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타상여

 

'''沙咤相如'''
'''생몰년 미상'''
1. 개요
2. 행적
3.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


백제 말기의 장수이자 유민. 660년 백제 멸망 당시 달솔이었던 흑치상지의 별부장(別部將)이었다.

2. 행적


백제 멸망 직후 처음엔 당군에 협조했으나, 흑치상지를 따라가 백제부흥운동에 가담했다. 백제부흥군은 초기에 임존성 전투, 고사비성 전투, 반걸양 전투 등 당군과 신라군을 상대로 승기를 올렸으나 지도층의 분열과 신라군과 당군의 공세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백강구 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이 참패하자 당 고종의 회유로 흑치상지와 더불어 당에 항복했다.
당에 항복한 이후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지수신이 지키는 임존성흑치상지 등과 함께 함락시키는 매국행위를 했고,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3. 기타


백제 멸망 이전 관직은 별부장 직위의 경우, 별부를 지명으로 파악해 익산시 일대로 보고 사타상여를 별부의 군대를 이끄는 장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1] 다만 흑치상치 휘하의 인물인 점을 감안할 때 확실치는 않은 편.
당군에 투항할 때 유인사와 유인원이 흑치상지와 함께 평가받는 걸 보면 백강구 전투로 붕괴한 백제 부흥군에서 나름 고위급 인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
여담으로 백제 사(沙)씨(또는 사택/사타씨)는 백제 대성팔족 중 하나였으니 고위 귀족 출신이다. 그리고 달솔 관등인 흑치상지 휘하의 별부장이었으니 그보다 관등은 낮을 것으로 보인다.

4. 관련 문서



[1] 이때의 部는 軍部隊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별부장은 別將과 같은 軍職이라 할 것이다. 이 別部를 왕도 五部 이외의 특별 部로서 別都 益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별부장은 別部의 군사를 거느린 장군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김주성, 「백제 무왕의 사찰건립과 권력강화」, 《한국고대사연구》 6, 한국고대사연구회, 1992, 264쪽).[2] 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임존성을 빼앗아 그들 자신의 성의를 나타내는 기회를 갖게 하려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인사가 말하기를 “그들은 야심이 있어 믿기 어렵다. 만일 그들이 무기와 곡식을 얻는다면 이는 그들에게 도적질을 할 방책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심과 지모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라고 하였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