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더들리
Sir Robert Dudley
(1532 또는 1533. 6월 24일 ~ 1588. 9월 4일)
노섬벌랜드 공작인 존 더들리의 차남으로 어린 시절부터 엘리자베스 1세와 잘 알고 지냈으며, 에드워드 6세 사후 아버지가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앉히려고 하자 이를 돕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런던탑에 투옥돼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아버지와 형은 처형되었지만 1554년에 석방되었으며, 프랑스에 주둔한 영국군에 입대하여 생캉탱에서 승리하였다. 영국으로 돌아와서 노퍽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엘리자베스 1세와 연락을 가졌다.
1558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거마 관리관에 임명되었다가 1559년에는 추밀원 고문와 기사 작위에 임명되었으며, 여왕의 총애를 믿고 거만하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이 때 부인인 에이미 롭사트(에이미 더들리)가 사고로 사망[1] 하자 엘리자베스 1세에게 지속적으로 구애하였기 때문에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 살해했다는 소문[2] 이 퍼지면서 귀족, 평민에게서 평판이 최악이었다.
또한 자신의 가문에서 이전에 할아버지, 아버지, 형 등 3대에 걸쳐 반역죄로 참수된 가계에 대한 편견도 있었기 때문에 함께 세간으로부터 지조없는 기회자로 이기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여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고 하며, 외형은 키는 180cm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미남이었기 때문에 집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젊을 때 당당한 체격을 가지면서 규칙적인 운동으로 그 체격을 유지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유창하면서 고전 학문에도 능했으며,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수많은 시인, 극작가, 다양한 유파들의 화가들을 후원했다고 한다.
유머 감각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친구는 누구보다도 여왕에 대한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여왕을 즐겁하게 하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이 유머 감각 덕분에 엘리자베스 1세에게 총애를 받았으며, 엘리자베스 1세의 가정교사이자 친구인 캣 애슐리가 탄원하라고 했을 때도 변호하였다.
1564년에는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스튜어드와 결혼할 것을 제안받으면서 레스터 백작 겸 덴비 남작에 봉해졌다. 이후에는 셰필드 경의 미망인과의 스캔들, 에식스 백작의 미망인과의 비밀 결혼을 단행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청교도를 자처하면서 국내 가톨릭 교도에 대한 탄압을 하면서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자 1584년에는 그를 비판하는 레스터의 공화국이라는 책까지 출판되었다. 1585년에는 네덜란드군에서 일어난 봉기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공작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이하자 총사령관에 임명되면서 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을 매우 거만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반감을 사서 1587년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1588년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 함대의 부사령관에 임명된다.
그러나 몸이 좋지 않아서 1588년 8월 말에 더비셔의 버스턴의 온천으로 떠났다가 도중에 리딩 근방의 라이코트에서 엘리자베스 1세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는 집에 묵어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스페인과 전쟁을 하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가 우드스톡 부근의 콘베리 파크에서 1588년 9월 4일, 새벽 4시에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을 들은 엘리자베스 1세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다고 하며, 그가 이 때 보낸 편지는 겉표지에 그의 마지막 편지라는 글을 적어넣으면서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1532 또는 1533. 6월 24일 ~ 1588. 9월 4일)
노섬벌랜드 공작인 존 더들리의 차남으로 어린 시절부터 엘리자베스 1세와 잘 알고 지냈으며, 에드워드 6세 사후 아버지가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앉히려고 하자 이를 돕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런던탑에 투옥돼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아버지와 형은 처형되었지만 1554년에 석방되었으며, 프랑스에 주둔한 영국군에 입대하여 생캉탱에서 승리하였다. 영국으로 돌아와서 노퍽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엘리자베스 1세와 연락을 가졌다.
1558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거마 관리관에 임명되었다가 1559년에는 추밀원 고문와 기사 작위에 임명되었으며, 여왕의 총애를 믿고 거만하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이 때 부인인 에이미 롭사트(에이미 더들리)가 사고로 사망[1] 하자 엘리자베스 1세에게 지속적으로 구애하였기 때문에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 살해했다는 소문[2] 이 퍼지면서 귀족, 평민에게서 평판이 최악이었다.
또한 자신의 가문에서 이전에 할아버지, 아버지, 형 등 3대에 걸쳐 반역죄로 참수된 가계에 대한 편견도 있었기 때문에 함께 세간으로부터 지조없는 기회자로 이기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여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고 하며, 외형은 키는 180cm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미남이었기 때문에 집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젊을 때 당당한 체격을 가지면서 규칙적인 운동으로 그 체격을 유지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유창하면서 고전 학문에도 능했으며,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수많은 시인, 극작가, 다양한 유파들의 화가들을 후원했다고 한다.
유머 감각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친구는 누구보다도 여왕에 대한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여왕을 즐겁하게 하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이 유머 감각 덕분에 엘리자베스 1세에게 총애를 받았으며, 엘리자베스 1세의 가정교사이자 친구인 캣 애슐리가 탄원하라고 했을 때도 변호하였다.
1564년에는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스튜어드와 결혼할 것을 제안받으면서 레스터 백작 겸 덴비 남작에 봉해졌다. 이후에는 셰필드 경의 미망인과의 스캔들, 에식스 백작의 미망인과의 비밀 결혼을 단행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청교도를 자처하면서 국내 가톨릭 교도에 대한 탄압을 하면서 상당한 권력을 휘두르자 1584년에는 그를 비판하는 레스터의 공화국이라는 책까지 출판되었다. 1585년에는 네덜란드군에서 일어난 봉기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공작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이하자 총사령관에 임명되면서 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을 매우 거만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반감을 사서 1587년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1588년에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 함대의 부사령관에 임명된다.
그러나 몸이 좋지 않아서 1588년 8월 말에 더비셔의 버스턴의 온천으로 떠났다가 도중에 리딩 근방의 라이코트에서 엘리자베스 1세와 함께 방문한 적이 있는 집에 묵어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스페인과 전쟁을 하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가 우드스톡 부근의 콘베리 파크에서 1588년 9월 4일, 새벽 4시에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을 들은 엘리자베스 1세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다고 하며, 그가 이 때 보낸 편지는 겉표지에 그의 마지막 편지라는 글을 적어넣으면서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1] 집안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목뼈가 부러졌다. 당시 나이 24살. 그녀는 아버지 스펜서 롭사트 준남작에게 남편이 나를 죽이려 한다는 편지를 이전에 썼기에 준남작은 딸이 살해당한 것으로 믿고 평생 더들리를 증오했다.[2] 당시 러시아나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에서도 큰 화제가 되어 여왕과 더들리가 서로 짜고 죽였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오죽하면 프랑스 대사가 이런 소문으로 비웃음을 듣는다고 하소연하는 편지까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