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이프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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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10.19일 - 11.22일까지 서부전선의 이프르에서 벌어진 전투. 이 전투로 인해 서부전선을 단기전으로 끝내려는 독일의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참호전이 고착화된다.
2. 전투 전
1914년 9월 12일,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1차대전은 일단 몇가지 흐름이 변했다. 피해는 연합군이 컸지만 독일군은 끝내 마른(Marne)에서 프랑스를 이기지 못하며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각자 측면을 치기 위해 독일군과 연합군 판 바다로의 행진, 즉 참호전을 시작한다. 10월 둘째 주가 끝날 때 어느 한 편이 결정적인 공격을 개시할 수 있었던 서부전선의 벌어진 틈은 벨기에의 플란데런에 남은 좁은 회랑지대로 축소되었다. 10월 8일부터 19일까지 이제는 영국원정군도 포함한 5개군단이 연합군의 방어를 지원하기 위해 열차와 도로로 도착했다. 영국원정군의 북쪽에는 안트베르펀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벨기에군의 잔여부대가 에이저르 강 어귀의 나우포르트로 이어지는 해변을 따라 전진했다. 영국 해병사단의 수병들은 대부분 오스텐더로 이미 떠났고 앞서 상륙한 영국군 제 7사단은 그곳에서 교두보를 장악하고 있다가 10월 14일에 이프르 근처에서 영국원정군의 본대에 합류했다.
3. 전투전개
엔 강쪽에서 10월 10일과 10월 13일에 차례로 도착한 영국군 제 2군단과 제 3군단은 이프르의 동쪽에서 약 5마일 밖으로 솟아오른 능선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영국군이 도착하자 갓 편성된 독일군 군단들도 영국군을 맞이하기 위해 도착했다. 10월 15일 제 14군단이 도착했고 뒤이어 제 7군단과 19군단, 그리고 10월 19일 에 제 13군단이 도착했다, 영국군은 압박을 받고 후퇴했다. 영국군 제 4군단은 이프르의 오래된 요새 가까운 곳까지 밀려났다.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이 지휘하는 제 1군단이 그나마 10월 20일에 도착해 이프르를 구했으나 그 때문에 군의 전투력이 소진되었다. 인도군을 포함하여 본국에서 올 증원군은 약속된 것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오고 있는 중이었다. 10월 20일이 되자 남쪽의 라바세 운하부터 북쪽의 에이저르 강 어귀까지 전선전역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24개 사단이었고 영국군은 벨기에군 6개사단을 포함해도 약 19개 사단이었다. 전선은 영국군이 소총의 속사에서 우세한 덕에 유지되었고 10월 말 독일군의 대규모 공격은 막대한 희생을 남긴채 실패로 돌아갔다. 10월 31일에 팔켄하인은 독일군이 점령한 고지대에서 매넌에서 이프르로 이어지는 도로를 막고 다시 한번 협소한 전선을 두드렸지만 역시 실패... 11월 11일에 다시 한번 공격하지만 별 소득 없이 가다가 결국 20일에 이프르를 둘러싼 전투가 종료되었다.
4. 결말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4만 7천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영국군은 5만 명 이상 희생되었다. 이는 1914년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 중 가장 참혹한 수준이었다. 독일이 전력이 앞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참호전이 공자(功者)보다 방자(防者)에게 절대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기동전은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참호전이 시작되었다.이제 전쟁 전에 피아가 세워 놓았던 모든 시나리오는 무효가 되었다. 특히 마른 강에서 후퇴하였을 때는 물론, 엔 강에 진지를 구축하였을 때까지만 해도 전선의 정체를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던 독일의 전략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팔켄하인은 당장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서부전선의 상황을 인정하고 4개 기병사단과 8개 보병사단을 차출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고전을 하고 있던 동부전선으로 보냈다.
[1] 프랑스군 참모총장이자 총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