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루시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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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8년 12월 15일 서인도 제도 세인트 루시아 섬 앞바다에서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이 맞붙은 전투. 영국 해군이 승리했다.
2. 배경
1778년 9월 7일, 프랑스의 마르트니크 총독 부이예 후작은 도미니카 섬을 공략해 카리브 해에서의 영국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이후 11월 4일 프랑스 해군 제독 데스탱 백작 장 바티스트 샤를 앙리 엑토르가 이끄는 프랑스 해군이 메사추세츠 주 보스턴 항구에서 서인도 제도를 향해 항해했다. 같은 날, 영국은 서인도 제도의 패권을 되찾기 위해 윌리엄 호담 준장이 이끄는 영국 함대를 파견했다. 호담 준장의 영국 함대는 전열함 5척 및 몇몇 프리깃 함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제임스 그랜트 소령 휘하 육군 5천 명을 태운 수송함 59척을 호위했다.
이후 영국 함대는 프랑스 함대가 폭풍우에 시달리는 틈을 타 먼저 카리브 해에 도착했다. 리워드 섬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해군 사령관 사무엘 베링턴 제독은 12월 10일 호담 준장과 합세했고, 12월 12일 세인트 루시아 섬으로 향했다. 12월 13일 저녁과 14일 아침, 제임스 그랜트 소장이 이끄는 영국 육군과 로버트 프레스콧 준장 휘하 현지 민병대가 세인트루시아 섬에 상륙했다. 이후 그랜트와 프레스콧은 세인트루시아 만 주변의 고지를 장악했고, 다음날엔 망루를 장악하고 수비대를 밀림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던 12월 14일 데스탱 제독 휘하 프랑스 함대가 근처에 이르렀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베링턴 제독은 전 함대를 이끌고 적을 상대하러 출격했다. 이리하여 서인도 제도의 패권을 둘러싼 프랑스와 영국의 해전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 지휘관: 데스탱 백작 장 바티스트 샤를 앙리 엑토르
- 병력: 전열함 12척.
3.2. 영국군
- 지휘관: 사무엘 베링턴 제독
- 병력: 전열함 7척.
4. 전투 경과
베링턴 제독은 12월 14일 밤 중에 수송선 50여 척을 그란데 쿨-데-삭 만으로 옮기고 전열함 7척으로 하여금 만 입구를 가로질러 전투 대형을 형성하게 했다. 이후 12월 15일 아침, 데스탱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만으로 접근했다. 데스탱 백작은 적이 아직 대비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기함 랑그도크 호를 선두에 세워 만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이미 만 입구에 포대를 설치했고, 영국 포병대가 쏜 대포가 랑그도크 호에 직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황급히 후방으로 물려난 데스탱 백작은 11시 30분에 10척의 전열함을 투입시켰지만, 그들 역시 영국 함대의 결연한 대응과 육상에서의 적 포병대의 공세에 밀려 패퇴했다.
데스탱 백작은 오후 4시에 다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이번엔 전열함 12척 모두를 동원해 프링스 웨일지 호가 이끄는 영국 함대 전투 대형의 북쪽 끝 지점에 집중 공격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결연한 의지로 버텼고, 보이네 호의 함장 허버트 소이어 대위는 전투 도중 중상을 입었지만 갑판을 떠나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배를 지휘했다. 랑그도크 호 함장 피에르 안드레 수패랭 대위는 데스탱 백작에게 아군의 함선 수가 적보다 많으니 적 함선에 바짝 다가가서 백병전을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데스탱 백작은 피해가 커질 것을 우려해 이를 거부했다. 결국 그의 함대는 적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데스탱 백작은 영국군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6마일 떨어진 지점인 그로스 만까지 항해해 저녁 동안 7천 명의 육군 병력을 상륙시켰다. 그 후 그는 영국군을 상대로 3차례 공세를 가했지만 적의 방어에 가로막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프랑스 육군은 거의 천 명의 사상자를 내며 철수했다. 결국 데스탱 백작은 더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12월 29일 마르티니크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세인트 루시아 해전은 영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영국군은 세인트루시아 해전에서 23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프랑스군은 85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세인트 루시아 섬은 데스탱 백작이 철수한 12월 29일에 영국군에게 접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