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홍

 

1. 개요
2. 일생
2.1. 세월호 참사
2.1.1. 박근혜 정부의 소송
2.2. 진상규명 활동
2.3. 인터뷰
2.4. 20대 총선 선거운동 지원
2.5. 사망
3. 추모
4. 영향
5. 참고 자료


1. 개요


'''뒷일을 부탁합니다.'''

-유언

세월호 참사 때 많은 시신을 수습했던 민간 잠수사다.

2. 일생


은평구 토박이로 은평구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덕분에 은평구에 출마한 박주민 변호사를 도울 수 있었다) 94년 군 전역하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보다 운동을 좋아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고생하다가 찾은 직업이 잠수사이다. 1996년부터 오래된 교각의 안정성 점검 및 수리, 유물 발굴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을 찾아내는 일까지 다양한 일을 하였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고 밑으로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던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2.1. 세월호 참사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서 구조팀에 참가하여 292구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목숨을 걸고 물 속에서 라인을 연결하고 선내 집기를 정리하여 희생자 유품을 올려주는 등 사고자 수습 작업을 한 것은 민간잠수사 스물다섯명이었다. 그 과정에서 물살에 휩쓸려 정신을 잃고 긴급하게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응급처치만 받은 후 사흘 만에 현장에 복귀하였다. 목과 등 등에 부상을 입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입었던 신체적 외상 및 극심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려왔다. 후유증으로 본업인 잠수사 일을 그만두고 낮에는 아내의 꽃가게 일을,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생계 활동을 이어왔다. 정부로부터 민간잠수사로 인정받지 못해 구호비용을 지급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육체적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인을 기리는 사촌 형(김형주씨)의 글에 따르면 김관홍은 후배들의 생활고를 부담하였고 이것이 그의 경제적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 되었다.

2.1.1. 박근혜 정부의 소송


그가 처했던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의 소송사건에 대해 이해를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해경은 민간잠수사 공우영을 동료 잠수사 사망사건(이광욱)과 관련해 업무상 과실치사혐의로 고소하였고, 검찰은 징역 1년을 구형하였다. 다만 이례적으로 검찰은 '국가, 해경이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잠수 부분도 물적, 인적 능력이 부족했다. 피고인의 법률적, 실질적 책임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런 부분을 참작해달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는 함께 목숨걸고 일한 동료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는 공우영이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 분노를 표했다. 해경의 소송으로 시신을 292구 수습한 잠수팀을 지휘한 공우영은 1년 4개월간 재판을 받아야했고, 해경은 소송에서 승리하기 위해(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문서를 짜깁기하였다.

2.2. 진상규명 활동


[image]
2015년 9월 15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국민안전처)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참가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저희 법적인 논리 몰라요.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었으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번 밖에 들어가면 안 되는 그 수심에서 많게는 네 번, 다섯 번……, 법리 논리 모릅니다. 제발 상식과 통념에서 판단하셔야죠. 법리 논리? 저희가 간 게, 양심적으로 간 게 죄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타인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이상입니다.'

2015년 12월 16일, 세월호 참사로부터 만 1년 8개월만에 이뤄진 4.16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참가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약이 없으면 잠을 못 자고, 화 조절이 안되니까 그러다가 7월달 경에 지금 현재 유가족분들을 만났어요. 만나 가지고 '고맙다'고, '고생했고, 고맙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정신과 치료제를 끊었어요. 그 한 마디에. 정신과 치료제라는게 치료가 안 돼요. 약이라는 건 화만 눌러놓는거지…. 그 한 마디가, 그 한 마디가 저에게는…. (중략) 저는 잠수사이기 전에 국민입니다. 국민이기 때문에 달려간 거고, 제 직업이. 제가 가진 기술이 그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간 것일 뿐이지, 국가 국민이기 때문이기 간 거지 애국자나 영웅은 아녜요. 저희가 왜 마지막에, 저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11구가 남아있을 당시에 왜 나와야 했는지, 왜 저희가 그런 식으로 쫓겨나야 했는지, 우리는 포기 못했는데 그들은 왜 저희가 나가야만 했는지 저는 그걸 묻고 싶고요. 가족분들한테 저희는 구조 업무를 한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빨리 찾아서 한 구라도 더 찾아드리려고 했을 뿐이고, 고위 공무원들한테 묻겠습니다. 저희는 그 당시 생각이 다 나요. 잊을 수 없고 뼈에 사무치는데, 사회 지도층이신 고위 공무원께서는 왜 모르고 왜 기억이 안나는지,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 자리에 계시는데 저희는 일명 노가다예요. 그런 사람보다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천불 같은데…… 가족분들하고 저희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단순한 거에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 진실은 다를 수 있지만 상황은 정확히 얘기를 해야죠. 욕을 먹더라도 …….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2.3. 인터뷰


2015년 12월 20일,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노컷v 기자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그 중 일부를 발췌하였다. ()는 문맥상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으로 작성인이 넣었음을 밝힌다.

전문가분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트라우마? 죽음에 대한 각인이다. 죽음에 대해서 느끼고 만지고 냄새 맡고 이런 뭐가 각인이 된거야 …. 그러니까 생존자들도, 내가 구하려고 했던, 못 살린 사람들 눈빛이 살아있을 거라고. 그거에서 오는 죽음에 대한 각인이라고 … 죽음이 이제 너무 쉽게 생각되는 거야 우리한테…. 아 이런 말 하면 또 안되는거야? 모든 건 바뀌었어요. 모든 게 몇 도 몇 도로 바뀐게 아니라 왜 사람들은 할 말을 안하고 다른 짓거리들을 하고 … 딴 말로만 뱅뱅 돌까? 언론은 왜 이런 얘기를 안 하나. 아니 우리가 한 마디로 말하면 바깥에서 막일하는 사람이에요. 물 속에서 막일 하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생각보다 더 많이 배우고, 권력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왜 저것밖에 안될까. 진짜 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없네. 처음에 우리가 살려고 얘기를 한 거에요. 그런데 지금 남들은 다 내 주변 지인들은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지 말래. 다친다고. 잊으래. 아니 잊을 수 있으면 내가 잊었지, 지울 수 있으면 지우고. 아니, 그 시점에 삭제를 시켜버렸으면 좋겠는데 현재까지의 모습을. 약을 먹어도 안 되고, 술을 먹어도 안 되고, 지인들이 떠나요. 나도 말을 할 수가 없으니까 나조차도. (지인들이) 나를 위해서 얘기를 해줘요. 나를 위해서. 그런데 그게 상처가 되는 거야. 우리가 자전거가, 이것도 정효신 박사님이 하신 얘긴데, 자전거가 왼쪽으로 쓰러져요. 그러면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면 안 쓰러지는데 우리는 안 쓰러지려고 반대로 꺾는다고, 그래서 쓰러진다고. 아 내가 여태까지 내가 살려고 하는 행동들이, 나는 살고싶어서 한 행동이, 저는 많이 좋아진 게 맞아요. 점점점 좋아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야. 이유가 나는 왼쪽으로 쓰러지니까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던 거야. 마주 대한 거야. 객관화시키려고 하고. 내가 왜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가족들한테 상처를 주고 있고. 유가족들한테 왜 내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는지를……. 정부를 저는 비판한 게 아녜요. 싸운 게 아니야, 몸부림이고, 이거 아닙니다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소리 없이 탄압하는 거 이건 탄압이에요. 내가 왜 탄압을 받아야… 내가 좌파예요? 좌파가 뭔데? 그런 사람들이 좌파가 아니야. 단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일 뿐이야. 여기 민주주의잖아요. 생각이 다를 수 있잖아. 들어야지 같이 얘길하고 합의점을 찾아가야 하는데…….


2.4. 20대 총선 선거운동 지원


세월호 참사시 변론을 맡았던 박주민 국회의원 후보자의 선거운동에 참가하여 운전을 도맡아 하였다. 그가 박주민 출마 지역인 은평구에 거주했던 사람이라 지리와 민심을 잘 아는 편이었으며, 옆에서 끊임없이 박주민에게 잔소리와 조언을 하며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선거운동본부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은 '톰과 제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둘 다 73년생 동갑내기라 격의없이 서로 잔소리하고 구박(?)하며 지냈다고 한다

2.5. 사망


2016년 6월 17일 비닐하우스 자택(경기 고양시 용두동 소재)에서 쓰러진 채 발견,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숨을 거두었다. 경찰은 현장에서 발견된 소주병과 약통, 지인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등으로 미루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고 추정했으며 진상 규명에 들어갔다. 동년 동월 19일 은평구 서북시립병원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발인식이 치러졌다. 다만 당초 추정 및 일부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이 맞다. 경찰의 부검 당시 위에서 수면제 성분이 검출되었지만 죽음의 원인이 될 만큼은 아니기도 했고.[1]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박주민이 국회의원 활동을 시작한 뒤 의원실 관계자들이 김관홍을 찾아와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는데 정작 본인은 '''"그러면 내가 선거운동을 도와준 의미가 없다."'''면서 거절했다고.
무리한 구조 활동으로 인하여 지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트라우마도 심각한 상태였다. [2] 한창 트라우마가 심할 때는 길에서 아디다스 츄리닝을 입은 고등학생을 보고 주저앉을 정도였는데 세월호 희생자 분들이 아디다스 츄리닝을 많이 입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까지 고등학생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지속적인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상태였으나 국가는 치료비 지원을 돌아가시기 몇달전에 끊었고 망가진 몸으로는 잠수사일을 할 수가 없었기에 대리운전으로 전업,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활동하며 박주민의원실과 협력하여 세월호 잠수사들을 지원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었다. 법안이 완성되어 국회 법제실에 넘어온 날이 2016년 6월 17일이다. 법안 명칭은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 약칭 '''김관홍 법'''이며, 20대 국회가 끝나는 2020년 5월 20일에 본회의를 통과하게 되었다.

3. 추모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온오프라인에서 추모 물결이 일었다. 아래는 박주민 의원의 추도사.


4. 영향


박주민 의원은 '4.16 세월호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등을 위한 특별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현행법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피해자를 '승선자 및 그들의 배우자 및 직계존비속과 형제자매'로 한정해, 자원봉사자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진행 중인 2차 피해가 방치된 것을 바로잡자는 취지이다.
해당 법안은 2020년 5월 2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 하였다.


5. 참고 자료



[1] 불면증으로 인해 복용한 것으로 보인다.[2] 세월호 잠수사 분 중에서는 잠수병으로 인하여 뼈가 썩어들어가서 절단한 분도 계시고 끝까지 남아있던 분들 중에서 현업으로 복귀한 사례가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