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
'''百濟復興運動'''
존속기간
660년 ~ 663년
정치체제
부흥운동(군주제)
성 탈환 수
약 200
중심지
주류성→피성→주류성→임존성
주요 인물
지수신
흑치상지
부여풍
귀실복신
주요 사건
660년 백제 멸망, 부흥 시도
10일 안에 성 200개 탈환
663년 백강구 전투
663년 소멸[1]
멸망 이전
백제
소멸 이후
통일신라
1. 개요
2. 목록
2.1. 일반적으로 말하는 백제부흥운동
2.1.1. 발단
2.1.2. 전개
2.1.3. 부흥운동 소멸 후
2.1.4. 왕사
2.1.5. 관련인물
2.1.6. 관련항목
2.2. 후백제
2.2.1. 개요
2.2.2. 후백제와 백제 부흥 운동과의 연관성 문제
2.3. 이연년 형제의 난
3. 유사사례
4.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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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백제가 멸망한 이후 다시 백제를 부활시키려했던 일련의 정치적 움직임을 뜻한다. 국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백제부흥운동은 멸망 직후 백제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을 일컫는 표현이지만, 후백제나 고려시대의 이연년 형제의 난까지 그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2. 목록



2.1. 일반적으로 말하는 백제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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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발단


660년 백제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한 이후 의자왕사비성에서 빠져나와 도망가자 사비성에선 부여태가 왕을 자칭한 다음 사비성을 지키려 했으나 함락되었고 며칠 후 웅진성까지 함락되면서 백제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는 신라와의 약조는 온데 간데 없이 씹어버린 뒤 백제의 영토를 혼자서 먹으려고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 도독부 및 백제도호부를 설치하게 된다. 다만 아직 이 단계에서는 백제 고토에 제대로 된 통치를 한 적은 없었고 당나라 군대가 딱히 신라군보다 더한 행패는 부렸는지 도저히 알 길은 없으나, 나당 연합군이 사비도성을 함락한 직후 단계에서 엄청난 학살, 약탈, 강간 등의 만행을 저질렀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도침, 복신 등과 오간 서신과 이후 선동에서 이들이 백제부흥의 대의로 주로 들고 있는 얘기는, 사비성에서 벌어진 참극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사비성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연합군의 손을 용케 벗어난 난민들이 백제 전역으로 달아나 소문을 퍼뜨린 게 봉기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걸로 추측된다.[2] 이에 백제의 잔존 세력들이 백제의 부흥을 시도하게 된다. 복신도침 등은 백제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고 왜#s-2에 있던 백제의 왕족 을 왕으로 추대하여 당나라와 맞서 싸웠다.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역은 초반에는 주로 금강 서부 지역 일대였으나, 부흥 운동이 점차 커지면서 신라 쪽 국경 인근 지역은 물론이고 전라도 일대도 모두 부흥군 쪽에 호응하게 된다. 사실 신라나 당이나 지배 조직은 어디까지나 명목이었지 세금이나 인력 징발은 나당전쟁 단계 이전까진 제대로 하질 못하고 있었으므로, 부흥군이 활동하지 않은 지역들 또한 소극적인 저항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부흥 운동의 당면한 목표는 사비와 웅진에 각기 백제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꾸려서 웅거한 당나라 잔존 군대의 축출 혹은 몰살이었고, 신라는 사비 함락 후 군대를 물려 백제와의 옛 국경 지대부터 먹어 들어가고 있었으니 부흥 운동의 주적은 당군이었던 게 맞지만, 신라 또한 초반에는 당군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했다. 백제 멸망 직후 당군이 웅진과 사비 등지에서 거의 고사 일보직전에 몰리고 아예 사비성을 포기해버릴 단계에선 신라도 당군을 꽤 적극적으로 돕기도 했다. 신라가 당군에 대해 품은 불신을 현실로 나타내서 지원에 소극적으로 나오게 되는 건, 당나라가 약조를 깨고 백제에 5도독부를 설치한 이후다. 일단 그 단계부터 신라는 당나라군과 직접 연합 작전을 펼치기를 꺼리고 주로 변경 지대에서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펼치며 해당 지역을 신라 직할 영토로 삼으며 실리를 챙겼다.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백제부흥운동 막판에 가서야 연합하여 본거지인 임존성 함락전을 펼치고 백강 전투를 치루게 된다.

2.1.2. 전개


백제부흥군은 초반에는 꽤 좋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약 10일만에 200개의 성을 탈환하는 기염을 토하는 한편 왜국과 힘을 합쳐 웅진도독부의 아성이자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을 포위하여 당나라 군대의 보급을 끊어버리고 당나라 군대가 철수를 고려하기까지 했던 저력을 보여주었기 때문. 이 단계에서 백제도호부는 설치된 지 1년도 못가서 없어지고 웅진도독부만 남게 된다. 고구려도 660년 말부터 뇌음신 장군을 지휘관으로 해서 신라 북쪽 한강 유역을 줄기차게 공격해(칠중성 전투, 북한산성 전투) 백제 땅에 신라군 정예가 쏠려있는 상황에서 후방 견제해주어 백제부흥군에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곧이어 당나라 본토에서 토벌군이 순차적으로 파견되면서 전세가 뒤바뀌기 시작한다. 당나라의 증원군은 육로가 아닌 수군으로 주로 파견되어 신속하게 백제 땅에 도착했다. 의자왕의 맏아들이자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도 당나라군의 지휘관이 되어 돌아와 유인궤와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토벌하는 당나라군을 이끌었다(...) 고구려도 661년 제2차 고구려-당 전쟁이 벌어지자 백제를 지원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 부흥군 내에서 부여풍과, 복신도침 등 부흥운동 지도자 간에 내분이 벌어졌다. 《일본서기》에는 부흥운동 세력의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부터 내분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3]

, 에치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4]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5]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 충남 당진군 신평면에 흐르는 신평천)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그러나 이 당시 부여풍은 실권이 거의 없이 복신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던 시절이라, 사실 저 천도안은 복신 혼자의 주장이었을 개연성이 높고, 부여풍의 뒷배였던 일본군 장수가 반대 의견을 내놓은 게 실은 부여풍의 의중이었을 소지가 높다. 부여풍과 복신 간의 대립은 부흥 운동의 노선 갈등이 원인이었다. 부여풍은 되도록 일본측에 외교력을 집중해서 일본의 원군을 더 많이 끌어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부여풍이 데려오는 일본 군세가 많아질수록 영향력이 떨어지는 복신 입장에서 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또 다른 원인이 있었는데, 일단 부여풍이 백제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장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천황에게 책봉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부흥군 장수들이 눈물을 흘리는 사건이 있었다. 부여풍이야 일본의 지원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필요악으로 여겼겠지만, 다른 부흥군 장수들이 보기엔 이건 백제사에서 단 한 번도 벌어진 바 없는, 그 아신왕도 광개토대왕한테 해본 바 없는 대굴욕이었다. 복신에게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신에게 문제는 없었는가?''' 복신은 백제에서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명망이 높았던 고승 도침을 살해하고 그 병력을 빼앗은 바 있었는데[6], 이렇다 할 구실도 없었고 순전히 그냥 본인의 권력욕과 야심이 이유였다. 이 사건 때문에 부흥군 내부의 결속이 흔들려 대전 동구 지방의 중요한 요새들을 죄다 신라에게 빼앗겨 원군과 식량 보급을 웅진의 당군에게 허락하는 바람에, 웅진 탈환에 실패하는 큰 군사적 실패를 겪은 바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나당 연합군에게도 잘 알려져 공개적으로도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판이었다. 부흥 운동 중간에 전남북 일대는 물론이고 충남에서도 적지 않은 성이 당군이나 신라군에게 순순히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건 이 원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결국 복신은 파견나온 왜측 지원군 장수들의 의견을 씹고 자기 뜻대로 피성(避城)[7]이란 곳을 부흥운동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천도한 직후에 김흠순천존이 이끄는 신라군이 백제 남부로 쳐들어와 지금의 전라북도 동부 및 경상남도 서부인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을 함락시키는 사태가 벌어지고,[8]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4개성을 신라에 빼앗긴 후 피성과 국경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위험했으므로 결국 2달만에 다시 주류성으로 환도하게 된다.[9]

(663년) 2월에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한 [백제의]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천 7십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2년(663) 봄 2월 乙酉 초하루 丙戌 백제가 달솔 김수(金受)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개주를 불태우고, 아울러 안덕(安德)[10]

등의 중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피성(避城)이 적과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주류성에 돌아와 살았으니, 타쿠츠(田來津)[11]가 헤아린 바와 같았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이런 진행 과정에서 복신이 먼저 선수쳐 풍왕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돼서 풍왕이 복신을 처형해버렸다. 기록에 의하면 복신이 (본인이) 병이 났다는 것을 핑계로 거짓말하면서 누워 있었다가 풍왕이 병문안을 오면 죽여버리려고 했다가, 오히려 발각되는 바람에 본인이 먼저 처형돼 버렸다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패턴은 복신이 도침을 죽인 실수와 정확히 일치했다. 바로 이 사건 직후 신라군이 대전 유성구-서구 일대에서 여전히 웅진으로의 보급을 방해하던 백제군 요새들을 모조리 함락하면서 오늘날의 대전 전체를 완전 장악했고, 그것은 옛 백제 핵심지에 웅거한 당군의 보급에 방해될 요소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뜻했다. 이후 풍왕은 왜의 구원군과 함께 나당연합군과 백강 전투를 치르는데, 이 백강 전투에 이와 같은 대실패가 크게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결국 백제부흥군은 대패하여 부여풍고구려로 망명하였고, 여자신 등은 왜군과 함께 왜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구심점인 왕이 사라지자 남아있던 다른 지역의 백제부흥군도 사기가 꺾이고, 부흥군도 서로 갈라져버려 따로 버티고 있던 흑치상지당나라로 망명하였으며 지수신은 홀로 부흥운동을 진행하다 고구려로 망명, 마지막까지 저항한 주류성임존성은 함락되고 부흥운동도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664년 3월 사비산성에서 백제부흥군 잔당들이 봉기를 일으켰지만, 웅진도독 부여융에게 진압당했다.[12]
일단 이 시점에서 백제부흥운동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고, 백제의 수도권은 당나라의 지배를 받는 웅진도독 부여융이 다스리고 그 외 백제 외곽의 각 지방은 신라군이 차지한 상태가 된다.[13] 남은 백제의 잔존세력은 왜국이나 고구려로 도주하거나 신라당나라의 괴뢰국이라 할 수 있는 웅진도독부에 붙어 나당전쟁에서 서로 싸우게 된다.

2.1.3. 부흥운동 소멸 후


나당전쟁 종결로 패배한 웅진도독부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일단 백제 왕실이 주도하는 백제 부흥운동은 끝나게 된다.[14]
신라는 백제인에게 신라 관등을 주고 신라 지방 지배층의 일부로 편입시켰다.[15] 문무왕 13년인 673년 백제인에게 서울과 지방[內外]의 벼슬을 주었는데 그 관등(官等)을 백제 본국의 벼슬과 견주어 주었다. 경관(京官)인 신라의 대나마(大奈麻)는 본국(백제)의 달솔(達率)이었으므로 대나마에 임명하였다.
흔히 백제 유민에게 주어진 최고 관등이 5두품이라는 점에서 진골까지 준 고구려계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주장은 일단 사실이다. 고구려계, 백제계 모두 본국의 벼슬과 견주어 벼슬은 주려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백제계 귀족들이 신라가 주는 벼슬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나라가 혹시 있을지 모를 부흥운동의 씨앗을 차단하기 위해 사비성에 있던 백제 왕족들은 모조리 당나라로 압송했고, 나머지 왕족 중 왜로 도피한 부류가 많았다지만 상당수는 탈출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후 떠나지 않고 머무르고 있었다. 백제부흥운동 당시 부여풍을 데려온 건 본토에 왕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자왕의 아들, 즉 정통성이 가장 강한 왕자가 그 뿐이어서지 사비성 함락 후 백제 왕족이나 귀족이 다 증발해선 아니었다. 나머지 고위 귀족들이 왜로 집단 도주했으나 그 규모가 수십만을 헤아린다는 건 근거 없는 추측이다. 이와 더불어 애초에 항해술이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고 정세가 혼란했던 당대의 상황을 감안하면 고위 귀족들을 포함한 수십만 명의 백제 유민이 중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신라를 피해 대한해협을 건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장 백강 전투만 봐도 왜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병선 천 척과 함께 투입한 병력의 최대 추정치는 4만, 최소 추정치는 2만 7천을 왔다갔다하고 있다. 꽤 많이 도주했지만 다는 못가고 상당수는 남은 게 확실하다. 신라가 부흥운동 진압 과정에서 기회만 되면 대단히 많은 백제인을 원신라 지역으로 사민시켰던 것도 특기할 일이다.
그렇다면 백제계 성씨들은 이후 다 어떻게 된 것일까? 통일신라 시대에 성씨를 쓸 수 있었던 건 6두품 이상이었는데, 남은 백제계 귀족이나 세력가들은 6두품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씨를 아예 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원래의 지위에 맞게 관품을 받은 건 저항하다가 항복해서 의자왕 시절 다스리던 고을의 태수로 그대로 임명받은 몇 가지 예외 외엔 거의 없었고, 나중가선 아예 백제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했더라도 품계는 5두품으로 한정되어 적용받게 된다. 백제 출신으로 신라에 투항하여 장군으로 맹활약한 상영(常永), 충상(忠常), 자간(自簡) 같은 백제인들은 과거 백제 16관등 중 1순위인 좌평이나 2순위인 달솔의 벼슬을 가지고 있었던 고위 귀족들이었음에도 투항 후 비교적 낮은 아찬이나 일길찬의 관등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마저도 이 확정된 조치에 비하면 꽤 우대받은 케이스일 정도. 고안승(高安勝), 고연무(高延武)를 따라 신라에 합류한 고구려 유민들도 신분을 막론하고 신라계가 아니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높은 관등을 제수받는 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직 가락국의 왕족인 김해 김씨들이 거리낌없이 신라 지배층에 사실상 수용된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2.1.4. 왕사


대수
왕호

재위기간
비고
32대
풍왕(豐王)

660년 ~ 663년
벡제 31대 의자왕을 계승했다고 자처. 풍장왕(豊障王)이라는 이칭이 존재함.


2.1.5. 관련인물



2.1.6. 관련항목



2.2. 후백제




2.2.1. 개요


신라는 백제 유민들을 체제의 한계 탓에 온전히 신라인으로 포섭하는 데는 끝내 실패했고 결국 백제는 망한지 약 230년 만에 다름아닌 신라 장수의 손으로 이 땅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견훤의 후백제는 단순히 편의상으로 붙이는 명칭에 지나지 않으며 당대의 정식 국호는 그냥 백제였다. 역사에 익숙하지 못해 한반도 국가들이 본디부터 하나였다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일쑤인 현대 한국인들은 이러한 망한 나라의 재등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나, 정체성이 완전히 죽지 않으면 망한 나라는 백 년이든 이백 년이든 다시 등장하며 오히려 이런 경우가 흔한 사례에 속한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다름아닌 신라도 망한지 백수십 년 뒤에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물론 진성여왕때 작은 도적때들의 반란조차 재대로 진압하지 못할 정도로 신라의 전국토에 걸치는 세력은 약화되어서 견훤의 후백제 건국이 가능했던 건 맞지만, 그러한 중앙 정권에 대한 도전이 왜 망한 나라의 이름을 붙여서 일어났어야 했는가? 그때까지도 유민 의식이 불식되지 못한 채 그 영역 속에 깊게 남아 있었기에 설득력이 있어서 다름아닌 조상 때부터 신라인인 견훤이 야심을 그러한 식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16] 백제 유민들의 부흥 운동과는 '전혀 시대적으로 다른 것'이란 견해는 망한 나라를 부활시키려면 모름지기 망한지 시간이 얼마 안 지나야 한다는 대단히 자의적인 전제를 깔고 하는 주장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신라 정부에 크게 대항한다면 구태여 백제의 이름을 차용하지 않고도 방법은 많았는데 굳이 그걸 택하는 것 자체가 백제인, 고구려인 등이 완전히 신라에 통합되지 못했음을 상징한다.
물론 국적이나 소속만으로 보면 후백제의 구성원은 전부 통일신라인, 후고구려의 구성원은 전부 통일신라인이었던 건 맞지만,[17] 그런 식이면 해방 직후 온전한 '조선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다 국적이 일본 제국인 사람들이었다. 동로마 제국에게서 이백 년만에 나라를 찾은 불가리아는? 현상적인 국적만으로 보면 주모자는 그리스계였던 데다 주민은 얼마 전까지 동로마군에 복무하기도 했던 불가리아계 동로마인들이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어디까지나 원나라 사람이었으며 주원장 자신도 스스로가 원나라 황실에게 나름의 은혜를 입었다고 말했으나, 그렇다고 한족 중흥을 포기하진 않았다. 역사는 한 번 주역이 플레이에 실패하면 끝나는 오락실 게임 같은 게 아니고, 후세 누군가의 괴이한 국적 관념으로 재단될 수 있지도 않다.

2.2.2. 후백제와 백제 부흥 운동과의 연관성 문제



통일신라는 다른 국가에선 유례없는 민족 융화 정책을 실시하였으니 후백제는 백제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저 신라인들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더 생각해볼 내용이다.그건 제대로 된 역사 해석이 아니며 그러한 조치가 다른 국가에서 유례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세계사적인 사례로 봤을 때는 틀린 얘기다.

어느 나라나 타국을 지배해서 완전히 영역으로 삼고 싶으면 본래부터의 기득권층의 반발은 잠깐 억누르거나 설득하면서 해당 국가의 지배층에게 상당한 특권과 이득을 보장한다. 페르시아도 로마도, 헬레니즘 제국은 물론이고 그 불가리아 제국도 부활에 성공한 직후 그리스계에게 딱히 축출과 보복을 단행하는 바는 없었다. 일본 제국도 조선의 왕족과 기득권층에겐 일단 병탄에 성공한 후 대우는 어떠했는가?
왕족 일부는 그렇다치더라도 모든 지배층이 타국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는 가설은 성립할 수가 없음도 생각해볼 부분이다. 당나라보다 더 악독하게 현지 지배층의 소멸에 열을 올린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의 경우도 이스라엘 왕국이나 유다 왕국에서 옮길 수 있었던 비율은 겨우 20%에 불과했고 상류층이나 지방 지배층도 상당 부분 세력을 유지했던 게 고고학적, 문헌적 조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런 와중인데 신라에서 6두품 정도는 줄 수 있었던 백제 귀족층이 아예 없었다고 단정하는 건 그냥 틀린 소리며, 게다가 그나마도 그런 획기적인 조치들은 죄다 문무왕 때 일인 건 생각해보면서 사료를 해석해야 한다. 그러한 조치와 기조가 통일신라 내내 지속이 되었는가? 김유신 계열마저도 결국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는데 이후 옛 백제나 옛 고구려 지역에서 성장하는 호족 세력이 신라라는 국가의 향방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는 할 수 있었는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후백제가 생기고 태봉이 일어났던 것이며 다름아닌 중앙 정계에서 밀린 신라의 옛 김씨, 박씨 왕족들마저 신라를 저버리고 망한 나라들에게 충성하는 길을 택했는데 이렇게 지방에 이식된 옛 왕족마저 본국을 버리는 경우가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드문 케이스다. 역사의 섵부른 해석이 때문에 이렇게 위험하다.[18]

2.3. 이연년 형제의 난



후백제가 멸망하고 300년이 지난 후, 여몽전쟁이 한창이던 고려 1236년에 전라도 담양[19]에서 이연년 형제가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경손의 고려 관군에게 진압되었고, 이를 마지막으로 백제부흥운동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최씨 무신정권의 수탈이었으나, 그 명분이 백제 부흥으로 나타났다는 건 여전히 백제 유민 의식이 남아있었음을 나타낸다.[20] 물론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지방 세력을 나름대로 인정하였으며 오히려 신라보다도 삼한일통의 대의에 충실했기에 이 백제 부흥운동은 그 전에 일어난 두 시기의 백제 부흥운동과 비교하면 성공과 호응도가 확실히 처져 단발로 끝나버렸지만 그걸 이유로 부흥운동이 아니라곤 할 수 없다. 어차피 모든 부흥운동은 지배국의 학정이나 정당하지 못한 통치 행위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직접적인 원인은, 이연년 형제의 조상이 후백제에서 견훤에게 후대를 받았으나 후백제가 망한 후론 바로 그 이유로 별 재미를 보지 못했음이 주요 이유로 지적된다. 굳이 말하면 직접적인 정체성은 후백제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후백제는 분명히 국호가 백제였고, 백제부흥운동의 결과로 통일신라에게서 떨어져나가 재건된 백제였기에 역시 백제유민의식이 이유 중 하나라고 보는 게 옳겠다.

3. 유사사례



4. 같이보기



[1] 664년 사비성 봉기도 있었지만 백제부흥운동 지도부 자체는 백강구 전투로 괴멸되어버렸기에 663년을 종결 시점으로 본다.[2] 충청남도백제문화연구원 백제 멸망 편 참조[3] 이름이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4] 풀네임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일본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다. 타쿠츠는 후에 백강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5] 주류성(周留城)을 가리킨다.[6] 물론 부여풍에게도 보고도 없이 독단으로.[7]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등으로 비정된다.[8] 백제부흥군의 4개성을 신라군이 점령한 것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모두 나온다.[9] 대가야가 예전에 백제가 어려울 때 진출했던 그 영역들이기도 했다.[10] 현재 위치는 불명이나 백제 5방중 한곳인 덕안(德安)의 오기로 보고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으로 추정하기도 한다.[11] 왜군을 이끌고 백제부흥운동에 참전한 왜측 장수.[12] 3월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사비산성(泗沘山城: 현재 부소산성)에 머물면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웅진(熊津) 도독(都督)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깨뜨렸다.(三月, 百濟殘衆據泗沘山城叛 , 熊州都督發兵, 攻破之. -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6 문무왕)[13] 정확한 정세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지금의 대전광역시 와 그 주변 그리고 전라북도 상당부분은 부흥전쟁 직후 신라 점령지였다. 이후 나당전쟁 때 당군을 몰아내면서 백제 영역 전체를 신라가 차지하게 된다.[14] 이후 웅진도독부의 친당 백제부흥세력은 고구려 건안성에서 자치집단인 소백제로 잔존하다가 발해 선왕소고구려랑 더불어 발해에 흡수된다.[15] 삼국사기 직관지 신라 외관, 국보 106호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 명문[16] 신빙성은 낮지만 견훤의 후손이 지은 『이비가기(李碑家記)』란 책의 경우 견훤이 아예 진흥왕의 먼 후손으로 나온다.[17] 후고구려의 경우 후에 말갈인, 발해인 등도 상당수 받아들이게 된다.[18] 나말여초 정치제도사, 충청남도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 중 백제 유민 권 참조. 다만 후자는 비매품이기에 도서관에서 참조해야 한다.[19]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20] 이 난은 백제~후백제의 중심지였던 충남ㆍ전북 일대가 아닌 전남 끄트머리인 담양에서 발생했다. 전라도 내에서도 전북과 달리 전남은 백제와 전혀 관계없다는 일부의 인식을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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