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크 VS AWARE, 로렌스 존슨, 빈센트 하트넷 사건
1. 개요
이 사건은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시기에, 매카시즘의 문제점과 사상 검증 및 사회적 매장 등을 정면으로 드러내보인 사건이다. 피고는 AWARE, 빈센트 하트넷, 로렌스 존슨. 이 사건은 1956년에 판결이 났으며, 명예훼손 소송에서 최고 배상액이었던 50만 달러의 기록을 깨고 보전적 배상금으로 100만 달러, 징벌적 배상금으로 피고 빈센트 하트넷과 AWARE(단체)가 각각 125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평결이 이루어졌다. 다만 항소에서는 하트넷과 AWARE의 손해배상액이 각 50만 달러로 감액되었고, 두 피고는 파산 상태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원고인 폴크(언론 직종에 종사하였다.)가 받은 금액은 단 17만5000달러. 그리고 소송 비용을 제하면 7만5천달러만이 남았다. 그런데 56년의 가치로는 그래도 큰 금액일 것 같다.
1.1. 배경 상황
1947년, 유명 인사들이 일반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주목한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는 할리우드에서 40명 이상의 참고인을 소환하였다. 이들 중 10명은 어떤 질문에도 답변을 거부하는 적법한 진술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연방대법원이 그들의 상고를 기각함에 따라 의회모독죄로 6개월에서 1년형이 구형받았다.[1] 그리고 이들 10인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더 이상 채용되지 못했다. 심지어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서 전직 검사였던 로이 콘 변호사는, '동성애에 대해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 강하니 동성애자들은 약점이 잡히기 쉽고,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의 표적이 된다.'고 주장했다.[2]# 이런 식으로 사상 검증은 곳곳에서 이루어졌고, 심지어 여자 아역 배우도 아버지가 공산주의 단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면서 배역을 맡지 못한다. 이 때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공산주의자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가입시키니까요."'''
그러나 시민들도 바보가 아니다. 근거 없이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이면 오히려 의심을 받는다. 그래서 AWARE나 소위 다른 '자경단'들은 확실한 근거가 될 만한 '행적'을 조사하여 공산주의자를 적발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근거가 있다면 공산주의자임을 시민들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보들 중 일부는 FBI에서 제공한 것이기도 했다. 여러분도 한 번 아래 예시를 보고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 알아보자.
J.F.K가 만난 기자는, 프라우다PRAUDA(1912년 창간된 러시아의 일간지. 공산당 기관지로 공산주의 유머에도 소재로 나온다.) 지 출신의 공산주의 작가입니다. 그는 그것을 알고 그 모임에서 만났습니다. 해답은 각주로.[3]
1.2. 사건의 시작
AWARE는 무명 시나리오 작가인 빈센트 하트넷과 뉴욕에서 활동하던 배우들이 만든 단체였다. 매카시 위원회의 사설 조직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언론인들을 감시하고 강압했다. 상기한 대로, FBI에서 제공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하트넷은, 붉은 채널Red Channels이라는 책으로 공산주의자라고 생각되는 이들을 공격했다. 책의 서문에서는 '이들이 반드시 공산주의자는 아닙니다.'라고 빠져나갈 구멍을 파두었으나 사실상 '이미지'를 신경쓰는 방송 업계는 여기에 올라 분쟁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모두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방송 업계의 채용 담당 임원들은 하트넷에게 '''자문료를 내고 채용 예정자의 사상 검증을 부탁'''하는 처지에 몰릴 정도였다. 또, 피고 중 하나인 로렌스 존슨은, 전국 슈퍼마켓 협회의 임원이었으며 어떤 방송국이 하트넷에게 '''자문료를 내지 않거나 하트넷의 사상 검증에서 탈락한 이를 채용하면 식품 광고를 주지 않았다.'''
결국 전국텔레비전라디오예술가 연맹의 상식적인 이들이 나섰다. 존 헨리 폴크는, '''공산주의에도 반대하지만 블랙리스트와 사상 검증의 마녀 사냥에도 반대한다.'''며 총대를 메고 나섰다. 그리고 이들이 연맹의 집행부 직책 35개 중 27개를 휩쓸자 AWARE가 나섰다. 그리고 당연히, 폴크는 직장인 CBS에서 잘렸다.
AWARE의 출간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1. AWARE의 출간 내용
존 헨리 폴크는, 모든 중도 성향의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면서 AWARE에도 반대한다고 합니다.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폴크는 마찬가지일까요?' 그의 기록은 어떻습니까?
(1) 1946년 4월 22일 데일리 워커Daily Worker(공산당 기관지)는 '잭 폴크'라는 사람이 뉴욕 시 아트로트 광장의 클럽 65에 나타났다고 보도했습니다. 그 곳은 공산주의 동조자들의 소굴입니다.
(2) 1947년 4월 17일 데일리 워커Daily Worker(공산당 기관지)는 '행동을 위한 무대'가 후원하는 개막 행사에 '자니 폴크'가 연예인으로 등장한다고 보도했습니다. '행동을 위한 무대'는 공식적으로 공산주의 단체로 지정되었습니다.
(3) 1948년 4월 5일 데일리 워커Daily Worker(공산당 기관지)는 공식적으로 공산주의 단체로 지정된 '미국시민연합'이 만든 시사풍자극에 '존 폴크'가 후원을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4) 공식적으로 공산주의 단체로 지정된 '인민의 노래'의 발간물 제3권 1, 2호에는 폴크가 인민의 노래 창립 2주년 축하 인사를 보낸 사람으로 적혀있습니다.
(5) 한 회람에는 '조니 폴크'가 1948년 2월 16일 제퍼슨 사회과학 학교 200호실에서 열리는 행사에 출연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여기는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훈련장입니다.
이런 식이었다. 그나마 상기한 내용들은, 계속 같은 패턴이라서 일부 생략하고 작성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위 내용들 중 공식적으로 공산주의 단체 운운은, 공산주의 단체로 지정된 적도 없는 새빨간 거짓말이고 어떤 행사들은 그냥 하트넷이 꼴리는대로 지어낸 것.''' 이름도 들어온 정보 중 비슷한 것만 인용(이 경우는 사실이었는데 문제는 존 헨리 폴크와 비슷한 다른 사람의 이름만 나열한 것.)하거나 지어냈다.
1.3. 재판의 시작
1956년 6월 26일, 뉴욕 주 1심 법원에 제기된 이 소송은, 피고들의 지연 전술에 의하여 5년 이상 지나서야 선서와 증언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고 1962년 4월 3일에 재판 기일이 정해졌다. 아브라함 겔러 판사가 사건을 맡았다.
그 6년 동안 폴크의 아내는 화장실 설비를 판매하는 회사의 광고부에 취직하였으나 이 소송건을 고용주가 알고 즉시 해고하는 바람에 웨이트리스 일로 연명하였고 폴크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백과사전을 판매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처음에 일거리를 제공하려다가 '폴크가 아직도 논쟁거리이므로 채용하지 않겠다.'는 편지와 함께 면접을 취소당했다. 후에 이 편지는 '블랙리스트'의 존부를 다루는 증거로 제출된다.
폴크의 변호사인 나이저 변호사의 변론에 따르면, 1957년에 폴크의 '''연''' 수입은 2500달러였고 1961년에는 연 4700달러의 수입뿐이었다. 58년, 59년, 60년에는 한 푼도 벌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송을 맡아 진행한 나이저 변호사는 책임감만으로 진행하였으며, 실제로 지출된 50만 달러의 소송 비용에도 불구하고 소송이 끝나 폴크가 배상을 받은 뒤 7만5천달러만을 받았다.
1.4. 재판 진행과 논란 및 의의
명예훼손의 법리는 어려운 것이 아니며[4] 이 사건의 시대적 의의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항목에서 다루지는 않도록 한다.
원고인 폴크를 대리한 나이저 변호사의 능숙한 진행으로 하트넷은 결국 '''"후원하는 단체에 따라 공산주의에 동조하는지 결정된다면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런데 하트넷이 증언대에 서서 증언을 하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메모했다. 나이저 변호사가 뭘 하는지 질문하자, 하트넷은 '방청객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_- 누구나 보기에도 뻔했다. 다들 공산주의자들이 법정의 배심원으로 앉아있다고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하트넷의 변호사인 볼란 변호사가 도와주기 위하여 '누구를 적었느냐'고 질문했는데 하트넷은 멋지게 자살골을 넣는다. 하트넷은 몇몇 사람들의 이름을 대었는데, 폴크의 부인인 린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도 적었다고 했다. 나이저 변호사가, '누가 린인지 맞춰보시죠.' 하자 하트넷이 어떤 여자를 지명했는데, 전혀 다른 사람Hellen soffer이었다.
이것부터 시작해서 상기한 '''"아빠가 공산주의자면 아역 배우도 공산주의자"''' 증언부터 간행물이 증거로 요청되자 반을 없애버리고, '''"내가 틀린 것은 누군가 내게 잘못된 정보를 주었기 때문이다."'''로 일관하면서 결국 전술한 대로 재판은 폴크의 승소로 끝나게 된다.
이 사건은 단순한 명예훼손 사건이 아니다. 매카시즘으로 인하여 희생된, 수정 헌법 5조의 적법한 '''진술 거부권과 무죄 추정의 원칙'''을 지켜낸 사건이기도 하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반 사회 내에서 소위 '''자경단'''이 부리는 횡포 역시 철퇴를 맞았다. CBS는, 이 사건을 드라마로 만들어 대중과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고 한껏 즐겼으나 자신들이 해고한 폴크에게 방송계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는 주지 않았다.
[1] 의외로 미국 사법 체계도 반성할 과거사가 많다. 1927년 5월 2일에는, '3대가 저능-정신 박약-이면 유전자 개량과 사회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강제로 나팔관을 절제하는 불임 수술을 하는 것은 사회의 이익이다. 이는 법률로 예방 접종을 실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가장 우수한 이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도 적지 않다.'고 판시하여 강제적으로 불임 시술을 해버렸다. 이것이 캐리 벅 VS 벨 사건이며 1950년대 후반까지 미국 전역에서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은 사람은 거의 6만명에 이른다. 버지니아 주에서는 1972년까지 불임 시술이 시행되었으다. 1933년 7월 14일에 독일도 우생학적 불임시술법을 제정했고 이후 나치 불임시술법에 따라 200만명이 불임 시술을 받았다.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이 판시한 이 사건을 들어 항변하였다.[2] 그리고 콘 변호사는 300만 달러의 세금을 포탈한 뒤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1986년에 에이즈로 사망했다. 다만, 콘 변호사는 로젠버그 부부 간첩단 사건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이후 기밀 해제된 문서는 실제로 이들이 간첩이었음을 증명했다. 그런데, 냉전 이후 기밀 해제된 문서 중에는 헤밍웨이도 이중 간첩이라는 문서도 있었다.[3] 눈치빠른 분들은 알겠지만, J.F.K, 즉 케네디 대통령이며, 저 모임은 백악관 기자 회견이었다. 단 이것은, 원고인 폴크를 대변하여 나이저 변호사가 상대방인 하트넷을 비꼬느라 한 변론이다[4] 미국과 우리나라는 명예훼손의 법리가 일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