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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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찬웅(朴贊雄)
일본식 성명
宮本贊雄
생몰
1919년 11월 14일 ~ 1943년 6월 21일
출생지
전라북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현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수여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찬웅은 1919년 11월 14일 전라북도 금산군(현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23일, 그는 같은 학교 학생 박효준(朴孝濬)·강두안·유흥수·문홍의 등과 함께 당시 대구부 봉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 소재 이태길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문예부(文藝部)'를 조직하였다.
문예부는 민족의식을 고취, 단결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 독립에 목적을 둔 결사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문예활동을 표방하면서 매주 토요일 작품 감상 및 작품 비평 등의 운동방침을 정하고 1940년 11월 30일부터 1941년 3월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갖고 민족문화를 연구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런데 문예부 회원들 중 8기생의 졸업을 앞두고, 이들은 각기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면 아동 및 학부형에게 민족의식을 고양하기로 하고, 그 활동상황을 월 1회씩 보고하기로 하였다.
그는 1941년 3월 논산군 소재 노성공립국민학교 훈도로 근무하면서# 위와 같은 문예부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같은 해 3월 문예부의 기관지 「학생」이 발간될 때 편집·제작에 참가하였으며 출판비의 일부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같은 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후 2년여 동안 미결수의 상태로 대전형무소에서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2월 8일 예심이 종결되었으며, 그해 6월 미결수로서 옥중 순국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