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영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서재영은 1877년경 함경북도 성진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진군의 욱정교회 집사였는데, 1919년 2월 중순 함흥 학생단체에서 활동하던 박승봉(朴承鳳)이 성진군에 찾아와서 민족 거사가 조만간 있을 것을 알렸다. 이에 성진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유지들은 그레이슨 목사 집에서 회합을 열고 성진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서재영은 여러 동지들과 함께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제작, 배포했다.
그 후 1919년 3월 10일 오전 10시, 제동병원 광장에 욱정교회 교인을 비롯해 5,000명이 모였다. 서재영은 그들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했다. 오후 3시 반경 기독교에서 경영하는 보신학교 학생 40명도 일본인 상가, 경찰서, 우체국 앞에서 만세 시위를 시작했고, 기독교도 200명도 학생들의 시위에 가담했다. 이에 일본 경찰은 무력으로 이들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군중은 투석으로 대응했다.
3월 11일 아침, 일본인 경찰이 거리로 들어와 무차별 사격을 가해 수 명이 피살되고 중경상자가 속출했다. 이에 시민들이 분노해 다시 뭉쳤고 오전 10시경 제동병원 앞에서 700명의 군중이 모여 일제의 무차별 사격을 성토했다. 이에 일본 경찰은 이들에게 다시 발포했고, 군중은 결국 흩어졌다. 이후 시위를 주동한 죄로 체포된 서재영은 1919년 6월 28일 1심과 9월 2일 2심 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출반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고, 이후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의 생애 및 사망년도와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서재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