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그레이

 


[image]
'''이름'''
제인 그레이
(Jane Grey)
'''출생'''
1536년 또는 1537년
런던 또는 레스터셔 브래드게이트 파크
'''사망'''
1554년 2월 12일 (16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런던탑
'''재위'''
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의 여왕 (논란)
1553년 7월 10일 ~ 1553년 7월 19일
'''배우자'''
길포드 더들리 경 (1553년 결혼)
'''아버지'''
제1대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
'''어머니'''
프랜시스 브랜든
'''형제'''
캐서린, 메리
1. 개요
2. 생애
2.1. 불행했던 어린 시절
2.2. 억지로 왕위에 오르다
2.3. 죽음
3.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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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의 여왕으로 1553년에 7월 10일부터 7월 19일까지 9일 동안 재위했다.
헨리 7세의 차녀이자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메리 왕녀[1]의 외손녀로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의 5촌 조카다.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한 후 여왕으로 추대되어 잠깐 즉위했으나, 그 기간이 '''고작 9일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녀를 '''"9일 여왕"'''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녀를 여왕으로 분류해야 할지에 대해선 학자마다 의견이 갈린다고 한다.

2. 생애



2.1. 불행했던 어린 시절


도셋 후작 헨리 그레이와 헨리 8세의 조카인 레이디 프랜시스 브랜든 사이의 세 딸 중 장녀로 잉글랜드 레스터셔에서 태어났다. 모계 쪽으로 튜더 왕가의 혈통을 이었기에 야심만만한 그녀의 부모는 제인 그레이를 항상 왕과 혼인시키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권력에 눈 먼 부모가 워낙 극성맞아서 제인은 어릴 때부터 조금만 실수를 해도 부모에게 모진 매질을 당했다. 후에 제인이 정치적인 이유로 처형될 때에도 "드디어 비참한 인생이 끝나 평화를 누리게 되어 기쁘다"고 주변사람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그녀의 부모는 정말 문제가 많았다.
당시 사람들이 그녀의 외모를 아름답다고 표현해 놓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미녀였던 듯하다. 하지만 외향적이고 사교계에 나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와는 달리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이 역시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탐탁찮게 여겨 체벌하는 이유가 됐다고. 하지만 두뇌가 명석하고 학구적인 성격이라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자기 뜻대로 딸을 통제하려는 부모에게 눌려 살다가 후에 헨리 8세의 마지막 아내인 캐서린 파가 데리고 가 1년 정도 맡아 기른 적이 있었는데 그 시기가 제인 그레이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한다. 헨리 8세와 결혼하기 전에 늙은 재력가와 두 번 결혼하여 그 전처 소생 자식들을 살뜰히 돌본 바 있던 파는 제인 역시 친딸처럼 보살펴 주며 제인이 학문을 갈고 닦도록 따뜻하게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가 출산하고 얼마 뒤에 산욕열로 죽자 다시 부모에게 돌아와야 했고 '''그녀의 불행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물론 이 모두가 그녀의 부모의 탐욕에서 비롯된 일.

2.2. 억지로 왕위에 오르다


헨리 그레이와 프랜시스 브랜든은 처음에는 헨리 8세의 왕비로 제인을 내세웠지만 이미 헨리 8세는 왕비를 한참 갈아치웠던 데다가 노령이라 실패했다. 그러자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의 왕비로 들이려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와의 혼인도 주선자인 토마스 시모어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숙청당한데다가 에드워드 6세가 병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허사로 돌아간다.
그러자 마침 그녀를 에드워드 6세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와 제인의 부모는 손을 잡는다. 제인의 부모는 제인을 존 더들리의 아들 길포드 더들리와 강제로 결혼시키고 병석에 누운 에드워드 6세를 회유해 왕의 자식을 우선시하는 왕위계승법률을 무시하고 제인을 차기 왕위계승권자로 지정하게 한다.
원래 에드워드가 후손 없이 사망하게 되면 계승권 순서상 에드워드 6세의 첫째 누나인 메리 1세가 왕위를 잇게 되지만, 에드워드 6세와 달리 메리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다. 메리 다음으로 계승권을 가진 둘째 누나 엘리자베스 1세가 성공회 신자였으나 엘리자베스는 왕비 작위를 잃고 사형당한 죄수 앤 불린의 딸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존 더들리 입장에선 당시 나이가 어리기에 다루기 쉬울 제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건 당시 왕위 계승권 서열이 헨리 8세의 장녀 메리, 헨리 8세의 차녀 엘리자베스, 헨리 8세의 조카 프랜시스 브랜든, 헨리 8세의 조카손녀 제인의 순서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2]
길포드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으나 부모가 끝내 강제로 성사시켰다. 그러나 길포드가 제인을 성적으로 학대했기 때문에 결혼생활도 순탄치 못했다.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한 후에 제인은 자신이 여왕으로 추대되었다는 걸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졸도했을 정도로 경악했다. 어떻게든 즉위하지 않고자 "적법한 후계자는 메리 왕녀님이시다."라며 필사적으로 거부했지만 부모와 주변 인물들의 강압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프랜시스가 제인을 밀실에 가둬 놓고 즉위에 동의할 때까지 매질했다고 하니 달리 방법이 없었을 수밖에 없다. [3]
강제로 즉위하여 9일 동안 왕위에 있는 동안 제인은 부모인 도셋 후작 부부와 시아버지인 노섬벌랜드 공작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했지만 자신은 여왕의 남편이니 국서(King Consort)으로 봉해 달라는 길포드의 요청만은 끝내 거절했다.[4] 하지만 제인의 부모와 노섬벌랜드 공작이 제거하려고 했던 메리 1세는 런던을 탈출해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런던에 재입성하게 되었고 전세가 바뀐 그 순간에 그녀의 부모는 제인과 길포드를 버려두고 탈출했다. 비록 제인은 순순히 폐위에 동의했으나 어쨌든 적법한 후계자인 메리 1세의 즉위를 저지하고 즉위한 것은 사실이기에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2.3.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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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폴 들라로슈 作. 1833년. ##
민중의 지지를 받아 적법하게 즉위한 메리 1세는 일단 반역자 노섬벌랜드 공작을 처형했다. 그러나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여왕으로 즉위한 제인은 동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단 제인과 길포드를 런던탑에 가둬 두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메리 1세는 자신이 당시 스페인의 왕세자였던 펠리페 2세와 결혼해 후사를 낳아 왕권이 안정되면 제인과 길포드를 사면해 석방시킬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인의 아버지인 도셋 후작이 토마스 와이어트의 반란에 가담하여 또 메리 1세에게 저항하고 말았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도셋 후작도 체포되었으나 자연히 제인을 계속 살려 두면 제인을 빌미로 신교도들이 또 반역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여론이 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 1세는 제인을 살려 주고자 제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독실한 신교도인 제인은 개종을 끝내 거부했고, 메리 1세는 제인이 살아 있는 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결국 제인 그레이를 처형할 것을 명한다.[5]
남편 길포드도 같은 날에 참수되었다. 선고를 받고도 담담하게 마지막을 준비한 제인과 달리 신세를 한탄하던 길포드는 죽기 전에 위로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아내인 제인을 만나 보고자 사람을 보냈으나 제인이 완곡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이날 런던탑의 타워힐에서 길포드가 먼저 참수되었고 그 시신이 수레에 끌려 왔을 때 제인은 그것을 보고 "아, 길포드! 길포드!"라고 소리치며 울었다고 한다.
아름답고 총명했지만 전술한대로 무능한데 야심만 많은 부모 때문에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경우라 비공개로 처형당할 당시에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제인의 시녀들은 물론이고 메리 1세가 보낸 신하들조차도 그녀를 동정했다고 한다. 제인은 눈이 가려졌을 때 처형대를 못 찾아 당황한 것 말고는[6]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는데, 역시 처형을 앞두고 두려움을 참지 못했던 길포드와 사뭇 달랐던 그 모습 역시 안타까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사망 당시의 나이는 고작 16세.[7] 말 그대로 한번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버렸다.[8]
이때 '''제인의 어머니 프랜시스는 제인과 남편을 위한 구명 노력을 전혀 벌이지 않았다.''' 비록 남편이 반역죄를 지어 처형당하면서 재산을 국고에 몰수당해 한때 빈털털이 신세가 됐으나 곧 자신의 시종과 재혼해 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게다가 나중에는 메리 1세의 사면으로 궁정에 복귀까지 했다. 이후 프랜시스는 새 남편과의 사이에서 세 자녀들을 낳고[9] 잘 살다가 1559년에 사망했는데 죽을 때까지 제인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프랜시스는 제인의 동생들인 캐서린과 메리와도 사이가 매우 나빠 재혼하고 나서는 딸들이 어머니 프랜시스와 의절한다. 사망했을 때도 막내딸 메리에게는[10] 20파운드의 돈만 주고 대부분의 유산은 새 남편에게만 주었지만 어머니를 싫어하는 메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참고로 메리는 선천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났는데[11] 그 때문에 명색이 귀족가의 여식인데도 결혼하지 못하다 늦은 나이에 평민과 결혼했다. 이 결혼 역시 언니인 캐서린의 결혼처럼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결혼이라는 얘기가 많았으니 메리도 30대 초반에 언니들처럼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기에 더 논란이 되는 일은 없었다.

3. 이야깃거리


  •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대립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 비해 제인 그레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한국 같은 상당히 떨어져 있는 외국에서만 그렇고, 같은 유럽권 내에선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을 주제로 한 명화(바로 위의 그림)도 있는 걸 보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독실한 성공회 신자로 부모와 달리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극성맞고 비정한 부모만 아니었으면 그냥 평범한 귀족과 만나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었던 여인이다.
  • 여동생으로 캐서린 그레이(1540~1568), 메리 그레이(1545?~1578)가 있다. 캐서린과 메리도 큰언니 제인처럼 부모와의 관계가 매우 나빴고 아버지와 제인이 처형되고 어머니가 재혼한 이후로는 어머니와 의절했다.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 1세 초기에는 잠재적인 상속인으로 여겨진적도 있었으나[12], 오히려 그 때문에[13] 엘리자베스 1세에게 감시 받으며 살다가 허락받지 않은 결혼을 하고 아들들을 낳았다는 이유로 런던탑에 투옥됐다가 궁정에서 추방당하면서 계승권을 잃었다.[14]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후계자로는 (헨리 8세가 제정한 계승법에도 불구하고) 메리 여왕과 그 아들 제임스 1세가 떠오르게 된다.[15]
  • 트리니티 블러드의 등장인물인 제인 주디스 조슬린의 모티브라 여겨지는 인물이다. 처한 상황이나 성격은 정반대(...).[16]
  • 대한민국의 가수 레이디 제인이 여기서 이름을 따와서 지었다고 하는데 아니다. 레이디 제인 본인은 롤링스톤즈의 동명 곡에 따와서 지은 이름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롤링스톤즈의 레이디 제인은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나오는 등장 인물에서 따왔다고 한다.
  • 문피아 대체역사물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도 등장한다. 메리 1세 여왕이 제인을 죽이기를 원치 않는 것을 안 주인공이 헌책을 하여 제인을 살려줄 방도를 마련하면서 생존 플래그가 꽂혔다. 이후 제인은 여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조건으로 리치몬드 궁에 이감된 뒤, 형식상으로는 유폐지만 실질적으로는 경비병들에게 정중한 대우를 받고 성벽을 나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유로운 외출을 하며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가 주인공과 연애 플래그를 꽂아 결혼도 하고, 박탈당한 작위를 돌려받고 궁정에 복귀하고, 스코틀랜드 왕위에도 앉게 되는 등, 작중 대체역사 최대의 수혜자가 됐다.


[1] 오빠 헨리 8세의 장녀인 메리 1세와는 동명이인. 헨리 8세가 여동생과 사이가 매우 좋았기 때문에 동생의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메리라고 지었다.[2] 원래 메리와 엘리자베스 다음으로는 헨리 8세의 누나 마거릿 쪽으로 계승권이 넘어가야 하지만, 마거릿 튜더는 스코틀랜드의 왕후였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인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헨리 8세는 유언장에서 누나 마거릿과 그 자손들의 계승권을 부정하고 오직 여동생 메리(장녀 메리의 이름을 여기에서 따왔다.)와 그 자손들의 계승권만을 인정했다. 그러나 제인 그레이 추대 사건으로 메리(메리 1세 X)의 자손들은 풍비박산이 나서 결국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식 없이 죽자 왕위는 마거릿의 친손녀 메리(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의 장남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에게 넘어간다. 애초에 적자녀가 몇 안 되니 혹시나 해서 여동생의 계승권을 유언장에 써놓은 게 화를 불렀다.[3] 사실 계승권도 있긴 하지만, 제인 그레이의 왕위 계승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선대 왕인 에드워드 6세가 직접 지명한 거였다.''' 문제는 이를 제하면 원래의 계승권에서도 우위에 있던 메리 1세가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토대로 동정표를 얻어 여론의 지지까지 얻었다는 것.[4] 제인 그레이 전기 영화에서는 제인과 길포드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나오기도 했으나, 제인이 길포드에게 클래런스 공작 작위만 준 것으로 보아 제인과 길포드의 사이가 나빴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5] 여담이지만 메리 1세는 처형을 명하고도 어떻게든 제인을 살려 보고자 처형 당일에 특별히 산파들을 보내 제인의 임신 여부를 검사했다는 비화가 있다. 당시에는 사형을 선고받은 여죄수가 임신하면 무고한 아이를 죽일 수 없다는 이유로 형 집행을 연기해 주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면해 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과 사이가 나빴던 데다가 처형당하기 몇 달 전부터 남편과 따로 유폐되어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별거 상태였던 제인은 본인 주장대로 임신하지 않았고 결국 메리 1세도 더는 어쩔수가 없어 형은 예정대로 집행됐다.[6] 침착하게 처형대에 올랐으나 눈가리개를 하고 있어 처형대를 찾지 못해 "어디 있지?"라며 당황해 하다 울음을 터뜨렸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결국 사제가 제인의 손을 잡아 처형대로 안내해 주었다고 한다. 위의 들라로슈 작 창작화가 이 에피소드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7] 만 16세로 계산한다고 쳐도 겨우 '''고등학생''' 나잇대다(...). 미처 성년이 되기도 전에 처형대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말이 된다.[8] 제인 그레이는 신교를 버리고 구교를 택하라는 메리1세의 제안에 이 땅에서 생명을 지속하겠다고 영원한 생명을 버릴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자존심과 고집으로 죽은 게 아니라 신앙심 때문에 순교했다 보는 게 옳은 해석이다. 무엇보다 중세 유럽의 종교(기독교) 문제를 현대의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못하다. 중세~근세의 유럽에서 종교란 윤리를 비롯한 사회제도 전반을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체계의 근본이었고, 따라서 현대인이 생각하는 '국가' 나 '이념', '민족'등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충성을 바쳐 수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 즉, 제인 그레이는 '신앙이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당대의 윤리관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개종했으면 살 수 있는데 '''괜한 자존심과 고집을 부리다''' 죽었다'는 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마치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까짓거 일본이 요구하는 대로 전향했으면 살 수 있었는데 괜히 자존심과 고집을 부리다 죽었다'고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자존심을 버렸더라도 한번 왕이었던 자를 살려서 내보내지는 않았을 것이고, 살았더라도 나중에 그녀의 언니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았을 확률이 높으니, 그 꼴을 보고 무의미하게 연명하기보다는 순교로 영원히 남는 길을 택하는 게 낫다고 보았을 법하다.[9] 하지만 두 명은 사산하였고 한 명은 생후 7개월 만에 사망했으며 이후에는 더는 자식을 가지지 못했다.[10] 이때 둘째딸 캐서린은 폐결핵으로 28세에 이미 요절한 상태였다.[11] 곱사등이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가문의 수치로 여겨졌다고 한다.[12] 헨리 8세 말년에 제정한 계승법에 의하면 헨리 8세 직계 다음에는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1496~1533)의 후손에게 우선권이 있었는데(스코틀랜드로 시집 간 헨리 8세 누나 마거릿의 후손은 스코틀랜드와의 충돌 때문에 헨리 8세가 계승 순위에서 제외함),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그레이 자매는 메리 튜더의 장녀 프랜시스 브랜든의 자녀들이기 때문.[13] 물론 제인 그레이의 사건도 영향이 있있을 것이다.[14] 참고로 캐서린 그레이의 남편은 제1대 서머셋 공작인 에드워드 시무어(헨리 8세의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무어의 큰 오빠이자 에드워드 6세의 큰 외삼촌이었던 그 사람 맞다.)의 아들인 허트포트 백작 에드워드 시무어(1539~1621)이다.(물론 혼인 무효가 선언되기는 했지만) 그녀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중 장남인 에드워드 시무어는 나중에 왕으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집안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여 평생을 신중하게 처신했고, 그 대신 자손을 많이 남겨서 지금까지 그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 그 아들인 윌리엄 시무어의 대에 영국 내전 때에 끝까지 왕에게 충성한 공적으로 증조부 때 제인 그레이 사건으로 빼앗긴 서머셋 공작 작위를 돌려받아, 제2대 공작이 되었다. 다만 그들의 자손은 1750년 끊어지고 먼 친척(캐서린 그레이의 남편 허트포트 백작의 이복형(에드워드 시무어의 차남인 에드워드 경(1529~1593))의 후손)이 물려받아 현재의 공작가는 그레이 가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메리 그레이는 자녀가 없었다.[15] 사실 메리 튜더의 차녀 엘레노어 브랜든(1519~1547)의 외동딸 마거릿 클리포드(1540~1596)도 있었지만 여기도 여왕의 결혼 계획에 반대하다 추방당해서 배제되었다.[16] 제인 주디스 조슬린은 본인이 에린(아일랜드) 공작이며, 동시에 알비온의 해군 제독이었다. 제인 그레이와 달리 본인이 사람들을 잡고 휘두를지언정, 휘둘릴 만한 인물이 아니다. 무엇보다 작중 메리 1세가 모티브가 된 메리 스펜서를 몰락시키는 데 본인이 일조하였다는 게 큰 차이점. 처음에는 절친인 메리 스펜서를 왕으로 옹립하는 게 낫다 생각했으나, 메리가 조모인 브리짓 1세(제인에게는 백모)의 병세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음을 파악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