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벅
1. 개요
미국의 소설가. 장편 첫 작품 《동풍·서풍》을 비롯해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왕룽을 중심으로 그 처와 아들들 일가의 역사를 그린 장편 《대지》 등이 대표 작품이다. 또 미국의 여류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한국은 고상한 국민들이 살고 있는 보석같은 나라다.
펄 벅의 소설 《The Living Reed》 서문 中
2. 생애
미국에서 태어나고 생후 3개월 만에 미국 장로회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서 자랐다. 선교활동에만 열중하고 가정에는 무신경한[3] 아버지 때문에 외로운 유년시절을 지냈지만,[4] 오랜 중국 생활은 벅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중국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였다. 청 말기에는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는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팽배해 있어서 물리적 테러도 빈번했는데, 펄 벅은 폭동이 일어나서 목숨을 위협받게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이며 백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자각했다고 한다.[5] 그 전에는 명백한 구분 없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했다는 뜻이 된다.
그녀의 부모님은 미국인이었지만, 중국인 유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자연스레 영어, 중국어를 함께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중국의 고전문학 삼국지, 수호지 등을 '''원서'''로 읽으며 자라났으며, 훗날 미국에서 이 소설들이 출판될 때 번역을 맡기도 했다. 1910년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1914년 랜돌프 매콘 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펄 벅의 미국 대학 생활은 처음으로 미국에서 살아보게 된 경험이었다고 한다. 미국에 있을때도 지나치게 중국화된 성격과 사고방식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1917년 농업경제학자 존 로싱 벅과 결혼하면서 벅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고 난징 대학, 난둥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1926년 일시 귀국해 코넬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고 이혼 후 출판사 사장과 재혼하게 된다. 1932년 뉴욕에서 했던 강의에서 "중국에는 선교사가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다른 비(非)기독교 국가에서 선교할 때 오만함을 버리길 바랍니다"라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장로파 전도위원에게 비난받아 선교사 직위를 사임했다.[6] 펄 벅은 미국내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을 지적하며 그들의 인권에 대해 외쳤고 마찬가지로 그 당시 차별이 심하던 흑인 인권에도 관심을 보여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심각한 지적 장애를 가진 딸이 한 명 있었는데, 이 딸은 벅 인생의 가장 큰 아픔이 되었다.[7] 이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입양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한국과 중국에서 미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의 입양을 주선하는 펄 벅 재단을 1964년에 설립하게 된다. 이 단체는 한국전쟁 이후 혼혈아들의 미국입양을 알선해주는 대표적인 단체로 자리잡는다.
수십여 년을 중국에서 살아온 만큼 중국에 대한 애정이 깊어 동아시아의 실정에 대해서도 전문가였다. 그 당시 동아시아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대체로 대지 이후의 작품들은 펄 벅 본인의 생생한 체험에서 우러나지 않고 취재한 정보를 토대로 집필된 것이 많은데다, 다작 성향이 너무 지나쳐서 대지만큼의 엄청난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인 '살아있는 갈대' 같은 경우 한국이(당대의 서양인들이 흔히 생각하던 '미개한 동양' 의 이미지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고도화된 정치적 체계를 갖춘 사회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기는 한데...(제한된 분량 때문에 자세한 설명이 힘들었는지) 동인과 서인 개념을 양반의 동반/서반 개념과 등치시켜서 설명해버리는 고증 오류를 저질렀다. 다만 작품의 전반적인 고증 수준으로 미루어보건대 이것은 그저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일부러 단순화시킨 것일 가능성이 높지만... 여하간, 대지 이후 다작시대의 펄 벅 작품은 작가의 정치적 의도(반 제국주의/식민주의, 여권 신장, 아동 보호, 인종차별 반대)가 매우 명확히 드러나고, 애초에 복지 사업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책을 빨리, 많이 썼기 때문에 각각의 작품은 상당히 허술하게 쓰여졌다는 점 때문에 문학적으로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펄 벅 본인의 체험이 아닌 취재한 정보를 토대로 집필된 작품들의 경우에도 일단 펄 벅은 당시 미국의 저술가 중에서는 중국 및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참작의 여지가 있다.
3. 한국 관련
한국에도 여러 번 와서 정·재계 관계자 및 문학가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서울대학교 장왕록 교수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 대지 3부작의 초기 번역을 장교수가 맡았다. 장왕록 교수의 딸인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번역한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원제: The Living Reed)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이 책의 초판본 표지에는 '아리랑' 가사가 쓰여있고, 서문에 한국을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같은 나라"라고 언급하는 등 한국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영미 언론에서 대지 이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쓴 《일본 내막기》의 서평과 추천서를 남겼으며, 한국의 혼혈아를 소재로 한 소설 《새해》(1968년)를 집필하기도 했다. 또한 유한양행의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와의 교분도 있었는데, 후일 그녀의 작품에 '김일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고, 스스로 박진주(펄을 번역한 이름)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쓰기도 하는 등 여러 점을 미루어 볼 때 한국에 대한 애착이 꽤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활발히 복지사업을 벌였다. 부천에 있던 유한양행 소사공장이 이사를 가자 유일한의 도움으로 그 부지를 매입, 1964년 한국펄벅재단 소사희망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1975년 문을 닫을때까지 9년간 8번이나 소사희망원을 방문해 아이들을 직접 씻기고 돌봤다. 소사희망원이 문을 닫은 후에는 부지가 일반에 매각되고 주거지가 되었지만, 2006년 부천문화재단이 부지 일부를 매입하여 소사희망원 건물 한 동을 복원, 펄벅기념관을 세웠다.
일설에 의하면, 1962년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이 펄 벅한테 “내 생각에는 동맹관계라고 미군이 너무 퍼주는데, 그만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 같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요. 우리는 빠져 나오고 대신에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맡도록 해야 할 것 같소."라고 말하자,[8] 그녀는 "그들은 서로 같은 인종같아 보일지 몰라도 서로 불공정했던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서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힘있던 쪽에게 다시 통제권을 주겠다는 소리는, 마치 우리 미국이 예전 영국의 지배받으라고 돌아가라는 소리와 같습니다."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이에 케네디도 농담이었다며 물러섰다고.
4. 중국 관련
펄 벅은 중국을 떠나온 뒤 중국에 꼭 다시 가고 싶어했으나, 마오쩌둥 정권 하의 공산주의 중국에서 펄벅은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중국을 왜곡한 작가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입국이 불허되었고, 죽기 몇년 전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 때도 동행이 거절되었다. 미완성 유작도 대지 4부인 붉은 대지로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을 그리며 쓰다가 끝내지 못하고 1973년 3월,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설의 묘사를 들여다보면 펄 벅은 특별한 사상적 주장 없이, 그저 중국 하층민들의 생활을 핍진할 정도의 현실적인 묘사로 (거기다 다분히 동정과 애정을 가진 필체로) 그려나갔을 뿐이다. 근데 정작 펄 벅을 비난한 루쉰은 작중에서 '''같은''' 중국인들을 미개하고 타락한 사람들로 그리며 각성을 촉구하고 있고, 그 중국인을 피해망상에 찌든 미치광이나 정신병자(아Q는 약과다)로 묘사하며 아주 가차없이 비난했는데도, 마오쩌둥을 비롯한 정치인이나 중국의 지식인이나 문학가들은 그를 다른 부분에 대해서 비판했으면 했지 중국인에 대해서 폄하했다며 까진 않았다. 이는 당시 자격지심에 시달리던 상당수 동양인들이 '''"까도 우리가 까!"'''라는 식으로 다른 인종이 동양인을 조금이라도 안좋게 묘사하는걸 못견뎌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9]
벅에 대한 이런 평가를 정착시킨 인물 중 하나가 루쉰인데, 사실 이건 펄 벅의 작품을 죄다 중역판(...)으로 읽어서 생긴 오해라는 의견도 있다. 다만 북미의 중국인 작가 중에서도 의외로 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는 중국에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 '''인식이 많이 바뀌었고''' 펄 벅의 작품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진 지 오래다. 중국 매체가 선정하는 세계명작 추천서나 반드시 읽어야 하는 영미문학 중에 펄벅의 대지는 항상 목록에 오른다. 청 말기 - 군벌 난립 - 혁명기를 다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대지 3부작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지(소설) 항목이나 루쉰 항목에도 구구절절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사실 이 문제는 펄 벅 자신이 가진 복잡한 정체성과도 연관된 문제이다. 자서전에서도 밝힌 것처럼 젊은 시절의 펄 벅은 중국인에 속할 수도, 미국인에 속할 수도 없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 문제 때문에 고민했고, 펄 벅 자신이 작가로써 불후의 명성을 쌓아감에 따라 이는 단순히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넘어 펄 벅이라는 역사적 위인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관한 문제가 된 것. 말하자면 서구 문화권(유럽+미주)에서 펄 벅은 동양의 사회와 문화, 문명을 소개하는 대변인이었지만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펄 벅 역시 백인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으며 펄 벅 자신도 청소년기의 반 백인 테러에서 인식한 것처럼 중국에서 성장했지만 중국인이 될 수는 없던 자신을 인식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실제로 펄 벅의 자서전을 보면 동양에 대한 비하적 편견에 사로잡힌 서양인들을 사정없이 비판하면서도 동양(특히 자신이 성장한 중국)에서 뭔가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이 미개한 동양놈들!' 이라고 화를 냈다가 잠시 후 왜 그런 차별적인 생각을 했는지 크게 후회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10]
[1] 중국어에 능통했던 본인이 사용했던 중국 이름이다. 싸이는 자신의 친정 성의 발음의 음역에서 한 글자를 딴 것이고 전주는 본명을 그대로 번역한 것.[2] 펄(Pearl)은 진주, 벅(Buck)은 박(朴)씨로 바꾸었다. 실제로 그녀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스스로 박진주朴眞珠라는 이름을 지어 사용했다고 한다.[3] 심지어 펄 벅의 아버지는 벅을 대학에 보내는 것보다는 그 돈을 자신의 선교 사업에 사용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딸의 미래에 대해 무관심했다.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한 펄 벅에게 있어서 미국에서의 대학 교육은 곧 미국인으로써의 사회화의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펄의 아버지인 압솔름은 딸이 '중국인 사회에도, 미국인 사회에도 속하지 못한 일종의 국제적 미아' 가 되더라도 아무렇지 않다고 여길 정도로 딸과 가정에 무관심했다.[4] 심지어 펄 벅의 아버지는 딸의 작품마저 무시했다.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타게 한 '대지'도 죽을 때까지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벅은 선교사들 사이에서 왕따당해 쫓겨난 아버지를 위해 대학에 일자리를 주선해주기도 했다(...).[5] 반서양인 폭동에 휘말릴 뻔한 일도 있다. 가뭄이 서양인들 탓이라고 생각한 동네 사람들이 펄 벅 일가를 습격하기로 했는데, 한 이웃에게 귀띔을 받은 펄 벅의 어머니(아버지는 다른 지역에 가 있었다)는 도망치거나 공포에 떠는 대신, 온 집안에 불을 켜고 문과 창문을 활짝 열고 차와 케이크를 준비해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차리고 폭도들을 맞이했다. 그래서 이미 펄 벅 일가를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었던 폭도들은 웃으면서 환대하는 펄 벅의 어머니와 평소처럼 무릎에 올라앉는 아이들을 보고 어물거리다가 차 대접만 받고 물러갔다고 한다.[6] 다만 실제 당시 일부 선교사들이 꽤 오만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건 사실이다. 구한말 윤치호의 일기에도 선교사들에 대한 실망과 불평이 등장한다. 한 예로, 레르 목사가 중국인 신도들에게 설교를 하는데 '일본이 중국을 이겨서 대만을 얻었다'는 굳이 안해도 될 말을 해 화를 돋구기도 했다고.[7] 그 당시엔 지적 장애나 정신병이 매우 혐오스런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는 치부여서 벅은 딸의 존재를 감추어야 했는데, 노벨상 수상 때도 기자들에게 이 문제로 시달렸다고 한다. 이 경험을 벅은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책으로 풀어냈다. '대지'에서도 왕룽의 딸중 하나가 지적장애를 가진 백치로 나오는 것도 이 영향인 듯.[8] 케네디의 재임기에 한국은 4.19와 5.16으로 정치적인 혼란, 저개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으며, 케네디는 그러한 한국의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9] 굳이 동양인이 아니더라도, 미국만 봐도 흑인이 흑인 보고 니그로거리며 비하어를 쓰는건 농담으로 받아들이지만, 백인이 흑인 보고 니그로라고 하면 바로 주먹 날라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펄벅은 비하어를 쓴 것도 아니고 하층민 묘사했다고 이러니 좀 억울할 법도 하겠다만.[10] 여담으로 상기한 유일한 회장과의 인연은 배우자인 호미리 선생과의 친분도 의미한다. 중국계 미국인과 미국계 중국인이 될뻔한 미국인의 교류가 그러한 경계인을 체험한 그들만의 고민을 서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