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방직 똥물 사건

 



1. 개요
2. 배경
3. 사건 전개
4. 사건 이후
5. 참고/외부 자료


1. 개요


1978년 2월 21일에 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1] 동일방직 인천공장에서 벌어진 여성 노동자에 대한 탄압 사건.

2. 배경


동일방직은 1955년 정헌 서정익(1910~1973) 창업주가 귀속재산 동양방적공사[2]를 불하받아 세운 방직회사로, 주 생산품은 재봉실, 면직물이었다. 고용 노동자는 약 1,300여 명이었으며 이중 절대 다수인 1,200명 이상이 여성 노동자였다. 노조는 있었으며 동양방적공사 시절 1946년 결성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핵심 조직이었으나, 1948년 전평 해체 후 이렇다 할 활동이 없다가 1961년 5.16쿠데타 후 회사 측의 지시를 받는 어용 노조였고 그나마도 남자 기술직이 조합 간부직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1966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파견돼 위장취업한 조화순 목사와 6개월간의 소그룹 활동을 통해 권리의식을 자각해 여성 집행부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1972년 한국 최초로 주길자 씨를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하여 집행부를 새로 구성했다.
이에 사측은 폭언, 협박, 부당해고, 사표 강요, 부서이동 등의 불이익을 주며 탄압을 가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75년에는 이영숙 노동자를 절대 다수의 지지로 선출했다. 그러나 사측은 1976년 2월 대의원 선거에서 탄압을 했고, 4월 정기 대의원대회도 사측의 회유 공작으로 무산됐다. 이에 노조측은 동월 23일 대의원대회를 열었으나 비슷한 이유로 무기 휴회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측 지지자 고두영 등 남성 조합원들은 대의원을 매수하고 지부장을 폭행하자 노조 측은 섬유노조 본조에 징계를 요구했고, 이에 본조는 이들을 징계처분시켰다. 그러자 고두영은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에 공탁금 30만 원을 걸고 '징계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자 7월 13일에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고, 16일에 조병규 경기도지사는 소집권자를 고두영으로 확정했다. 그는 7월 23일을 대의원대회 날짜로 잡자 7월 22일에는 본조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보고대회를 열고자 했다. 이에 사측은 보고대회장인 식당 불을 끄고 문을 걸어잠궜으며, 지부장을 조합원과 만나지 못하게 했다. 조합원들이 보고대회를 요구하며 몰려들자 사측은 경비와 사원들을 동원해 폭력으로 제지시켰고, 기숙사 문도 못질했다. 더 나아가 경찰이 지부장을 연행했다. 이 상태로 어용 조합원들끼리 모여서 고두영을 지부장으로 선출해 어용노조로 회귀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여성 노동자들은 기숙사 문을 부수고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등 사측의 제지를 뚫고 노조 사무실로 몰려가 지부장 석방과 어용노조 대회 무효 등을 촉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경찰이 지부장을 풀어주면서 노동자들이 집으로 돌아가자 다시 지부장과 이총각 총무를 연행했고,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24일 밤 10시까지 지부장과 총무를 풀어주지 않으면 파업에 돌입한다고 결의했지만 경찰은 이들을 풀어주지 않았고, 사측은 단전/단수를 벌이고 화장실 문까지 봉쇄했으며 가족들이 음료수를 들여보내도 경비원들은 병째로 깨부쉈다.
25일 아침 들어서 회사 주변 교통은 두절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합원들은 더위로 인해 탈진 상태에 접어들었다. 저녁 6시 반에 기동경찰이 호송버스를 배치하고 몽둥이를 든 채 기숙사를 포위했다. 경찰측이 5분간 말미를 두고 자진 해산하라고 강요했으나, 여성 노동자들은 작업복을 벗고 노총가를 부르며 나체시위를 강행했지만, 경찰은 반나체 상태의 여성 노동자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연행했다. 당시 70여 명이 연행당하고 50명이 졸도했으며, 70명이 부상당해 이 중 14명이 병원으로 실려갔다. 심지어 한 여성노동자는 이 사태의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이후 7월 29일 섬유노조 대의원대회에선 김영태가 방순조 위원장이 동일방직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고 책임을 물으면서 위원장이 되었고, 김영태는 지부측의 기대를 무시하고 관과의 관계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때에도 고두영 집행부와 사측의 탄압이 지속되어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본조에 몰려가 호소를 했다. 이에 따라 11월 3일 본조에서 이풍우 기획실장이 수습대책위원장으로 내려와 노조로부터 권한을 양수했지만, 이들은 노동자들의 뜻과는 달리 회사와 공모해 반장 이상의 사원을 노조에 가입시키도록 단체협약을 갱신시키자 경기도는 12월 25일 단체협약 승인을 받아들였다. 이 공문을 받아든 여성 조합원들은 즉각 반발해 본조의 비리를 사회에 고발토록 결심해 "섬유노조는 근로자의 아픔을 대변하라"고 호소문을 써서 각계에 배부했고, '동일방직사건 수습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재야단체로 하여금 '사건 해부식'을 1977년 2월 6일에 열기로 했다.
그해 2월 4일 밤에 노동청으로부터 협의 주선 및 모든 요구조건 수락 등을 받아내 해부식을 취소하는 한편, 사원의 노조 가입 문제를 배제하고 조합이 자율적으로 대의원대회를 열도록 하는 등 6개 항에 합의했다. 이후 노조 탄압에 앞장섰던 생산부장과 노무주임은 인사조치되고 조합은 경위보고대회를 열었다. 이후 본조에서 이광환 조사통계국장이 수습대책위원회로 새로 내려와 남녀 공평하게 수습위원 13명을 선출했고, 2월 28일부로 대의원대회를 열기로 합의했으나 새벽 5시 40분경 남성 조합원 175명이 지부 사무실을 점거하고 투표함과 투표소를 파괴했다. 이에 조합원들이 농성할 기미를 보이자 서민석 부사장이 남자들을 설득하면서 해산했다. 이후 남성 조합원들은 집행부 의석을 많이 내놓으라며 시비를 걸었으나 여성 조합원들의 거센 반발로 공작이 무력화되고, 4월 4일 대의원대회에서 이총각 노동자를 선출한 후, 21일에는 유니온샵 등을 담은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6월 15일에 조직분규로 쫓겨난 674명을 복귀시켰다.
위와 같은 사건을 전후해 정부는 언론을 통해 우선 '여성 노조원=빨갱이' 라고 분위기를 몰고 갔고,[3] 김영태 섬유노조 위원장은 이미 1978년 1월 22일 본조 대의원대회에서 규약을 개정해 사고지부에는 한국노총이 보낸 수습위원들이 집행부를 맡고, 외부 세력 침투를 봉쇄코자 '근로환경 개선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산하에 조직행동대를 편성토록 했다.

3. 사건 전개


[image]
여성 노동자들이 똥물을 뒤집어쓴 사진. 이 사진은 전문 언론기자가 아니라 일반 사진사인 이기복 씨가 촬영한 것이다. 이기복 씨는 동일방직 공장 근처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며 직원들의 사진을 찍어 주던 사람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이기복 씨는 직원들의 부탁으로 그 광경을 촬영했고 사진 필름을 몰래 숨겨두었다. 회사 등에서 사진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이미 가져갔다며 이를 거부했고 이후에 여성 노동자들에게 사진을 무사히 돌려 줄 수 있었다.
동일방직노조는 1978년 정기총회를 2월 중에 개최한다고 본조에 통고했고, 선거일을 2월 21일로 공고했다. 이에 사측은 남성 조합원들을 매수해서 대회를 무산시키려 했다. 이에 불구하고 2월 21일 대의원선거를 강행하자, 박성기 등 남성 노동자 대여섯명이 방화수통에 똥물을 가지고 와서 여성 노동자들의 입과 옷, 신체 등에 퍼부어 폭언과 폭행을 했고, 투표함 40여개를 파괴했다. 이때 현장에 있던 경찰들은 울부짖으며 도와달라는 노동자들을 방관하며 오히려 욕설을 퍼부었다.[4] 대회 무산으로 노동자들은 농성을 시작하자 5백여 명이 모였다.
섬유노조 측은 이를 꼬투리삼아 2월 23일 제60차 집행위원회에서 동일방직노조를 사고지부로 규정해 이총각 집행부를 해산시켰고, 3월 6일 중앙위원회에서 조합원 자격을 뺏고 제명시켰다. 이에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정부-회사-섬노 3자 커넥션에 의한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자 투쟁을 전개했다.
3월 10일 노동자 80여 명이 TV 생중계 중인 노동절 기념식에 숨어들어가 정동호 한국노총 위원장의 연설 때 일어서 ‘아무리 가난하지만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는 똥은 먹고 살 수 없다’라고 말하며 플래카드를 펼치고 전단을 살포하여 격렬히 항의하지만, 이들은 강제 퇴장당하고 31명이 연행됐다. 이후 노동자들과 신/구교 종교인들이 동일방직노조 문제 해결 및 산업선교회 탄압 중지 등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전개했고, 동월 20일에는 원풍모방 등 노동자 30여 명과 함께 CBS 기독교방송에 들어가 "광장에 크낙새가 죽은 건 크게 보도하면서 우리가 당한 건 왜 알리지 않느냐"며[5] 노동문제 보도 외면에 항의하며 생방송을 중단시키고 방송국장 면담을 요구했다. 3월 21일에는 각계 재야인사들이 '동일방직사건 긴급대책협의회'를 구성해 정부 고위층과 협상을 벌여 2월 21일 이전 상태로 원상복구시키도록 약속을 받아냈다.
이에 고무된 노동자 111명은 13일 3월 23일에 단식농성을 풀었으나, 3월 26일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때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2명이 남영나이론, 원풍모방 등 노동자 4명과 함께 단상에 올라가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순 없다!",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다가 구속됐다. 이에 사측은 전 노동자들에게 회사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각서를 내게 했고, 4월 1일에는 노동위원회 승인을 받아 노동자 126명을 해고했다. 뒤이어 섬유노조는 해고자 명단을 전국 각 사업장에 돌려 재취업을 막게 했다.
뒤이어 사측은 4월 26일 대의원선거를 실시해 어용 지부장을 선출하려 했고, 이에 이총각 지부장과 김인숙 총무부장 등 해고 노동자들이 단식농성을 하려다 폭행죄로 구속되었다. 이윽고 다음날 사측이 신임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대의원선거를 강행해 박복례를 지부장으로 선출하자, 해고 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추송례를 지부장 직무대리로 뽑았다. 같은 시기 김영태 섬노위원장이 부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입후보하자 해고 노동자들은 5월 15일 밤차로 부산까지 내려가 김영태의 만행을 폭로하는 유인물 400부를 배포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7명이 구속됐다.
위와 같은 사태 해결과 산선에 대한 비방을 불식시키기 위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지원과 연대운동이 지속됐고, 해고 노동자들은 임시노조를 구성해 기도회나 집회마다 적극 참여해 동일방직 문제에 대한 진상을 폭로했다. 6월 4일에는 김명자와 김영숙이 성남 주민교회에서 노동자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하다 연행됐고, 9월 18일에는 4.26 회사 기습사건 당시 구속 노동자 공판에서 해고 노동자들이 사측 증인들 및 경찰과 충돌해 14명이 연행됐다. 심지어 9월 22일 서울 기독교회관 기도회에서도 해고 노동자들이 농성을 하다 경찰이 들이닥쳐 참석자들을 무차별 폭행해 해산시키자, 이들 중 35~40명이 실신하고 약 40명이 구류 처분을 받았다.
뒤이어 11월 6일 부산에서 동일방직 사태에 대해 강연했던 조화순 목사가 다음날 연행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고, 12월 30일 중앙노동위원회가 부당노동행위구제신청을 기각하자 회사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서울고등법원에 '부당노동행위 및 부당해고에 관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뒤이어 1979년 2월 25일 '똥물사건 1주년 기념식'을 열려다 경찰에 의해 무산됐고, 김영태 노총위원장은 8월 14일 MBC 보도특집에서 해당 사건을 언급하며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난했다. 그의 발언을 전후해 기업가들 사이에선 "도산(都産)이 들어오면 도산(倒産)한다"라는 풍문이 퍼지기도 했다.
다만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한 후 반전의 계기가 보이는 듯 했으나, 1980년 5.17 내란으로 농성이 중단되고 9월 30일 서울고법 제3특별부가 해고예고예외인정 재심신청기각결정 취소의 소를 기각해 사건이 종결됐다.

4. 사건 이후


해고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 때문에 온갖 직장에서 받아주질 않았고, 동일방직 출신임을 숨겨도 무자비하게 해고됐다. 게다가 경찰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분류된 탓에 일일이 감시를 받았으며 시집을 가도 시댁으로부터 학대를 받는 등 온갖 박대가 이어졌다. 이후 해고 노동자들은 노동단체, 생활협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등지에 몸담으며 각자의 길을 걷다가 2000년 김대중 정부가 민주화운동 보상신청을 받으면서 재집결했으며,[6] 2001년에는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같은 해 최종길 교수의 막내동생 최종선이 중앙정보부 재직 시절 동일방직 노조탄압이 중앙정보부와 연계돼 있다고 진술했다. 뒤이어 해고 노동자들은 복직투쟁을 전개했지만 사측은 그때의 해고가 정당했다 하여 복직시켜주지 않고 있다.
2010년에 진실화해위가 ‘청계피복노조 등에 대한 인권침해 사건 결정문’을 발표하면서 동일방직 등의 블랙리스트 문제가 공식적으로 확인됐으나, 2014년에 대법원은 국가폭력에 대한 정신적 위자료 청구에 대해 '국가와 화해가 성립됐다'는 이유로 패소 판결을 내렸다. 다만 2017년 문재인 정부 수립 후 정신적 손해배상에 대한 국가청구 금지가 위헌으로 판정되어 2018년 12월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에서 국가배상 판결을 받았다.

5. 참고/외부 자료


  •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저. 돌베개. 1985.
  • 독립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2006)>
  •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p305~306, 329~330.
[1] 당시는 경기도 인천시 동구 만석동[2] 일제 시기에는 도요방적(현 토요보) 인천공장이었다.[3] 예나 지금이나 노동탄압, 정적탄압에 용공이나 빨갱이가 주로 쓰인다.[4] <한국 현대사 강의> 김인걸 외 공저.[5] 1977년 서울 광릉 숲속에서 천연기념물 크낙새 한 마리가 담비에게 잡아먹혀 죽은 사건을 가리키는 말로, 1975년 동아-조선일보 해직사태 이후 유신정권에 타협한 채 상업성에 찌든 언론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6] 다만 재집결 이전에 3명이 사망했고, 2명이 정신이상과 공황장애로 입원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