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1. 개요
筆寫. 글을 베껴 쓰는 일.
2. 역사
인쇄술이 제대로 상용화 되기전까지는 직접 필사해서 책을 찍어내는 일이 대부분이였다. 그런데 필사는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작업량도 많아[1] 이 당시에는 책 값이 상당히 비쌌다. 그래서 수도원의 고행 과정에도 성서 필사가 있었을 정도.
동양에서도 불교의 불경을 필사하는 사경이 단순히 인쇄술의 미발달을 넘어 옮겨쓰는 행동 자체가 중생과 내세를 이롭게 하려는 공덕 일종으로서 간주되어 권장되었는데 현존하는 고려 시대의 사경을 보면 색지나 비단에 금가루를 섞은 먹으로 글자를 쓰고 불경에 등장하는 장면을 삽화로 그려 넣는 등 지금 기준으로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수준 높은 작품이 상당히 많으며, 현대에도 사경 자체를 전문으로 하는 예술 분야도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일족의 번영을 기원하면서 一門의 사람들과 함께 사경해 이쓰쿠시마 신사에 봉납한 헤이케 노쿄(平家納経)가 현존하며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문헌 자료를 인쇄하거나 촬영하기가 어렵다면, 학자들이 직접 필사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내용을 왜곡하거나 첨삭하는 등의 필사자의 주관이 들어가거나 오자, 탈자와 같은 실수가 있을 수 있으므로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몇 개월에서 몇 년간에 걸친 필사는 힘든 작업이었다. 말 그대로 밭갈이에 비유됐다. 심지어 천국에 들어가려는 참회의 방법으로서 간주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필사하였는가'로 천국으로 가는 길을 계산하기도 하였다나.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모작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고대의 서적이나 서예 미술품 가운데 원본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필사본이나 모사본이 유일하게 현대에 남아있는 예가 잦다. 이런 작품은 비록 베껴진 것일지라도 매우 높게 평가받고 희귀한 자료로서 취급된다. 그 대표로 왕희지의 난정서도 원본은 소실되었으며 필사본만이 현대에 존재한다.
3. 소설 훈련법
작가 지망생이 훈련하는 방법으로 기존의 창작품을 베껴쓰는 훈련이다. 필사의 효과는 다음과 같다.
- 더욱 깊은 독서를 경험한다.
- 글쓰기 경험을 간접으로 경험한다.
'''글은 엉덩이로 쓴다'''라는 격언처럼, 작가에게 끈기는 매우 중요하다. 집중력을 발휘해 오래 앉아 많이 써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초보 작가지망생이라면 원고지에 고작 몇 문장 쓰고 나서부터도 벌써 엉덩이가 들썩거리면서 안전부절하리라. 필사는 집중력을 키우고 글쓰기 경험을 대리 경험하는 효과가 있다.
워드프로세서로 베껴 써도 무방하지만, 보통은 필기구로 쓰기를 추천한다. 그 이유는 아날로그의 장점 때문이다. 종이를 볼때의 눈의 피로도는 모니터보다 덜하고 글쓰기 속도가 타자기보다 느린 만큼, 쓰는 문장을 더욱 많이 느끼고 더 느리고 깊게 생각할 수 있다. 문장을 오래 쓰면 손이 피곤해지므로 간결체로 쓰는 버릇을 들이기 쉽다는 장점도 있다.
작법을 훈련하려고 워드프로세서로써 필사하고자 한다면,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 가면서 천천히 해야 한다.''' 필사는 또다른 독서일 뿐, 백지에 자신의 소설을 쓰는 일과는 다르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절대 기계처럼 정신줄 놓고 받아쓰기하는 막노동이 되지 않도록 순간순간 흩어지는 집중력을 되잡는 일이 중요하다.'''
필사하다 보면 자신의 작품이 필사해 본 다른 작품에 매우 많이 영향받으므로 어떤 작품을 필사할지는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한다.
필사하는 몇몇 지망생은 문장에만 집착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망하는 분야가 '시'가 아니라 '소설'이라면 이야기가 더욱 중요하므로 문장의 질만 올리는 필사는 효율이 나쁘다. 이 점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문장을 베껴쓰되, '''그 문장이 나온 맥락, 화자의 의도, 청자가 취할 만한 행동,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뒤에는 무슨 내용이 이어질지 등등을 조금씩 상상하면서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보자.'''
시를 지은 윤동주는 시인 백석의 시집을 필사했다고 한다. 신경숙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s-1》을 필사하면서 문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3.1. 필사 훈련의 문제점
신경숙은 다른 작가의 문장을 여러 차례 표절했는데 그것에는 필사가 악영향을 끼쳤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국내 문단은 유난히 아름다운 문장(美文)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경향을 현대 독서인이 원하는지는 의문스럽다. 미문이 추앙받던 때는 소설을 읽을 만큼 사람들의 시간이 넉넉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현대는 속도감 있는 문장과 좋은 이야기를 더욱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필사에는 문장력을 향상시키는 장점이 있지만 구성력은 떨어지게 하는 단점도 있다. 문장을 오래 붙잡기 때문이다. 손은 움직이는데 머릿속은 움직이지 않는 셈이다. 어쨌든 유난히 한국에서는 필사가 중요한 소설 공부 방법으로 여전히 통용된다.
그림 연습의 트레이스와 위치가 비슷하다. 트레이스 역시 초보자에게 유효하지만, 중급자에게는 무효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초보자에게도 별로 좋지 않다고 보기도 하는데 다른 사람의 창작품 베끼기를 반복하면 개성을 잃기 때문이다. 이것을 필사에도 적용한다면, 이런 공부법을 마냥 추천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3.2. 개선된 필사법
필사 과정에 교정을 추가한다. 작가는 기자나 편집자 출신이 많다. 마르케스ㆍ헤밍웨이ㆍ김훈은 기자 출신이며, 편집자 출신은 셀 수 없이 많다. 마루야마 겐지는 텔렉스 기사로 일하면서 문장을 익혔다고 한다. 이들은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소설이 아닌 글을 보고 고치며 기술을 익혔다. 소설이 아닌 전문영역에서도 글쓰기를 익힐 수 있다는 방증이다. 즉, 이들이 문장을 익혔던 방식을 공부법에 반영하는 것이다.
교정 과정이 추가된 필사는 훨씬 어렵지만 문장과 맞춤법을 더 정확하게 익힐 수 있다. 대신에 국내 작품은 제외한다.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하자. 연필로는 감당 안 된다.
3.2.1. 오래된 번역서를 필사하며 교정한다
80년대 전후 번역서를 살피자. 원작은 분명히 훌륭하지만, 기존 번역서는 문장력이 형편없는 예가 잦다. 일부는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전자 출판이 없던 시기인지라 번역과 편집력이 지금보다 심각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나 SNS가 없어서 대충 번역해서 내도 불평을 덜 들었고 호황이던 시기인지라 번역 수준이나 문장 수준이 엉망이어도 잘 팔렸다. 독자 피드백이 활발한 현재에는 출판을 이처럼 엉터리로 하기는 어렵다.[2]
고로 헌책방에서 非영어권·非일어권 출신으로서 좋은 작가의 책을 찾자. 스페인·중국 번역본 등은 중역이 많아 더욱 엉망이다. 순수문학이 아닌 SF나 로맨스, 추리소설 등 장르문학도 좋다. '''무엇이든 문장이 엉망진창이어야 한다.''' 이들을 읽을 만한 물건으로 만든다는 생각으로 문장을 고치면서 필사하자. 개판으로 해놓은 오역 탓이므로 선배 작품을 난도질한다는 죄책감을 품지 않아도 된다. 장편은 손이 많이 가므로 단편을 고르자. 영화 자막을 고치기도 나쁘지 않다.
작가가 사망하고 70년이 지나면 저작권이 만료되므로, 이런 작품을 교정하여 블로그 등지에 공개해도 좋다.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3.2.2. 위키를 교정한다
작가는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자들이다. 하지만 필사는 흔적이 별달리 남지 않아 동기부여가 낮으며 봐주는 이도 딱히 없다. 따라서 위키 교정은 단순 소설 필사보다 여러모로 가치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위키에서 유난히 가독성이 엉망인 문서들을 찾아보자. 이왕이면 관심사 밖의 문서를 골라 견문을 넓히자.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정확한 자료를 추적해서 고치자. 그 과정 역시 글공부가 된다. 추가할 내용이 없더라도 좋다. 비문과 오문을 고치고, 중구난방인 문서들을 정리하며 쳐내는 과정에서 구성력이 좋아진다.
3.3. 외국어 필사
필사할 지문만 잘 선택하면 좋은 공부법이다.
4. 기타
- 삼국지의 감택이 필사를 직업으로 삼았다. 그는 이 일로 학비를 벌었는데 필사를 하는만큼 지식이 쌓여 다양한 학문에 능통해지자 손권에게 등용된다.
- 로그 호라이즌의 시로에는 필사사이다.
-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3] 와 정조의 누이 청연공주,청선공주는 필사 시기가 알려진 소설중 가장 오래된 필사소설인 곽장양문록을 1773년 봄에 필사하였다.[4] [5]
- 초대 기독교의 경우에는 당시 인쇄술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하나 전부 손으로 베껴, 즉 필사를 해야했다. 그런데 문제는 필사를 하는 과정에서 원래 성경 원문에 없던 내용을 필사꾼들이 멋대로 만들어서 집어넣거나[6] 혹은 원문에 있는 내용을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일부러 빼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4세기의 어느 성경을 보면, 가운데 부분에 "어리석은 무뢰한이여! 옛 구절을 빼거나 더하지 말고 그대로 놔두시오!"라는 경고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또한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에서 "이 글에서 문구를 빼버리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생명책의 명단에서 그 이름이 빠질 것이고, 문구를 더하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받을 형벌의 갯수가 늘어날 것이다."라는 문장이 들어간 것도, 원래 성경을 필사하면서 문구를 빼거나 더하지 말고 원문 그대로 놔두라는 경고였다.
[1] 중세 유럽에서 만든 필사 책에는 글자만이 아니라 삽화나 장식이 들어갔다. 박물관에서 중세의 필사본들을 보면 단순한 책 한 권을 뛰어넘는 예술품 수준이다. 또한 글자도 서예체로 써 내려 가야 했으므로 작업량이 대단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준이 개판 엉망진창인 번역본도 꾸준하게 나온다.[3] 필사 당시에는 궁녀였다.[4] 같이 필사를 한건 의빈 성씨를 양녀처럼 키웠던 혜경궁 홍씨의 영향이 있었던걸로 보인다.[5] 여담으로 이때는 의빈 성씨가 정조의 고백을 차고 7년 후이다. [6] 가령 예수가 하는 설교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문장은 오래된 사본을 보면 그냥 "가난한 사람에게..."이다. 왜 이렇게 고쳤느냐 하면 기독교 교회에서 부자들한테까지 복음을 전파하려고 원래 문장을 저렇게 고쳤던 것. 사실 신약성경에서 예수는 부자들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냥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는 편이 아귀가 더 맞는다. 또한 예수가 부활한 뒤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 "이제부터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해라."고 명령하는 부분도 오래된 사본을 보면 없는데 이는 후대의 필사꾼들이 일부러 만들어서 넣은 부분이다. 사실 원래 예수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는데, 기독교 교회에서 로마인을 포함한 이방인들한테 복음을 전파하여 교세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원문에 없던 내용을 일부러 만들어서 집어 넣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