렐(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1. 장문 배경
2. 두 번째 무덤


1. 장문 배경


녹서스를 여행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위험한 범죄자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거대하면서 무딘 창으로 무장하고, 괴이한 괴수를 타고 다니는 그 존재는 제국 전체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심지어 트리파르 군단의 노련한 전사들까지 겁에 질렸다. 그 범죄자를 쫓으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극악무도하고 무분별한 파괴를 일삼는 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열여섯 살짜리 소녀였다.
더 자세한 설명은 허락되지 않았다.
렐은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때문에 그 아이에게 고통은 숙명적이었다. 일개 녹서스 병사의 딸이자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난 렐은 하급 귀족 자제들에게 주어지는 풍요나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렐의 부모는 딸이 복잡한 녹서스의 정세 속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탁월함은 희생으로 쌓아 올리는 법." 렐의 모친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렐은 점점 불행해졌고, 결국 수 세기 동안 누구도 볼 수 없었던 특별한 마력을 얻게 된다. 바로 금속을 조종하는 능력이었다. 렐의 부모는 그 능력을 활용해 딸을 정계 또는 군에서 출세시키고자, 여러 위대한 마법사들 밑으로 보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그 마력에 주목했던 한 사람이 찾아왔다. 낯빛이 창백한 그 여자는 렐을 예부터 녹서스인들이 가장 증오해왔던 적을 무찌를 무기로 보고, 양친에게 사악한 제안을 했다. 곧 렐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의회의 감시가 닿지 않는 특수한 학교에 들어가 가장 주목받는 학생이 되었다. 렐의 부모는 학교로 면회하러 오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딸 앞에 놓인 밝은 미래에 그 어느 때보다 기뻐했다.
잠깐이지만 렐은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렐이 처음으로 다른 학생과 전투를 벌인 것인 여덟 살 되던 해였다. 전투를 마친 뒤에는 마력을 증폭시키는 마법의 인장을 팔에 붙였다. 훈련의 일환이라고는 했지만, 렐은 자신이 상대했던 소년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 이후로 맞붙은 상대들도 마찬가지였다.
렐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마법을 활용한 전투 능력도 점점 향상되었다. 온몸은 인장으로 뒤덮였고, 덕분에 마력은 극도로 증폭되었다. 땅속 깊은 곳에서 광석을 뽑아 올리거나 철벽을 뒤틀어 무기를 만들고, 상대의 갑옷을 가열해 으스러트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교수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렐을 제국 역사상 최강의 전사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결국 열여섯 번째 생일, 유난히 처절했던 결투를 마치고 이성을 잃은 렐은 교수들과 경비병들을 죽인 다음, 학교 내 금지 구역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곳의 비밀이 드러났다. 그동안 결투에서 제압했던 모든 상대가 기억과 감정이 없는 꼭두각시 상태인 무효체가 되어 갇혀 있었다. 렐의 마력을 증폭했던 인장의 힘은 그들의 몸에서 강제로 추출되었던 것이었다. 다시 돌려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던 교장은 사실 렐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말했다. "전부 너를 위해서였다. 탁월함은 희생으로 쌓아 올리는 법이니까."
렐은 분노했다.
학교 내 소수의 생존자는 눈앞의 광경에 경악했다. 땅이 갈라지면서 날카로운 소용돌이처럼 변했고, 건물이 해체되어 렐의 몸 주위로 검은 갑옷을 형성했다. 노련한 병사들이 그 앞을 가로막았지만, 태산보다 무거운 창으로 무장한 소녀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강철로 만든 말을 타고 정문을 돌파한 렐은 최대한 많은 학우들을 구출했다. 검은 장미단은 서둘러 남은 무효체들을 수습하고,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의 흔적을 없앴다.
그러나 뒤늦은 조치였다. 생존했던 교수들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죽어 나가기 시작했고, 무효체도 더는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렐은 녹서스 제국의 적이 되었지만, 수배 전단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약자를 보호하면서, 수년간의 고통과 학대를 눈감았던 녹서스 제국에는 분노와 불신으로 가득 찬 무자비한 괴물이 되었다. 제국이 직접 저지른 일은 아니었으나, 알고도 방관했기 때문이었다.
강철마를 타고 달리는 렐의 목적은 간단하다. 바로 녹서스 제국의 파멸과 검은 장미단 학교에서 생존한 아이들을 구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렐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다.

2. 두 번째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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렐은 무효체 생각을 자주 했다.
물론 그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긴 여정에 불쑥불쑥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문과 소문을 쫓아 금속 말을 타고 이동할 때는 그 불행한 기억에 잠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몇 시간이고 이어지는 침묵은 늘 살인으로 끝나곤 했다.
지금 렐은 국경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무효체 아이의 속삭임을 따라 녹서스 영토 변두리에 와 있었다.
"무효체." 렐이 얼굴을 구겼다. 그 형태만으로도 아픈 단어였다. 렐은 가만히 욕을 내뱉고 몸을 긴장시키며 그 무게를 떨쳐 냈다. 그러자 고통은 화로 변하고, 화는 곧 분노로 변했다.
녹서스는 무효체와 렐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녹서스인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며 현실을 외면했다. 영광스러운 녹서스로 돌아갈 수 있도록 무효체를 머나먼 곳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렐은 멍청하고 추잡한 인간들로 가득한 이 더러운 나라를 증오했다. 보람 다크윌의 침략 전쟁에 쓸 광석을 모조리 캐내느라 황량하게 채굴된 산들을 증오했다. 군량으로 쓸 작물을 남김없이 쓸어가는 바람에 휑하니 드러나 갈라지고 썩은 땅도 증오했다. 이제 이 땅에 자라는 것은 인적 없는 땅 구석구석까지 뒤덮은 듯한 녹갈색 이끼뿐이었다. 이곳에 사는 생물은 집채만 한 육식 도마뱀이 대부분이었다.
참으로 끔찍하고 단순한 곳이었다. 어찌나 능력주의에 집착하고 끝없는 확장을 갈구하는지 현재 자신들의 모습은 보지도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검은 장미단과 그들의 실험은 그보다 더한 골병의 한 증상일 뿐이었다. 렐은 전부 무너뜨릴 작정이었다. 무효체를 구한 후 혼자서라도 제국을 차근차근 파괴해 나갈 생각이었다. 학교를 해체한 것처럼.
그때 렐이 바위에 맞았다. 그리고 잠시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렐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학우가 많지 않았다. 유망한 학우 대부분은 '렐의 힘을 시험'하기 위한 '연습 시합'에서 렐을 상대해야 했다. 렐은 이후 상태가 어떻든 상대를 데려간 교수들이 정기를 흡수하는 돌 형태의 인장으로 마법을 추출한 뒤 상대가 영원히 무효체로 남아 있게 방치한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몇몇 아이는 기억이 났지만, 나머지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얼굴이 뒤죽박죽 떠오를 뿐이었다. 그 고통은 싸움 그 자체의 고통이자 자신에게 힘을 주었던 몇 시간의 끔찍한 인장 이식 과정에서 느꼈던 고통이기도 했다.
다른 학생들은 금세 렐을 두려워하다 못해 증오하게 되었다. 그렇게 렐은 늘 외톨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달랐다.
부드러운 눈과 친절한 목소리를 지닌 가브리엘은 녹서스가 아니라 어렴풋이 상상만 할 수 있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 출신이었다. 렐을 이해했던 그는 흙으로 작은 동물 모양을 만들 수 있는 이상한 마법을 부렸다. 렐은 가브리엘의 고향에 있다는 동물과 새가 춤추고 노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다. 가브리엘은 가족과 멀리 떨어져 슬픈 듯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우정을 나누며 마음을 달랬다. 학교에서 혹사당한 렐이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할 때면 가브리엘이 곧잘 위로해 주곤 했다.
두 사람이 전투에서 서로를 상대하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희망적인 듯한 렐과 달리 가브리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이나마 두 사람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렐은 병사 무리가 생사를 확인하려고 조심스레 다가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병사들에겐 안됐지만 렐은 살아 있었다.
렐은 말의 부서진 금속판과 함께 일어났다. 거대한 창이 렐의 손에 들어오자 땅에서 정제되지 않은 녹은 광석이 위로 떠오르며 무시무시한 무기로 흘러들었다. 말은 천여 개의 용광로에서 나오는 듯한 열기로 고동치며 다시 형태를 갖추어 갔다. 정제되지 않은 철이 뒤틀리며 들쭉날쭉한 말의 형상을 완성하자 렐이 그 위에 올라탔다.
상대는 다섯이었다. 그중에는 커다랗고 울퉁불퉁한 돌 더미 위에 걸터앉은 미노타우로스도 보였다. 그 돌로 렐을 맞춘 듯했다. 그리고 한 명이 더 있었다. 꼬질꼬질한 흰색 코트를 입은 마른 남자가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녹서스 황무지를 향해 어설피 달아나려고 하는 중이었다.
루카스 교수였다. 가브리엘을 학교로 데려온 자이자 멋대로 데려간 자이기도 했다.
렐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두와 싸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전 스승을 대할 때만큼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특별한 규칙을 따랐다. 예외를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렐의 말이 어둡고 아득한 악몽에서 탈출이라도 한 양 앞으로 내달렸다. 곧 렐의 창이 멸시를 받은 신의 망치처럼 앞을 가로막은 첫 번째 병사를 강타했다. 그것은 꿰뚫기 위한 것이 아닌 으스러뜨리기 위한 무기였다. 공포로 눈이 휘둥그레진 병사의 마음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자신의 투구였다.
말을 찌르려던 두 번째 병사의 창이 증기를 내뿜는 금속판 사이에 끼어 부러졌다. 렐은 병사를 저 멀리 쳐 냈다. 고철과 이상하게 뒤틀린 몸이 몇 미터 밖으로 날아갔다.
아까보다 훨씬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석궁병 둘은 황급히 달아나려고 했다. 렐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말이 형태를 바꾸어 렐의 몸 주위로 검고 두꺼운 갑옷을 형성했다. 렐이 두 병사 위로 떨어지자 그 한없는 분노에 발밑의 땅이 쩍 갈라졌다.
미노타우로스가 또다시 던진 거대한 화산석 덩어리 역시 천천히 다가가는 렐의 갑옷에 맞고 산산이 부서질 뿐이었다. 그야말로 무적인 어둠의 기사는 커다란 미노타우로스를 한 방에 쓰러뜨렸다.
렐은 예전 스승에게 시선을 돌렸다.
루카스는 옛 제자가 부드럽게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곧 뜨거운 광재 덩어리가 이끼 낀 흙에서 떨어져 나와 렐 주위를 휘감고 있는 잔해의 소용돌이 속으로 루카스를 밀어 넣었다. 금속과 열기, 증오의 폭풍이었다. 루카스는 겁에 질려 마지막으로 울먹였다. "가브리엘은 야영지에 있어!" 렐은 곧바로 루카스를 깔아뭉갰다. 몸이 어찌나 깊이 파묻혔는지 바실리스크가 와도 파내기 쉽지 않을 듯했다.
그러자 폭풍이 멈추고 광재가 흩어지며 다시 한번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루카스의 마지막 말대로 가브리엘은 천막 안에 숨겨져 있었다. 천막이 있는 곳은 땅이 무너지며 넓고 얕게 파여 생긴 협곡으로 풀이 무성했다. 야영지를 숨기기 완벽한 장소였다.
가브리엘은 렐이 발견하기 한참 전에 죽은 상태였다. 영양실조였다.
무효체가 되면 마법만 빼앗기는 게 아니었다. 영혼이 분리되어 무엇도 원하지 않고, 말도 거의 하지 않으며, 기억하지 못하고, 꿈꾸지 않는 멍한 눈의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약간의 음식은 먹여야 했지만 검은 장미단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은 맡은 일에 불만이 컸는지 그 임무를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렐은 가브리엘을 바라봤다. 렐이 고통스러워할 때 땅에서 작은 동물을 만들어 내며 웃음을 주었던 가브리엘은 질긴 천에 싸여 있었다. 지면에 창을 꽂은 렐은 검은 금속을 뽑아내 위로 들어 올린 후 시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브리엘 주위를 감쌌다. 친구의 죽음을 표시하는 단순한 무덤이었다. 투박하게 생긴 동물들이 강철 속에서 영원히 멈춘 채 장식된 파괴할 수 없는 무덤이기도 했다.
렐은 눈을 감고 말을 달리며 가브리엘의 옛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시신을 먹는 바실리스크와 낯빛이 창백한 여자의 목을 쥔 자신의 주먹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