정비성이 아주 안 좋았다. 후대 전차들도 독일 전차의 설계개념은 받아들여도 이런 바퀴 겹치는 방식인 오버랩 설계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따라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정비 방식이다. 결국 유지보수 문제로 후기형에선 로드휠의 재질을 강철로 바꾸고 최 외측 로드휠은 제거해버린다.
티거는 모든 전략기동을 열차수송에 의존했고 절대로 자력주행하지 않았다. 비전투지역에서 자력주행을 하게 되더라도 장비에 무리가 갈 가능성을 감안해 보통 포장도로에서는 시속 20~25km까지, 비포장도로에서는 그 이하의 속도까지만 내는 경우가 많았다. [49] 또 두꺼운 궤도때문에 독일의 열차 설계 폭을 넘어버려 마주오는 열차나 철로위의 다른 구조물과 충돌할 수 있었기 때문에 57톤 짜리를 열차에 올리고 내리고 하는 것도 힘든 판국에 여기다 또 열차 수송용 궤도를 별도로 두고 이송 시마다 궤도를 교체해야했다. 중전차대대 편성 훈련 때 궤도 교체는 30분 이내로 완수하도록 훈련 받는다. 게다가 궤도교체는 필연적으로 승차와 하차시 교체가 짝으로 이뤄져야만 한다. 즉 2배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꽤 번거로운 작업이다. 다행인 것은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 평원의 선로는 대부분 허허벌판에 철로만 덩그라니 깔려있어 궤도 교체 없이 열차기동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티거의 최고속도는 이론상 45km/h로 T-34 전차에 밀리지 않는다. 야지 기동성에서도 비슷한 속도를 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야지 기동성은 타국의 경우 어느 나라나 비슷한 수준, 즉 20km/h 정도였다. 다만 트랜스미션 및 종감속기에 가해지는 부하의 강도는 전차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큰 편이었고 그런 점에서 이론상으로는 T-34보다 티거의 야지 기동 시 부담이 더 큰 게 정상이었다. KV라면 티거보다 더 사정이 나쁘기 십상이고 현실은 부품의 품질유지 및 설계상 배려 문제 덕분에 티거가 T-34보다도 나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전차전은 카 레이싱이 아닌지라 단순히 최고속도나 중량대비 출력이 전부가 아니다. 광폭의 궤도로 회전반경이 적었고 당시의 자동차도 일부만 적용된 유압식 파워핸들을 갖추는 등[50] 조향장치가 훨씬 고급이었으며 전/후진 기어도 더 다양했다. T-34의 조향능력이 어찌나 한심했는지 독일군 사이에선 '오리 궁뎅이'라고 불릴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렇듯 전술기동은 좋았지만 반면에 낮은 연비와 무거운 무게로 인한 신뢰성 문제 때문에 자력으로는 전략기동을 제대로 못했고. 거기에 수세에 몰리면서 전략수송을 담당하던 열차수송이 제 역활을 못하게 되는데. 이는 티거의 작전능력, 전장 장악력을 크게 제한했고 특히 서부전선은 물론이고 동부전선에서도 제공권을 상실해버리면서 전투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노르망디 상륙당시 공습으로 파괴된 철도망 때문에 티거들은 전부 자력주행으로 전장에 가야했는데 애초에 자력주행이 힘든 전차라 상당수가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주행 중 고장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상실한 티거중 약 10%만이 공습에 의하여 격파되었으나[51] 항공기를 피하기 위해 연료를 낭비하거나 기동로의 제약, 매복 포인트의 상실 등 전투우위를 점할 수 없게 만드는 다양한 간접 피해가 야기됐다. 동부전선에서도 T-34처럼 장거리를 자력으로 주파하여 포위망을 형성한다거나, 유리한 지역을 선점한다던가 하는 전략 기동성은 자력 기동이 제로에 가까운 티거를 비롯한 독일전차들이 막기에는 애당초 무리였고. 바로 이 때문에 티거는 당장 눈앞에 닥친 전투는 이겨도 소련군의 전략기동을 저지하지 못해 결과적으론 전장을 내주고 후퇴하는걸 무수히 반복해야 했다.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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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로부터 피격당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찰기로부터 발각되지 않도록 기동흔적을 지우고 매복한 모습이다.
3. 운용
티거는 거의 대부분이 집단군, 군단, 전투단 직할 독립 중전차대대로 편성되었으며 거의 항상, 가장 격렬한 전장으로의 투입을 강요받았다. 티거는 무리한 중량과 상기된 단점들 때문에 별도의 정비팀, 보급팀, 수송팀이 붙어야 했으며 보급순위도 최우선적이었다. 각 중전차 대대는 4개 차량이 1개 소대로 편성되며 3개 소대에 중대장 직속으로 2개 차량이 모여 14대가 1개 중대, 여기에 3개중대+대대장직속 차량3대로 45량이 완편 규모가 된다. 정비팀을 위해 별도의 중전차 시제차량들이 개조 후 지급되기도 했다. 더딘 생산속도 때문에 45대를 완편하고 있던 상황은 흔치 않았다. 동시에 최대로 배치된 티거의 수는 1944년 7월 기준로 671량에 불과했다.그러나 연합군의 파상공세와 함께 단 두달동안 300대 이상을 손실하면서 1944년 말에는 중전차 전력의 핵심은 티거 2 중전차로 변경된다.
Panzerkampfwagen Tiger Ausf. E 중전차를 운용했던 각 중전차대대의 목록과 투입된 전장은 중전차대대 문서 참조.
티거는 중요 장비였던 탓에 한대 한대의 손실이 대부분 기록으로 정확하게 남겨졌고 각 중전차 대대의 전투일지는 영어, 독일어 일본어 등으로 출판되어 있다. 상세한 손실과 충원 요약은 링크에 정리되어 있다.
이 표에서 제시하고 있는 티거의 손실(Losses)은 연합군 전차 뿐만 아니라 항공기 폭격, 야포 등에 의한 다른 전투손실을 비롯해 유기, 승무원에 의한 자폭, 부품수급을 위한 해체[53] 까지 포함한 티거 총손실이다. 전차 대 전차의 순수한 교환비는 앞서 말했듯 1:10을 넘는다.[54] 그러나 티거는 전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많은 단점을 감수했고 그 결과로 일어난 높은 비전투 손실을 굳이 빼고 이야기 할 이유가 없다는 비판이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티거는 주로 공세의 선봉에서서 적의 화력을 받아내며 방어선을 뭉개는 임무를 담당했으며 소련의 공세에 시달리던 시점부터는 기동방어의 핵심전력으로 활용되었다. 전선을 뚫고 밀려 들어온 소련의 전차군단이 통신이나 보급 한계선에 도달했을 때 티거 전투단들이 이들을 섬멸했다. 대전 후반에는 강력한 주포와 넉넉한 휴행탄수의 장점을 활용한 방어전의 화신이 되어 영국과 소련군은 전선의 주요 교두보마다 티거의 매복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유명한 전과들은 다음과 같다.
1943년 2월 11일, 로스토프 전선에서 503 중전차대대의 사벨 소위가 탄 티거는 76.2mm 포탄 11발, 45~57mm 대전차포탄 14발, 14.5mm 대전차총탄 227발을 맞았지만 단 한발의 탄도 티거를 관통하지 못하였고, 전륜과 차축 여러개가 파손되고 토션바 2개가 기능을 상실하고 대전차지뢰 3개를 밟았지만 적군을 유린한 후 60km 떨어진 아군 부대로 야지를 자력주행하여 돌아갔다.
1944년 7월 미하엘 비트만의 중대는 빌레르 보카쥬에서 27대의 영국군 전차를 격파했고 영국군의 캉 조기 점령을 저지시켰다.[55]
이 밖에도 티거가 찍은 전차 무쌍의 기록은 셀 수 없이 많다. 더구나 생존성 역시 상당해서 전투불능이 되어도 일단 회수만 된다면 정비 후 재투입이 가능한 경우도 허다했다.[57] 오토 카리우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만일 작동 불능 및 회수 불가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면 포탑을 간단하게 박살낼 수 있도록 포탑 주변의 수납 공간에 폭발물들을 설치해놨다고 밝혔다.[58] 회수작전은 주로 야간에 이뤄졌으며 실패할 경우 회수에 나선 티거가 주포로 격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기밀 유지를 위해 노력했어도 티거가 전장에 투입된지 얼마 안 돼서 소련군들 사이에선 꽤 정밀한 티거 그림이 돌아다녔다고 한다.1944년 동부전선에서 오토 카리우스와 알베르트 케르셔는 말리나파 전투를 벌여 단 2대의 티거로 소련군 전차여단을 한대의 생존차량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켰다.[56]
가격 대 성능비로 보자면 티거는 대당 3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4호 전차(12만 라이히스마르크)에 비하면 대략 세 배, 판터(15만 라이히스마르크)에 비해 2배에 조금 못 미치는 가격이다. 그러나 티거가 1943년 한 해동안 때려잡은 적 전차 및 자주포는 약 5천여 대 같은 기간 소련군이 잃은 전차 및 자주포는 총 2만 2천 대로 티거가 독일군 전차에서 차지하는 비율(5% 이하)을 생각하면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대전차전에선 가격 대비 성능 또한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유의할 것은 이 티거의 가격은 평균가란 점이다. 티거 극초기형은 80만 라이히스마르크에 달했는데 소량생산[59] 과 노동자 숙련도 부족 등이 원인이었다. 이후 생산량이 늘고 노동자들이 숙련공이 될 때 생산된 중/후기형까지 합쳐지면서 평균가가 하락했다.
4. 형식적 분류
티거는 이제까지 독일군의 주력이었던 3, 4호 및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5호 전차와는 달리 성능적으로 크게 개량된 바가 없었기 때문에 A형, B형등의 개량형으로 파생되지 않고 하나의 형식을 유지했으나, 편의상 외형적 특징을 기준으로 극초기형, 초기형, 중기형, 후기형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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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초기형은 사이드 스커트와 에어필터가 없었고 전면 스커트 역시 각이 있고 미끄럼 방지가 되어있었다. 전차장 큐폴라는 초기형처럼 원통형이었으며 포탑 후방의 공구상자(게펙카스텐)는 3호 전차의 것을 공유했으며[60] 초기에는 궤도는 좌우 구분이 되어 있었다. DAK(독일 아프리카 군단) 사양의 경우 초기형과 다소 유사한 모양이다. DAK사양부터 에어필터가 장착되었고 초기형까지 이어지다 중기형부터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레닌그라드에 투입된 티거는 극초기형 중에서도 가장 처음 생산된 녀석들로 이 때의 기본색은 당시 다른 독일전차들처럼 짙은 회색이었다. 단 아프리카 군단은 환경에 맞추어 사막색을 사용하였다. 유명한 차량은 501 중전차 대대의 142, 112호차, 502 중전차 대대 100호차가 있다. 이 중 100호차는 주코프가 보고 있는 그 티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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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형부터 우리가 아는 티거의 틀이 잡히기 시작했으며 상당수의 특징을 DAK 사양과 공유한다. 초기형부터는 다크 옐로우를 기본으로 3색 위장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DAK 사양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차이점이 있는데 전면 라이트가 차체 상판에 2개가 다시 올라갔다. 전면에 장착하니 파손이 잦았기 때문이다. 포방패는 극초기형과 유사한 형식에서 중•후기형의 포수 관측부가 강화된 것으로 교체가 되어간다. 유명한 차량은 미하엘 비트만의 1331호와 S04(지휘전차), 쿠르트 크니스펠의 101호, 504 중전차대대 소속의 131호, SS 102 대대의 S11, S13, S33 [61] 등이 있다. 이외에도 중기형, 후기형에는 없는 차체 엔진실 상판에 파이프가 있으며, 이 파이프는 배기구 옆에 붙어있는 양쪽에 각각 2개 씩 있는 에어필터에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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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형에서는 피격위험이 있던 기존의 원통형 큐폴라가 판터, 티거 2와 유사한 방식으로 바뀌었고 전면 라이트가 전면장갑 중앙으로 옮겨졌으며 연막탄 발사기(S마인 발사기 겸용)와 에어필터가 제거되고 요철이 들어간 궤도가 적용되어 후기형까지 이어진다. 이때부터 치메리트가 적용되었고 차체 후방에는 주포 고정부가 추가되었다가 후기형에서 사라진다. 또한 포탑의 밴딜레이터가 포탑 중앙으로 옮겨졌다. 유명한 차량은 오토 카리우스의 217호차, SS 101 3중대 소속 차량들이 있다. 오토 카리우스가 탄 중기형 티거는 정확히는 중기형에서도 끝자락 생산품이다. 초기형과 중기형 이상의 차체와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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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형은 상당수의 부품이 티거 2와 호환이 되도록 바뀌었다. 주포 머즐 브레이크와 로드휠, 장전수측 관측구 등이 호환되며 포방패의 포수 관측구는 하나로 줄어든다. 가장 큰 특징은 최외측의 로드휠이 사라져 정비성이 향상되었고 엔진도 티거 2의 HL230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야보의 공격을 버티기 위해 최후에 생산된 차량들은 포탑 상부 장갑이 강화된다. 유명한 차량은 비트만이 빌레르 보카쥬 전투 당시 탑승한 것으로 추측되는 212호와 비트만이 전사할 당시 탑승한 대대 지휘전차 007호,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의 A12 등이 있다.
5. 연합군의 대처
5.1. 소련
5.1.1. 85mm 등장 이전
티거가 강력한 전차이긴 했지만, 85mm 대전차포 개발 이전까지 소련이 티거를 격파할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이는 티거 전차장 생존자들의 증언과도 배치된다. 정말로 85mm 등장 이전까지 티거가 금강불괴였다면 독일은 1년 동안 전선을 훨씬 더 멀리 밀어냈을 것이다. 사실 기존 T-34도 96mm 관통력의 고속철갑탄과 75mm 관통력의 성형작약탄을 보급받았기 때문에 티거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특수 탄종은 보급이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한창 밀리던 독소전 초 당시 소련제 포탄의 품질수준을 생각하면 일선병사들 입장에선 거의 답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성공적인 방어와 미국의 무기대여법이 본격화된 대전 중기 후에나 가서야 해결된다.[63]
티거를 괴롭히는 병기 중 하나는 대전차포였다. 대전차포는 전차에 비해 매복하기 쉬워 티거가 대전차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무리 76mm ZiS-3이 약했다 하더라도 측면이 노출되는 경우 무사할 수 없었다. 또한 티거와 판터 등장 이후, 소련은 ZiS-3보다 관통력만큼은 뛰어났던 예전의 무기인 57mm ZiS-2를 재생산해 대전차포로 사용했다. ZiS-2는 APCR을 사용한다면 500m에서도 150mm 정도의 강력한 관통력을 보유했는데 이는 85mm D-5T를 뛰어넘는 수치였다. 게다가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텅스텐 매장량이 넉넉한 소련은 상당량의 APCR을 확보해 둔 상태였다. 파편량이 적고 저구경이라 단발로는 티거를 격파할 수 없었지만 이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포가 작으면 작을수록 매복이 쉬워진다.
대구경 야포 또한 티거에게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1940년에 배치된 KV-2의 경우 152mm 야포를 사용하는데 이는 1세대 MBT도 직격당한다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게다가 직격당하지 않더라도 대구경 야포의 파편은 궤도, 광학장비를 충분히 손상시킬 수 있는데, 특히 야전에서 궤도가 손상될 경우 치명적이다. 게다가 파편에 대해 방호를 성공한다 하더라도 152mm 야포는 약 2m 깊이의 호를 만들게 되는데[64] 이 또한 전차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오토 카리우스의 중대원 중 하나가 이런 야포가 만든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1942년 겨울에 첫 선을 보인 122mm를 사용하는 SU-122의 경우 직사사격과 곡사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는데 직사 사격으로 제한적인 대전차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122mm의 위력은 티거를 격파할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종합적인 성능은 여러 면에서 나빴지만, 이런 다목적 자주포들도 제한적인 상황에서는 티거를 격파할 수 있었다. 티거 전차병들은 이를 소련의 구축전차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65]
그러나 앞서 서술했듯 이 들은 모두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티거를 격파할 수 있었고, 티거를 격파하는 데는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5.1.2. 85mm 등장 이후
SU-152 같은 대형 자주포는 티거를 잡을 수 있었지만 비효율적이었다.[66] 57mm 포 재생산은 나름대로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ZiS-30처럼 자주화 계획도 있었지만 소련에게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소수 차량[67] 만 만들고 관두고 만다.[68] 소련은 85mm 대공포를 1943년 85mm D-5T로 개수하고, T-34의 포탑을 강화한 뒤 장착하여 T-34/85를 제작하기로 했다. 85mm 포는 1km에서도 100mm가 넘는 관통력을 보여 티거를 충분히 격파할 수 있었다. T-34 에이스인 알렉산더 오스킨은 티거가 아니라 티거 II까지 격파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85mm 대전차포는 KV-85와 SU-85 등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KV-85는 이미 구식이 된 KV 전차의 재활용 같은 성격이 강했으며 T-34/85 역시 티거에 대해 우위에 선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신형 중전차 계획도 당연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IS-2가 1943년에 선보였지만 IS-2는 태생부터가 대전차전보다는 다목적 지원을 목적으로 개발된 중전차였다. 그리고 당시 대구경 강선포의 숙명인 분리장약이 발목을 잡긴 하지만 편견과 다르게 IS-2의 122mm 주포는 관통력과 명중률 모두 수준급이었으므로 대전차전 능력이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방호력 역시 티거의 88mm로는 약점을 정교하게 노리지 않으면 격파가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다.[69] '''오토 카리우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확실하게 "스탈린 전차는 우리의 것보다 뛰어난 성능을 가졌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소련 전차는 부족한 교신 능력과 조준 능력으로 우리보다 뛰어난 방호력과 공격력을 가졌어도 우리에게 패퇴하는 일이 많았다' 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IS 시리즈들은 독일 중전차와 운용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 비교가 힘들다.[70]
1944년에 T-44이 등장했지만 실전 경험은 없다. T-44의 경우 T-34/85보다 여러모로 우수한 전차였지만 실전 경험이 없어서 티거를 상대로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겨야 한다. 독소전이 끝나고 세계대전이 거의 끝날 무렵인 1945년 중반에야 양산에 들어간 IS-3의 경우는 이집트군이 운용하면서 M48 패튼 전차의 90mm를 튕겨낸 전력도 있는 만큼 방호력면에서는 티거는 물론 티거 2보다도 훨씬 앞설 것이라고 기대되지만 45년은 되어야 등장해서 티거와 만날 일이 아예 없었다.
1945년 3월에는 SU-85를 대체할 SU-100이 등장했고, 100mm D-10은 1km에서도 160mm 이상의 관통력과 뛰어난 명중률을 자랑해서 티거에 대한 완전한 격파를 보장했다. 하지만 100mm 대전차포는 포미부의 크기가 상당히 큰 편에 속했기에, 이 포를 장착한 전차는 2차대전 중에는 SU-100만 양산되었으며. 전후에 해당 주포를 탑재한 T-54가 양산되었다.
5.2. 미국과 영국
미군의 경우 영국군의 6파운더를 라이센스한 57mm M1대전차포가 표준장비였는데 이 물건으로는 약점을 노린 사격[71] 으로만 상대할 수 있었다. 미군 사령부는 M9 바주카로 10야드에서 독일 중전차들도 전부 때려잡을 수 있다고 교육했다. 많은 병사들이 티거를 잡았다고 보고했으나 확인결과 진짜로 티거를 잡은 사례는 단 한건도 없었다.[72] 미군은 대전 말기까지도 장갑강도와 탄착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관계로[73] 카탈로그 스팩상의 관통력을 가지고 교리를 짜는 등의 실수를 범한 것이다. 82공수사단의 제임스 개빈(James Gavin) 사단장은 부하들이 독일 중전차를 잡을 수 있게 된 시점은 판처슈렉을 노획하고 나서부터라며 후일 바주카로 독일 중전차를 잡으라고 교육한 것에 대하여 맹렬히 비난했다. 이는 M4 셔먼 전차병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사실 75mm/L40 주포로 측 후면에서 15도 이내의 탄착각이하면[74] 500미터까지도 공략이 가능했으나 제대로 된 교리를 만들지 못하여 전차병들은 헛되이 죽어 나갔다. (아이젠하워에게 올라간 보고서) http://tanksandafv.blogspot.kr/2015/01/interview-with-steven-zaloga.html 다만 영국군과 달리 서부전선에서 미군이 상대했던건 판터나 티거 2 였다. 스티븐 잘로가가 양측 공식기록의 교차검증으로 확인한 티거와 미군과의 전차전은 단 3번 뿐이었을 정도로 조우 자체가 적기도 했다.1944년 7월 12일, 미군은 노획한 티거와 판터를 놓고 어떤 무기로 관통되는지 확인해 보았다. 판터는 정면에서 모두 관통되지 않았고, 측면과 후면은 제한된 거리에서 몇몇 무기가 성공했다. 이 사실을 아이젠하워에게 보고하자 그는 비통하게 대답했다. "76mm로 판터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이오? 난 이게 훌륭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병기국은 이걸로 모든 독일 전차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소. 이제는 그게 안 된다는 걸 알게 됐구만."
- M26/M46 Pershing Tank 1943-53 - Steven J Zaloga - 자세한 이야기
미군은 동 체급의 M26 퍼싱 전차를 들고 오긴 했지만 이런저런 문제 탓에 전쟁이 거의 끝난 뒤에 투입했기에 실전을 많이는 치르지 못했다. 그나마 퍼싱과 동급의 90mm 전차포를 탑재한 M36 잭슨이 판터와 티거 같은 독일 전차를 격파할 수는 있었으나 대전차 자주포의 한계상 정면에서 티거와 격돌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선제공격당해서 박살나거나 서로 동시에 쏘고 양패구상 당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도 퍼싱의 경우 엘스도르프 근교에서 티거와 정면으로 격돌해 2차례 교전한바 있으며, 첫 교전에선 퍼싱이 티거의 선제 공격에 연달아 3발을 얻어맞고 전투불능에 빠졌지만 두번째 교전에선 티거가 격파당했다. 유럽전선이 끝나가던 시점에 미 제2기갑사단은 90mm 전차포에 대해 800야드 이내에서는 88mm와 대등하며 그 이상에서는 불리하다는 병사들의 일관된 증언을 모아 아이젠하워에게 보고했다.
반면에 영국군은 북아프리카에서부터 티거의 위험성을 인지했기 때문에 발빠르게 대처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2,100~2,200대 정도의 셔먼III가 셔먼 파이어플라이로 개조되었고. 1945년 5월 경에 남아있는 파이어플라이는 1,350대 정도였다. 또한 영국군의 PIAT은 전차의 상면을 때릴 수도 있었고 관통력도 바주카보다 미묘하게 높았던 관계로 종종 티거를 격파하기도 했다.
6. 생산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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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가지 형식만 사소한 개량을 거쳐가며 생산된 티거의 총 생산대수는 약 1,350대로서 중(重)전차임을 감안해도 연합군의 동급 차량 생산에 비해 부족한 편이었다. 모든 차종의 전차 생산량을 합계할 경우 독일이 5만, 소련이 7~8만이다. 그런데 중전차만은 독일이 2천뿐인데 비해 소련은 1만을 넘는다. 소련이 중전차를 독일보다 2년 정도 먼저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해도 확실히 생산량 격차가 특히 큰 편이다. 하지만 티거가 배치되던 당시에는 적이라곤 소련밖에 없는데다 당시 소련군은 전차고 뭐고 공장도 못돌릴 정도로 패색이 짙었다. 그리고 양 군 편제를 고려해 보면 독일군은 GD사단이나 무장SS의 극소수 정예를 제외하면 중전차를 독립 전차대대에 집중 배치한 반면 소련군은 1941년도 편제상 KV중전차를 전차사단 당 63대를 보유하게 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해체되고 전차부대가 여단 단위로 재편되는 와중에도 편제상 중전차의 비중이 상당했다. 따라서 애초에 요구하는 수요가 다른 만큼 단순히 생산 대수로 따질 문제는 아니다.
전쟁에 쓸 장비의 대량생산은 그 장비의 생산성 자체뿐만이 아니라 해당 국가의 중공업규모와 자원, 생산 설비 및 노동력의 수급과 배분도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이다. 8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생산가는 그렇다 치더라도[75] , 티거는 30만 인시(人時)에 달하는 노동력과 엄청난 양의 고급 자원을 소모했고 작전 중에도 많은 연료를 지속적으로 소모했으며 이는 연료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쉽게 감당할 것이 못 됐다.
독일의 산업능력은 미국과 소련에 비해서는 열세했으나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비슷하거나 뛰어난 수준이었다. 이는 점령지의 공장을 다 돌려도 마찬가지. 아무리 강제노동이 되었든 뭐든 국내외의 유통망과 자원수급망 등에서 변화가 생겼고 점령군에게 100% 협력하리라는 것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 게다가 아무리 해도 그러나 미국은 '원정'이었지만 독일은 '홈그라운드'에서 흠씬 두들겨 맞으며 전쟁 중이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열세해졌으면 열세해졌지 상황이 우세해질리는 만무했다.[76] 소련처럼 도망가서 다시 만들 시간도 공간도 없으니 더더욱...[77]
동맹국과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상호간의 협력이 비교적 원활했고 다들 한가락 하는 강대국들이 뭉친 연합국과는 달리[78] 독일의 동맹국들은 대부분 군사력이 약해서 나름 열심히 싸워도 세력에 한계가 있는 중소국가라 군사적으로는 도움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네 사정도 안습이라 역으로 지원을 해줘야 했다. 대표적인것이 독일이 아프리카에 발을 들여놓은 건 원래 괜히 사자의 콧털을 건드렸다가 엉덩이에 불이 난 이탈리아를 도와주려던 것이다.[79] 그러나 군사 부분이 아닌 그외 부분에서는 독일이 동맹국에게 엄청난 지원을 받았었다. 독일이 사용하는 원유의 최대 70%를 루마니아가 지원해줬으며, 독일이 사용한 대부분의 철들은 노르웨이가 지원해줬다. 또한, 전차의 자잘한 부품들은 헝가리가 상당수 지원해줬다. 결국 티거의 생산량이 적은 원인은 그저 비싸고 복잡한 사치품이어서가 아니라 전 지구적 소모전을 자초한데다 그나마 있는 여력도 효과적으로 쓰지 못한 나치 독일의 정치력 문제도 고려해야하는건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티거는 오히려 정치인들에게 수혜를 받은 입장이며 미국은 정치적인 문제로 M4 셔먼의 업건이 늦어졌으며 소련은 T-34의 양산이 그리고리 쿨리크 원수에게 심각하게 방해를 받았다. 그런데도 티거의 생산량이 심각하게 적다는건 티거의 생산성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미국이 티거의 설계도를 가지고 티거를 뽑아냈다면 티거가 셔먼 찍혀나오듯이 찍혀나오는 광경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티거와 비슷한 체급인 M6 전차의 경우 초기 양산시에만 월 250대를 생산할 계획이 있었으므로 그대로 5개월 반이면 독일이 2년간 생산한 티거의 숫자를 능가한다. 애초에 국력의 차이도 있지만, 독일의 경우 단일한 설계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변경이 잦아 생산성에 저하를 초래했지만 당연히 미국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기도 하다. 당시 나치 군부가 헨셸에 계약을 주면서 현장에서 요청되는 개선안을 즉시 반영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티거의 2년간 총 생산대수는 1350대에 그쳤는데, 생산 초기와 비교했을 때 차체에 적용된 "사소한 개량"의 가짓수는 약 250개였고, 대부분은 전차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추가적인 부품의 장착이나 기존 부품의 질적인 개선을 요구했으며[80] , 다수의 개선안을 한번에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개선안이 제기될 때마다 설계에 적용시키는 방식이었다. 즉, 총 생산량이 1350대인 차량에게 무려 '''250개의 차체 파생형'''이 있고 각 버전당 생산된 차량이 평균 5.25대밖에 되지 않는, 마치 실제 차량의 생산은 등한시한 채 차량의 파생형 설계도를 수집하는 것과 같은[81] 처참한 생산성을 보여주었다. 생산 공정에 대한 이런 과도한 간섭 때문에 결국 한달에 최대 300대의 차량을 생산하기로 계획되었던 헨셸 공장에서 평균 60대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82] 이는 대서양을 건너는 원정군의 입장이었기에 중전차의 체급마저도 크레인의 최대 하역 중량인 40톤에 맞춰야 했던 영국, 미국과, 생산 공장을 우랄 산맥으로 이전한 후 열악한 철도망과 라스푸티차, 광대한 영토 때문에 항속거리가 가장 중요한 소련의 입장에서는 배가 너무나도 불렀던 것이다.
거기에다 독일은 전쟁 초기에 많이 노획된 적 전차의 유지보수에 매달리느라 군수지원이 난잡해지고 낭비도 심해졌다.[83]
동부전선이 장기화되면서 나치 수뇌부가 아무리 암덩어리라고는 해도 의도치 못한 소모전에 누적되는 인명손실 통계를 보며 '이대로가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문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인적자원이 고갈되어가던 독일이 똑같이 "양이 곧 질이다"라며 양산병기를 찍어내서 전선에 축차투입 하는 일은 전 세계를 상대로 침략전쟁을 일으킨 독일이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84] 바꿔 말하면, 소련처럼 전차 마구 찍어낼수도 없었지만, 공업력이 있다고 해도 만들 자원도 없었고, 만들었다 치더라도 미국처럼 그 승무원들을 보충하는것도 어려웠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치 수뇌부가 다소 비싸고 숫자가 부족하더라도 고성능의 병기를 운용한 것은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85] 공업생산력, 지원문제뿐 아니라 인적자원문제에 있어서도 독일의 티거전차 선택은 불가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티거가 생산성이 부족한 병기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병기의 생산성이 해당 국가의 산업 역량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병기 자체의 생산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생산량을 논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위에서 예를 든 T-34의 경우에는 무기대여법도 없고, 병기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 평시 상황에서, 개발된지 얼마 안 돼 공장이 2개밖에 없을 때도 1년 동안 생산한 댓수가 1500대에 가깝다.
해당 국가의 중공업 규모, 자원 상황, 노동력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병기의 생산성을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이 점을 지나치게 간과한 판단이다. 당장 세계 최강국인 미국조차도 비싸서 많이 운용하지 못하는 병기가 있음을 살피면 병기의 생산성은 해당 국가의 경제적 역량만큼이나 중요한 사항이다.[86] 경제적 역량이 부족해서 많이 생산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 장비 자체의 생산성까지 나쁠 경우에 티거와 같이 타국과 생산댓수에서 몇 배나 차이가 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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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국내 총생산을 비교해보아도 독일의 경제적 역량이 소련에 비해서 그렇게까지 열세에 있는 것은 아니다.[87] 국내총생산이 모든 경제적 지표를 망라하여 판단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지만 오히려 소련보다 독일의 국내총생산이 우위에 있기까지 하다면 독일의 경제적 역량이 소련에 비해 절대적 열세에 처해있다고만은 단언한 수 없다. 이는 만약 소련이 티거를 생산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소련제 전차만큼 많이 생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티거와 이 소련제 전차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생산성'이다.[88] 소련제 전차가 티거보다 생산성이 나았기 때문에 많이 생산된 것.
나치 독일의 정치력이 티거의 생산량을 깎아먹었다는 사항은 소련의 대숙청을 고려해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티거는 독일 수뇌부에 의해 주력으로 지원받고 가장 우선적으로 자원을 배당받았기에 정치인들의 수혜를 본 것에 가깝다.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문제는 쿨리크 원수의 직접적인 훼방을 지속적으로 받은 T-34이 더 크게 겪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비슷하게 정치적 문제를 겪어도 티거만 생산량이 처지게 된다면 생산성의 문제를 논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독일이 연합국의 폭격으로 공장을 가동하기 어려웠다는 말도 소련 또한 핵심 영토와 중공업 파트를 모두 잃고 시작했음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큰 디메리트가 아니다. 미국의 무기대여법이 병기 생산에 도움을 준 것은 맞지만[89] , 위에서 언급했듯이 렌드리스가 존재하기 전부터 소련은 T-34를 붕어빵처럼 찍어내고 있었다. 결국 이건 티거의 생산성이 문제인 것이다.
티거가 특수병기이기 때문에 많이 생산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당시 독일의 전차 가동률에서 판터, 4호보다도 오히려 티거의 가동률이 높을 때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그 가동률을 위해서 다른 전차들과는 달리 대대단위까지 정비부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위에서도 줄줄이 적혀있듯이 티거는 독일에서 가장 많이 활약한 전차이며 또한 가장 많이 가동된 전차이다. 다시 말해 결코 수요가 적은 특수병기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7. 운용상 문제
티거의 경우 운용상 난점에 대한 말이 많고 가동률 자체가 낮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이 아니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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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표를 살펴보면 총 차량 숫자 대비 운용가능 차량 숫자를 따져보면 무난한 수준이며 오히려 티거의 가동률이 높은 경우도 종종 보인다. 가령 1945년 1월의 서유럽에서 독일 전차의 가동률은 티거가 58%, 판터가 45%로 오히려 티거가 더 높은 가동률을 보인다. 또한 티거의 가동율이 낮게 나오는 시기를 보면 다른 전차들의 가동률은 훨씬 낮고 이중 대부분은 애초에 정원조차 채우지 못한 상태인 탓이 크다. 아예 대파돼서 회수, 공장에 들어간 장기수리 차량도 대대/연대 보유 차량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다. 또한 독일은 티거 생산과정에서 철저한 품질관리를 한것도 이런 가동률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도표에서 나타자니 않은 요소가 있는데 정비받으려면 연대까지 가야했던 다른 전차들과는 달리 티거는 중전차 '''대대 정비부대'''에서 충분한 정비를 받을 수 있었으며 독일은 이들 정비부대에게 최대한의 지원까지 쏟아부었다. 즉, 티거 부대는 다른 전차를 운용하는 부대보다 더 먼저 정비를 받고 더 빨리 물자를 보급받은 것이다.
티거가 운용하기 쉬운 전차인 건 결코 아니었다. 티거의 경우 필수 정비과정이 복잡하고 힘들었다.
오버랩되어 있는 전륜의 경우에는 하나의 교체를 위해 최대 9장까지 제거해야되는 경우도 빈번했으며 50톤이라는 무게를 받칠 잭과 크레인이 흔치 않은 관계로[91] 차체 밑으로 땅을 파고 내려가서 정비해야 하며 트랜스미션만 점검하려고 해도 포탑을 들어내고 트랜스미션을 통째로 꺼내야 하는 등 중장비 없이는 정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정비병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게다가 티거는 점점 악화되어가는 전황 속에서 소방대로 끊임없이 여기저기에 불끄러 다니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다른 전차들에 비해서 소수가 혹사당하는 와중에 유지/보수/점검에 할애할 시간이 그만큼 부족했다는 이야기다.
거기다 엔진이나 현가장치에 문제가 생겨서 노상에서 퍼지면 급박한 상황에서 50톤이나 되는 물체를 견인할만한 수단이 마땅찮았기 때문에 보통 골치아픈 일이 아니었다. 같은 티거로 견인하려고 들었다가는 견인하던 티거도 같이 퍼질 확률이 높았기에 티거로 티거를 견인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했다. 운용 교범상에는 정비대 표준장비인 18톤 트럭 3대를 이어서 견인토록 했으며 후기에는 베르게판터 등의 중전차 회수차량으로 견인토록 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18톤 트럭 숫자도 적은데다 방어력의 문제로 전선 가까이까지 끌고 오기는 좀 곤란했고 베르게판터는 수가 적은지라 그냥 다른 티거로 견인하는 사진이 많다. 빌레르 보카쥬 전투 직후 231호차를 다른 티거로 견인하는 유명한 사진도 있다. 동부전선 한정으로 전투시 파손된 티거의 포탑을 떼어 견인차량으로 사용한 베르게 티거도 있었으나 페르디난트/엘레판트 운용대대의 포르셰 타입 티거를 개조한 베르게 티거 외에는 전부 현지 개조품으로 육군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지했다. 전쟁 말기가 되면 마땅히 견인할 수단과 시간이 없어 고장난 티거는 바로 방치/유기되기 일쑤였다.[92]
또한 큰 포를 탑재하고 공간성을 위해서 포탑을 크게 만들다보니 포탑 정면과 자체 사이의 틈이 크고 외부로 포탑링이 상당히 노출되어 있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산전수전 다 겪은 승무원들이 탑승한 셔먼의 경우에는 티거의 포탑링에 포탄을 날려서 포탑 선회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험지주파를 위해 넓게 설계한 무한궤도에 포탄을 날려서 기동불능에 빠지게 만들어서 티거를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일을 해내기도 하였다. 당연히 이건 티거의 정확한 포격을 숙련된 조종기술로 개나리 스텝으로 피하면서 근거리까지 접근해서 정확한 사격을 날려야 가능한 일이지만, 숫적 열세 때문에 장거리전을 치루더라도 곧 근거리 접전이 벌어지는 독일의 전차전 특성상 티거가 100% 무시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8. 총평
많은 정비소요와 낮은 생산성 그리고 독일전차들의 고질병인 낮은 연비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전투력만큼은 대단히 우수한 전차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주로 교전하던 T-34나 M4 셔먼 등보다 높은 중전차라는 체급 차이와 개전 초기부터 티거 전차와 함께 산전수전 다 겪으며 모든 상황에 숙련된 승무원, 그리고 방어자의 이점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연합군의 전차 부대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한 것은 그만큼 전투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라는게 확실하다. 즉, 전투력 자체만 놓고 본다면 매우 우수한 전차임은 확실하다. 그리고 정비성의 문제도 티거 1까지는 중전차임을 감안하면 불쾌해도 납득할 만한 수준이기는 했다고 하지만 보기륜이나 변속기 가는 사진보면 정비병 출신들은 그야말로 혐짤이 따로 없다.만약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지금 독일군이 쓰는 5호 전차나 6호 전차를 타고 미군의 중형전차나 90mm포 Tank destroyer를 상대로 싸울 것 입니다.
- 윌슨 M. 호킨스Wilson M. Hawkins 중령, 제67전차연대 제3대대장
또한 위에서도 누차 언급되었지만 단순한 수치상의 공·수·주 뿐 아니라, 공간 설계 자체가 넉넉하고 여유로운데다 여러모로 승무원들을 배려한 설계로 인해 승무원들의 거주성 및 조작 편의성, 전투지속능력 등 카탈로그에 나오지 않는 장점들도 훌륭했다. 특히 이들이 주로 상대했던 소련군 전차나 영국군 전차들의 형편없는 편의성[93] 을 고려하면 비교가 민망할 지경. 많은 퇴역 전차병들이 그때로 돌아간다면 티거를 고르겠다고 했다는 후문에는 이런 요소도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전투 외적인 부분에서는 문제가 상당한 편이었는데 생산성이 형편없어서 항상 필요한 숫자에 비해서 턱없이 적은 수만이 존재했고, 정비가 복잡하고 힘들어서 높은 정비소요와 함께 낮은 연비로 인해 대전 후반에는 연합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해 병기로서는 심각한 결점이다. 이러한 문제는 전장에 투입되는 전투인원들은 물론이고 장비들을 운용하고 지휘하는 지휘관들에게는 크게 다가오는 문제인데 일례로 당시 동부전선의 오토 카리우스는 전투중 전차에 손실이 생기거나 기동불능에 빠지면 밤중에 돌아가 견인해왔다. 그나마 정비와 관련된 문제의 경우에는 티거 정비반이 대대마다 배치가 되어있고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다른 전차들 이상의 가동률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떨어지는 생산성과 연비는 끝까지 해결하지 못해 그야말로 국가를 잘못 타고난 전차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티거가 무시무시한 자본력과 생산력을 자랑하는 미국이나, 소련에서 생산이 되었다면 그야말로 티거는 강력한 물주 덕분에 위에 문제점들이 해결됐겠지만 독일의 사정은 매우 심각했고, 그런 국가에게 티거같은 자원 소모가 심한 무기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94] .
'숫자는 적지만 하나하나가 강력한 소수정예'는 '''멋있기 때문에''' 창작물에서 주인공이 속한 세력 등으로 선호되는 소재지만, 실제 전쟁의 역사에선 이러한 소수정예의 대활약보다 '일정한 수준을 갖추고 대량으로 뿜어져 나오는' 군대가 이기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숫자가 적은 쪽은 그 자체로 심각한 전략적 열세를 안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인데, 예를들어 3대의 티거가 30대의 t34를 상대로 전역에서 싸울경우 티거 1대당 t34를 4~5대씩 격파하더라도 나머지 15대의 t34가 이미 우회하여 포위망을 형성하면, 장거리 자력주행이 안되는 티거의 앞날은 탈출하려 발악하다 유기,자폭 해버리는 수 밖에 없고 실제로도 수많은 티거가 이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교환비, 소위 게임에서 말하는 '킬딸'은 밀려도 최종적으로 전장은 t34가 장악하는 것이다.
물론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미국의 퍼싱, 소련의 IS-2같이 티거와 동급이거나 같은 독일의 쾨니히스 티거처럼 기존의 티거를 능가하는 중전차[95] 도 나왔고, M36 잭슨 같은 대전차 자주포나 ISU-152같은 티거를 한방에 격파 가능한 다목적 중 자주포도 나왔지만 국지전 상황에서는 티거처럼 가장 필요할 때 힘을 써준 전차는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규모의 경제에 역행하는 전차였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평가에 있어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그런 전차겠지만.'''
사실 연합국이 티거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사용했을지는 의문이다. 바다를 건너야하기도 하고 긴거리를 빠르게 진격해야하는 영미 입장에서는 40톤급 전차도 부담스러워했던 마당에 60톤급 티거는 수많은 페이퍼플랜 전차들처럼 버려졌을것이다. 한참 공장을 뜯어 우랄 산맥 너머로 옮기던 대전 초기에도 소련의 공업력은 독일에 비해 딱히 뒤진다고 하기는 어려웠고, 티거가 배치되어 본격적으로 활약한 대전 중반기 이후에는 무기대여법의 지원까지 더해져 소련의 공업력이 명백히 독일에 비해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다른거 다 따질거 없이 T-34 전차의 생산량만 보더라도 이는 명백하다. 영국 역시 소련과 같은 대륙의 기상급 전차생산력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무슨 티거같은 고오급전차는 영국에게는 사치라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단지 생산력 우위를 기반으로 다수의 중형전차와 그 중형전차의 전투를 보조할 수 있는 중전차를 대량생산 할 수 있던 소련이나 섬나라라는 특성, 그리고 동맹국인 미국의 지원이 있으니 전차에만 집착할 이유가 적었던 영국과는 달리 부족한 생산력으로 막대한 육군전력을 지탱하야 했던 독일이기에 티거와 같이 소수라도 전술적 상황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일종의 슈퍼병기에 집착했던 것 뿐이다. 말하자면 독일은 어차피 적에 상응하는 규모의 전차를 생산할 수는 없으니 소량이라도 매번의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전차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인 데 비해 소련이나 영국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초병기에 대한 비 이성적 집착을 보이지 않은 것. 이를 두고 무슨 영국이나 소련은 티거같은 고급 전차를 굴릴 능력이 없어서 못 굴렸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해석이다.
1990년대에 생존한 2차 대전 참전 전차병 100명을 무작위로 고른 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때 어떤 전차를 골라서 돌아가겠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 100명 모두 티거, 티거 2를 골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티거 전차 에이스인 오토 카리우스도 자서전 서문에서 티거 전차를 명품이라며 극찬하며 티거 전차를 타며 살아남은 모든 이들은 티거 전차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이다. 이는 디스커버리 채널의 2차대전 당시의 무기를 비교하는 프로그램에서도 티거와 셔먼이 비교된 적이 있었고 방송 막바지에 이들의 승무원들에게 다시 전차를 타면 어느 것을 타겠냐고 질문을 했었는데, 티거 승무원은 물론 셔먼 승무원도 티거를 골랐다. 러시아인은 물어볼 것도 없다는 투로 미국인은 당연한 걸 물어본다고 째려봤다고. 실전에서는 티거 전차를 상대로 셔먼이나 T-34같은 중형전차 10대 이상이 달라붙어도 잡아내기는커녕 거꾸로 전멸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티거가 10대 1 다구리를 당해도 셔먼과 T-34를 전멸시킨다는 것은 '''명백한 허구'''로서 몇몇 에이스 전차장의 전과나 전쟁 총교환비가[96] 부풀려진 것이다.
전차병 출신 노병들의 이런 일관된 고평가는 전차병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각 개차의 전투력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티거 가성비가 어쩌니 하는 문제야 국가 차원에서 높으신 분들이 고민할 일이고, 정비가 안좋으니는 정비병이 짜증낼 일이지, 딱 하나 있는 목숨을 내걸고 전방에서 싸우는 전차병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자신의 목숨을 보장해 줄 높은 방어력과 기동력. 그리고 내 목숨을 위협하는 적군을 확실히 날려버릴 공격력을 가진 전차가 최고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병사 개인에게 가장 좋은 선택지와 국가 단위에서 가장 좋은 선택지가 불일치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
9. 기타 운용국가
9.1. 추축국
티거는 생산량이 많지 않았고 티거 중전차대대가 군단 직할 부대로 운영될 만큼 전략적 예비대로서 중요한 전력이었기에 다른 독일제 무기들과 달리 추축국 군대에 공여된 예가 매우 희귀하다.
9.1.1. 헝가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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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이외의 군대에서 티거를 운용한 대표적인 예로 1944년 4월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에 새로이 임명된 발터 모델 원수가 헝가리 1군을 시찰한 뒤 이들 전차부대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1944년 5월 4일 헝가리 왕립 제2전차사단에 4호 전차 H형 12대, 3호 돌격포 10대, 티거 중전차 10대를 배치시켰다.
헝가리 전차병들이 티거를 운용하기 위한 훈련을 마무리 짓고 실전 투입을 앞둔 7월 말, 3대의 티거가 추가로 헝가리군 왕립 제2전차사단에 배치되었는데 무려 생일선물로 준 것이라고 한다. 체코에서 출판된 <Obrněná technika. 6. Střední Evropa 1919-1945 II část.>에서는 이를 라즐로 홀로시-쿠티 소장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이었다고 적어놓았는데 이는 당시 2전차사단장이었던 졸탄 제디니 소장의 이름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홀로시-쿠티 소장의 직책은 보병사단장이었고 그의 생일은 8월 23일인 반면, 제디니 소장의 생일은 7월 22일이며 모델 원수가 제디니 소장의 실력을 높이 평가해왔던 것을 고려해보면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링크
1944년 7월 갈리치아 전투에서 티거에 탑승한 에르빈 타르차이. 이후에는 독일군으로부터 판터를 수령하여 주로 판터에 탑승한다.
사단장의 생일 다음 날인 7월 23일, 헝가리군 왕립 제2전차사단은 스타니슬라프와 사르투니야 방면 전투에 기존의 티거 10대에 생일 선물을 더하여 12대의 티거를 투입하였고 이를 2개 중대로 나누어 에르빈 타르차이 중위와 야노슈 베드레슈 중위가 지휘를 맡았으며 특히 타르차이는 단 두 대의 티거로 30분 동안 소련군 T-34전차 14대를 격파하여 언덕 고지를 사수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연료와 정비 부품 부족으로 인한 손실은 어찌할 수 없어서 1944년 12월에 헝가리군이 보유한 잔존 티거는 4대 뿐이었다.
9.1.2. 일본군(6호 중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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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거를 타보는 일본군 장교들. 전차장석에 있는 사람은 주독 일본대사였던 오오시마 히로시다.
일본군 역시 티거를 도입하려 했던 전적이 있다. 1943년, 독일에 사절차 방문한 일본 장교단이 티거의 위용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 즉석에서 구매계약을 체결하고 2대분의 대금까지 완납했다. 문제는 독소전이 한창이던 때라 육로로는 일본으로 수송할 수단이 없었으며 티거같이 무거운 물건을 수송할 수 있는 잠수함도 없던지라 독일에서는 무슨 방법을 써도 일본으로 운송할 수 없었다.[97] 일본에 자료와 부품을 전해줄 비용이 독일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2배 더 비싸다 한다.
1944년 2월, 티거 두 대와 판터 D형 하나가 보르도 항으로 이송되었고 일본 측에선 영수증까지 작성했지만 서술했듯 수송할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서 그해 여름까지 그 티거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이미 대금을 양도한 물건을 차마 환불해달라는 말을 하기는 뭐했던지 구입한 2대분은 독일이 양도해서 서부전선 어딘가로 보냈다고 한다. #
다만 일본이 티거를 자국까지 수송하는 데 성공했더라도 전황에 별 영향은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원산지인 독일이 충실하게 증명했지만 전쟁은 결전병기의 원맨쇼로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태평양 어디 숲속에서 갑자기 티거가 튀어나온다면 미군이 충공깽하긴 하겠지만, 곧 폭격으로 고철덩이가 될 것이다. 게다가 일본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일본의 수준은 티거와 같은 중전차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기술력은 종전까지 겨우 M4 셔먼하고 동등한 치토 같은 전차를, 그것도 2대만 완성하는데 그친 수준에다가 중전차 운용 경험은 오로지 91식, 95식 중전차 뿐에 실전도 거치질 못했고, 중전차 설계를 포함한 전체적인 전술교리는 그야말로 구시대적인 개념인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자원까지 모자랐기에 보급 역시 처참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설명했듯 티거는 연료를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데, 그나마 루마니아라는 기름셔틀이 있었던 독일과는 달리 미국에게 섬을 실시간으로 뺏기는 일본이 어떨지는 안 봐도 비디오.
수리 및 유지보수 문제도 발목을 잡는데 일본보다는 사정이 매우 나았던 독일도 연료 부족에 골골거리면서 전장에서 기관계에 문제가 일어난 티거를 견인해 수리할 여력이 되지 못해 폐기하는 일이 잦았는데 일본의 사정은 그보다 훨씬 더 안습했다. 일본의 여력으로는 독일에서는 간단한 수리로 해결됐을 사소한 문제라도 문제가 발생했을 시 제대로 수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일본의 치하 전차 이상 체급의 중전차들의 행보를 고려했을 때, 티거 역시 전쟁이 끝나는 그 날까지 본토결전병기로 짱박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본토방어에 전념한다고 해도 미국 전차를 만날 상황은 최소 45년 초반 이후일텐데 그때면 M26 퍼싱과 각종 시제 중전차들, 심지어 만주를 박살내고 내려온 소련의 IS-3과T-44까지 만나야 한다.
9.2. 연합국
대다수 노획해서 사용한 경우였지만 전후 정식으로 인수받아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
9.2.1.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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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전차 수리병 바실리 킬레브닉이 수리한 100호차
티거를 잡기 위해 온갖 화력을 동원한 만큼 온전하게 노획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한번 노획하면 단순 사격시험 용도 뿐만 아니라 실전용으로도 잘 써먹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몇 가지 있는데, T-34 전차장으로 근무하던 알렉산드르 므나차카노프 소위[98] 는 충각으로 티거 한대를 기동 불능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전차에서 빠져나와 티거 해치에 수류탄을 까넣어 승무원만 몰살시키는데 성공한 그는 이 티거를 활용하면 독일군의 뒷통수를 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전차병들과 함께 티거를 수리해 독일군 진영으로 간 다음 독일군이 방심하는 틈을 타 접근해서 티거로 독일군을 몰살시킨다. 독일 부대를 전멸시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그는 아군 진영으로 오자 티거를 보고 혼비백산한 아군이 포격을 가해 크게 부상당한다(...) 결국 팬티를 벗어 걸어 아군에게 항복의사를 나타내 겨우 살아남고 후방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로 티거 전차에 돌격해 자폭해서 돈좌시킨 영웅적인 소련병사 우골롭스키를 기리기 위해 상부에서는 격파된 티거 전차(100호차)를 묘비삼아 무덤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전차 수리병이던 바실리 킬레브닉은 해당 티거가 궤도만 수리하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아봤고, 티거를 호시탐탐 노리던 그는 그를 따르는 전차병과 함께 티거를 수리하는데 성공한다.
그들은 철십자를 지우고 크게 붉은별을 그린 다음 레바킨 근위를 전차장으로 삼아 독일군에게 돌진해서 상당수의 대전차포와 토치카를 박살 냈다. 이 소식을 들은 수뇌부는 영웅의 무덤을 훼손했다고 노발대발했지만 다행이 정치장교가 말려줘서 28근위전차여단에 소속되어 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동프러시아 공세 전투에서 소실되었다.[99] 그밖에 몇몇 티거들이 노획되어 사용되었지만 레바킨 전차장의 100호차가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9.2.2.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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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군대를 복구하기 위해 나치의 무기를 다수 사용했는데 이때 6호전차 티거도 있었다. 나라가 어느정도 정상복구된 뒤에는 모두 팔거나 시험용으로 소모하였다.
10. 종전 후
전후에는 5호 전차 판터나 4호 전차처럼 주변국/신생국에 보상 공여되지도 못했는데 1945년 4월 이전에 가동 가능한 차량 자체가 거의 남지 않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계속 소모에 소모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베를린 전투에 참가한 차량도 있는 등 최후의 한 대까지 전투가 가능한 상태라면 어떻게든 전투에 투입하고 봤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노획 후 전시된 차량들이 미국과 영국, 러시아에 각 1대씩 있다. 미국과 영국은 티거는 북아프리카에서 노획한 이후 추가 노획하지 못했을 뿐더러 작동불능의 티거들이 발견되면 독일군에 의해 다시 운송되어 수리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소련은 1942년부터 운좋으면 노획했다가 1944년부터 줄줄이 노획, 보존 중인 것은 단 1대 뿐이고 나머지는 노획할 때마다 실험 및 자잘한 패전 때문에 선전용으로서 각종 화포의 표적으로 써먹은 탓에 원형을 유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재 지금까지 살아남아 박물관에 남아있는 티거 전차들은 9대로 이 티거를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은 아래와 같다. 추가로 2020년 드론으로 항공 촬영을 하던중 헝가리 가정집 뒷마당에서 원형에 가까운 녹슨 티거 초기형이 발견되었다. 헝가리 티거
2020년 오스트레일리아 군사 박물관에서 티거 후기형 복구를 시작했다. 자폭 처리하여 조각된 티거의 조각들을 모아 소생시키고 있다고한다. 2021년 2월 차체 복원이 거의 완료 단계에 이르렀다.
특히 영국의 보빙턴 전차 박물관은 전 세계에서 오리지널 부품을 긁어모으는 등의 복구 작업을 거쳐 노획한 초기 생산형 131호 티거를 가동 상태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131호 티거는 노획 이후 바로 영국으로 보내져 다른 티거들의 잔해들에서 찾아낸 부품으로 수리하여 여러 테스트를 받았고, 1942년 6월 6일에는 조지 6세가 직접 시찰까지 할 정도로 영국은 티거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이후, 각지역마다 전시되었다가 9월에 대대적인 조사 이후 방치되었고 1959년 9월에 박물관에 인도된다. 이후 박물관에 방치되었던 것을 보빙턴 박물관에서 1990년부터 약 13년동안 우리돈 1억 3천만원에 해당하는 8만파운드를 들여서 위와 같은 근성과 눈물의 작업으로 2003년부터 매년 전시회 등에서 공개[100] , 거기까지 찾아올 정도로 그 쪽 바닥을 잘 아는 인간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단, 원래 북아프리카에서 노획했던 상태를 완벽하게 재현한 건 아니다. 일단 엔진이 다르다. 노획 당시엔 HL210이었지만 당장 가동 가능한 엔진은 전부 티거II용 HL230이라서 부득이하게 아르덴 대공세 당시에 라 글레즈 외각에서 노획된 무장친위대 제 501 독립중전차대대 1중대 소속 제프 프란츠 하사의 104호 티거II의 HL230 엔진을 빼서 탑재했고 원래 탑재돼 있던 HL210 엔진은 컷오프 전시물로 전용했다....만 이 HL230의 출처가 불분명하다. 독일 뮌스터 박물관에서 파는 야크트티거에 대한 책에선 쿠머스도르프에 있었고 보빙턴으로 끌려간 야크트티거의 HL230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유일하게 가동 가능한 티거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2014년 개봉하는 2차 대전 영화 퓨리에 등장하게 되면서 많은 밀덕들의 눈길을 끌었다. 다만 워낙 오래된 물건인지라 출연료도 출연료거니와, 제작진은 이 녀석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무슨 일이 안 생길까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물론 운전한 사람들은 박물관 직원들. 또한 적당히 개조한 촬영용 더미 차량도 준비했다. 전신샷은 131호, 궤도같이 일부분이 나오는 장면은 촬영용을 썼다. 러시아산 티거
프랑스의 티거. 전후에 잠깐 형식적으로 운용한 후 재빨리 퇴역시켰다고 한다.
11. 티거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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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gerfiebel
티거에 탑승할 전차병들을 위해 만들어진 매뉴얼(교범)로, 티거를 의인화한 엘비라 티거라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이 여성의 비위를 맞추는 법을 상세히 설명함으로서 티거 전차를 다루는 법에 숙달되도록 이끄는 것이 이 책자의 목적이다. 탈 것을 여성화시켜 부르는 서양 문화에서는 인격화 자체는 특별할 것 없지만 이런 매뉴얼이 군에서 정식 채용된 매뉴얼이란 것이 놀라운 점이다.도덕과 철학은 그 자체가 때때로 부도덕하다! 딱딱한 표정을 짓는 것은 멍청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티거 운용병들은 유머감각을 익힐 것.
-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이 쓴 서문
2012년 번역되어 나온 오토 카리우스의 자서전 진흙 속의 호랑이 별책부록으로 완전번역되어 제공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출간이 늦어진 이유가 티거 피벨을 부록으로 주기 위해서라고.
5호 전차 판터의 매뉴얼인 판터 피벨도 의인화까지는 아니지만 전혀 군용 메뉴얼스럽지 않은 분위기를 자랑한다.
걸즈 앤 판처 3화에서는 레이제이 마코가 4호 전차의 조종을 위해 한번 훑어본 PzIV fibel이란 명칭으로 패러디되어 등장한다.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인 "진흙속의 호랑이"를 사면 부록으로 한국어 번역본이 따라온다. 책 자체도 흥미로우니 관심이 있다면 구매 추천
12. 파생형
12.1. VK 45.01(P) (Tiger(P))계통 전차
엄밀히 따지면 파생기가 아니라 계열상으로 전혀 다른 자매기에 가까운 차량이지만, 티거라는 이름을 받을 수도 있었던, VK.45.01 프로젝트의 탈락한 시제 전차다. 그러나 이를 모르고 100대나 찍어서 버릴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그렇게 만들어진게 페르디난트/엘레판트이다.
12.2. 슈투름티거 (Sturmtiger)
해당 문서 참조.
12.3. 베르게티거(Bergeti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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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포를 제거하고 크레인을 설치했다.
포탑이 파괴된 티거에서 포탑을 들어내고 구난전차로 전용한 물건. 수뇌부에서는 금쪽보다 귀한 티거 차체를 고작 회수차량 용도로 낭비하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엄격하게 금지했으나, 각급 부대에서도 금쪽보다 귀한 티거가 고장나 있으면 그걸 일단 구출해야 써먹을 수 있으므로 임기응변으로 만들어 쓴 경우가 있다. 전장에서 50톤 가까이 되는 전차를 끌어낼 방법이 마땅치가 않아서 머리를 굴린 결과물. 포탑을 들어내면 전체 중량이 감소하여 구동계에 가해지는 부담이 줄어드는 만큼 다른 차량을 견인할 여력이 생기며 아울러 섀시는 당연히 티거니까 적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도 회수차량의 생존성이 크게 높아진다.
임기응변인 만큼 포탑만 제거하고 차체 내부는 휑하게 드러내고 다니는 차량부터 최소한 나무로라도 뚜껑은 덮어준 전차 아예 크레인 등 상부구조물까지 올린 본격파 등등 다종다양하다. 다만 치타델레 작전시 페르디난트를 운용한 제653 중구축전차연대에 티거(P)섀시 3대와 파손된 페르디난트 섀시 2대를 이용하여 정식으로 베르게티거(P) 5대를 제작해 배치한 예가 있다.
이 베르게 티거 중 가장 유명한 차량은 왼쪽사진의 차량으로 508 중전차대대 소속의 311호 차량이다. 508대대는 종전까지 이탈리아 전선에서 연합군을 막는 동안 각종 비전투손실로 78대를 잃은 전과로 중전차대대 중 졸전한 부대로도 유명한데 아마 이러한 비전투손실로 잃은 티거들을 견인하기위해 제작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12.4. Hybrid Tiger/Zombie ti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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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최후의 티거였던 323호 티거
후기형 차체에 초기형 포탑이 달린 대표적인 하이브리드 티거이다. 잘보면 후기형에서는 폐지된 외측 로드휠이 남아있고 로드휠도 완충고무가 붙어있는 초기형이고, 포탑은 원통형 큐폴라가 달린 초기형인데 포방패는 보강용 리브가 추가된 후기형 포방패다. 전황이 급박해지자 교육 및 훈련부대에 있던 티거도 결국 전선으로 내몰렸는데 후방에만 있다가 전쟁 말기에 이르러 실전 투입을 준비하다 보니 초기형 차체에 후기형 부품이나 장비가 섞인 '잡종' 차량들이 많았다. 이를 하이브리드 티거라 부른다. 야전에서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티거를 독일의 공장으로 가져가서 재생한 차량인 좀비 티거들도 비슷한 이유로 다양한 형식의 장비가 이것저것 뒤섞인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1944년에 티거 생산라인이 폐쇄될 때 만들어진 54대의 티거가 대표적이다. 이 하이브리드 티거를 운용한 부대 중 가장 유명한 부대로는 페르만 전차학교 소속 교관 프란슨 중위가 지휘한 페르만 전투단이며 1945년 에셀 지방에서 영국, 미국 연합군과 교전하였다. 페르만 전투단 소속 티거의 다른 특징은 넘버링 맨 앞부분에 F자가 들어가 있었다.
12.5. 그 외
- 티거 H2형(VK 45.01(H) 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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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거에 5호 전차 판터에 달린 75mm 70구경장주포를 장착한 형태
- VK 45.02(H)
- 보르크바르트 4호를 원격 조종하는 무선조종장치를 추가한 티거가 있다. 그중 안치오 전선에서 유기된 티거 한대의 사진이 베르게 티거의 사진이라고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으나 실은 바로 이 보르크바르트 4호 조종용 티거. 베르게티거와 구분할 수 있는 부분은 베르게티거는 포탑을 들어낸 반면 보르크바르트 조종용 티거는 포탑을 그대로 얹어놓은 상태에서 크레인 등의 상부구조물을 추가한 점이 다르다. 보르크바르트 4호는 무선조종이긴 해도 근처에서 조종을 해야 했기에 튼튼한 전차에서 조종해야 안전했으므로 독일군 전차중 그나마 장갑과 기동성이 다른 중전차보다 훌륭한 티거가 담당했다.
- Tiger 1 mit. 7.5cm A18 KwK
T-25에 사용될 예정이었던 스코다 사의 7.5 cm A18주포를 티거에 장착하고 자동장전장치를 다는 프로젝트. 루머에 의하면 한 대의 전차가 실제로 A18 주포를 끼운 채 테스트되었다 하나, 밝혀지지는 않았다.
- T-VI-100
소련은 2차대전 중 소수의 티거 전차들을 노획해 굴려먹었는데, 1944년 말 OKB-43이 티거 한 대에 SU-100의 주포인 100mm D-10T 주포를 달아 개조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개발 중 전쟁이 끝나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
13. 관련 영상
14. 매체에서
티거 중전차가 등장하는 매체들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티거는 괴물같은 활약을 보인 철로 된 짐승 그 자체로서의 이미지 성립에 성공하였다. 그래서 대부분 최종보스나 주인공의 최악의 고난같은 형식, 아니면 아예 적군이든 아군이든 이해조차 불가능한 재앙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 One-Two, Soldiers Were Going...
작은 마을에 주둔하면서 금괴 호송을 엄호중이던 티거 3대가 등장한다.
이 3대의 티거 중 첫 번째 티거는 승무원들이 사살당하고 오드볼의 셔먼 전차에게 후미를 기습공격당하여 격파당한다. 두 번째 티거는 길을 잘 못 들어 막다른 골목에서 갇혀버린 상태에서 오드볼의 셔먼이 티거의 후방을 잡는데 성공하여 사격하지만 페인트탄이었다. 재장전하는 사이 티거는 포탑을 돌리려고 하지만 주포가 한쪽은 돌담에 반대쪽은 나무에 걸려서 반격도 하지 못한채 허무하게 터져버렸다. 나머지 1대는 켈리와 협상하여 은행 문을 전차포로 때려부수고 미군들과 사이좋게 금괴를 나눠가진 뒤 전차장과 승무원들은 다른 차량을 이용해 떠나고 전차는 오드볼에게 팔려나간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켈리의 영웅들에서 등장하는 티거 전차들은 T-34 전차의 외형을 개조해서 만든 모조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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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에 비해서 포탑이 더 크고 약간 전방에 달려 있어서 포르셰 티거와 비슷한 점이 포인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등장하는 티거 전차는 개조를 맡았던 군용 차량 동호회의 회원이었던 스티브 라몬비의 취향에 의하여 티거 전기형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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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의 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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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 예정이던 레플리카
- 데드 스노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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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셸-아들러 트리의 티거는 후기 양산형 티거[102] 이며, 같은 티어의 포르쉐 트리는 당연하게도 VK 45.01(P) "포르셰 티거"로, 차체 전면에 100mm 두께의 장갑판을 추가로 붙인 지휘전차 사양으로 등장. 현실과는 달리, 경사진 곳을 오른다고 엔진이 고장나거나 불타버리는 일도 없고 속도도 의외로 잘 나온다. 헨셸이나 포르셰나 같은 주포를 최종포로 가져가나, 헨셸은 살짝 뒤로 물러나 정신나간 DPM으로 승부를 보고 포르셰는 DPM은 떨어지지만 두툼한 전면장갑으로 앞에서 방어하는 식으로 플레이 방식이 갈린다.
월탱 블리츠에서는 7티어의 후기형 티거도 나오지만 본가의 일본 티거와 달리 쿠로모리미네 여학원의 전차도팀 대장 니시즈미 마호가 운용하는 초기형 212번 티거가 일본 6티어 프리미엄 전차로 있다.
또, 앞서 설명한 131호 티거가 독일 6티어 프리미엄 전차로 등장한다.
- Men of War 시리즈
컴퍼니오브히어로즈 마이너 갤러리에선 '과학'이라 불리며 까일 정도인데, 사실 객관적인 성능 자체는 강력하지만 티거의 로망 충족만을 위해 뽑아야할 유닛을 안뽑고 돈모으다가 게임 밀려버리는 일명 티거충들이 뉴비부터 고인물까지 널려있기 때문. 티거의 가격은 4호전차 2대와 비슷한데, 이 말은 적들이 중형전차 2대를 뽑고 공세를 이어갈 타이밍에 티거충들은 티거를 빨리 쓰고 싶어 아무것도 안뽑고 버티다가 게임을 말아먹는다는 의미이다. 여담으로 등장 형식은 전부 초기형이나, 대공용 MG42를 장착할 수 있다는 작은 고증 오류가 있다.
'엘리트 트룹 독트린', 'Strategic Reserves Doctrine' 지휘관은 "티거 에이스"라는 유닛을 호출할 수 있는데 이 놈은 애매한 기본 티거보다 좀 더 성능이 강화된 버전이다. 체력이 좀 더 높고, 유용한 액티브 스킬을 가지고 있는 대신 기본 티거보다 비싸며 기동력이 살짝 낮다. 일반 티거보다 강하다 해도 결국 사거리가 짧은 티거의 약점이 유지되기 때문에 운용법은 일반 티거와 거의 동일하다.
서부전선군은 대공세 교리 지휘관이 사용할 수 있다. 지휘전차란 설정으로, 동부군 티거보다 자체 전투력을 높여주는 배테런시 보너스가 고레벨으로 밀려난 대신, 티거의 연사력을 잠시 깎고 주변 아군의 화력을 크게 높여주는 버프스킬을 가지고 있다. 밸런스 문제로 해당 지휘관이 가진 전차의 시야와 포격스킬을 추가해주는 전차 지휘관 업그레이드는 사용하지 못한다.
과거 티거 에이스는 이 게임 최고의 문제아로 악명 높았는데 '한번 불러내면 티거 에이스가 파괴될 때까지 자원 수급률이 바닥을 치게 된다.'는 패널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 발매 초기엔 그래도 나오면 끝판왕 포스를 풍기며 승기를 굳혀줄 수 있었지만 후에 너프를 두들겨 맞고 연합군이 구축전차를 좀 모으면 할수 있는게 없어졌다. 한번 터지면 다시 호출도 못하며 비쌌던 건 덤. 덕분에 여기서 좀 강한 전차가 있으면 100퍼센트 이기겠다 확신할 수 있을 때만 가끔 뽑는 유닛으로 몰락했었다.
작중에선 슈츠슈타펠 소속으로 초기형 1대가 나왔는데 매복하고 있다가 셔먼 전차 1대를 날려버리며 첫 등장하며 3대1 전투에서도 2대의 셔먼을 격파하고, 마지막엔 주인공 일행의 퓨리와 접전을 벌이고, 근접전을 벌이던 도중 티거의 후방을 잡은 퓨리의 근거리 사격 2연타에 전차는 격파된다. 티거의 승무원 중에서 2명이 탈출하다 컬리어 하사의 돌격소총에 의해 사살되고, 전차장이 권총으로 최후의 발악을 해보지만 나치에 대한 증오심에 차 있던 노먼이 사격한 M1919 브라우닝 기관총에 사살당하는 걸로 상황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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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레플리카가 아닌 진짜 대전 당시 제작된 티거 전차가 나왔다. 그것도 바로 문서 상단에 나온 보빙턴 박물관의 131호 티거. #BBC의 관련보도(영문)
- Theirs is the Glory'
- 프라하의 독립
독일군의 첫 번째 중전차로 등장한다. 첫 번째라곤 해도 현질을 제외하면 전차병을 상당히 숙련해야 입수할 수 있는 전차인데, 1티어 주제에 2티어도 씹어먹는 괴물이다.[105] 상대하는 미군과 소련군의 중전차가 티거나 티거보다 더 단단한 토치카를 잡자고 만들어진 M26 퍼싱과 IS-2 이지만 M26 퍼싱는 모든 부위가 숨펑숨펑 관통되고 IS-2는 해치와 포탑이 숨펑숨펑 관통된다.[106] 하지만 기동성은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차량을 통틀어서 가장 느려터져서[107] 대전차 보병의 기습에 심각할 정도로 취약하다. 하지만 수리비가 1티어 인지라 꽤 적어서 가성비는 최강이다.[108]
- 프라모 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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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격인 오아라이 학원에서 추가 장갑이 없는 기본형 포르셰 티거가 후반부에 합류하여 레오폰팀이 탑승하였고, TVA 최종보스로 등장하는 쿠로모리미네 여학원에서 초기형 아프리카 군단 사양 212번 헨셸 티거를 니시즈미 마호가 운용하여 1회전에서는 이거 하나로 97식 전차 10대를 격파하는 무쌍을 찍고(...) 2회전에서 티거의 활약은 정확히 묘사되진 않았지만 준결승에서는 세인트 글로리아나 여학원의 플래그 차량인 처칠 Mk. VII을 직접 기습해 승리했으며 결승전에서는 현립 오아라이 여학원의 4호 전차와 1대 1 대결을 벌여 패배한다.[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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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극장판에서는 동생의 4호 전차 H형과 함께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최종결전에 참여해 M26 퍼싱[112] 2대[113] 를 격파한 후 4호 전차의 후면에 공포탄을 발사해 그 추진력으로 시마다 아리스의 센추리온 Mk 1을 격파할 수 있도록 한다.
연출을 보거나[114] 카타리나 사령관의 말에 의하면 여기 등장하는 티거 탱크들은 모두 무인 시스템을 갖춘듯 하다.
15. 모형화
2차 세계 대전의 아이콘과 다름없는 전차답게 어지간한 프라모델 회사라면 안 건드린 곳이 없다. 아카데미과학, 타미야, 드래곤 모델, 이탈레리 등 쟁쟁한 프라모델 메이커에서 티거를 만들어왔으며 각 회사마다 특징이 있다.
- 아카데미- 처음에는 타미야 카피본을 만들다가 이후 내부를 재현한 초기형으로 호평받았으나 이 때의 티거의 포탑이 비대칭이라는 것이 알려져 결정판에서 사장되었다. 그래도 내부재현은 준수한 편인데다 연결식 궤도, 에칭 그릴 등 가성비는 매우 좋은 편. 포탑 등을 개수한 중기형과 후기형이 나온 상태다. 그리고 초기형 부품과 후기형 부품을 혼합한 하이브리드형을 모형화해서 출시하였다.[115] 특징은 세계최초로 개발된 치메리트 코팅용 데칼이 포함돼 있다. 4D 퍼즐로도 발매되었는데 사막전 사양과 동계 컬러 사양이 있다. 최근 쿠르스크 전투 사양 초기형이 포탑이 개수되어 출시되었다.
- 타미야- 1/35-대칭 포탑 건이 터지자 기존 생산품에 은근슬쩍 비대칭 포탑으로 개수하여 한동안 결정판의 자리를 차지했으나 드래곤의 난입으로 2000년대 중반부터 결정판의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 조립성은 아카데미보다 약간 좋은 수준이며 가격적 메리트가 없는 상태이다. DAK 극초기형은 마킹설정이나 전방머드가드부분이 문제가 있다. 에칭이 없는 것이 흠.
- 드래곤- 티거에 환장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116] 수많은 티거 바리에이션을 뽑아냈으며 그 중에는 치메리트를 몰드화 시킨 중•후기형이 있으며 비트만 탑승 티거는 초기형 티거의 결정판으로 인정받는다. 이 킷에는 남는 부품도 많아서 다른 회사 티거의 디테일 업용 재료도 된다. 가격이 비싼 것이 흠이나 에칭, 남는 부품이 가격을 커버한다. 비트만 탑승차량 이후에는 보빙턴의 131호 키트를, 이후 아프리카 군단 사양[117] 을 계획하였다. 요즘은 후기형 007호차 '비트만의 마지막 티거'나 카리우스의 중기형도 나왔으나 후기형 찌메리트 버젼은 초기몰드의 찌메리트품질이라 표면이 투박하고 거칠다. DAK 6608은 극초기형의 결정판으로 기존의 타미야 DAK 극초기형을 일격에 사장시켜버렸다. 물론 사이버하비의 화이트박스 DAK를 일반화한 제품이지만 그것과 다르게 전방 머드가드의 형태를 정확하게 재현해놓았고 그외 자잘한 면이 대폭수정되어서 화이트박스의 존재의의도 없애버렸다.
- 이탈레리-가격 자체는 저렴하나 대칭 포탑 및 비교적 낮은 퀄리티로 사실상 낮은 가격으로 승부를 보는 편. 최근에는 에칭과 반연결식 빈터케텐(동계용 궤도)를 추가하고 치메리트 가 기본으로 붙어져있는 고급형도 나왔다.
- AFV CLUB- 금속제 포신과 가동식 서스펜션을 재현하였으나 치메리트를 해주어야 하고 부품을 잘게 나눠놓은 탓에 조립성은 그렇게 좋지는 못한 편이다. 하지만 타미야보다 저렴하고 퀄리티는 미세하게 높은 편. 연질궤도는 뛰어난 퀄리티를 보여주나 붙이기가 까다로운 편이다. 하지만 다른 티거 키트에 비해 포탑 높이가 너무 높고 용접선 묘사는 부족하다. 단, 1/48 스케일의 티거는 결정판[118] 에다 후기형의 경우, 치메리트가 몰드 처리다.
- Rye Field Model- 2015년 여름,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메이커로 첫 제품으로 다름 아닌 아프리카 군단 501 중전차 대대 사양의 극초기형 티거를 발매했다. 발매 이후, 사이드 스커트 장착 볼트 위치 오류, 두꺼운 베기구 커버 기둥, 과장된 용접선을 빼면 뛰어난 프로모션을 보여줬고 이 때문에 2005년에 딱 한 번 아프리카 군단 티거를 한정판으로 발매하고 그 이후, 생산하지 않는다던 드래곤에서 부랴부라 아프리카 군단 티거를 계획했을 정도. 무엇보다 최근 DS 연질궤도만 넣어주던 드래곤과 달리, 가동식 궤도를 넣어주면서 드래곤보다도 저렴해 화제가 됐다. 또한 2015년 11월엔 내부재현형 티거 초기형, 정확히는 쿠르스크 전투 당시에 503 중전차대대 3중대 소속 차량을 발매했는데 고퀄리티다. 가장 정밀한 내부재현 티거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메리트가 있을듯.[119] 이후 아카데미처럼 페르만 전투단 소속의 하이브리드 사양의 티거도 발매했는데 꽤 비싸다.
- 트럼페터- 88mm 71구경 장착 사양 티거인 VK 45.02(H)를 발매하였다.
- 옥스포드 완구- 블록 모형으로 발매. MILITARY WW2라인업으로 나왔으며, T-34, 5호 전차 판터, 윌리스 MB랑 같이 발매되었다.[120] 옥스포드답게 후한 악세사리는 물론이다. 다만, WW2 초기라인업인지라 해치가 탈부착식이고 들어있는 피규어는 전원 장교모자를 쓰고있다. 이는 아직 슈탈헬름 같은 부품이 개발단계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독일군 일반병사는 P-38[121] ,P-51[122] 에서나 얻을 수 있다.
15.1. 종이모형
- 워게이밍 러시아서버에서 배부중이다.
- 페이퍼레플리카-티거 초기형의 도면을 구할 수 있다. 본인이 직접 도색할 수 있는 것도 덤이다.[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