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우
(朴一禹)
1903년~1955년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중국의 공산주의자, 항일운동가. 북한의 전선사령부 부사령관, 정치보위상, 체신상 등을 역임한 군인.
박일우는 1903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만주로 이주하여 길림성 연길현에 있는 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간도에서 국민학교 교사를 지내던 그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 지방정부에서 활동하였고 당 간부양성기관이었던 중앙당학교를 졸업하였다. 1942년에는 조선독립동맹의 창립에 참여하였다.[1]
연안군정대학 교관을 역임한 그는, 같은 해 7월에는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1945년 초에 세워진 조선혁명군정학교의 부교장 겸 당위원회 서기도 도맡았으며 독립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1월 입북한 뒤 북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였다.[2]
1946년 8월에 그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7년 2월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장, 1948년 3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8월에 열린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9월부터 1953년 3월까지 내무상을 맡았다. 1949년 6월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0년부터 군사위원회위원,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고 1951년에는 정치보위상을 맡았다. 1953년 3월부터 1955년 11월까지는 체신상을 맡으며 요직을 두루 거쳐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3]
이처럼 박일우는 초기 북한에서 대표적 지성파 인물로 주목되는 존재로서 국내파 영수였던 오기섭을 자아비판에 회부하였을 때도 충분한 검토를 거쳐 엄정히 처리하자는 신중론을 내세워 김일성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워낙 직업혁명가로서 논리정연하고 객관적이었기 때문에 김일성도 그를 숙청할 수 없었다.[4]
그러나 6·25 전쟁에 대한 책임문제를 가지고서 김일성이 김무정, 방호산 등 연안파 지도자들을 숙청하는 것을 박일우가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불충고발 의하여 박일우는 결국 박헌영의 남로당에 가담하였다는 반당종파혐의로 1955년 숙청되었다.[5]
1903년~1955년
1. 개요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중국의 공산주의자, 항일운동가. 북한의 전선사령부 부사령관, 정치보위상, 체신상 등을 역임한 군인.
2. 생애
박일우는 1903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만주로 이주하여 길림성 연길현에 있는 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간도에서 국민학교 교사를 지내던 그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 지방정부에서 활동하였고 당 간부양성기관이었던 중앙당학교를 졸업하였다. 1942년에는 조선독립동맹의 창립에 참여하였다.[1]
연안군정대학 교관을 역임한 그는, 같은 해 7월에는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1945년 초에 세워진 조선혁명군정학교의 부교장 겸 당위원회 서기도 도맡았으며 독립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1월 입북한 뒤 북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였다.[2]
1946년 8월에 그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7년 2월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장, 1948년 3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8월에 열린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9월부터 1953년 3월까지 내무상을 맡았다. 1949년 6월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0년부터 군사위원회위원, 전선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고 1951년에는 정치보위상을 맡았다. 1953년 3월부터 1955년 11월까지는 체신상을 맡으며 요직을 두루 거쳐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3]
이처럼 박일우는 초기 북한에서 대표적 지성파 인물로 주목되는 존재로서 국내파 영수였던 오기섭을 자아비판에 회부하였을 때도 충분한 검토를 거쳐 엄정히 처리하자는 신중론을 내세워 김일성의 비위를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워낙 직업혁명가로서 논리정연하고 객관적이었기 때문에 김일성도 그를 숙청할 수 없었다.[4]
그러나 6·25 전쟁에 대한 책임문제를 가지고서 김일성이 김무정, 방호산 등 연안파 지도자들을 숙청하는 것을 박일우가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불충고발 의하여 박일우는 결국 박헌영의 남로당에 가담하였다는 반당종파혐의로 1955년 숙청되었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