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image]
[image]
이름
한국어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공식명칭'''
한글
《훈민정음》
영어
Hunminjeongeum Manuscript
한자
訓民正音
프랑스어
Hunminjeongeum
영어
Hunminjeongeum Manuscript
국가·위치
대한민국 서울
'''분류번호'''
'''국보 제70호 '''
소장·관리
간송미술관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등재유형
기록유산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목판본/ 관판본
등재연도
1997년
'''시설'''
1책
제작시기
1443년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조선, 1443년
訓民正音 解例本
1. 개요
2. 어떤 책인가?
3. 해례본의 구성
4. 현존하는 해례본
4.1. 안동본(간송본)
4.1.1. 안동본 발견의 뒷이야기
4.1.2. 간송 전형필, 그 이후
4.2. 상주본
4.2.1. 국외 유출과 훈민정음 기원에 대한 조작 우려?
4.2.2. 학술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4.2.3. 상주본의 실질적 가치
4.3. 제3의 판본(?)
4.4. 제3의 판본(?) - 2
4.5. 위작: 조선 왕실본


1. 개요


[image]
한글, 즉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의 사용 방법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책의 제목. 국보 제70호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1]
원문은 여기서 확인 가능.

2. 어떤 책인가?


1940년에 와서야 비로소 다시 발견되어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책이다. 훈민정음 언해본에는 제작 원리 내용(해례)이 실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의 창제에 대한 여러 가지 구구한 추측이 난무했다.
애초에 많이 인쇄하지도 않았던지 조선 시대부터 이미 해례본은 희귀했는데, 그 유명한 "훈몽자회"를 쓴 최세진 역시 해례본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인용만 했으며, 이덕무가 쓴 백과사전 "청장관전서"에도 '세속에 전하기를 세종이 변소에서 문살을 보다 깨닫고 한글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2] 이런 저런 어중이 떠중이식 설이 나돌던 와중에 해례본이 발견되며 한글이 계통적으로 독립적인 동시에 당시 최고 수준의 언어학, 음성학적 지식과 철학적인 이론이 한글에 적용되어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해례본의 발견으로 인해 한글 창제의 원리에 대해 많은 것들이 확인되고 알려지긴 했는데, 사실 그 내용이 꽤 어려워서 아직도 대해 학자들 사이에 한글 원리에 대한 해석에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자음 글자의 경우 혀나 입술 같은 발성 기관을 본따 만들었다고 쓰여있지만 모음 글자의 경우 성리학 이론과 관련된 천, 지, 인을 가져와서 만들고 조합한 것이라 서술되어 있어서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다.
2019년 현재 알려져 있는 판본은 안동본(간송본)과 상주본 단 둘뿐이다. 그나마도 소재가 알려져 있는 것은 안동본(간송본)뿐이다. 다행히 안동본을 토대로 영인본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열람이나 유실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2014년에 제3의 판본의 일부분이 궁중에서 쓰던 모자 속에서 발견되었다. 아래 단락 참고.

3. 해례본의 구성


  • 임금의 글
    • 어제 서문
    • 본문(예의): 세종이 간략히 해설한, 글자의 운용 방법
  • 신하의 글
    • 해례(다섯 '해설'과 한 '예시'가 실렸기에 '해례'이다)
      • 제자해: 글자 창제에 관한 해설
      • 초성해: 초성 글자에 관한 해설
      • 중성해: 중성 글자에 관한 해설
      • 종성해: 종성 글자에 관한 해설
      • 합자해: 초중종 글자를 합한 글자에 관한 해설
      • 용자례: 글자를 활용한 예시
    • 정인지 후서 - 정인지 서문의 위치를 따지면 '발문'[3]에 가깝겠으나, 세종의 서문과 구분하기 위해 보통 '정인지 후서'라 칭하고 '정인지 서문'이라는 표현으로도 불린다.
그리고 해례본은 '''한문으로 쓰여 있다.''' 흔히 말하는 '나랏말싸미…'는 훈민정음 언해본의 서문이고,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문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한다. 당대의 문자 언어는 한문이었고, 새로 만든 문자를 설명하는 문자 언어가 한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초로 발견된 《훈민정음》은 맨 앞 부분 두 장이 고의적으로 찢긴 상태였다. 이 낙장 두 장은 실록본을 베낀 가짜 페이지로 메꿔져 있었다.[4] 찢긴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연산군의 한글 탄압 때 책을 감추기 위해서 표지를 뜯어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최초 발견된 《훈민정음》의 종이 뒷면에는 한 선비가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십구사략언해》가 있었는데,[5] 이 내용 역시 초반부가 등장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책을 필사할 때 처음부터 쓴다는 점을 감안하면, 표지를 뜯어낼 때 이 필사 내용 역시 같이 뜯겨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십구사략언해》는 내용상 약 18세기 후기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니, 결국 책 표지를 뜯어낸 것은 18세기 이후라는 얘기가 된다.

4. 현존하는 해례본



4.1. 안동본(간송본)


[image]
초간본, 즉 원본으로 여겨지는 해례본이자, 최초로 발견된 해례본이다. 1940년대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된 후 간송 전형필이 입수하여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보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었'''다. 그런 까닭에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이름보단 '《훈민정음》 원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상주에서 두 번째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는 구별을 위해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따 '''안동본''' 또는 소유자의 호를 따서 '''간송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은 이 판본 역시 세종대왕 생전에 나온 것으로 보긴 힘들다. 책에 수록된 '세종'이라는 묘호는 세종 사후에 붙여진 것이기 때문[6] 즉, 해례본에 수록된 내용 자체는 세종대왕이 만든 것이 확실하나 대왕 생전에는 어디까지나 그 내용을 대신들 앞에서 반포만 한 것이고, 지금과 같이 책으로 활자판본을 만들어 편찬, 보급한 것은 세종 사후인 것이다. 그래도 현재 남아있는 판본 중에서 간행 시기가 가장 이른 판본이고 내용상 원본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어학계에서는 이를 원본이라 하지 않고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정확하게 부른다.
상주본의 경우 도굴꾼 서 씨가 1999년 안동 광흥사의 대웅전 나한상 토불들을 부수고 훔친 복장유물이라는 증언을 하였고 2013년 말에 실제로 안동 광흥사에서 조선 세조 시기에 복장한 다수의 관찬 언해본 서적이 발견되면서 이 당시 편찬된 것임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데, 간송본 또한 그 판본이 완전히 똑같고 같은 안동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상주본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 복장했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원소유주는 광흥사? 최근 초간본 월인석보 언해본 등 다량 발견돼 소유권 주장 탄력 ‘한글 보급 전초 기지’ 설득력, #

4.1.1. 안동본 발견의 뒷이야기


[image]
김태준(金台俊, 1905년 ~ 1949년)
안동본은 일제 강점기의 국문학자 김태준의 제자였던 이용준(李容準)에 의해 그 존재가 처음 밝혀졌다. 이용준의 처가인 광산 김씨 종택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이용준이 발견하고 김태준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당연히 김태준은 깜짝 놀라 이용준과 함께 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가 해례본을 직접 확인했다. 이용준은 잘 보관할 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고 말했고, 김태준은 당시 문화재 수집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던 간송 전형필을 떠올렸다. 김태준은 전형필을 만나 해례본 이야기를 했고, 전형필은 그 자리에서 은행으로 달려가 1만 1천 원을 찾아와 1천 원은 김태준과 이용준에게 사례금으로 주고 1만 원은 해례본 값으로 치렀다. 그때 당시의 물가로 따지면 기와집 열 채값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고,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무려 '''30억 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당시 전형필이 해례본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봤는지 알 수 있는 일화.
앞서 해례본의 앞쪽 두 장이 찢겨나갔다고 언급했는데, 2000년대의 연구[7]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공개되었을 때 그에 관련되어 있던 인물들이 소유주 몰래 팔아먹기 위해(!) 일부러 찢어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은 이용준이 긍구당의 서고를 열람하다 해례본을 훔쳐갔던 것. 이용준이 해례본과 《매월당집》을 여기서 훔쳤는데 표지에 광산 김씨 가보를 뜻하는 도장이 찍혀있어 이를 찢어내어 팔았던 것이 표지 실종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현재 일본에 있는 《매월당집》 역시 해례본과 마찬가지로 앞 두 장이 인위적으로 찢겨져 있다. 나중에 이를 들키고 장인에게 혼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과 이를 뒷받침하는 편지도 있다.
그 이후 김태준과 이용준은 이걸 판 돈을 사회주의 운동에 써 경성 콤그룹의 거물이 되었다고 한다. 김태준은 지리산 빨치산으로 붙잡혀 죽었으며, 이용준은 월북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들의 공산주의 행적은 따로 평가하더라도 영원히 묻혀 버릴 뻔했던 해례본을 공개한 공적은 인정해야 한다. 소유주인 광산 김씨 문중에서는 이를 공개할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었으며 후일의 인터뷰에서도 빼앗겨서 억울하다란 소유권 타령만 주절거렸을 뿐이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종택 서고에서 먼지 뒤집어쓰고 있거나 6.25 중 없어져 버렸거나 했을 것이다.[8] 또한, 정 억울하면 광산 김씨 문중이 간송미술관에 소유권 반환소송을 걸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입수경로를 확실히는 말하지 못하는 듯하다.

4.1.2. 간송 전형필, 그 이후


전형필은 이것을 사들이고 나서 광복이 될 때까지 이 해례본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고 한다. 한국 문화를 철저히 말살한 일제 강점기 말기에 한글 창제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이 책이 들켰다면 영 좋지 못한 꼴을 당할 것은 당연지사였기 때문.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피난갈 때 이 책을 먼저 챙기고, 베개 밑에 두고 잠을 잘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보존하였다. 지금까지 해례본이 이어져 내려온 것은 그런 간송 선생의 노력 덕이며, 1956년 이 소장본을 바탕으로 사진을 촬영하여 만든 영인본이 제작되었다. 전형필은 영인본 제작을 위해 이 소장본을 흔쾌히 내놓았다고 한다. 내놓은 것 뿐만이 아니라 '''책을 한 장 한 장 해체하는 것까지 직접 했다'''고 한다(!).
그 이후 원본은 간송미술관에서 보관되고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하는 날이 적어 직접 보기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어차피 내용은 원본 사진을 찍어서 만든 영인본이 따로 있는데다, 현 시점에서는 전부 공개되어 있어서 한글 연구를 위해서 굳이 원본을 볼 필요성은 없다. 보존을 위해서 함부로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도 있다.
한국을 대표하며 아주 희귀한 것이기 때문에 실물로 보기가 굉장히 힘들다. 2014년 3월 말부터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열리는 간송 문화전에 원본이 전시된 적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고려 청자와 함께 다른 전시물과 다르게 손에 유리대고 볼 정도로 가까이 볼 수 없으며 약 1미터 이상 떨어져야 볼 수 있다.

4.2. 상주본


오랜 세월 해례본은 단 한 권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왔지만, 2008년 7월에 경북 상주에서 간송미술관의 간본과 동일한 판본이 발견되었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에 사는 고서 수집가인 배익기씨가 집 수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 발견하였다며 이를 안동MBC에 제보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발견지를 따서 이를 상주본이라 부른다. 최초보도

상주본은 《훈민정음》 안동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서문 4장과 뒷 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보존 상태는 안동본보다 좋고 안동본에는 없는 당시 연구자의 주석이 있다.[9] 때문에 이 상주본은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여겨졌다. 굳이 가격으로 따진다면 1조 원 이상의 가치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는 고문서 전문가와의 인터뷰가 안동 MBC 방송에 실린 적도 있다. 현재 이 책의 가격이 1조 원 이상이라는 이야기나 배익기가 이 책을 10분의 1인 천억 원에 팔겠다는 이야기는 다 이 방송 인터뷰의 고문서 전문가의 발언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상주본의 행방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배익기 문서 참조 바람.

4.2.1. 국외 유출과 훈민정음 기원에 대한 조작 우려?


상주본이 외국으로 유출되고 조작되어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신뢰성을 낮출거라는 우려도 있으나 이런 짓을 하면 문화재 보호법에 의해 처벌받을 가능성도 있다. 문화재 보호법 제90조(무허가 수출 등의 죄)에는 '제39조 제1항 본문(제59조 제2항과 제74조 제1항에 따라 준용하는 경우를 포함한다)을 위반하여 지정 문화재 또는 가지정 문화재를 국외로 수출 또는 반출하거나 제39조 제1항 단서 및 제2항(제59조 제2항과 제74조 제1항에 따라 준용하는 경우를 포함한다)에 따라 반출한 문화재를 기한 내에 다시 반입하지 아니한 자는 5년 이상의 유기 징역에 처하고 그 문화재는 몰수한다.'라고 되어 있다. 제32조에는 '문화재청장은 제23조·제25조 또는 제26조에 따라 지정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문화재가 지정 전에 원형보존을 위한 긴급한 필요가 있고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칠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중요 문화재로 가지정(假指定)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니 일단 가지정 문화재로 하는 게 시급할 듯.

4.2.2. 학술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순수한 학술적인 측면에서 위와 같은 외국으로 유출과 조작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동본이 존재하기 때문에 훈민정음 해례본의 내용은 이미 다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누가 조작해서 기존의 내용을 뒤집을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상주본이 처음에 공개되었을 때 이미 안동본과 '내용 같음'으로 검토가 끝났다.''' 둘의 내용이 다르다면 제일 먼저 조작을 의심할 텐데 어느 멍청이가 대놓고 하겠는가? 후대 인물의 개인적인 주석이 필사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그 필사가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학술적으로 중요한 내용은 옛날에도 별도의 문집으로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첫 장이 있었다면 그나마 학술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졌을 텐데 상주본도 첫 장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서 국어학자들은 사실 학술 자료로서의 상주본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상주본이 가진 가치가 폄훼되지는 않는다. 엄연히 상주본도 훈민정음이며 세계기록유산국보이기 때문. 이런 유물이 해외로 유출된다거나 소실이 되는 경우에는 학술적으론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는 못하나 상징적으로는 굉장히 타격이 크다.

4.2.3. 상주본의 실질적 가치


피카소의 유화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은 2015년 5월 11일(현지시간) 밤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 7936만 5천 달러(한화 1968억 1721만 원)에 낙찰돼 기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 상주본 또한 이에 미치지 못하지만 1천억으로 구매가 된다면 해외 토픽감 확정이다.
물론 상주본은 귀중한 국가보물인 만큼 회수에 대해 반대의 여지는 많지 않지만 과연 도난된 장물 구입 및 범죄자(일 가능성이 상당한 인물)에 대해 사면, 1천억 세금까지 투자하면서까지 사야 하는지 논란이 있다. 또한 이러한 것은 차후 절도된 문화재 관련으로도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길 우려가 있으니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주본에 대해 문화재청이 이미 가격을 매겼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거짓말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이 나왔다. 이 기사 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무가지보, 유일의 문화유산을 언급하며 가치를 따질 순 없지만 굳이 따지면 1조 이상이라고 하였다. 가격을 매긴 방식은 시민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서 감정가가 매겨진 직지심체요절의 가격과 비교한 방식이라고 한다. 물론 상태도 최악 수준이고 고서 중 매우 비싸게 낙찰된 마그나카르타가 300억 수준에 낙찰된 것을 생각해 봤을 때, 터무니없는 감정가 맞다.
반대의견으로 문화유산이 그만큼 소중한 것이고,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함은 신중치 못하다는 말 또한 있다. 사실 일반 미술품과는 달리 서적이라는 것은 실물 자체보다는 속에 담긴 텍스트의 내용이 중요한데, 학술적 가치만을 생각한다면 상주본은 안동본과 동일한 판본이라서 독자적인 가치는 없다. 그래도 안동본과 함께 두 권밖에 남지 않은 원본이라는 점과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기록물이라는 상징적인 가치가 이 책에 대한 적절한 경제적 평가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경제적인 가치평가를 할 수도 없고 하면 안 되는 물건을 현 점유자가 억지로 금전적 가치 평가라는 진흙탕 속에 처박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4.3. 제3의 판본(?)


[image]
[image]
세종의 익선관으로 추정되었던 모자
마감재로 사용된 훈민정음 활자본이 보인다.
2013년 2월, 일본에 있던 조선 왕실 유물인 비단 모자를 한 수집가가 구입했는데 이 모자가 이슈가 되었다.
이 모자가 먼저 1444년 이전에 세종이 사용하던 익선관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근거가 크게 2가지 있었는데, 첫 번째로 모자안에 마감재 같은 용도로 종이가 들어있는데 그 종이가 세종 이전에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훈민정음 제자해 활자본'''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뿐이라면 세종 이후 시기의 모자라는 증명에 불과했지만, 이 모자에 새겨진 용의 발톱이 4개라는 것 때문에 세종의 익선관이라고 콕 찝어 추정하게 됐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이전까지 용의 발톱이 4개인 사조룡복을 입었다가 1444년에 명에서 용의 발톱이 5개인 오조룡복을 하사하여 이후 그것을 입었다고 나와있다. 즉, 세종 이후의 것이라면 용의 발톱은 4개가 아니라 5개여야 한다는 논리가 된 것이다.
만일 세종이 쓰던 익선관이 맞는다면 현재 남아있는 안동본과 상주본의 1446년을 앞서는 버전일 가능성이 높았기에, 저 모두가 사실일 경우 진짜 국보급 보물이 되는 것이기에 당시 기대가 엄청나게 치솟았다.
그러나 감정 결과, 모자가 임진왜란 이후의 것임이 밝혀지면서 논란은 가라앉았다. # 하지만 모자 안에 훈민정음의 판본 일부가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고, 세종대왕의 익선관이 아니었다 한들, 이 모자 자체가 조선 복식 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 희귀 유물인 것도 여전히 사실이다.

4.4. 제3의 판본(?) - 2


CBS 김현정의 뉴스쇼 2019년 7월 16일 인터뷰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은 이 인터뷰에서 모 대학 박물관에 비슷한 해례본이 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보 지정은 확실하고, 훈민정음 연구에 적잖은 진전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4.5. 위작: 조선 왕실본


인터뷰 내용을 포함한 기사 전문
고서화 수집가 편영우가 1986년 7월 일본에서 구입했다고 하는데 안동본, 상주본과 달리 1쪽도 낙장이 없는 완전한 훈민정음이라고 한다. 또한 편영우는 서울 시립 남산 도서관 사서 과장 출신이다. 단, ㅁ자에 중간 쉼표 권점이 빠져 있는 것과 글씨체가 안동본의 고딕체보다 해서체에 가까운 것 등 지금까지 알려진 판본 둘과는 다른 점이 많다. 그리고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당대 최고의 먹과 종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기사에도 나와있지만 일본에서 발견된 이유는 일제 강점기 때 통째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라고 소장자는 생각하고 있다.
일단 '왕실본'이라는 것은 학계에서 붙인 이름이 아니라 수집가 편영우가 편의상 붙인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두자. 이름이란 건 굉장히 중요해서 사람들의 머리속에 강한 고정 관념을 심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위작임이 분명하다. 안동본 첫 장은 사실 원본 그대로가 아니라 후대에 위조된 부분이다. 便於日用'''耳''' 가 便於日用'''矣'''로 되어 있는 부분은 안동본에서 찢긴 부분을 위작한 것이다. 최현배가 이 책을 보고 첫눈에 이를 근거로 위작임을 따지자 판매자들이[10] 곧바로 실토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에피소드는 국어학계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새로 나왔다는 판본은 안동본의 영인본을 바탕으로 그대로 위조한 것이다. 광곽과 판심만 봐도 당시의 책이 아니라 한글 학회 영인본을 그대로 베낀 것이 확인되며 소장자가 사서 출신이긴 하지만 한국 고서에 대한 형태서지학(판본학)에 대해서는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소양이 깊지 않은 듯하다. 소장자의 희망과는 달리 불행히도 후대의 위작임이 너무 분명해서 더이상 학계에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훈민정음 왕실본의 진위 여부에 판정하겠다고 말하였다. 기사
[1] 참고로 해례본 책이 등재된 것이지, 무형의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 자체가 등재된 것이 아니다.[2] 이 설이 독일인을 거쳐 일본인들에게까지 전해져 일제강점기에는 한글이 한국 고유의 창살 문양에서 유래되어 창제되었다는 설이 일반화되어 있었다.[3] 책의 본문 끝에 그 내용의 대강이나 그에 관련된 일을 간략하게 적은 글[4] 내용은 같았지만 오자가 있고 권점도 엉망으로 찍히는 등 원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만든 가짜여서 금방 들통났다.[5] 당시의 책은 긴 종이 한 장 한 장씩을 반으로 접어서 철을 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한 페이지 뒷면에 다른 글을 써 넣을 수 있었다.[6] 훈민정음 문서 첫 부분에서도 훈민정음 그림 두 개를 비교하며 이를 짚었었다.[7] 박종덕(2006년) - 훈민정음해례본의 유출에 대한 연구 《한국어학》 31호, 김주원(2005년) - 훈민정음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 《국어학》 45호.[8] 실제로, 소유권을 주장한 광산김씨 종택과 그들의 의뢰를 받아 해례본이 광산 김씨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종택에 이것만큼 귀한 책들이 몇권 더 있다고 주장했으나 10년이 넘도록 아무 소식도 없다. 이용준, 김태준이 아니었으면 해례본은 공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100%이다.[9] 이를테면 《훈민정음》에는 순음(입술 소리)를 오행 '토(土)'-오음 '궁(宮)'에, 후음(목구멍 소리)를 오행 '수(水)'-오음 '우(羽)'에 배치시켰으나, 다른 중국 운서에는 순음(입술 소리)이 오행 '수(水)'-오음 '우(羽)'에, 후음(목구멍 소리)이 오행 '토(土)'-오음 '궁(宮)'에 해당한다고 되어 있다는 주석이 있다. [10] 바로 김태준, 이용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