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자체
한자: 物自體
독일어: das Ding an sich
영어: thing in itself
독일 관념론, 특히 칸트가 주로 사용한 용어로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나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지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런 게 있는데, 그걸 이야기할 수도 있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직은 그것을 정의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기 때문에 인식의 바깥에 있으나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결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결심은 판단에서 기인하고, 그 판단은 이성과 감각으로 보편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주장한 영구평화론은 그 당시에는 '물자체'였던 '영속적인 평화적 상태'였고, 이에 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하도록 목적하고 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 상태에서 도달하지 못한 물자체와 현 상태의 당장에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을 가리켜 칸트는 간극이라고 했는데, 보통 철학에서 물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서의 간극을 언급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간극이 나오면 간극이 생기게 된 물자체와 그걸 불가능하게 되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이는 칸트 이후 근대적인 비평 이론을 이끌어내는 골자가 되는데, "왜 사람은 이만큼을 보고 있는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한가"를 이야기 하기 위해 물자체라는 개념과 간극이라는 개념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전제에 깔려 있다.
현대에 와서는 물자체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실체로, 현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만 지속적으로 현실의 외부로써 남아 있는 것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칸트 자신도 경험론과 합리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개념을 도입해서 사용했고, 그의 삼대 비판서[1] 는 비판의 교과서로 여기기에 충분하다.
한편 칸트의 인식론에서 물자체는, 어떻게 하더라도 우리가 완전한 본질을 알 수 없는 사물 자체를 일컫는 말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사물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틀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다. 따라서 인식틀을 거치기 이전의 본래 모습, 즉 물자체는 시공간 속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당연히 물리법칙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에서는 한 입자를 분석할때 입자를 물체라고 생각하는 행렬역학으로 계산하거나, 입자를 파동이라고 생각하는 파동역학으로 계산하는데 둘이 다른 전제에서 출발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정확히 입자의 특정 상태를 설명한다. 그렇다면 연구하는 입자는 물체인가, 파동인가? 여기서 칸트는 아마 입자가 물체의 틀로도, 파동의 틀로도 지각될 수 있는 '''물자체'''라고 말할 것이다. 입자는 물체로도, 파동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입자 자체의 본질은 어느 틀로도 모두 잡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입자의 상태와 그와 관련된 입자의 비실재성 역시 물자체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칸트는 현실이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주장을 거부했다.[2] 물론 현실 속의 사물들은 물자체이기 때문에 시공간 속에 있지 않고, 물리법칙의 지배도 받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은 한계가 있을수 밖에 없지만, 동시에 인간의 인식이 현실을 완벽하게 무시하진 않기 때문이다. 위의 예만 봐도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은 어떤 한계 내에서는 입자를 설명하는 데 있어 거의 동일한 결론에 이르며, 이는 역시 어떤 한계 내에서는 입자의 상태를 잘 서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근사치적인 접근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식을 우리의 인식틀이 자신에게 던져진 현실을 해석하는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이 현실을 나름 제대로 설명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칸트의 물자체는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며 과장하면 모두 인간의 해석에 불과하다고 보는 포스트모더니즘, 도가와 같은 상대주의와는 근본적인 태도를 달리한다.
독일어: das Ding an sich
영어: thing in itself
독일 관념론, 특히 칸트가 주로 사용한 용어로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나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지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런 게 있는데, 그걸 이야기할 수도 있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직은 그것을 정의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기 때문에 인식의 바깥에 있으나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결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결심은 판단에서 기인하고, 그 판단은 이성과 감각으로 보편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주장한 영구평화론은 그 당시에는 '물자체'였던 '영속적인 평화적 상태'였고, 이에 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하도록 목적하고 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 상태에서 도달하지 못한 물자체와 현 상태의 당장에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을 가리켜 칸트는 간극이라고 했는데, 보통 철학에서 물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서의 간극을 언급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간극이 나오면 간극이 생기게 된 물자체와 그걸 불가능하게 되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이는 칸트 이후 근대적인 비평 이론을 이끌어내는 골자가 되는데, "왜 사람은 이만큼을 보고 있는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한가"를 이야기 하기 위해 물자체라는 개념과 간극이라는 개념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전제에 깔려 있다.
현대에 와서는 물자체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실체로, 현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만 지속적으로 현실의 외부로써 남아 있는 것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칸트 자신도 경험론과 합리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개념을 도입해서 사용했고, 그의 삼대 비판서[1] 는 비판의 교과서로 여기기에 충분하다.
한편 칸트의 인식론에서 물자체는, 어떻게 하더라도 우리가 완전한 본질을 알 수 없는 사물 자체를 일컫는 말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사물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틀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다. 따라서 인식틀을 거치기 이전의 본래 모습, 즉 물자체는 시공간 속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당연히 물리법칙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에서는 한 입자를 분석할때 입자를 물체라고 생각하는 행렬역학으로 계산하거나, 입자를 파동이라고 생각하는 파동역학으로 계산하는데 둘이 다른 전제에서 출발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정확히 입자의 특정 상태를 설명한다. 그렇다면 연구하는 입자는 물체인가, 파동인가? 여기서 칸트는 아마 입자가 물체의 틀로도, 파동의 틀로도 지각될 수 있는 '''물자체'''라고 말할 것이다. 입자는 물체로도, 파동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입자 자체의 본질은 어느 틀로도 모두 잡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입자의 상태와 그와 관련된 입자의 비실재성 역시 물자체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칸트는 현실이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주장을 거부했다.[2] 물론 현실 속의 사물들은 물자체이기 때문에 시공간 속에 있지 않고, 물리법칙의 지배도 받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은 한계가 있을수 밖에 없지만, 동시에 인간의 인식이 현실을 완벽하게 무시하진 않기 때문이다. 위의 예만 봐도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은 어떤 한계 내에서는 입자를 설명하는 데 있어 거의 동일한 결론에 이르며, 이는 역시 어떤 한계 내에서는 입자의 상태를 잘 서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근사치적인 접근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식을 우리의 인식틀이 자신에게 던져진 현실을 해석하는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이 현실을 나름 제대로 설명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칸트의 물자체는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으며 과장하면 모두 인간의 해석에 불과하다고 보는 포스트모더니즘, 도가와 같은 상대주의와는 근본적인 태도를 달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