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세시티 요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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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4.1. 주먼빌 글렌 전투
4.2. 네세시티 요새
4.3. 워싱턴의 항복
5. 결과
6. 이후의 이야기


1. 개요


1754년 7월 3일 뉴욕 펜실베니아의 파밍턴의 산 꼭대기에 위치했던 네세시티 요새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프랜치-인디언 전쟁의 첫번째 전투이며 조지 워싱턴의 데뷔전이기도 하다. 다만 워싱턴은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항복해 체면을 구겼다.(...)

2. 배경


영국과 프랑스가 북미 대륙에 진출한 이래, 두 유럽의 강대국에서 이주한 식민지인들은 더 많은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특히 1740년대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인들이 오하이오 일대를 자주 들락거리면서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프랑스 식민지 당국은 자신들이 먼저 오하이오에 발을 들여서 식민지 마을들을 건설했는데도 영국 출신 식민지인들이 오하이오에 들어오는 것에 불쾌해했고 1753년부터 여러 개의 요새들을 오하이오 강 상류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에 버지니아 총독 로버트 딘위디는 프랑스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당시 21세의 버지니아 민병대 소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에게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요새를 건설 중인 프랑스군에게 떠날 것을 요구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접수한 워싱턴은 통역으로 재이콥 반 브라암, 버지니아 지역의 회사에서 측량사 일을 하던 크리스토퍼 기스트, 그리고 영국에게 우호적인 밍고족의 추장 타나챠리존을 대동한 채 1753년 12월 12일 르베프 요새에 도착했다. 이때 르베프 요새 지휘관 자크 르가르저 드 생피에르는 그날 밤 워싱턴을 식사에 초대했다. 워싱턴은 식사 중에 딘위디 총독이 생피에르에게 보낸 편지를 내밀었는데, 그 편지엔 프랑스군이 오하이오 강 상류에서 즉시 철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생피에르는 정중한 태도로 거절하며 프랑스 식민지인들이 영국인보다 먼저 오하이오에서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프랑스가 오하이오를 자국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워싱턴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버지니아로 복귀했다.
한편 딘위디 총독은 윌리엄 트렌트가 이끄는 40명의 중대를 오하이오에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증원병력을 받은 오하이오의 프랑스군에게 압도되어 곧 철수했다. 딘위디는 트렌트가 철수한 것을 모른 채 막 복귀한 워싱턴에게 트렌트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르베프 요새로 가던 워싱턴은 트렌트가 퇴각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그는 잠시 어찌해야 할 지를 고민하다가 타나챠리존이 지원병력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믿고 듀케인 요새로 방향을 틀고 그곳으로 진군하던 중에 타나챠리존과 만났다. 그 후 그는 근처에 프랑스의 정찰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기습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조지 워싱턴 인생 최초의 전투이자 프랜치-인디언 전쟁의 서막을 장식할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지휘관: 조지 워싱턴, 타나챠리존
  • 병력: 영국 식민지군 100명, 밍고족 전사 300명

3.2. 프랑스군


  • 지휘관: 루이 콜롱 드 빌리에르
  • 병력: 프랑스 식민지군과 인디언 전사 600명

4. 전투 경과



4.1. 주먼빌 글렌 전투


1754년 5월 24일, 워싱턴과 그의 부하들은 앨러게이니 산맥의 바로 서쪽에 있는 고산 평야지대를 발견했다. 오늘날 '그레이트 메도우'로 불리는 이 곳을 "매력적인 들판"이라고 판단한 워싱턴은 습기가 매우 많은 환경임에도 이곳에 진을 치라고 명령했다. 한편 근방에 있던 프랑스군은 워싱턴과 그의 부하들이 근처에서 야영중인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현지 사령관 루이 콜롱 드 빌리에르 대위는 부하들이 버지니아에서 온 영국인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의 부하이자 이복동생인 조셉 콜롱 드 주몽빌 중위에게 40여 명의 병력을 맡겨 워싱턴과 만나게 했다.
5월 27일, 주몽빌 중위는 영국군 진영 근처의 어느 작은 계곡(오늘날 '주먼빌 글렌'이라는 지명이 붙은 곳)에 진을 쳤다. 밍고족 정찰대 한 명이 이것을 확인 한 뒤 돌아와 이 사실을 보고했고, 타나챠리존은 그들이 영국군을 공격하려는 의도로 온 것이라며 기습 공격을 하라고 건의했다. 워싱턴은 타나챠리존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5월 28일 새벽에 비바람을 맞으며 40명의 부하들과 함께 프랑스군 진영으로 향했다. 훗날 그는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의 접근을 눈치채고 발포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당시 가까스로 빠져나온 프랑스군 병사는 영국군이 난데없이 습격했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워싱턴은 적진에 갑작스럽게 난입해 15분간 격투를 벌여 프랑스 군인 10명을 죽이고 21명을 포로로 잡았다.
주몽빌 중위의 최후에 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진다. 한 기록에 따르면, 워싱턴은 사로잡힌 주몽빌을 전쟁포로로 취급하며 잘 대우해줬지만 프랑스어를 몰랐기 때문에 언어 소통에 문제가 많았다. 이때 곁에서 지켜보던 타나챠리존이 난데없이 주몽빌을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타나챠리존은 애초부터 프랑스인들에게 적개심이 대단했기 때문에[1]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주몽빌 중위는 포로로 잡힌 적이 없고 워싱턴에게 습격당했을 때 살해당했다고 한다. 워싱턴과 함께 동행했던 장교 아담 스티븐은 주몽빌이 첫번째 교전 때 죽었다고 진술했을 뿐 주몽빌이 포로로 잡혀 워싱텅과 의사소통에 문제를 보였다가 살해당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튼 워싱턴이 단순히 교섭하기 위해 찾아오는 프랑스군 중위와 병사들의 의도를 오해해 습격해버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 일로 두고두고 비난받았다.

4.2. 네세시티 요새


주먼빌 글렌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른 워싱턴은 5월 29일 그레이트 메도우에 네세시티 요새 건설을 감독했다. 먼저 14인치 크기의 창고를 만들었고 그 주위에 7피트 높이의 통나무로 된 조잡한 방어벽을 설치했다. 그는 이 조그만한 요새를 6월 3일까지 건설하는 동시에 윌스크릭에서 오하이오의 듀케인 요새로 가는 도로 건설 작업도 감독했다. 그러나 일꾼들은 숲이 우거진 언덕, 개울, 강 때문에 하루에 4마일 정도 밖에 공사를 진행시키지 못했다. 6월 9일, 2차 버지니아 민병대가 그레이트 메도우에 도착하면서 워싱턴의 가용 인력은 293명으로 늘어났다. 이 민병대는 9개의 선회포와 약간의 밀가루, 탄약을 포함한 물자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본래 이 민병대를 이끌고 왔던 워싱턴의 상관 조슈아 프라이 대령은 행군 도중에 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기 때문에, 워싱턴은 그를 대신해 이들을 지휘해야 했다.
다음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제임스 맥케이 대위가 이끄는 영국인 병사들이 도착했다. 하지만 맥케이 대위는 곧 워싱턴과 갈등을 빛었다. 그는 자신이 원정을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워싱턴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그와 떨어져 다른 곳에 진영을 세웠다. 이후 6월 11일 워싱턴은 부하들을 이끌고 듀케인 요새로 진군했다. 하지만 멕케이의 부하들이 1인당 하루 1실링의 보수를 받지 않는 한 도로 건설을 돕기를 거부했고, 워싱턴은 어쩔 수 없이 이들에게 네세시티 요새 수비를 맡겼다. 그 후 워싱턴은 길을 개척한 끝에 네세시티 요새에서 약 13마일 떨어진 '크리스토퍼 기스트의 농장'에 도착했다.
6월 27일, 워싱턴은 적의 증원군이 듀케인 요새에 이르렀고 곧 그를 무찌르기 위해 대규모 병력이 이동할 거라는 소식을 접했다. 워싱턴은 즉시 부하들을 농장에 집결시키고 참호를 파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멕케이 대위에게 자신과 얼른 합류하라는 내용의 전갈을 보냈다. 멕케이 대위와 그의 무리는 그날 저녁에 도착했고, 다음날 아침 적의 수색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6월 28일 저녁, 워싱턴은 회의를 열어 향후를 논의한 끝에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4.3. 워싱턴의 항복


더운 날씨와 수송할 말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의 부하들은 선회포를 포함한 물자를 네세시티 요새로 다시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식량이 부족해져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이에 부하들은 더이상 짐을 나르거나 선회포를 끌고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워싱턴은 어쩔 수 없이 네세시티 요새에서 수비에 전념하기로 하고 본부에 급히 사람을 보내 물자와 증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그는 네세시티 요새 방어 강화에 전념했으나 맥케이 대위와 그의 부하들은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타나챠리존도 이 시기에 무리를 이끌고 워싱턴을 떠났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에 대항할 더 나은 준비를 하지 못한 워싱턴에게 분노했으며, 그가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떠난 진짜 동기는 자신과 함께하던 아내와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송시키려는 것 때문이라는 기록도 있다.
한편 루이 콜롱 드 빌리에르 대위는 500명의 프랑스 민병대와 100명의 인디언 전사들을 대동하고 듀케인 요새에서 출격해 워싱턴의 행방을 추적했다. 그리고 7월 3일 마침내 워싱턴이 있는 곳을 확인한 빌리에르 대위는 즉각 네세시티 요새로 진격했다. 마침 요새 공사를 감독하고 있던 워싱턴은 한 보초병으로부터 이 소식을 접하자 병사들에게 요새에 들어가서 자신이 발포 명령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오전 11시경, 프랑스군과 인디언 전사들이 요새를 에워쌌으며 일부 병력은 숲에 들어가서 우회 공격을 하고자 했다. 워싱턴과 멕게이는 병사들을 진두지휘해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수적으로 워낙 열세인데다 다들 굶주림으로 지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워싱턴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오후에 접어들었을 때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참호는 흙탕물로 뒤덮혔고 요새 안에 있는 병사들은 무기력해졌다. 워싱턴은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이미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은 더이상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밤 8시경, 프랑스군이 항복을 제의했다. 그들은 부상병들을 치료하기 위해 군의관을 파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워싱턴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고 유일하게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던 장교는 부상을 입고 불구가 되어버렸다. 결국 워싱턴은 통역사 제이콥 반 브라암을 대표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3차례의 교섭이 오간 끝에, 워싱턴은 살아남은 부하들과 함께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다. 워싱턴이 항복 조건으로 내건 사항은 다음과 같다.
  • 프랑스인이나 인디언으로부터 모욕을 받지 않고 윌스 크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것.
  • 북과 깃발을 챙길 수 있게 해줄 것이며 포대를 제외한 모든 물자를 가지고 요새 밖으로 행진하여 영국군의 명예를 지킬 수 있게 해줄 것.
  • 물자를 비밀 장소에 당분간 보관해주고 경비병으로 하여금 그 물자를 지켜줄 것. 또한 본부에서 말들이 와서 부상병들을 싣고 갈 때까지 그들을 보호해줄 것.
  • 주먼빌 글렌의 교전에서 사로잡은 프랑스 병사들을 돌려보내고 반 브라암과 로버트 스토보 대위는 인질로서 프랑스인과 남는다.
  • 영국군은 1년 동안 프랑스 국왕의 영역에 어떠한 요새 건설이나 군사 행동을 시도하지 않겠다고 명예롭게 약속한다.
이에 대해 빌리에르 대위는 협정서에 "우리의 의도는 두 친근한 국왕들 사이에 군림하는 평화와 좋은 화합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장교들 중 한 사람에게 행해진 암살에 복수하는 것이었다."고 기재하고 워싱턴이 내건 조건을 모두 들어줬다. 그후 워싱턴은 7월 4일 아침 네세시티 요새에서 한 차례 행진한 뒤 윌스 크릭으로 돌아갔다.

5. 결과


워싱턴이 지휘한 버지니아 민병대는 네세시티 요새 전투에서 31명이 사망하고 70명이 부상당했다. 멕케이 대위가 이끈 부대의 전사자와 부상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고, 프랑스-인디언 연합군의 손실 역시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매우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워싱턴의 대원들은 70마일을 행군한 후 7월 15일경에 윌스 크릭에 도착했다. 워싱턴과 멕케이 대위는 윌리엄스버그로 가서 자신들이 서명한 항복문서를 총독부에 전달했다. 워싱턴과 그의 장교들의 행동은 적절하게 평가되었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운 것에 대한 표창장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조지 워싱턴은 펜실베이니아 서부로 돌아와 영국 장군 에드워드 브래독의 무급 보좌관으로 부임해 프랑스-인디언 연합군과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른다.

6. 이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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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복원된 네세시티 요새
네세시티 요새는 1970년대에 복원되어 펜실베이니아 파예트 군의 유니온타운 근처에 위치해 있다. 미국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내무부가 이 요새를 관리하고 있으며 네세시티 요새의 북서쪽으로 약 1마일 떨어진 곳에 워싱턴을 거둬들였던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의 무덤이 있다.
[1] 그는 어렸을 때 프랑스인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렸었고 자신의 아버지가 프랑스인들에게 삶아먹혔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