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무관심성
1. 개요
Aesthetic disinterestedness
이마누엘 칸트가 그의 저서 '판단력비판'에서 아름다움을 대할 때의 태도를 지칭하면서 사용한 미학 개념.
다른 말로는 무사심성이라고도 한다. 칸트는 미적 대상(혹은 숭고적 대상)을 느낄때 우리는 그 대상을 어떤 이해관계없이 보고 만족한다고 보았다. 칸트의 관점대로라면, 우리가 음식이나 섹시함이나 돈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건 진정한 미가 아니다. 반면 흘낏 아무런 관심없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꽃잎이나 유리조각을 '사심없이' 아름답다고 느꼈다면, 그건 미이다. 한마디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과정에는 다른 일체의 개입요소 없이 그냥 아름답다 고 느끼는게 전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변 상황 등과 관계없이 '저것은 아름답다' 고 느끼는 태도이며, 일체의 전제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꽃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것은 그것을 보면서 이윤을 얻거나, 도덕적으로 그것이 옳다고 느끼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순수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감상의 측면으로 확장해서도 볼수 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예를들어 한국인이 일본의 극우 미화 미디어물을 볼때, 비록 한국인으로서 그 메시지가 아니꼽다 하더라도 그 역사적, 정치적 의미와는 관계 없이 그 순수한 작품만의 아름다움, 완성도, 예술성으로 평가해야 한다.
2. 영향
근대 미학의 주류이고, 예술제도론, 예술맥락론, 예술정의 불가능론, 최근에는 철학의 영역까지 벗어나 진화심리학을 끌어들인 예술론 등등 온갖가지 예술 사상들이 난무하는 현대 미학계에서도 여전히 주류인 이론이다. 말하자면 모든 미 이론의 기초. 미학과는 물론 문학과든 성악과든 미술과든 예술 관련 전공자들은 대부분 이 개념을 배울 정도로 매우 유명한 개념이다.
이 무관심성은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 sake)을 주장하는 예술지상주의 예술가나 이론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금과옥조처럼 여겨진다. 예술가는 그냥 예술이 좋아서 하는거고, 예술애호가는 그냥 예술이 좋아서 감상하는 거라는 식의 예술지상론이 이 무관심성에 근거하고 있다. 다른 말로 이를 예술의 자율성(autonomy)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미적 판단은 정치나 경제등 다른 어떤 요소에 종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미적 무관심성을 (자신이 이해한) 불교의 개념과 연관지어, 맹목적 의지와 욕구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아름다움은 그 특유의 무관심성을 통해 인간 정신을 해방시켜준다는 '미적 무욕성'이라는 개념을 주장하기도 했다.[1]
3. 오해
사실 이점 때문에 과연 '순수한 아름다움'이 무엇이냐는 점에서 미적 무관심성은 비판받아왔다. 이 무관심성이란게 정말 있는건지는 후대의 미학자들이나 예술이론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렇게 따지면 오늘날 경매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는 예술품들은 전부 무관심성에 위배되는 것이 된다. 그냥 투기하기 위해 사는거지 아름다워서 사는게 아니게 되니까 말이다. 반대로 이렇게 따지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회참여예술 같은 것도 성립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소녀시대를 좋아하는건 엄밀히 말하면 무관심성에는 위배된다. 따지고 보면 소녀시대 멤버들의 성적 매력 등에 끌리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히 꽃잎이나 유리조각을 어떻게 이용해보겠다고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일단 탈락이다. 즉 식욕, 물욕, 성욕 등과 무관하게, 그저 초연히 무언가를 느낄때의 태도이자 상태를 말한다.
얼핏 보면 모에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앞서 말한 이유로 둘은 다르다. 실제로 둘은 '어떤 대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받든다'는 점에서 개념적으로 꽤나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면에서 미적 무관심성을 쉽게 이해하고 싶다면, 이를 모에라는 단어로 바꾸어 보는 것도 대강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모에가 주로 귀여운 것 혹은 섹시한 것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무관심성과는 다르다. 칸트가 무관심성의 예시로 든건 폭풍우나 피라미드, 빛나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
모에는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미'라는 개념과, 감정이 칸트의 미적 무관심성에서의 미와 다른 경우가 아주 많다. 칸트 뿐만이 아니라 근대 미학 성립 전의 '미학'이라고 하는 것들을 잘 읽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미'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에는 '노동하기 적합한 노예의 몸'도 포함된다(...).
4. 비판
예술제도론, 예술맥락론, 예술정의 불가능론 등은 '순수한 아름다움'이란 개념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예술은 제도에 의해 조성되었거나, 특정 맥락에 의지하고 있거나, 정의 불가능한 무작위 현상이라고 해석한다. 무관심성 개념을 근거없이 교조적이라고 까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우리가 미를 추구하는 행위도 결국 유전자와 진화에 의해 결정된 본능으로 본다. 하지만 이런 이론들은 여전히 왜 우리가 어떤 특정 대상이나 현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으로 여전히 미적 무관심성 개념은 계속 지지받고 있다.
[1] 정작 불교에서는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대상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한 감동이나 기쁨 역시 무명으로 미혹한 마음과 과거에 쌓은 행(잠재적 습관)이 빚어내는 현상으로 본다. 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지닌 사람이라면, 그 대상 역시 인연 화합으로 생겨난 것으로 올바르게 알고 보므로 이에 이끌리거나 취착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기쁨과 유사한 것으로 환희심(삐띠, pīti)을 들고 있으나, 환희심은 집착의 대상을 여의었을 때 일어나는, 깨달음에 유익한 마음의 현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