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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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732년 2월 22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버지니아 식민지
웨스트모어랜드
(現 미국 버지니아 주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
'''사망'''
1799년 12월 14일 (향년 67세)
미국 버지니아 주 마운트 버넌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789년 4월 30일 ~ 1797년 3월 4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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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어거스틴 워싱턴 시니어(1694 ~ 1743)
어머니 메리 볼 워싱턴(1707/1709 ~ 1789)
'''배우자'''
마사 워싱턴(1731 ~ 1802)
'''자녀'''
의붓아들 존 파크스 커스티스(1754 ~ 1781)
의붓딸 패시 커스티스(1756 ~ 1773)
'''친인척'''
증조부 존 워싱턴(1631 ~ 1677)
조부 로런스 워싱턴(1659 ~ 1698)

'''학력'''
파머스 칼리지[39] (편입)
마이애미 대학교 (B.A.)
'''종교'''
개신교 (성공회)
'''신장'''
188cm
'''정당'''

'''최종 계급'''
'''육군 대원수'''[40]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생애
2.1. 출생
2.2. 젊은 시절
2.3. 영국군 장교 시절
2.4. 결혼
2.5. 미국의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2.6.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2.7. 사망
3. 평가
4. 기타
5.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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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군인으로 '''세계 최초의 대통령'''.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자 대륙군 총사령관으로서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다.
다만 엄밀히 따지면 최초의 프레지던트는 워싱턴이 아닌데, '''President'''라는 단어는 1775년 대륙 회의 의장(President of the Continental Congress)들이 최초로 쓴 것이었다. 며칠만 하다 관둔 의장들을 제외한 사실상의 초대의장은 4대 의장이자 독립선언문에 최초로 서명을 했던 존 핸콕[1]이었는데, 이 직위는 핸콕 이후 12년간 11명[2]에게 돌아가다가 그 이후에야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이 되었다. 대개는 1년 임기로, 독립이 인정된 1783년 이후로는 7명이 있었기 때문에 총 16대 15명.
지금의 미국에서도 President는 연방 대통령(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과 연방 의회의 미국 상원 임시의장(President pro tempore of the United States Senate) 두 명이 다 사용하는 호칭이다.[3] 말이 길었는데 요약하자면 프레지던트란 명칭은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지만, 성격이나 권한이 좀 달랐기에 실질적 초대 대통령이라는 것.

2. 생애



2.1. 출생


버지니아의 나름대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워싱턴 가문은 본디 잉글랜드 북동부 타인위어에 위치한 워싱턴(Washington)[4] 출신으로 가문의 선조인 윌리엄 드 허트번(William de Hertburn)이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당시 워싱턴 지역을 영지로 하사받으며 성씨를 '드 웨싱턴(de Wessyington)'에서 바꾼 것에서 유래했다. 이후 '드 웨싱턴' 가문은 '워싱턴'으로 성씨를 바꾸었으며 1613년 워싱턴 가문은 영지인 워싱턴 장원을 팔고 노샘프턴셔에 위치한 설그레이브(Sulgrave)로 이주하였다.
이후 1656년 조지 워싱턴의 증조부인 존 워싱턴(John Washington) 대에 영국을 떠나 미국 버지니아로 이민가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에 정착하였으며 , 조부인 로렌스 워싱턴(Lawrence Washington)을 거쳐 아버지인 오거스틴 워싱턴(Augustine Washinton) 대에 이르렀을 때, 담배를 주로 경작하는 큰 농장과 상당수의 노예를 보유하고 있는 버지니아의 상류 층에서 중간 급의 위치를 차지하는 가문이 되었다. 워싱턴의 아버지인 오거스틴 워싱턴은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의 판사이기도 했다.

2.2. 젊은 시절


워싱턴 대통령이 11살일 때 아버지가 질병으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이복 형인 로렌스가 가장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이복 형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워싱턴은 버지니아 민병대의 지휘자였던 이복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군인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해군에 지원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그는 대신 버지니아 민병대로 지원, 대령의 계급으로 근무했다.
광활한 토지에 대한 측량 업무가 중요하던 그 시절, 워싱턴도 일찍부터 측량 기술을 익혀 18살이던 1749년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에서 측량사 자격증을 수여받고 정식으로 전문 측량사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 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워싱턴 대통령은 측량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2.3. 영국군 장교 시절


1753년 조지 워싱턴은 오하이오 회사라는 개척회사의 대리인 자격으로 오하이호 강 지역에 파견되는데, 이때 프랑스와 충돌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버지니아에서 영국군 소령 직위를 받았고 이렇게 워싱턴은 영국군에 입대한다. 그러던 중 1754년 7년 전쟁(Seven Years' War, 1756–63)의 전초적 전쟁이었던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4–62)이 벌어지고 조지 워싱턴은 중령 직위로 버지니아 의용군을 이끌고 프랑스 식민지 군대에 맞서 참전하였다.
워싱턴은 1754년 7월 네세시티 요새 전투에서 첫번째 전투를 치뤘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다. 이후 1755년 영국 에드워드 브래독(Edward Braddock) 장군의 미국 측 자문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에 미국 최초의 정규 민병대인 버지니아 연대의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0개월 동안 인디언과 벌어진 20번의 전투에서 연대 병력의 1/3을 잃는 등 격렬한 전쟁을 지휘하였으며 1758년 퇴임하였다. 워싱턴이 그 후 독립 전쟁에서 발휘한 군 지휘관 및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은 이 참전을 통해 얻게 되었다. 그는 영국군의 군사 전술과 장단점을 훤히 꿰뚫게 되었으며 군 조직, 군사 교육 및 훈련, 군수의 중요성 등을 이 기회를 통해 파악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인망을 보여 수하들의 신뢰를 얻었다고 한다.

2.4. 결혼


1759년 워싱턴은 마사 커스티스(Martha Dandridge Custis)라는 부유한 과부[5]와 결혼, 당대 미국 최대 갑부[6] 중 한 명이 되었다. 마사는 매우 지적이고 우아한 태도를 가진 여자로서 광대한 농장 관리에도 탁월함을 보여줘 둘의 결혼 생활은 워싱턴이 사망할 때까지 원만하게 지속된다.
다만 아내가 이전 결혼에서 출산경험이 있음에도 워싱턴과의 사이에선 아이를 낳지 못했다.[7] 이후 아내가 사별한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의붓자식인 존 파크 커스티스(John Parke Custis)와 팻시 커스티스(Martha Parke "Patsy" Custis)를 입양해 키웠는데[8] 존 파크 커스티스가 사망하자[9], 존 파크 커스티스의 아들이자 자신의 의붓손자인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를 입양해서 아내의 전 남편의 후손이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워싱턴은 본인이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의 재산 중 원래 워싱턴 가문의 재산은 조카 부시로드 워싱턴(Bushrod Washington)에게 상속한다.
그런가 하면 당시 법적으로 금지된 지역을 개척해 재산을 불리는 꼼수도 부렸다. 이 당시 영국 측은 13개 식민지(미국)가 끊임없이 땅을 개척하도록 놔두면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사사건건 부딪히고, 그러다 보면 그 세력이 본국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개척에 상당한 제약을 가했고, 심지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는 가지도 못하게 법으로 금할 정도였는데 이를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어기고 열심히 재산을 부풀린 것.

2.5. 미국의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1750~60년대 유럽에서 7년 전쟁이 벌어지자, 신대륙에도 그 영향이 미쳐 프랑스-인디언 전쟁이 발발, 조지 워싱턴은 다른 영국계 식민지 유지들과 함께 영국군을 지원하는 식민지 의용군에 가담하여 나름의 공로를 세운다. 허나 식민지 전쟁에 많은 예산과 국력을 소모한 영국 정부가 이를 매꾸려고 식민지에 세금을 늘리고, 새로 편입된 식민지의 원주민을 다독이기 위해 식민지인의 구 프랑스 식민지 지역으로의 개척을 금지시키자, 이런저런 불만들이 쌓여서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1774년 구성된 대륙의회는 지휘관을 물색 중 이전 전쟁에서 인망을 보인 워싱턴을 대륙군(Continental Army) 총사령관으로 취임시킨다.
워싱턴은 초반에는 영국군에 연전연패하였는데, 사실 워싱턴부터가 총사령관 임무는 처음 맡는 신참이였던데다가 초기 식민지 대륙군은 당시 영국군의 보조병격으로 원주민 또는 (비슷한 처지의) 프랑스 식민지군이나 상대해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영국군 같이 고도화된 선진군대와 싸운 적은 없는 사실상 민병대에 불과한 오합지졸들이었다. 워싱턴도 전술적 실수를 몇번하는데, 그렇다고 대안이 있었냐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라서, 초기의 영웅이자 후반의 배신자인 베네딕트 아놀드나 대니얼 모건, 너대니엘 그린 정도가 고작이었고, 이중에서도 총사령관이 가능한 인물은 베네딕트 아놀드 정도였지만 이때만 해도 그정도급은 아니었고 결국엔 배신 때린다. 찰스 리처럼 어떻게든 총사령관 자리 좀 뺏어보려고 온갖 뒷공작을 하며 워싱턴을 괴롭히거나, 호레이쇼 게이츠처럼 얼마 되지 않는 군대를 제대로 말아먹은 인물도 있었다.
허나 이런 유리한 전쟁 상황 속에서도 영국군은 여러모로 운이 안따라줬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776년 12월 26일에 있었던 트렌턴 전투이다. 이 전투 직전의 상황은 연전연패하고 사기가 떨어진 워싱턴군이 영국군만 보면 싸움을 회피하고 도망갈 정도였으나[10], 이래 가지곤 어차피 못이긴다고 판단한 조지 워싱턴의 과감함 + 전술적 변경 + 운이 합쳐져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조지 워싱턴의 급박한 열흘. 이 외에도 워싱턴의 대륙군은 뜻밖의 행운 덕분에 열세를 딛고 위기를 극복한 사례가 신기하게 많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마치 고대 건국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영웅담 수준.
그리고 1777년 이후, 생각보다 선전하는 대륙군을 보고 벤자민 프랭클린 등의 꼬드김에 응한 영국의 앙숙 프랑스, 네덜란드 등으로부터의 지원에 힘입어, 워싱턴은 영국군을 본격적인 소모전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토벌군은 단발적인 전술적 승리를 했음에도 전략적인 소모전에 계속 끌려다니다가[11] 마지막 요크타운 전투에서 패해 항복, 그길로 식민지에서 손을 뗀다.
사실 워싱턴이 없었으면 미국 독립 전쟁은 얼마 안가서 끝났을 거라고 보는 시각도 제법 많다. 일단 당시 식민의회는 독립파와 왕당파가 여전히 독립하냐 마냐로 팽팽한 견해차를 보이고 있었는데, 때문에 인망이 없는 사람이 독립파를 지휘했으면 얼마 안가 민중의 지지를 잃고 독립파의 입지도 좁아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찌됐든 조지 워싱턴은 전술 천재 소리까진 듣지 못했지만 전략적 판단과 친화력, 리더쉽으로 말 많은 13개 주를 단합시켜 끝내 독립을 쟁취한다.

2.6.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승리 후 그는 미련없이 군권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다른 사람들의 추대로 결국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12] '''만장일치'''로 결정된 대통령직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13][14] 워싱턴은 취임 후 대통령 직책도 꽤 성공적으로 수행했는데, 퇴임할 때도 그는 이 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지라[15][16] 임기를 2번만 치르고 물러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상에 수많은 집권자들이 유능하고 자격도 있고 공적도 있던 이들이 10년 20년씩 장기집권하며 점차 독재자가 되어가는 걸 생각하면 이는 매우 큰 업적이다.
대통령 시절 그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존 애덤스, 알렉산더 해밀턴, 토머스 제퍼슨 등이 주도하는 정파간 대립이 심화되자 이를 어느정도 통솔하는 모습도 보였고, 내각(cabinet) 시스템, 국가 중앙은행 설립(1차 미국은행. 20년 간 존속한다) 등 헌법에 기술되지 않은 대통령의 임무도 나름 잘 수행했다. 새로 창설된 미국 의회와 오랜 시간 협의한 끝에, 세금 제도도 개편하여 소득세, 법인세 등 직접세 위주의 세수 기반을 확보했다. 또한 대통령한테 부여된 거부권도 한 차례 행사하여 미국 의회를 견제하면서, 해당 법안을 의회에서 재의결하자 그대로 수용하는 등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한 획정에도 힘을 썼다. 그리고 인구주택총조사(센서스)와 토지-부동산 총조사 시행이란 업적도 남겼다. 초기 대통령으로써 미국이라는 나라의 인구와 토지, 건물의 측량과 세입 기반을 확정하는 데에 2기 동안 진행된 8년 대통령 임기 중 6년을 투자했다. 미국은 워싱턴이 계획한 센서스 방식을 21세기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워싱턴은 미국이란 신생국 정부가 뇌물이 오가는 부패한 공무원들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며, 의회에 요청해 청탁금지법을 만들었다. 국가직, 지방직, 의회 공무원을 불문하고 공무원과 배우자에 대해서는 공무원이 속한 정부 부처에서만 선물을 받을 수 있고, 그 외에서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 자체를 금지시켰다. 심지어 생일파티도 외부인사를 초청하지 못하게 하고 공직사회 내부인원들끼리만 시켰다고 한다. 조지 워싱턴 본인부터 대통령직에 있는 기간 동안에는 타 정치인이나 민원인들로부터 각종 선물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청탁금지법은 위반이 적발되면 즉시 공무원 직에서 파면하는 법안이었다. 허나 이 청탁금지법은 워싱턴 50년 후 '''앤드루 잭슨이 폐지'''시켜버리는데, 이후 미국 정치권은 19세기 엽관제가 횡행하고 20세기 좀 주춤하나 싶더니 21세기에는 로비를 아예 비범죄화 하는 등 완전히 쇼미더머니를 보여주고 있다.
2번의 임기가 끝나자 워싱턴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미국 법 어디에도 대통령직은 2번까지만이라는 말이 없었지만, 워싱턴이 2번만 하고 물러난 뒤로 일종의 관례처럼 굳어져서 워싱턴 이후의 미국 대통령들도 2번 넘게 대통령직을 하지 않고 1선과 2선에 한해서만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17] 그러다가 1930년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4회 연임을 한 뒤에 1951년에야 법으로 4년 중임제가 명시되었다.
권력을 잡았다가 놓기란 정말 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특히 조지 워싱턴은 2번의 임기 후에도 여전히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더군다나 당시 시대적 상황을 봐도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었기에, 전례가 없는 대통령직을 사실상의 봉건국가 왕처럼 인식하는 분위기도 꽤 강했다. 하지만, 그는 본인이 2번 넘게 집권하게 되면 왕권이 된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내려왔다. 이렇게 시작을 정말 잘 끊은 것이 지금까지 미국의 민주주의와 대통령제가 문제 없이 돌아가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대통령제를 도입한 나라에는 그의 잔향이 짙게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워싱턴은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독재자가 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애시당초 불법도 아니고 합법적으로 종신통령까지 될 수도 있었다!) 일국을 건국한 개국공신이자, 당대 세계 초강대국인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라는 든든한 명분도 가지고 있고, 8년간 신생국가 미국을 안정시키며 통치능력도 증명했으며, 대중들의 지지라는 뒷배경도 가지고 있었다. 행정부도 장악하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미약하긴 해도 군대마저 그의 통솔 하에 있었던데다 본인이 군인 출신이기도 했다.[18] 그야말로 종신집권도 가능했을 법한 상황.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그 모든 권력욕과 유혹을 이겨냈다. 별다른 저항도 없이 종신집권을 할 수 있는 여건에 있음에도 본인의 의지로 권력을 내려놓았다는 것은 진짜 본인의 어떤 확고한 신념이나 초인적인 자제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능력도 지지도 있고 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도 없는 상황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19] 장기집권의 이유들이 단순한 권력욕 외에도 자기 추종자들 챙겨주기, 후손들의 지위, 자기가 키운 국가를 딴 놈이 망쳐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등 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모조리 내려놓은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갓 건국된 신생국이고,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들이 많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결하고 가겠다는 책임감 같은 것으로도 장기집권을 노릴 수 있었고, 3선이나 4선 투표에 나가도 당선될 확률도 컸고, 실제로 워싱턴이 장기집권을 했다면 대선후보들이 치고박는 사회적 비용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장기집권의 안정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메리트니까.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그냥 독립전쟁 했던 흔한 사람A가 될 수도 있었던 워싱턴은 세계사에 다시 없을 위인이 될 수 있었다. 스스로 내려놓았으니 누구도 그를 끌어내릴 수도 없고, 차후 미국에서 장기집권을 원하는 사람들은 '내가 워싱턴보다 잘난 놈이야!' 라고 말하고 그를 증명해야 하는데...불가능하다.
실례로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782년경 공화정부가 군인들의 봉급을 제대로 못 챙겨주고 있다며 불만을 품은, 워싱턴의 부관 루이스 니콜라 대령이 워싱턴에 편지를 보내 공화정부를 쿠데타로 뒤집어 엎고 장군님을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소위 뉴버그 편지(Newburgh letter)를 보내기도 했으나, 워싱턴은 군의 불만을 이해한다면서도 직접 '''후손들에게 군과 의회가 대립하는 비극의 역사를 물려줘선 안된다'''며 명확히 거절한 뒤 군인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하고 감정적으로 달래서 쿠데타 시도를 자제시킨 적도 있었다. 관련 기사. 덕분에 워싱턴은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로부터 최고의 대통령 중 한명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2.7. 사망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지 2년후인 1799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워싱턴의 공식 사인은 '과다출혈'이다. 워싱턴은 눈 내리는 날 무리하게 말을 타고 산책하다가 폐렴에 걸렸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무리하다고 생각될 만큼 많은 피를 뽑았다.[20] 결국 5파인트(약 2.35리터)나 되는 피를 뽑은 워싱턴은 폐렴에 걸린 지 3일만에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워싱턴의 사후 원래는 미망인 마사의 제안에 따라 워싱턴 D.C.국회의사당에 영묘를 만들어 워싱턴의 을 안치하려고 했으나, 고인의 의사에 따라 유해는 생전에 개인 영지인 마운트 버넌에 만들어놓은 가족 선영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워싱턴이 안장될 당시까지만 해도 마운트 버넌의 선영은 관리가 매우 부실한 상황이었고, 워싱턴은 마운트 버넌에 안장되길 바라면서 무덤을 새로 더 크게 개축하길 바랐지만 이 유언은 집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1830년 마운트 버넌에서 일하다 해고당한 후 앙심을 품은 정원사가 워싱턴의 유골을 훔치려고 시도한 사건이 터지면서 워싱턴의 무덤을 새로 만들어야 된다는 의견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미영전쟁 당시에 불타버린 국회의사당을 재건하면서 국회의사당 지하에 새로이 워싱턴의 묘실을 만들어 그곳으로 이장하자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당시 남부 출신 의원들의 반발로 인해 흐지부지되었고, 결국 워싱턴은 1837년 마운트 버넌에 새로 만든 무덤에 부인 마사 그리고 다른 워싱턴 가문의 구성원들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이 국회 의사당 지하에 마련된 묘실을 이용하지 않자 이후 어느 누구도 이 자리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고, 현재도 이곳은 "워싱턴을 안장하려 했던 자리"로 팻말만 붙어 있고 비어있는 상태다.[21]

3. 평가


'''전쟁 속에서도 으뜸, 평화 속에서도 으뜸, 그의 국민들 마음 속에서도 으뜸이었던 사람(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

헨리 리 3세(Henry Lee III), 조지 워싱턴의 장례식에서의 추도 연설

살피건대, 화성돈(华盛顿, 워싱턴)은 이인(비범한 사람)이로다. 무기를 들고 일어난 것은 오광, 진승과도 같고, 천하를 분할해 웅거함은 조조, 유비와도 같다. 그러나 세 자 검을 들고 일어나 만 리가 되는 영토를 얻었건만, 참람되이 을 자칭하지 않고, 자리를 자손에게 물려주지도 않았으되, 외려 추거의 법(선거제도)을 세웠으니 모두 천하위공(天下为公)에 따른 것이었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선량한 풍속을 숭상하고 무력을 높이지 않았으니, 이 또한 다른 나라들을 둘러보아도 같지 않다.

내 그(워싱턴)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기골과 용모가 굳건하고 빼어났으니, 오호라, 인걸이라 아니 부를 수 있겠는가! 미리견합중국의 도로써 나라를 세우니, 만 리나 되는 영토를 아우르지만 왕후의 칭호를 세우지 않고 세습의 법규도 따르지 않는다. 나라의 일을 공론에 따라 처리하여 고금에 없던 형국을 만들어내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고금의 서양(진서) 인물을 통틀어, 어찌 화성돈이 으뜸간다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서계여, 《영환지략》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실질적인 1대 대통령으로, 8년의 임기를 원만하게 보냈고 220년이 훨씬 넘은 현재까지도 미국 정치에서 지켜지고 있는 평화로운 권력이양(Peaceful Transition)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며 이를 미국의 '''정치적 전통'''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미국이 건국 이래 독재자쿠데타 없이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펼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의 공이 매우 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물론 조지 워싱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미국은 신생 국가로서 특히 초기의 경우 의 권한이 연방정부의 권한보다 강한 측면도 있었기 때문에, 괜히 독립전쟁 치른 동료들과 투닥거리며 정치할 바에야 돈도 많겠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별장에서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는 것이 더 나았기에 대통령직에 집착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권력욕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실제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의 총괄 지휘권자이자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드라마 애덤스에도 나왔듯이 워싱턴 본인 혼자서 연방, 공화주의자들의 지지 세력을 상회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초기 미군이 워싱턴 개인의 사병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연방정부의 권한은 현대의 미국보다 약했겠지만 워싱턴 개인이 누리던 권력은 그 이후 대통령들과도 비교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최초의 시도였던 대통령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확실하게 정의내리지도 못했던 시절이니 마음만 먹었다면 왕은 아니더라도 로마시대의 독재관 정도는 쉽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개발되지 않은 광대한 영토와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무수한 관리의 등용을 실시하고 법률의 제정, 시행을 시작한 신생 독립국의 체계와 국력을 개인의 재산과 비교하여 결코 미약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당장 지금도 워싱턴이 통치하던 당시 미국보다도 미약한 국가를 다스리면서 형식상 민주국가 타이틀만 달아놓고 왕처럼 행동하는 지도자들을 볼 수 있다.
결국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말처럼, 조지 워싱턴이 좋은 선례를 남겼기 때문에 미국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시도한 모험인 대통령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미국의 후임 대통령들은 명문화된 규정이 없어도 워싱턴의 전례를 따라 암묵적으로 세번째 임기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다 20세기 들어서야 프랭클린 D. 루스벨트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관례를 깨고 4연임을 했고, 이것도 문제 제기가 되어 이후 대통령 3선 금지가 헌법에 추가된 것이다. 이 선례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민주주의와 선출직 지도자 제도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나라들의 경우 대통령 제도 자체가 처음부터 어그러진 경우가 많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한국만 .. 미국과 달리 첫 방향성이 어그러지니 권력을 잡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권력만능주의와 이를 변명하기 위한 각종 궤변론이 난무하고 지지층도 분열되고 나라도 오랜 기간 계속 삐그덕거릴 수 밖에 없었다.
워싱턴은 권력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고별사(Farewell Address)[22]에서도 보이듯이, 워싱턴은 진정한 힘은 그 힘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워싱턴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시절에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역시나 왕이라는 생각 때문에 조지 워싱턴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도 꽤 많았다. 하지만 워싱턴은 2번의 임기를 마치고 스스로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으며 이를 통하여 최대 권력이 의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도 미국 국회의사당에 가면 정중앙 돔의 천정에는 조지 워싱턴이 당시 주 갯수였던 13명의 천사에 둘러 싸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조지 워싱턴을 나름 신격화해준 것이다.
이렇게 권력을 깔끔하게 포기한 조지 워싱턴의 행적 때문인지,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를 좋게 보는 사람들은 이런 조지 워싱턴을 좋게 표현하지만, 독재 국가나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조지 워싱턴이 권력을 포기한 행적을 별거 아닌 것처럼 표현하거나 아예 무책임한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한편 당시 미국 남부의 웬만한 대지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워싱턴 본인 역시 농장을 경영하면서 노예를 거느렸다. 워싱턴은 자신의 보금자리 마운트 버넌에 결혼 당시 기준 50여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사망 직전에는 이 숫자가 300여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자신이 운영했던 농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노예 수도 점점 더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워싱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으로 마운트 버넌을 찾는 이들도 많았기에 이를 수발할 인력도 필요해 워싱턴이 사망할 때까지 이들은 단지 잡일만이 아니라 대장장이나 천을 짜는 일 등 다양한 분야에 부려졌다고 한다.
젊은 시절만 하더라도 노예제에 대한 워싱턴의 견해는 다른 농장주들의 견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23] 독립 전쟁을 치룬 이후 노예제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고 차츰 노예제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지만 노예제 문제가 기껏 하나로 모은 미국을 분열시킬 수 있는 시한폭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워싱턴은 공식 자리에서는 노예제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고 하는데, 그러다 본인의 유언장에는 독립전쟁 때부터 자신을 수발한 비서 흑인을 자신의 사후에 자유인으로 풀어주도록 했으며, 자기 집에 있는 나머지 노예들은 부인 마사가 사망한 후[24] 모두 자유인으로 풀어 주도록 하였다.
다만 이런 행적에도 워싱턴 본인이 죽을 때까지 노예를 소유한 노예주였던건 사실이기에, 2020년 BLM 시위가 한창일 땐 워싱턴의 동상이 페인트 테러를 당하거나 스프레이로 노예 소유주, 백악관을 불태워라 등의 메세지가 적히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사실 미국 건국 초기 지도자들은 노예제도에 비판적인 경우가 많았는데[25], 그럼에도 이미 존재하던 노예제에 대한 현실적 제약이 있다보니 노예제도의 존폐를 헌법에 명시하면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와 찬성하는 남부의 연합이 균열되어 연방이 와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개별 주에 찬반 여부를 맡기는 일종의 방임 정책을 썼다. 워싱턴, 제퍼슨, 매디슨의 경우 이렇게 비노예주를 늘려가다보면 노예제 허용주들도 자연스레 이를 폐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26] 당시의 노예제 인식은 그나마 좋게 봐서 "필요악" 수준 정도였는데, 문젠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이론들이 나오더니[27] 심지어 정당화되고 이념화되었다는 것.[28]

4. 기타


미국 1달러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삽입되어있다. 이유는 가능하면 많은 이들이 그를 보게 하기 위해서. 하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어찌보면 당연한 소리지만 자주 지폐를 구기고 주머니에 쑤셔넣고 다닌다.[29] 미국 달러 발행 초기부터 조지 워싱턴이 1달러에 배정되어 있었는데, 조지 워싱턴이 1달러 도안으로 캐스팅된 건 1811년이라고 한다. 1811년 당시 1달러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고 하니 많이 보라고 1달러에 넣었다는 게 어느정도 납득이 가는 지점이다. 지금이야 1달러 지폐는 아무데나 쑤셔넣는 입장이지만 19세기 초반 당시의 조지 워싱턴 1달러 지폐는 고액권이었다. 미국 달러 발행 초기에는 1달러, 5달러, 10달러 세 종류의 지폐만 있었기 때문이다. 2달러, 20달러 등의 고액권 지폐는 남북전쟁때 추가되기 시작한다.
  • 치아 상태가 매우 나빠서 틀니를 끼고 다녔다는 사실이 다소 유명하다. 선천적으로 치아가 약했던데다가 독립전쟁 같은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항상 좋아하는 호두를 이로 껍질을 깨먹는 습관이 있었고, 양치질을 할 때 매우 힘을 꽉 주고서 했기 때문에 이에 상당히 무리가 갔다. 워싱턴은 하루 3번씩 양치를 꼼꼼히 했다고 하지만 그 당시 치약은 재료부터가 병맛이었기 때문에[30] 오히려 증상을 더 악화 시켰다. 이 때문에 워싱턴은 젊은 나이부터 치아가 빠졌고, 초대 대통령 취임 당시까지 남아있는 치아는 왼쪽 아래턱에 있는 하나가 전부였다고 한다.[31] 이렇게 되자 틀니를 할때까지 옥수수빵과 스프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가 되고, 이후 대통령에 다시 취임해달라는 제의에 치아가 몇개 남지 않아서 모양이 안서자 자신의 집 노예의 치아와 하마뼈, 바다코끼리 엄니, 밀랍과 금으로 만든 틀니를 만들어 끼우고 다녔다. 문제는 이 틀니가 너무 커서 잘 맞지도 않을 뿐더러 금으로 스프링을 만들다보니 툭하면 입이 벌어지는 모양새여서 워싱턴은 항상 입을 꽉 다물고 업무를 수행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뾰루퉁한 모습을 연상케 했다. 워싱턴의 초상화는 많지만 전부 입술을 삐죽 내민 모양으로 남은 건 이 때문이라고 한다.
  • 실제 워싱턴이 연설을 길게 한 기록은 찾기 드문데 그것 역시 틀니가 입에 맞질 않아 언제나 틀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을 걱정해서 일부러 말을 짧게 했기 때문이다.[32] 설상가상으로 이 치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닳아 없어지는 데다가 재료의 성질상 기공이 많아서 미세한 구멍에 찌꺼기가 끼기 쉬웠다. 워싱턴은 포도주를 자주 마셨는데, 그 결과 의치가 변색되고 썩어버리는 바람에 지독한 냄새가 났으며, 워싱턴은 그 냄새가 역겨워 항상 입을 부풀린 채 다녔다. 게다가 이물질을 너무 많이 물고 있었기에 나중에는 입안 곳곳이 곪아서 턱 일부가 뭉개지기까지 할 정도가 됬다. 후일 워싱턴이 대통령에서 물러나 남은 여생을 자기 집에서 보낼때 화가 길버트 스튜어트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초상화로 남겨두고 싶었는데 틀니를 너무 오래 껴서 볼 살이 늘어나다보니 틀니를 뺀 말년에는 볼살이 늘어져 화가가 입 속에 솜을 넣어서 그림을 그려야 할 정도가 됬다. 다만 그 틀니가 어지간히 사람을 괴롭혔는지 솜을 넣고 그린 워싱턴의 초상화는 이전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자상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 당시 워싱턴의 틀니를 만들어준 사람은 당대 최고의 치과의사이자 임플란트의 시조인 이삭 그린우드의 아들 존 그린우드로서 그는 워싱턴의 의치를 만들었다는 것을 광고로 손님을 끌어모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허나 정작 그 광고의 주인공인 워싱턴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틀니로 인해 엄청난 애로사항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린우드에게 자주 불만을 표했으며, 툭하면 그린우드가 돌팔이라고 투덜댔다.
  • 틀니로 인해 초상화가 상당히 무뚝뚝하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워싱턴은 관저에서 카드놀이를 열광적으로 즐겼고, 무료하면 관저를 나서 여우사냥에 심취했으며 다과회도 자주 열어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제법 미식가라서 음식에도 까다로웠으며 앞서 말한대로 포도주에는 사족을 못 썼다. 게다가 독립전쟁 이전부터 재력가로 한 이름 날렸기에 아메리카 대륙 버지니아 식민지 사교계에선 나름 알아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역사가들이 당시 문서를 뒤져본 결과, 워싱턴은 카스웰 메시 향수와 파우더 뿌린 가발을 자주 쓰는 등 외모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멋쟁이였다.
  • 일각에선 워싱턴이 흑인 노예랑 불륜을 저질렀고, 한겨울 엄동설한에 자신이 사랑하던 흑인 노예를 만나러 갔다가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도 떠도는데 이는 사실과 달라보인다. 폐렴에 걸려 치료 도중 과다출혈로 죽은 건 맞지만 흑인 노예와의 불륜설은 증거가 없다.[33] 다만 흑인 노예와는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염문설은 많았다. 물론 명확히 밝혀진건 없다. 그래도 섹드립은 종종 즐겼는지 독립전쟁 때 자신의 부관에게 "애인을 기쁘게 하려면 열심히 자신의 무기를 갈고 닦아라"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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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운티
  • 어렸을 때부터 기마술을 즐겼다고 한다. 덕분인지 기골도 장대하고, 키도 188cm로 매우 컸다고 한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당시 유럽 남성의 평균 신장이 보통 165cm 정도였다. 현재의 관점으로 봐도 굉장히 큰 키인데, 당시 기준에선 거의 거인 수준이었을 듯.
  • 미군에서 연공 서열이 가장 높은 군인이기도 하다. 비록 그가 전역할 땐 중장(Lieutanant General)에 불과했지만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미 의회가 법률을 제정하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추인하여 그를 3계급 특진대원수(General of the Armies)로 추서하였다. 엄밀히 따지면 이 법에 "'General of the Armies'라는 칭호는 6성 장군에 해당한다"라고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미군에는 5성 장군인 원수 계급까지 있었고 이 법에는 "'General of the Armies' 칭호는 과거이든, 현재이든 미합중국군의 다른 모든 계급에 선임한다"라고 명시해놓았기 때문에 사실상 6성 장군 계급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 칭호를 받은 군인은 워싱턴 말고도 존 조지프 퍼싱도 있지만 퍼싱은 대원수가 아닌 사실상 원수 계급으로 이 칭호를 받은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정식으로 원수 계급이 신설되면서 퍼싱의 계급에 대한 논란이 생기자 당시 미 육군 장관 헨리 스팀슨은 "퍼싱의 계급은 다른 원수 계급에 선임한다"고 해석을 내렸고 워싱턴의 사후 추서 때 정식 계급으로 신설되면서 대원수 계급으로 덩달아 올라간 케이스이다. 또한 법을 통과시킬 때 '연공 서열에서 워싱턴이 퍼싱보다 앞선다'라고 못박아놨기 때문에 미군에서 연공 서열이 가장 높은 군인은 워싱턴이 맞다.
  • 워싱턴이 도끼로 아버지가 아끼는 벚나무를 베었을 때 그가 솔직하게 말하자 아버지가 용서해줬다는 일명 벚나무 이야기가 나름 유명한데, 사실 이 이야기는 목사 행세를 했던 외판원 웜스란 사람이 워싱턴의 위인전이 너무 얇다고 생각해 맘대로 붙인 이야기라고 한다. 애초에 워싱턴 생가엔 벚나무가 없다. 더군다나 원래 버전은 워싱턴을 포함한 형제들이 같이 놀다가 벚나무 가지를 꺾어먹는 것이었고, 이때 무려 4살짜리 막내 워싱턴이 자기가 했다고 말했다는 비범한(?) 내용이었다. 사족으로 이 Parson Weems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소년 시절에 물건을 팔면서 가격을 깎고자 하는 손님에게 가격을 계속 올리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간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고 한다.[34]
    • 아메리칸 조크에서는 이 일화를 다음과 같이 유머스럽게 설명한다.
>선생님: "조지 워싱턴이 벚나무를 자른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용서했습니다. 왜일까요?"
>학생: "네, 조지 워싱턴은 아직 도끼를 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위스키와 인연이 좀 있는 인물인데 영국과의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위스키에 세금을 매겼다가 폭동이 일어나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런데 반란을 일으킨 쪽에도 사정이 있는 것이, 애팔레치아 개척지역민들은 험난한 산맥으로 곡물을 나르는 대신 남는 곡물로 만든 위스키를 운반하는 걸 선호했을 뿐더러 현금이 귀했던 개척지의 사정상 위스키는 일종의 화폐로도 사용되어 왔었다. 즉 이들에게 위스키는 없어서는 안 되는 생필품이었던 것. 워싱턴 정부는 위스키세를 사치세로 생각했는데 이들에게는 소득세가 된 셈. 결국 반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워싱턴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토벌했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 직접 군사를 이끈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이었다. 이렇게 보면 워싱턴과 위스키가 악연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퇴임하던 해, 워싱턴은 버지니아주에 증류소를 세웠고 사망하기 전까지 미국 최고의 양조업자가 되었다고 한다.
  • 독립군 시절에 영국군과 내통하던 요리사가 조지 워싱턴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카더라성 일화가 있다. 그 요리사는 조지 워싱턴이 평소 즐겨먹는 요리에 독을 바른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독이라는 게 다름이 아니라 토마토. 그 요리사는 토마토를 바른 요리를 워싱턴이 깨끗이 비우자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해 영국군에게 밀서를 보냈다. 물론 토마토엔 독 따위 없었으므로[35] 워싱턴에겐 아무 이상도 없었다. 토마토의 영양을 생각하면 남 좋은 일만 시킨 셈. 다만 이 일화는 다른 대통령 버전도 떠도는 것(특히 에이브러햄 링컨)을 볼때 진짜 있었던 일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 서기 1789년 10월 5일에 빌려간 책을 죽을 때까지 반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뉴욕 소사이어티 도서관(New York Society Library)에서 2권의 책을 빌렸다. 각각 국제관계학을 다룬 'The law of nations'와 영국 하원의 토론 내용을 담은 'Commons debates'라는 책이었다. 연체료는 누적된 액수와 인플레이션 등을 감안할 때 약 30만 달러라고 한다. 이 책은 서기 2010년에 반납되었다. 해당 책 자체는 찾지 못해서, 워싱턴 기념 사업회에서 해당 책과 같은 판본의 책을 따로 구입해서 반납했다. 연체료는 도서관 측에서 면제해줬다.뉴욕데일리뉴스 기사
  • 알링턴 국립묘지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데 국립묘지가 위치한 부지가 바로 워싱턴의 아내인 마사의 개인 재산이었다. 마사가 워싱턴과 재혼한 이후 워싱턴이 마사의 개인 재산까지 관리했는데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1802년 마사가 세상을 떠나자 워싱턴의 의붓손자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가 마사의 개인 재산이었던 친할아버지 대니얼 파크 커스티스의 개인 농장을 상속받았고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에게는 장성한 자녀가 딸 메리 애나 1명 뿐이라서 이 농장은 1857년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가 사망한 후 딸 메리 애나와 그의 사위에게 돌아갔는데 이 사위가 바로 로버트 E. 리이다. 그리고 남북전쟁 시기에 리가 아메리카 연합국 측에 가담하면서 리 일가가 남부로 떠나자 연방 정부는 이 농장을 매입해 전사자들을 위한 국립묘지를 조성했는데 이 곳이 바로 알링턴 국립묘지이다.
  • 이 이름을 본딴 워싱턴 주도(Washington State Road)가 있으며 범례는 그의 실루엣을 형상화했다.

5. 대중 매체에서


  • 게임 Liberty or death
코에이의 역사게임 Liberty or death에서 미국측 총사령관 캐릭터로 나오는데 다른 코에이의 역사 게임의 주인공격 캐릭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칭기즈 칸이 전투형 캐릭터인데 비해 워싱턴은 정치형 캐릭터에 더 가깝다. 사실 워싱턴은 총사령관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인물이었다. 전투력만 따지면 베네딕트 아놀드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문명 4문명 5에서 미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문명 4의 경우 확장팩을 모두 설치했다고 가정할 때 프랭클린 루즈벨트, 링컨과 공동 출연.
티미의 못 말리는 수호천사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티미가 역사 숙제를 하기 위해 수호천사에게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을 불러오라는 소원을 빌어서 등장. 여기서는 나무를 보자마자 도끼로 찍으려고 발작을 한다. 위의 '기타' 문단에도 등장하는 벚나무 일화의 패러디인 듯. 이때 발작하면서 외치는 대사인 "MUST CHOP WOOOD!!!!!"[36]는 밈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 성우는 코스모와 조르겐 등을 맡고 있는 대런 노리스. 여기서 나온 워싱턴의 필수요소 3가지는 흰 머리, 나무틀니, 자유 정신이라고 한다. 티미 엄마가 제퍼슨을 보고 니켈(5센트)에 그려진 사람이라고 신기해하자 "하, 니켈이라고! 나는 1달러에 있다고! 너보다 20배는 더 잘났단 말씀!"이라며 놀렸다.
이후 다른 에피소드에서 등장할 때도 나무만 보면 도끼질을 하고 싶어서 발작하는 기믹이 꼭 들어가는데, 베네딕트 아놀드가 워싱턴으로 변장해 독립선언서 작성을 방해하려 하는 편에서는 이 기믹 덕분에 진짜 워싱턴을 찾아낸다.[37]
흥미롭게도 이 게임에서 조지 워싱턴은 주인공의 협력자도 되지만 동시에 원수도 되고, 선하고 정의로운 성격이지만 동시에 악행도 저지르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심지어 DLC에덴의 조각에 지배당한 조지 워싱턴이 절대군주가 되어 폭정을 자행하는 환상이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조지 워싱턴(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문서 참고.
진짜 조지 워싱턴은 아니지만, 그 사람을 모델로 한 적, '기계 애국자'가 나온다.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적 참고. 팬들과 게이머들 사이에선 '좀비 로봇 워싱턴'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왠만한 신화속의 신과 역사 인물들이 모에화되어서 등장하다보니, 여기서 등장하는 조지 워싱턴도 얄짤없다.
코믹 어드벤처 게임인 이 작품에선 황당하게 나온다. 과거로 간 주인공 중 하나인 호기가 게임 진행을 위하여 미래에서 건네받은 폭발하는 시가(담배)를 그에게 주는데 고맙다고 그 시가를 피다가 폭발하면서 이빨이 다 부숴진다. 덕분에 이빨이 하나도 없는 확 늙어버린 모습으로 변하는데 역시 미래에서 건네받은 딱딱 움직이는 틀니를 주면 그걸 끼는데 이빨이 딱딱 움직이는 지라 얼굴이 흔들리면서 마치 추워보인다고 존 핸콕이 토머스 제퍼슨에게 모닥불을 피우게 한다.
나중에는 그 모닥불을 엄청 화력이 높게 만들면 불이야~ 소리 지르면서 핸콕, 제퍼슨과 같이 창문을 깨고 달아나는데 대머리(가발)이다. 특별히 병신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그냥 가볍게 웃기게 만든 수준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말트루언트를 막기 위해 타임 사이클을 통해 1773년으로 시간 이동한 벤과 루크가 만나며 배관공의 일원이란 설정이 붙었다. 성우는 David Kaye.
작중 세계관에서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브리타니아 공작에게 회유되는 바람에 미국 독립전쟁에 실패한다고 나온다. 여기서는 미국 독립전쟁이 아닌 워싱턴의 반란으로 나온다. 대신 영국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건국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Deadliest Warrior란 프로그램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5:5로 싸워서 이겼다.

5.1.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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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에서 주요 인물이자 주인공 가문인 블랙 가문의 조력자로 등장. 성우는 홍성헌. 영국군 해군장교[38]로 나오며 캠페인 2장 '얼음'에서 주인공인 존 블랙7년 전쟁 속에서 합동작전을 펼치며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5.1.1.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대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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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른쪽의 인물. 왼쪽은 나다니엘 블랙
성우는 오리지널과 마찬가지로 홍성헌. 오리지널에서는 그냥 장교였지만 확장팩의 캠페인 '불'에서는 잘 알려진 독립전쟁의 총사령관으로 등장. 존의 아들인 나다니엘 블랙의 보좌를 받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인격도 훌륭해 전쟁에서 죽어가는 장병들을 안타까워하며 요크타운 전투에서 나다니엘의 전역이 다음달이니 몸사리라고 충고도 해준다. 오리지널과 확장팩에서의 스킨이 다르며, 체력이 좋고 공격할 때 '''군도를 들고 직접 공격'''한다. 컨트롤을 안 하면 다른 유닛들이 원거리 공격을 하는데 워싱턴 혼자 군도 들고 돌격하다가 쓰러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래 살려가면서 컨트롤해봐야 특별히 이득이 있는 스팩도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제일 먼저 앞세워 일점사를 받아내게 하고 다른 유닛들로 공격을 하면 유닛 손실 없이 캠페인을 클리어 할 수 있다. 체력이 네자릿수라 은근히 오래버틴다.

5.2. CF



크라이슬러닷지 챌린저(Dodge Challenger) 광고에 등장했다. 친히 자동차를 운전해 영국군에 돌진해서 격퇴시킨다는 내용(...).

[1] 독립선언서에 제일 먼저 서명하면서 "크게 써야 영국 왕 조지 3세가 돋보기 없이도 이름을 볼 수 있지 않겠소?"하면서 큰 글씨로 서명을 한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존 핸콕이란 이름 자체가 '자필 서명(autograph)'이란 뜻으로 쓰인다. 가령 'Please put your John Hancock'이라고 하면 '여기 서명 좀 해 주세요'라는 의미다.[2] 핸콕이 두 번 했다. 첫번째엔 2년 5개월, 다음번엔 7개월.[3] 2001년 미 상원에서는 부시와 대선에서 붙었다가 낙선한 부통령이 겸임하고 있던 상원의 'President pro tempore' 자격으로 직접 부시의 'President' 당선 확정 선언을 하게 되는 장면이 연출되며 한동안 놀림거리가 되었다. 덧붙이자면 하원 의장은 'Speaker'로 불리므로 여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4] 이 당시 이름은 웨싱턴(Wessyington). 오랫동안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있다가 1974년 선더랜드의 일부로 편입되었다.[5] 당대 버지니아 식민지 최고의 갑부였던 대니얼 파크 커스티스(Daniel Parke Custis)와 결혼했는데 1757년 남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 남편의 재산이었던 1만 7천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와 300명에 달하는 노예를 상속받았다.[6] 결혼 후 워싱턴의 토지는 2만 2천 에이커가 되었다(부인 측 토지가 1만 7천 에이커). 워싱턴 자신의 상속재산 포함이다. 조지 워싱턴의 재산을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587만 달러인데, 이는 도널드 트럼프에 이어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두번째로 많은 금액이다.[7] 워싱턴이 10명의 사생아를 두었다는 낭설이 있는데, 근거가 없다.[8] 사실 마사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존 파크 커스티스 위로 아들인 대니얼과 프랜시스, 2명을 더 낳았으나 둘 다 마사가 워싱턴과 재혼하기 전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9] 의붓 아버지인 워싱턴을 따라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으나 1781년 요크타운 전투 직후 병으로 사망했다.[10] 물론 전략적으론 원정군인 영국군에 불리한 소모전 성격은 있었지만, 이것도 아메리카 땅이 넓어서 가능했지 아니었음 진작에 영토 다 먹혔을 것이다.[11]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모습은 베트남 전쟁 시기 호치민이나 보응우옌잡에게 당한 미국군의 모습과도 상당히 유사하다.[12] 다만 독립 이전에도 president란 직책은 있었으므로 만약 이를 감안하면 초대 대통령은 아니다. 처음 독립한 13개주의 모임인 대륙회의가 14년 동안 헌법을 만들고 합중국의 기초를 닦는 동안 각 주의 대표자들이 돌아가면서 대통령직을 짧은 기간 맡았었기 때문. 하지만 이 당시에는 회의의 사회자 성격이 더 강했고, 각각의 사정으로 사퇴하곤 해서 1년 이상 임기를 맡은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즉, 진정한 국가 수장으로서의 초대 대통령은 워싱턴이 맞다는 것.[13] 당시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이 1인당 2표씩 행사하며 투표하고 싶은 2명에게 각각 1표씩 투표해서 1위가 대통령, 2위가 부통령으로 당선되는 방식이었는데 워싱턴은 모든 선거인단에게서 1표씩 받았다. 득표율은 50%이지만 모든 선거인단이 워싱턴에게 표를 던졌으므로 사실상 만장일치이다. 더 대단한 점은 선거인단이 아닌 유권자 투표에서도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는 점.[14] 재선때도 그랬는데, 다만 부통령은 존 애덤스와 조지 클린턴이 경쟁을 통해 선출되었다. 단, 1820년 제임스 먼로의 재선 선거에서는 후보자가 한 명 뿐이었는데, 선거인단 선거 지지율은 100%였지만 존 퀸시 애덤스를 찍은 반란표로 선거인단 만장일치는 없었다(228/231).[15]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대통령 당시 언행은 왕이나 마찬가지기는 했다. 전임을 본게 없으니 대통령직을 어떤 포지션으로 둬야 할지 막막했던 워싱턴은 그냥 유럽 왕들처럼 "전하"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게 했으며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불렀다. 초기 대통령의 개념은 "투표로 뽑는 왕" 비슷한 개념이었던 셈.[16] 여담으로 '''조지''' 워싱턴은 당시 영국 왕 '''조지''' 3세와 같은 이름이었는데, 이 조지 3세는 독립전쟁 이후 군권을 쥐고 있던 워싱턴이 민간 정부에 권한을 이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후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묘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17]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경우 세 번 출마해서 세 번 다 최다 득표를 했지만, 두번째 선거 때는 선거인단 수에서 패해 당선되지 못하고 세번째에서야 재당선되었다. 즉, 연임이 아니라 두 임기를 나누어서 했다는 말. 율리시스 S. 그랜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경우 한번 연임 후 퇴직했다가 나중에 3선에 도전했지만 당선에는 실패했다.[18] 위스키 폭동 당시 직접 군대를 지휘해 최초이자 마지막인 미국 대통령 친정을 행하기도 했다. 위스키 폭동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면, 임기 중 국채 상환을 위해 위스키에 대한 과세를 사치세 개념으로 부과했는데, 당시 위스키가 일부 지역에선 사치품으로 보기 어려워서 사실상 소득세 비슷하게 되어 이에 반발한 농민들이 일으킨 폭동이었다. (철도 등 물류유통이 열악하던 시절에는 산더미처럼 수확한 곡식도 갖다 팔 수 없으면 쓰레기 되기 십상이었는데, 이걸 술로 만들면 부피가 쫙 줄고 돈 받고 팔수도 있으며 유통기한도 길어지는 '상품'이 된다.) 이때 연방정부가 상당히 강력한 힘을 과시함에 따라 그 권한을 증명한 사례가 되기도 하였다.[19] 실제로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독립 후 국가원수가 되면서 독재자 루트를 밟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나 튀니지의 하비브 부르기바, 베트남의 호찌민, 한국의 이승만 등이 대표적인 사례.[20] 당시 서양에서는 그때까지도 병이 나면 무작정 피를 뽑는 '방혈치료'가 유행했다. 현대인이라면 이런 치료법이 황당해보이겠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병의 원인이 되는 병균, 바이러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체내 혈액의 불균형이 각종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21] 때문인지 미국 대통령들도 사망하면 보통은 자기 고향이나 살던 곳에 묻히는 경우가 많다.[22] 명칭은 저렇지만 워싱턴은 이를 직접 연설하지는 않았고 1796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의 한 신문에 내용이 발표되었다.[23] 그래서 워싱턴에게 충성하는 노예들도 많았지만 반항하거나 도망가는 노예들도 있었다고 한다.[24] 워싱턴 사후 모든 노예를 풀어주면 자기가 물려받을 유산이 줄어든다고 생각한 아내의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25] 그런데 재미있는건, 사실 유럽에서 미국(버지니아)으로 건너온 초기 이민자의 3/4 정도가 소위 머슴이었다고 한다. 하층계급이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고 이민은 하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뱃삯 대신 자발적으로 계약제 하인이 되어 무보수로 몇년 일하다 영주권을 얻고 자유민이 되는 것.[26] 이 생각은 남부에서 면화농업이 번성하기 전까지는 얼추 맞았으나, 면화농업이 번성하자 노예제는 오히려 강화된다.[27] 예를 들어 노예제가 자본주의의 빈부격차에 의한 갈등을 완화시킨다(노예니까 가난해도 문제없음/서로 다른 두 인종이 공존할 수 있음/노예노동은 국익에 유익함/노예제는 적극적 선(positive good이다) 등.[28] 노예제도를 사수하기 위해 종교를 악용하기도 했는데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핀이 친구인 흑인 노예가 도망친 것을 알고 고민에 빠지는데 그 이유가 뭔고하니 '''도망가는 노예를 고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핀은 모범생보다는 부랑아에 가까움에도 ''''내가 지옥에 떨어질 각오를 해야'''' 도망치는 노예를 도울 마음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종교를 악용했는지 알 수 있다.[29] 한국천원권 지폐처럼 물가 사정상 거래의 주역은 안 되어 잔돈 취급을 당하기 때문이다. 흔히 볼 수 있는 1달러 지폐들은 갓 찍어낸 것이 아니면 대부분 지폐는 구겨져 있거나 기괴한 낙서가 적혀져 있거나 심지어는 지폐를 말아서 약을 빤다. 이래저래 험한 꼴(?) 많이 보는 지폐다.[30] 담배가루를 치약으로 썼다.[31] 제2소구치가 남았다고 한다.[32] 연설을 90초만에 중단한 일도 있었다.[33] 사실 흑인 노예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는 음모론 의 주인공은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유명하다.[34] 이 웜스라는 남자는 어쌔신 크리드 3에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며 매우 영악한 쥐새끼라고 까이는데, 코너가 워싱턴 암살 기도에 대해 말하자 "워싱턴은 주피터의 환생이자 이 나라를 자유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위대한 국가로 키워낼 인물이니 죽어선 안 된다"라며 (당시로써는) 엄청나게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떨어댄다. 이 윔즈라는 남자는 나중에 일명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한 위인전도 썼다. 이 아저씨가 다른 인물들을 어떻게 묘사했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35] 사실 줄기와 잎 쪽에 독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지식이 없었으니...[36] 해석하면, "나무를 찍어야 돼!!!!"[37] 나무를 미치도록 썰어대는 워싱턴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매우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 쪽이 진짜네.라고 말하는 것이 압권[38] 사실 Colonel을 오역한 고증오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