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화(1859)

 

성명
박영화(朴永和)
이명
박영화(朴英和)
생몰
1859년 5월 9일 ~ 1923년 8월 24일
출생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
사망지
경상북도 의성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영화는 1859년 5월 9일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신교 목사로, 1919년 3월 7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 전국 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와 만나 그로부터 만세운동 상황을 전해 듣고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대구계성학교(大邱啓聖學校) 학생으로 3월 8일의 대구에서 전개된 대구학생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자신의 아들 박상동(朴尙東)으로부터 대구의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김원휘·박영달(朴永達)·박영신·배중엽(裵重曄)·배달근(裵達根) 등과 여러 차례에 걸쳐 만나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3월 12일 그는 박영신의 집에서 박영달·배중엽·배달근과 함께 2백여개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이날 정오경,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를 시위행진한 후,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때 급보를 받은 의성경찰서에서는 이날 오후 4시 순사부장과 경찰이 이곳 주재소로 응원 출동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는데,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옥고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3년 8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박영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2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