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달
1. 함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달
박영달은 1887년 10월 30일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6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와 쌍계동 교회에서 만나 운동 상황을 전해듣고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대구계성학교(大邱啓聖學校) 학생인 박상동이 3월 8일의 대구학생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대구의 소식을 상세히 전하자, 그는 김원휘·박영신·배중엽(裵重曄)·배달근(裵達根) 등과 여러 차례 만나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3월 12일, 그는 박영신의 집에서 박영화·배중엽·배달근과 함께 2백여개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이날 정오경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를 시위행진한 후,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치고 자진하여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때 급보를 받은 의성경찰서에서는 이날 오후 4시, 순사부장과 경찰이 이곳 주재소로 응원 출동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고. 결국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의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2년 11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박영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홍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영달
박영달은 1916년 12월 13일 충청남도 홍성군 고도면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홍성군 고도면에 있는 신안서당(新安書堂)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인 1937년 7월 중순 무렵 송길한(宋吉漢)과 여러 차례 공산주의 등 신사상에 대해 토론하였다. 같은 홍성군 고도면 출신의 송길한은 1933년 일본으로 유학해 활동하다가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기 위해 1937년 6월 18일 귀향했으나, 그해 7월에 중일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중국행을 포기하고 홍성에서 동지를 규합해 독립운동을 모색 중이었다.
송길한과 동지가 된 박영달은 1937년 8월 하순부터 서당의 학생들에게 조선민족 정신의 표징(表徵)인 우리말과 글을 폐지하는 것은 결국 민족정신을 상실하는 것이라면서 한글을 가르치고 창가(唱歌) 등을 통해 이를 보급하였다. 또한 「걸식(乞食)과 쥐새끼(小鼠)」라는 제목의 옛날이야기 등을 통해, 자산가(資産家)나 지주의 횡포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불공평을 설명하고, 무산자(無産者) 해방을 위한 단결이 필요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후 같은 마을 한영석(韓永錫)의 집이나 송길한의 집에서 여러 차례 이들과 회합하여 당면한 정세 등에 대해 토의하였다. 한영석이 자신도 중일전쟁에 출정할 것이고 국방헌금(國防獻金)도 필요할 것이라 하자, 송길한이 조선민족에게 국가가 있다면 전쟁에 나갈 필요도 국방헌금을 낼 필요도 없을 것이라며 민족해방을 역설하였다. 또 송길한이 「사(死)의 찬미(讚美)」의 노래가사를 인용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설명하는 등을 통해 한영석도 점차 공감하게 되어, 이들은 함께 동지적 관계를 맺고 함께 단결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하였다.
같은 해 9월 19일 같은 마을 지창순(池昌順)의 집에서 송길한은 장차 만주(滿洲)로 가서 동지를 규합하고, 박영달과 한영석은 홍성에서 무산아동(無産兒童)의 교육을 통해 아동과 농민층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1938년 6월경 송길한 등 6명과 함께 홍성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7월 16일 5명은 기소유예 또는 기소중지로 석방되고 박영달과 송길한만 예심에 회부되었다.
1년여가 지난 1939년 7월 27일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청 검사분국에서 예심이 종결되었다. 같은 해 9월 16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1940년 칙령 제45호에 의거하여 징역 11월 7일로 변경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박영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