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직스
프란츠 알프레드 직스 (Franz Alfred Six)
(1909년 8월 12일 출생 - 1975년 7월 9일 사망)
만하임에서 가난한 가구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직스는 1921년에 실업학교에 입학했지만 1927년에 학업을 중단하고 목수일을 하다가 1929년 11월에 나치당의 학생동맹조직에 들어가 1930년 3월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1930년 4월부터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해 사회학, 국가학, 근대사, 법학 등을 공부했는데 1932년 11월에 돌격대 대원이 되어 나치학생동맹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발행했던 잡지 <하이델베르거 슈트던트>의 편집원이 되었다. 직스는 나치당 학생동맹의 간부 중 한 사람이기도 했는데, 머리가 명석하여 1934년 5월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조교로 일하면서 나치 친위대에 입대한 직스는 1935년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눈에 띄여 친위대 정보부로 초빙되었다. 1936년 말에는 정보부 2국 1부 1과(세계정보부) 책임자가 되어 1937년엔 2국 1부(적국 조사)부장을 겸임했다. 1938년에는 1국 3부(신문 및 박물관), 2국 1부(세계정보부), 2국 2부(거주지판단)의 3국도 겸했다. 또 학문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1938년 4월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다시 베를린 대학의 외국학부장, 독일 외국어 연구소 총재 등도 역임했다. 직스는 나치국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 되었다. 1939년에 하이드리히가 국가보안본부를 직접 경영하면서 직스의 역할은 감소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0년에 하이드리히에 의해 국가보안본부를 떠나는 것을 허가받은 후 베를린 대학에서 명예교수 직함을 받고 무장친위대에 종군했다. 네덜란드에서 훈련 후 제 2 SS장갑사단에 참가해 유고슬라비아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다시 국가보안본부로 돌아왔지만 1941년 6월에 하이드리히에 의해 아인자츠그루펜 B대에 소속되어 <보르코만도 모스크바>의 대장이 되어 동부전선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8월에 발데마르 클링겔헤퍼가 후임으로 부임해 다시 국가보안본부로 돌아갔다. 두달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직스가 대장으로 있을 때 그의 부대는 144명의 유대인 및 반나치주의자를 총살했다. 국가보안본부로 돌아와 7국(공문서 자료국)국장이 된 직스는 유대인의 정보와 수집임무를 담당해 그 연구성과를 4국(게슈타포)에 보고했다. 또 베를린 대학교수로 복귀하여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1943년에는 외무성으로 이동하여 외무성 문화정보국장을 지냈다. 직스는 전후 <게오르그 베커>라는 가명으로 캇셀 인근의 기르젤베르크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지만 미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47년 9월에 직스는 아인자츠그루펜 지휘관으로서 학살행위와 관련한 재판에 서게 되었다. 1948년 4월에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은 직스는 복무기간이 짧았고 살인에 적극적인 관여를 하지 않았기에 사형을 면할수 있었는데, 다시 이후 판결에서 10년이 감형되어 1952년에 란츠베르크 형무소를 출소했다. 전후 출판업계에서 일한 직스는 1961년 5월에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증언자로 나서기도 했다. 그 후 직스는 1975년에 이탈리아의 볼차노에서 65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