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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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화민국 국민정부(이하 '중국')와 일본 제국(이하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 1931년 만주사변 이래로 시작된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의 절정이며 일본 제국의 폭주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1939년 이전까진 나치 독일의 확장, 스페인 내전 등과 함께 고조되는 세계 긴장의 한 사례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주요 전역 중 하나로 격상되었다. 영어로는 Sino-Japanese War.[11] 중국에서는 중국항일전쟁(中國抗日戰爭) 혹은 간단히 항일전쟁, 8년항전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일중전쟁(日中戦争 にっちゅうせんそう)[12] 이나 지나사변(支那事変 しなじへん)[13] 이라고 한다.
소련이 독일을 완전히 밀어낸 독소전쟁과는 달리 중국은 일본을 밀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종전이 되었기에, 무능한 중국군과 폭주하는 일본군의 일방적인 전쟁으로 인식되었으나, 현대에는 빈약한 공업력에 낙후된 농촌사회를 이끌고 무기대여법의 이득조차 거의 보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이 8년이나 수백만에 달하는 일본군 육군을 대륙에 묶어두고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 전사자의 30%를 담당했다는 점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추세이다.
2. 전쟁의 시작과 성격
일본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침공해왔는데 이는 루거우차오 사건이 확대되어 교전이 발생했다는 일본측 시각에 의한 것으로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중사변' 또는 '지나사변'으로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14] 이렇게 명칭을 낮춘 이유는 꽤 여러가지 추론이 있다. 당시 1차대전 이후로 전쟁이 국제법상 금지되었기에 "나 전쟁 안했소" 하여 국제적 추궁과 국내의 국민의 신뢰추락을 피하고 싶었던 것, 중화민국을 인정치 않았던 일본제국의 정책 등이 있다. 결국엔 제국주의 침공을 면피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행각은 계속 유지되어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했다.
여기서 일본이 나중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일단 선전포고 문제는 의외로 나라 간의 이해타산이 엮여들어간 문제였다. 전쟁 내내 중국은 선전포고를 안했다는 것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초기에는 일본이 하더라도 선전포고로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고 미국에 타진하기도 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게 미국의 중립법이었는데, 국내 기업이 전쟁을 벌이는 쌍방과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률이었다. 따라서 선전포고가 공식으로 받아들여져 공식적인 전쟁이 되면 중국은 미국에게 물자원조를 전혀 받을 수 없고, 오히려 몰래하려다가 일본에게 나포당할 수도 있으며 미국이 이 나포문제와 한창 노리고 있던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통한 이득에 손해를 볼 것 같다는 이유 등으로 피해가 우려되어 껄끄러워 했고 일본도 당시 경제의 태반을 미국에 의지하던 상황에서 미국과의 경제교류가 전쟁기간 동안 정지되던 상황이었다. 전후는 어쨌든 전쟁 시작 시에는 공식적인 전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일본의 침공군 중 고참급 인사들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던 부류가 꽤 많아 비선전포고파와 아웅다웅했는데, 경제문제 따위가 뭔 상관이냐며 경시하는 시각과 함께 선전포고를 하는 편이 전후 패전국에게서 영토와 물자를 더 뜯어내고 점령시의 절차가 간단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비선전포고파의 경우는 손해없이 이득을 끌어내자, 즉 어떤 방식으로 중국을 침탈하는가에 대한 방법론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입장을 100% 인정해주더라도 엄연하게 선전포고를 하지도 않고 기습적으로 개전한 것은 국제법상으로 변명할 수 없는 전범행이다. 특히 일본에서 중국이 선전포고에 관련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랍시고 대는데, '''가해자들이 흔히 하는 변명'''중 하나다. 피해자가 이론을 제기하던 안하건 간에 범죄로 엄연하게 성립되는 내용을 가지고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니 전혀 의미가 없다.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앞서 언급했듯이 선전포고 안하고 기습을 해서 개전하는 것을 당연시여기는 행적들을 보인데다가 그렇게까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다면 나중에라도 하면 되는데 끝까지 안했으니... 당장 선전포고가 정당하게 전쟁하니 타국은 교전국의 뒤통수를 치지마시오에 가깝기 때문에 선전포고를 안하면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아서 똑같이 교전국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기만 해도 일본의 행동은 전형적인 전범의 행위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3. 전개
4. 전후 처리
8월 27일 난징에 중국군 병사 1백명과 탕언보 장군이 탄 비행기가 착륙했다. 이어 중국군 부대들이 속속 도착했다. 9월 8일 중화민국 국군 총참모장 허잉친이 난징에 도착, 난징의 중앙군관학교 강당에서 오카무라 야스지의 항복을 받아냈다. 중국, 타이완, 북베트남에 주둔한 전 일본군과 일본인은 이제 국민당에게 접수되었는데 그 수가 지나파견군 105만, 해군 7만, 기타 관동군을 비롯한 중국에 주둔한 총병력 128만을 합쳐 311만에 달했다. 미군의 협조를 얻어 이들을 일본에 송환하기 시작했지만 1946년 12월 일본 정부의 송환 완료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 중 돌아온 사람은 100만에 지나지 않았고 향후 1980년대까지 송환 문제가 거론되었으며 귀환한 일본인들은 본토에서 차별을 당했다. 이들을 히키아게샤라 한다."8년간의 항전은 양국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 양국 형제들은 머리를 싸받고 비통하게 울어야한다. 오늘 우리는 무기를 버리고 여러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언젠가는 우리는 양손에 옥과 수놓은 비단을 들고 당신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이후 11만 명의 미군이 중국에 상륙했으며 중국군은 서둘러 점령지를 탈환했으나 너무도 갑작스러운 승리는 웨드마이어의 경고대로 대혼란을 초래했다. 이는 미국이 중국에 정보 공유를 하지 않아 중국이 자신들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컸지만 전근대적인 중국의 행정력과 부패 자체도 문제였다. 국민당은 점령지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한동안 한간들을 일시 등용했는데 이후 장제스가 고위 한간들의 대부분을 총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국민당이 한간들과 결탁했다는 악의적 선전이 곳곳에서 나돌게 된다. 일본인의 재산, 즉 적산가옥 등은 국고가 아닌 개인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고 전쟁 종료 이후 다시 촉발된 초인플레이션은 중국의 경제와 민심을 크게 동요시켜 향후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패배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특히 타이완에서 국민당이 현지 주민들과 충돌한 2.28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낳았으며 오늘날까지 장제스와 국민당의 흑역사로 남게 된다.
한편 세력을 백만으로 키운 공산당은 국민당에 복종하겠다는 맹세를 걷어차고 황허 이북, 그리고 전 중국의 영토를 통제하려 시도했다. 곳곳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충돌하기 시작했고 장제스는 중국 중공업의 90%를 차지하는 공업지역인 만주를 확보할 것을 명령했지만 중국의 무리한 전과확대와 부실한 병참능력으로 인하여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웨드마이어는 만리장성 이남의 교통망과 통신망을 먼저 회복하고 만주는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신탁통치를 맡긴 다음에 나중에 찾으라고 제안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또 다시 만주를 외세에 넘기는 행위라고 거부했다. 장제스는 충칭에 있던 반면 공산당은 진작부터 화베이, 만주에 지하조직을 침투시켜 민심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중심지가 옌안이었던데다 소련의 후원을 얻었던터라 훨씬 만주에 접근하기 용이했다. 결국 공산당은 만주의 90%를 장악했다. 장제스는 쑨리런 산하의 신1군을 만주에 파견했으나 병참능력의 부족과 소련의 비협조로 일부 대도시만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소련은 여기서 막대한 일본군 무기를 노획하여 이것으로 린뱌오의 동북인민자치군을 무장시켰는데 실제로 린뱌오는 국공내전 발발 이후 만주의 요양-심양 회전에서 중화민국 국군을 크게 격파한다.
결국 전쟁이 끝난 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국공내전이 발발했고 중일전쟁에서 크게 타격을 입은 국민당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할 겨를도 없이 다시 전국구 규모의 내전에 돌입했다가 허망하게 패배하여 대만으로 밀려나 오늘날의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가 성립되게 된다.
4.1. 사상자 논란
8년간의 전쟁에서 중국은 1950년 발표한 중국백감을 통해 전사자 103만을 포함한 321만 명의 군인 사상자를 발표했으며 일본군의 경우, 후생성 통계를 통해 공식 전사자가 40만 5천명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 수치는 너무 축소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중국의 경우, 학계의 추가연구 결과 최소 2천만 명을 상회하는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공산당의 공식 역사서인 중화인민공화국 중앙당사연구실에서 편찬한 중국공산당 역사에서는 총 35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적 입장이다. 군인 사상자 역시 국민정부 관방이 처음 발표한 321만명 설은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며 1959년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내놓은 <Studies on the Population of China(1396~1951)>에서는 군인 사망자가 124만, 부상자가 167만, 실종자가 13만에 달한다는 추정을 내놓기도 했으며 민간인 사상자의 경우에도 중화민국 행정원배상위원회는 처음에 총 사상자 913만명을 발표했지만 1988년, 이를 훨씬 상회하는, 사망자 930만, 부상자 950만 등 2천만 이상이라는 추론이 나왔다. 이후 중화민국 군사작전국은 전사자를 131만 224명, 부상자를 175만 2591명, 행방불명자를 11만 5158명으로 발표하여 총 피해가 317만이라고 주장했다.
극단적인 경우, 군인만 최대 1000만명의 사상자를 내었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에서는 최대 사망자 5천만명설까지도 제기된다.
일본 역시 공식적 전사자는 40만 5천명 수준이지만 일본 후생성이 지나치게 많은 수의 행방불명자를 기록하였으며 전후에 일본이 중일전쟁 관련 기밀문서를 많이 폐기한 것등이 지적된다. 이시카와 요시히로는 일본군 전사자를 47만 명 정도로 보았으며, 허잉친도 <팔년항전사>에서 일본군 전사자가 48만 3천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허잉친은 부상자까지 합치면 일본군이 241만명의 피해를 입었다고 보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당이 섬멸한 일본군만 52만 7천명, 왕징웨이 정권의 괴뢰군을 합치면 171만 4천명에 달한다고 주장하지만 개구라다.
한국 국방대학교의 기세찬 교수의 경우, 일본군 전사자가 172만명에 달하여 일본군 전체 전사자의 55%를 차지한다는 수치를 인용했고[15] 중국사회과학원 류다녠 교수는 일본군 전사자가 198만 4천명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군 전사자가 100만이 넘는다는 주장 역시도 중국군 전사자가 1000만을 넘긴다는 주장처럼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라나 미터의 <Forgotten Ally>에 따르면, 서구 학계의 정설은 중국의 군민 총 사망자는 최소 1400만이며 최대 2000만에 이른다고 본다고 한다.
5. 중일전쟁 관련 편견에 대한 고찰과 반박
6. 역사에서의 비중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 세계 진보적 지식인들과 예술가, 정치가, 혁명가들에게 파시즘에 맞서는 영웅적인 항쟁으로 기록되면서 찬사를 받으며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중일전쟁이었지만 정작 중일전쟁이 종결된 다음에는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지다시피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전쟁사 연구에서도 대부분 누락되어, 1980년대에 나온 타임라이프사의 제2차 세계 대전사의 경우는 아예 중일전쟁을 '''2차 대전의 배경 중 하나'''로 간주해 중국 - 버마 - 인도 전역만을 다루고 있고 충칭 대공습과 대륙타통 작전을 제외하고는 '''버마 전선'''만 다루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전쟁 당사자인 중화민국이 패배하여 대륙에서 쫓겨났고 그 뒤를 이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중일전쟁 담론을 깨끗이 무시했으며 냉전의 결과로 서방에서는 국공내전에서 중국을 잃었던 이유를 추궁하기에 바빴던 탓이다.중일전쟁은 엄청난 역경에도 불구하고 고난에 처한 정부와 인민이 적에게 맞서 "최후까지의 항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기자들과 외교관들이 중국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고 거듭해서 내놓은 예측이 틀렸음을 증명한 영웅적인 저항이었다.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국은 일본에 맞서 사실상 홀로 싸웠다. 이 시기에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잘 무장되고 기술적으로 발달된 나라 중 하나의 80만 병력을 저지했다. 이후의 또 다른 4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 연합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중화민국이 전쟁에 남아 분명한 역할을 수행한 덕분이었다.
<중국, 잊어진 연합국>(Forgotten Ally: China’s World War II, 1937-1945), 2013년도 출판, 라나 미터(Rana Mitter, 옥스퍼드 대학 역사학 교수, 중국연구센터 주임), 서문 6페이지.
연구에도 오랫동안 난황을 겪었는데 기본적인 사료가 그렇게 빈약하지는 않으나 객관성의 문제가 있어서 검증이 어려운 탓이 크다. 일단 일본군의 1차 자료는 일제 패망 이후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를 조직적으로 파기한데다가 전쟁 합리화, 선전을 위해 사상자 누락, 왜곡 등 조작이나 자화자찬이 많고, 중국군의 경우에는 중화민국측 자료는 양은 많으나 대만 밖을 나가질 못했는데다가 이 또한 객관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국공내전의 승자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프로파간다에 묻혀버렸고[16] 장제스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어용학자들을 고용해서 조작한 자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중일전쟁 극초기와 백단대전을 빼면 거의 싸우지 않았는데도 집권 정당성을 위해 이를 숨기고 전쟁의 주역 국민당을 깔아뭉갰다는 근본적 문제가 있으며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과장성으로 인해 사료에 기재된 전황의 정확성에 문제가 많으며[17] 애초에 중일전쟁 자체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감이 크다.[18] 80년대 이후로 중일전쟁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유격전과 전면전을 분리해 국민당의 역할도 조명했으나 장제스 비하 등이 사라지는덴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상당히 전향적으로 재평가하는 편이지만 공산당 독재 치하의 연구라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
미국 등 기타 연합국의 자료는 애초에 버마 전선이나 대륙타통작전 정도만 빼면 관심도 없고[19] 스틸웰과 장제스의 불화에 집중했는데다가 당시 미국의 중국통이 패트릭 헐리나 앨버트 웨드마이어, 조지프 앨솝 정도만 빼면 마오빠가 되어서[20] 공산당을 '농촌 민주주의자' 정도로 인식한 낙관적 옹호와 국민당을 항일을 회피하는 부패정당으로 묘사하는 악의적인 보고를 많이 올렸으며 국공내전 이후 중국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잃은 것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화살을 국민당에게 돌리는 통에 이후 미국 쪽의 기록들은 국민당 정권 비난 일색에다가 역시 제3자라 자료가 적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의외로 일본에서 전후에 발간된 자료들이 어느 정도 신빙성 있을 정도이다.[21] 게다가 전투가 크게 벌어지고 사상자도 많은데 실제 전쟁에 끼친 영향이 거의 없다는 인식 또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일본이 중국을 치지 않았으면 태평양 전쟁은 아예 발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중국을 정복할 꿈에 가득 차 있었으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와 크기를 자랑하는 중국은 끝까지 버티면서 일본에 맞섰고 일본은 결국 이 수렁에 빠져 피해가 커지자 더욱 군국주의를 밀어붙이고, 손해를 메꾸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치기로 결정, 본격적으로 연합국, 그리고 미국과 마찰이 일어난다. '''중일전쟁이 없었다면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매우 크게 달라졌을게 뻔하기에 동아시아권에서는 매우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
중일전쟁은 태평양 전쟁 발발에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고 발발 이후에도 태평양 전쟁의 일부이자, 일본 육군의 절대 다수를 붙잡아둔 중요 전선으로 기능하였다. 일본군,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일전쟁은 일본 육군이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이고, 태평양 전쟁은 일본 해군이 주도한 전쟁이다. 당연히 '''일본 육군의 주 관심은 중원, 만주 일대'''였지, '''듣도 보도 못한 머나먼 태평양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 초, 중반에 지상군 병력을 필요로 하는 전장에 대해 일본 육군은 그다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태평양 방면의 병력 파견 규모도 작전 구역의 면적을 생각해 보면 중원과 만주에 투입한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당장 과달카날 전투의 진행 경과만 봐도 이러한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때문에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를 제외하고 연합군 지상군과 맞붙은 전장에서 일본군의 지상병력이 연합군 지상병력을 능가한 적은 없었으며[22] ,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에서의 지상전 양상은 대부분 '밀어붙이는 연합군(사실상 미군) vs 밀리는 일본군'이라는 구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상전의 패배는 그 일대의 제해권, 제공권 영구 상실[23] 로 이어지면서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지는데 한몫 하였다. 그리고, 전개 항목에 언급된 바와 같이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투들 중 일부는 중국 전역의 경과에 적게나마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을 폴란드 침공이 아닌 중일전쟁 발발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2000년대 들어서 나오고 있다.[24] 하지만 중일전쟁이 국제적으로 번져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2차대전과 중일전쟁은 별개의 전쟁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애초에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주제에서 나치 독일의 지분이 너무 크다. 전역의 규모로는 독소전쟁 하나만으로도 당시 전개된 모든 전역을 곁다리로 치부해버리는 게 가능한 수준이고 전쟁 이외의 부분으로 보더라도 나치당의 권력장악 과정 및 수권법, 그리고 체계적으로 산업화되어 전개된 홀로코스트까지 생각한다면 2차대전 = 나치 독일이라고 해도 전혀 부족하지가 않다. 다만 저 시각은 유럽 쪽으로 좀 많이 쏠린 관점이다. 독소전쟁을 예로 들었는데 전역 규모로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은 결코 뒤지지 않고, 태평양 전역은 인류가 전쟁을 벌인 전역중 가장 넓은 지역이다. 중일전쟁 사상자 숫자 또한 그때 당시 중국의 행정력 부족과 일본 측의 자료 폐기등의 사료 인멸로 인해 적게 집계되었을 뿐이지, 실제론 독소전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났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드는 계기가 된 태평양 전쟁이 중국 전선에서의 막장 상황을 타개한답시고 일본군이 벌인 자살 행위였다는 점에서 어느정도의 연결고리는 있다. 어차피 스페인에서는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아프리카에서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 전쟁, 반공학자의 일부는 적백내전 기원설까지 주장하니 그리 이상할 것이 없는 현상이긴 하다.
또한 이 전쟁의 결과로 중화민국은 2차대전의 승전국 중 하나가 되어 UN 상임이사국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직후 발발한 국공내전에 패해 타이완으로 이동하고 대륙을 중국 공산당이 접수하면서 극동 질서를 담당할 상임이사국, 즉 정통 중국이 누구냐에 대한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1971년 중화민국이 형식적으로 자진 탈퇴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임이사국 권리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에게 어찌어찌 승리하긴 했으나 일본이 점령지에서 저지른 생체실험, 신멸작전(특히 난징대학살) 등의 전쟁범죄로 인해 지금도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7. 기타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5월에는 중국 공군이 '''일본 본토 공격'''을감행한 적이 있다. 중국 공군의 소련제 SB-2 폭격기 2대[25] 가 일본 큐슈의 구마모토 상공까지 온 것. 이 때 중국군 폭격기가 투하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일본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선전물(삐라)'''들이었다(...). 작전을 수행한 폭격기들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귀환했다. 작전으로 인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고 이후에도 중국 공군은 더 이상의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작전을 시행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대공 방어 체계가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일본군 수뇌부는 이 사건을 단순 해프닝으로만 생각하고 대공 방어의 증강 등 대응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이 중일전쟁 덕분에 일본은 1940년 동계(삿포로) 올림픽/ 1944년 하계(도쿄) 올림픽 개최권을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자업자득인 셈이지만 당시의 숙원이 있었는지 전후 그곳에서 다시 개최[26] 했다.
7.1. 70년 후
전승절(중국) 항목 참조.
8. 참고문헌
중일전쟁과 그 하위문서들은 다음과 같은 저서, 논문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8.1. 기세찬 교수의 중일전쟁 논저들
기세찬(국방대. 육군 장교) 교수는 한국 학계에서 중일전쟁 관련 국민정부군에 대한 '''대표적 전문가이자 선구자이다'''. 그동안 중일전쟁 시절 국민정부군에 대한 연구가 매우 부진했던 실정에서 중국쪽 연구를 인용, 연구하며 해외에서 재평가 된 국민정부군을 국내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소개한 것이다. 또한 조지프 스틸웰의 실체를 분석해서 국내 학계에서 비판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 단행본)『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경인문화사(2013)[27]
- 논문)「中日戰爭 中期(1939~1941) 國民政府의 抗戰戰略과 實踐」, 역사와 담론 第56輯, 2010.8
- 논문)「남경국민정부의 국방건설 재검토(1928-1937)」, 中國近現代史硏究 第 46輯, 2010.6
- 논문)「中日戰爭 初期 國民政府軍의 抗戰戰略과 戰術 再檢討(1937~1938)」, 군사지 제78호, 2011.3
- 논문)「태평양전쟁 초기 연합국의 동맹전략과 대일작전」, 사총, 72권 0호, 2011
- 논문)「인도-버마전역과 중국원정군」, 군사지 제88호, 2013.9,
- 논문)「태평양전쟁시기 미국의 종결전략과 중국」, 中國近現代史硏究 第 57輯, 2013.3
- 논문)「국민정부의 항일유격전에 관한 연구」, 사총, 82권 0호, 2014
- 논문)「중일전쟁시기 국민정부의 전시동원에 관한 연구」, 사총, 85권 0호, 2015
8.2. 평전, 회고록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2014년)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2010년)
- 히로히토 평전, 에드워드 베르, 을유문화사(2002년)
- 마오쩌둥 평전, 로스 테릴, 이룸(2008년)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2016년)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2012년)
- The Generalissimo, Jay Taylor, Belknap Press(2009년)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저, 푸른역사(2009년)
- 웨드마이어 회고록과 논평, 이종학 저,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2014년)
- 제2차 세계대전 상하권, 윈스턴 처칠, 까치(2016년): 윈스턴 처칠의 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상하권으로 축약한 버전. 중일전쟁에 대해 많이 다루지는 않았으나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와 만난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8.3. 전쟁사 논저
- 중일전쟁(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권성욱, 미지북스(2015) - 인터넷에서 인기있는 블로거가 쓴 대중서적. 부흥 카페, 밀군카 등에서 활동하는 역덕이 연재한 중일전쟁사 시리즈를 편집, 수정하여 내놓은 단행본이다. 연재 때부터 역덕계에서 상당한 관심과 호응을 받아왔고 출판 후에 여러 역덕들에게서 인식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혁명사관이나 국공내전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면피하려는 미국식 사관이 주류이던 시점에서 장제스와 국민정부에 대한 재평가 경향을 소개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 근현대사를 파는 역덕들은 손에 꼽을 정도고 다른 분야에서 박식한 역덕들도 중일전쟁과 근현대 중국 전쟁사에 대해선 피상적으로 알거나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정부군에 대한 실체는 한국 인터넷에선 블루오션이었던 점이 크겠다. 하지만 해당 블로거는 오로지 본인이 개인적으로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쓴 작가이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고[28] , 저서인 중일전쟁에서도 여러 오류나 주관적 해석이 많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만한 물건은 아니며 역으로 지나치게 국민당의 실책에 대하서 면피한다는 등의 여러 비판도 있다. 입문을 넘어서 중일전쟁 시절 국민정부군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알고싶다면 위의 기세찬 박사의 글을 읽어보아야 한다.
- 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2013년): 원제는 Forgotten Ally: China‘s War with Japan, 1937~1945 지금까지 중일전쟁을 다룬 서구 학계의 최신 담론이자 가장 고평가되는 책 중 하나. 기세찬 교수가 번역에 착수해 2020년 3월 정식 출간되었다.
- 2차세계대전사, 존 키건, 류한수 역, 청어람미디어(2016)[29]
- 2차 세계대전사 1~3권, 제러드 와인버그, 길찾기(2016)
-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2017년): 스탈린그라드, 디데이, 스페인 내전으로 유명한 2차 세계대전 연구가 앤터니 비버의 저작. 엄청난 분량 가운데서 지금까지 출판된 2차 세계대전 관련 서구 학계의 저서들 중에서 중일전쟁의 비중을 가장 많이 할애한 저서로, 개전부터 종전까지 꽤나 자세히 다루었으며 국민정부와 장제스의 분투 및 정책에 대해서도 재평가 담론을 실었다. 다만 집필 과정에서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유명한 장융과 교류하면서 장융이 제기한 공산당 음모론 역시 상당히 인용하였는데 이는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해서 주의해서 읽어볼 부분이다.
8.4. 배경 및 체제 설명
- 중국근현대사 3권 (1925-1945, 혁명과 내셔널리즘), 이시카와 요시히로 저, 삼천리(2013년)
-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2012년)
- 중국의 당과 국가(정치체제의 궤적), 니시마루 시게오, 고쿠분 료세이 저, 한울(2012년)
-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2016년)
- 쇼와사 1 전전편, 한도 가즈토시, 루비박스(2010년)
- 일본군사사-전전편,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2013년)
- 다큐멘터리 중국 근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2014년)
- 중국인민해방군사, 국방군사연구소(1998년)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8.5. 기타
- 역사는 누구 편에 서는가(난징의 강간), 아이리스 장, 미다스북스(2014): 난징대학살을 다룬 기념비적인 저서.
-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리처드 번스타인, 책과함께(2016): 미국의 언론인 리처드 번스타인이 중일전쟁~국공내전 기 중국에서의 미국 외교 활동과 국공 갈등에 대해 써낸 책. 중국 공산당의 미국 접근 정책과 미국의 중국통들이 어떻게 마오에게 기울었는지, 그리고 국공내전 직전의 중국의 사회상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다룬 역작이다.
- 남경사건, 가사하라 도쿠시, 어문학사(2017)
9. 중일전쟁 관련 문서
9.1. 배경 관련
- 봉소전쟁
- 중원대전(1930.4.5~1930.11.4)
- 창사 폭동(1930.6.11~1930.9.13)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만주사변(1931.9.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
- 장왕합작(1932.1)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폐량개원(1933.4.5)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5)
- 하매 협정(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6.1)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9.2. 전투, 사건
9.2.1. 화북전역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
- 베이핑-톈진 전투(1937.7.25~1937.7.30)
- 베이핑 탈환전(1937.8.6~1937.8.26)
- 평형관 전투(1937.9.25)
- 신커우전-타이위안 전투(1937.10.2~1937.11.8)
9.2.2. 주요 전투
- 제2차 상하이 사변(1937.8.13~1937.11.12)
- 훙차오 공항 사건(1937.8.9)
- 장인 전투(1937.8.16~1937.12.2)
- 우쑹 전투(1937.8.23~1937.8.31)
- 트라우트만 공작(1937.11.5~1938.1.13)
- 난징 전투(1937.12.3~1937.12.13)
- 왕징웨이 공작(1938.2~1940.3.30)
- 동 공작
- 쉬저우 전투(1938.1~1938.5.19)
- 타이얼좡 전투(1938.3.17~1938.4.19)
- 1938년 황허 홍수(1938.6.9)
- 우한 전투(1938.6~1938.10)
- 광저우 전투(1938.10.12~1938.10.23)
- 쑤이셴-짜오양 전투(1939.5.1~1939.5.24)
- 제1차 창사 전투(1939.9~1939.10)
- 1939년 동계공세작전(1939.12~1940.2)
- 짜오양-이청 전투(1940.5.1~1940.6.18)
- 백단대전
- 제2차 창사 전투(1941.9~1941.10)
- 제3차 창사 전투(1941.12~1942.1)
- 남방작전 버마전역(1942.1~1942.3)
- 신멸작전(1941.12~1944?)
- 태평양 전쟁(1941.12.7~1945.8.15)
- 신강성 공산당원 숙청 사건(1942)
- 카이로 회담(1943.11)
- 창더 전투(1943.11.1~1943.12.20)
- 임팔 작전(1944.3.8~1944.5.3)
- 대륙타통작전(1944.4.14~1944.12)
- 제4차 창사 전투(1944.5.27~1944.6.19)
- 헝양 공방전(1944.6.22~1944.8.8)
- 위시-어베이 전투(1945.3.21~1945.5.11)
- 샹시 전투(1945.4.9~1945.6.7)
9.3. 인물
중일전쟁/관련 인물 문서 참조.
9.4. 관련 단체
10. 대중매체
중국에서는 당연히 근현대사극으로도 많이 제작되지만, 2010년대 전반기에 같은 중일전쟁을 우려먹으면서 시청률을 잡으려다 보니 '''항일신극(抗日神剧)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을 정도의 초 막장 드라마가 양판소처럼 쏟아져 나왔기도 했다'''. 이들 드라마는 중국내에서도 고증이 막장인건 물론이고 내용전개도 무협지나 판타지로 전개되냐며 엄청나게 까이다보니 광전총국[30] 에서조차 막장 고증으로 유명한 드라마에 대해서 과징금이나 방영중지같은 재제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맛이 간 드라마는 줄어들었다. 가끔씩 항일신극이라며 까이는 작품들이 좀 나오기는 하지만. 여하튼 이때의 막장고증이 어느정도였는지 바이두 백과 항일신극 항목에서 화살로 일본군을 때려잡을려고 한다거나 맨손으로 일본군을 반으로 갈라낸다거나 일본군의 전쟁범죄 등 방영시간대에 걸맞지 않게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며 선정적인(...) 장면들이 줄줄히 나올 정도.
10.1. 영상물
- 태양의 제국(미국)
- 색계(미국, 홍콩 합작)
- 존 라베(중국, 독일, 프랑스 합작)
- 난징! 난징!(중국)
- 흑태양 시리즈(중국) 4편
- 황시(중국, 호주, 독일 합작)
- 금릉십삼채(중국)
- 백단대전(중국): 2015년 8월 23일에 개봉한 전승 70주년 기념 영화.
- 첩혈고성(중국) 전투신 일부
- 귀신이 온다(중국) - 카가와 테루유키가 조연으로 등장했다. 이후 카가와 테루유키는 존 라베에서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친왕으로 등장한다.
- 플라잉 타이거즈(미국)
- 진주만(미국): 막판에 중국 전선과 중국군이 일부 등장한다.
- 붉은 수수밭 - 장예모 감독의 작품. 공리 주연.
- 패왕별희
- 대폭격(중국/미국 합작) 충칭 대공습이 나온다.
- 미드웨이(2019년 영화)(미국)
- 800 (중국)
10.2. 게임
- 광영사명 - 항전용사, 몽회항전 모드. 각각 상하이 전투와 루거우차오 사건, 쓰싱 창고 전투[31] 를 배경으로 하는 모드다.
- 팔년항전 - 2001년 대만에서 제작된 게임, 장르는 SLG.
- 팔년항전 2 - 2012년에 제작된 팔년항전의 후속작인데 장르가 RTS로 바뀌었고 무난한 전작에 비해 별로 호평도 듣지 못했다.
- 항일: 혈전상해탄 - 2003년 대륙에서 제작된 FPS 게임. 퀄리티나 완성도가 좋다고는 말 못하지만 의외로 중국에서 인지도는 있는듯.
- 항일: 혈전면전 - 2004년 제작된 후속작으로 이번에는 미얀마 원정이 주무대가 된다. 역시 호평은 받지 못했다. 제작사는 야심차게 후속작을 기획했으나 망해버렸다.
- 호이4의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모드: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가집중을 뜯어고치고 당시 중국의 지도를 훨씬 세밀하게 내놓은 모드다. 초반에는 일본의 국가집중만 손봤으나 이젠 중국의 국가집중과 국가정신 등이 대폭 추가되어서 고증에 맞는 플레이가 가능하다. 실제 역사대로 국민정부로 플레이하여 쓰촨 군벌들의 권력을 해체한다거나 1936년 2차 양광사변을 통해 광둥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등 중화민국 입장에서 더 다채로운 정치적 이벤트를 겪으며 플레이 할 수 있으며 오로지 일본의 괴뢰국이 되느냐, 일본과 전쟁하느냐만의 선택지가 있던 원작과 달리 만주국 인정을 담보로 한 중일동맹 체결도 가능하다. 당시 중공업이 부재하고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중화민국 상황을 고려하여 기갑 관련 기술 연구에 1000%이상 시간 연장을 하는 국가정신 페널티를 부여하는 등 중화민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 등도 고증이 되었으며[32] 일본 쪽도 다양한 정치 이벤트가 가능하다. 2차 양광사변같은 것은 이전 호이 시리즈엔 원래 있던 이벤트였지만 호이4에선 그냥 버려졌다만... 2017년 11월 15일 중국관련 확장팩인 Waking the tiger의 트레일러가 나오면서 보완될것으로 보여진다 자세한건 Hearts of Iron IV/DLC 항목 참조. 이에 맞춰서 8년 항전 모드도 Waking the tiger DLC에 맞춰서 새로 출시되어 지금까지 계속 패치되고 있다.
- Order Of Battle : World War II - The Morning Sun 캠페인에서 1937년부터 1940년까지의 중일전쟁을 다루고 있으며 플레이어는 일본군을 맡게 된다. 아마 중일전쟁 초반 전투를 가장 자세히 다룬 게임 중 하나일 것이다. 상대가 많이 약하기 때문에 여러 캠페인 중에서 난이도가 가장 낮은 편이다. The Rising Sun 캠페인에서 미군 상대로 밥솥처럼 터져나가는 치하도 이 캠페인에서는 최강의 전차이다. 1937년 베이핑-톈진 전투를 시작으로 1939년 동계공세작전까지 10개 시나리오를 역사적 전투에 따라가고 있으며, 마지막 가상 시나리오에서 국민당의 수도인 충칭을 점령하는 걸로 캠페인이 끝나게 된다. 이 캠페인이 끝나면 일본군의 승리로 중일전쟁이 마무리 되며 이어지는 The Rising Sun 캠페인에서는 미군을 상대로 싸우게 된다.
10.3. 문학작품
11. 어록
한 방울의 피는 한 치의 강토로, 10만의 청년은 10만의 정병으로!
-중일전쟁 당시 중국 정부의 슬로건.[33]
폭악(暴惡)한 지나(支那)를 응징하자(暴支膺懲)!
-중일전쟁 당시 일본 정부의 슬로건.[34]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의 국방을 대체하고 우리의 피와 살로 적의 총포에 저항한다면, 비록 모든 전투에서 패할지라도 나는 최후에는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혁명전술을 사용한다면 그들이 중국의 1개 성을 점령하는데 최소한 1개월이 걸릴 것이고 통계적으로 그들이 중국의 18개 성을 점령하자면 최소한 18개월이 걸릴 것이다. 이 18개월의 시간 동안에 국제 정세의 변화가 (일본에게) 이익으로 돌아가겠는가? 하물며 그들은 1개월에 결코 우리의 1개 성을 신속하게 점령할 수도 없을 것인데..."
-1934년 7월 루산군관훈련단에서의 장제스의 강연.
"일본이 얻고자 하는 것은 전 태평양의 패권이지 일본과 중국의 양 국가의 문제가 아니다. (...) 우리가 능히 자강할 수 있다면 천하가 모두 우리의 우방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무력이 얼마나 강대하던가에 관계없이 사실상 그들은 이미 고립의 위치에 처해 있으며 전 세계의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장제스
"이번 사건은 완전히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항일인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정부는 일본의 각의에서 중대결의를 행하여 북중국출병에 관해 정부로서 취해야 할 필요조치를 내릴 것을 결정한다."
-일본정부의 1937년 7월 11일 성명
"우리가 일개 약소국이긴 하나 만일 '최후의 관두'에 달했을 때에는 전 민족의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국가의 생존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 만일 피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여 '최후의 관두'에 서게 되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최후의 희생과 응전이 있을 뿐이다."
-장제스, 1937년 7월 17일 루산 담화.
"제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그곳이 바로 정부이자 저항의 중심지입니다. 제가 곧 국가입니다."
-장제스
"현재 상황은 제국이 경험해 온 것과 전혀 다르다. 우리는 이 전쟁이 전면전으로 이행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대신, 1937년 9월 4일.
"중화민국과의 제휴 협력에 의지하여 동아시아의 안정을 확보하느라 불철주야 애썼으나 중화민국은 제국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일을 크게 만들어 결국 이번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짐은 이를 개탄하는 바이다. 이제 군인은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충성을 다해달라. 이로써 중화민국의 반성을 촉구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빨리 확립할 수 있으니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히로히토, 1937년 9월 4일, 제국의회 개회식 칙어.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국민정부와의 대응에, 나머지 '''10% 항일에 사용한다."'''
1937년 9월 26일 8로군 중대장 이상 모든 간부들을 모아서 실시한 '''마오쩌둥'''의 훈시.
"상하이에서 내신을 통해 난징에서 보인 아군의 잔학상을 자세히 전해왔다. 약탈, 강간은 눈 뜨고는 못 볼 참상이다. 아아, 이것이 황군이란 말인가."
외무성 동아국장 이시이 이타로
"우리는 승리할 때까지, 우리의 두 다리가 정말로 부러질 때까지, 설령 우리의 아름다운 땅과 유구한 역사 그리고 중화의 갈망이 피로 물들고 화염에 삼켜져 멸망할지라도 계속 싸울 것입니다."
-쑹메이링, 1937년 11월
"...굴복해서 멸망당하느니 차라리 전쟁을 벌이다 패배해서 멸망하는 편이 낫겠다."
-장제스, 1938년 1월 2일.
"...국민정부를 부인하며 이를 '''말살'''하는 것이다."
-일본정부의 1938년 1월 18일 공식성명.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18개 성 중에서 15개를 잃는다손 치더라도 오로지 쓰촨, 윈난, 구이저우를 지킬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적일지라도 물리칠 수 있으며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고 국가를 재건하고 우리의 혁명을 이룰 수 있다.
-장제스, 1938년 난웨 군사회의에서의 발언.
"나는 일부 도시들을 잃었다고 동요하지 않소. 만약 너무 많은 것을 잃는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일으켜 세울 참이오."
-장제스
"차라리 산산이 부서진 옥이 될망정 온전한 기와가 되지는 않겠다."
-장제스, 우한 함락 이후의 발언.
"중국과 같은 대국이 나 따위에 팔릴 나라는 아니다. 비록 내가 조인하더라도 그것은 내 몸을 파는 계약에 지나지 않는다."
왕징웨이, 1939년 12월 30일.
"(중국에서의 최종 목적은) 군사적인 승리를 얻는 것 뿐 아니라 중국의 재생과 일본, 만주국, 중국의 상호협력을 기초로 하여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이 목표가 실현되지 않는 한 충돌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히라누마 기이치로, 1940년 1월.
"우리는 항복하지 않고 앞으로, 반드시 앞으로 진군해야만 한다. 항복은 틀림없이 전 국가적인 참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장제스, 1940년.
"적의 전의를 파괴하고 쇠망시키라."
-히로히토, 1941년 12월 3일 대륙명 575호.
옌안은 끓어올랐다. 붉은 깃발이 곳곳에 내걸렸다. 중심가는 물론 주변의 산악도 마찬가지였다. 북이 울리고 폭죽이 터졌으며 사람들은 모자를 하늘로 던졌다. 농민들은 사과와 배를 내놓았고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얼싸 안고 춤을 추었다. 그날 밤 산과 들은 불이 바다를 이루었고 기쁨이 흘러넘쳤다. 8년에 걸친 일본과의 힘든 싸움은 마침내 승리로 끝났다. 축제는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마오쩌둥의 러시아어 통역 스저의 회고.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공무원, 학생, 상인과 이른바 상류층이란 사람들은 환락의 소용돌이로 몸을 던졌다.
-수필가 겸 극작가 루링.
이 100년에 가까운 굴욕의 역사는 마침내 끝났다. 신화일보 전 직원은 열광했다. 사실상 충칭의 모든 주민, 중국의 모든 국민이 열광했다.
-신화일보 설립자이자 좌익작가연맹 작가 샤엔
모든 사람은 오늘을 영광스러운 날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는 홀로 커다란 부끄러움과 슬픔을 느낀다.
-장제스.
萬一真到了無可避免的最後關頭,我們當然只有犧牲,只有抗戰
만일 정말로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 이른다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희생과 항전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