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미 요시요리
里見義頼
(1543 ~ 1587. 11. 26?)
전국시대의 다이묘.
사토미 요시타카의 아들이지만 맏형인 사토미 요시히로가 적자를 낳지 못하자 요시히로의 양자가 되었다고 하며, 근래의 연구에는 요시히로의 서장자였다는 설도 있다. 본명은 요시츠구(義継), 별명은 타로(太郎).
요시요리는 자신에게 아와, 사토미 요시시게에게는 카즈사를 주기로 한 분할 상속 때문에 불만을 품어 요시히로와 험악한 사이가 되었는데, 1578년에 요시히로가 사망하자 요시시게와 상속권과 영토를 두고 대립하여 호죠 우지마사의 지원을 받아 1580년에 카즈사를 함락하여 요시시게를 강제로 출가시키면서 사토미 가문을 계승하였다. 1581년에 미사키 노리토키의 반란을 진압하여 지배를 확립하면서 다케다 가문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 동맹으로 다케다 가문과 동맹을 맺은 사타케 가문이나 오유미 구보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와의 동맹에 가세하게 되어 요시아키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리아츠에게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받아서 요시요리(義頼)로 개명한다.
이 덕분에 대 후호죠씨의 동맹이 성립되었으며 오다, 도쿠가와 연합의 공격으로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것으로 이 동맹이 파탄되었으며, 우지마사와 싸워서 격퇴하였다. 1585년에 히데요시가 총무사령을 발령하여 10월에 히데요시의 사자가 파견되자 각종 물품을 진상하여 히데요시에게 따를 것을 나타냈으며, 1588년에도 히데요시에게 진상하여 따를 것임을 나타냈다.
1587년에 오카모토 성에서 병사했는데, 후계자인 사토미 요시야스가 어렸기 때문에 그 죽음을 덮을 가능성이 있어서 10월 20일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무덤은 자신이 아와국(현재는 치바현) 미나미보소시에 창건한 절인 코간지(光巌寺)의 북쪽에 있다고 하며, 이 무덤은 미나미보소시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태합입지전에서 등장하나 능력치는 아버지, 형보다도 구리다. 어째선지 이름은 변경없이 등장때부터 쭉 요시요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