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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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독립 전쟁'''은 1775년부터 1783년까지 8년간 진행된 대영제국과 13개 식민지 사이의 전쟁이다.오늘은 어떤 중대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지 3세 - '''1776년 7월 4일'''[7]
"미국 독립 혁명" 혹은 더 간단하게 "미국 혁명"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결과로 13개 식민지가 미국이라는 신생국으로 독립했으며 명예혁명,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근현대 민주주의 체제 성립의 뿌리가 된 사건 중 하나로 뽑힌다.
2. 발단
근본적인 원인은 식민지와 본국 간의 갈등이었다. 본래 본국과 북미 식민지의 사이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북미 식민지는 영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식민지 개척을 했던 19세기와는 양상이 달랐다. 북미 식민지에 대한 대우는 인도 제국 같은 식민지라기보다는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처럼 자국민이 가서 개척한 자치령과 유사했다.
물론 16세기의 로어노크 식민지 이주시도나 17세기의 제임스타운(Jamestown) 개척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성공한 식민 이주는 메이플라워호로 이주한 청교도들 이후였다. 본국은 북미 식민지에 총독을 임명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총독들은 본국 출신보다는 북미 식민지 태생의 이민 2세대나 3세대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각 식민지들은 영국과 국왕에 충성한다는 조건하에서 자체적으로 의회와 주 정부를 구성하여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으며 영국도 이러한 방식으로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이 편했다.
그러나 영국의 중상주의 정책을 보조하기 위해 제정된 '''항해법'''이 점차 확대되는 식민지였던 미국의 경제에 족쇄로 작용하자, 미국의 식자층과 상인층을 바탕으로 반영감정과 혁명의 씨앗이 파종되었고, 1761년에는 이러한 경제권 제약에 대한 소송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물론 아직까지 이러한 움직임은 대중의 이해나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이렇게 파종된 씨앗은 이후 큰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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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미국 혁명의 시작
그러다가 '프랑스-인디언 전쟁'(프랜치-인디언 전쟁, French and Indian War)[8] 이 일어나자 북미 식민지와 영국 본국은 프랑스에 맞서 일치단결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본국과 식민지가 단결하여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양측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7년 전쟁에 포함되는 전역 중의 하나였고, 비록 영국이 승리했을지언정 7년 내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느라 재정이 버거운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이 전쟁에만 든 전비가 무려 650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면 수백억에서 수천억 파운드까지 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비용이다.[9]
이러한 전쟁이 또 반복되었다가는 영국의 재정상황이 버티지 못하기에, 맨 먼저 1763년 미국 식민지인들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의 확장을 금지시키는 포고문이 발표되어, 식민지 대중들에게 반영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또한, 재정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영국의회는 1764년 설탕조례(Sugar Act)를 제정했고 이듬해인 1765년에는 인지조례(Stamp Act)까지 통과시켰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지조례였는데 '''식민지에 유통되는 모든 인쇄된 종이에 3페니의 인지를 붙여야 한다'''라는 게 법안의 핵심이었다.[10]
식민지인들은 지난 전쟁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공헌했는데 돌아오는 보답이 이주제한과 세금이냐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런 반발의 배경에는 기존 세금이 간접세였던 것과 달리 인지조례가 제정되어 시행되는 인지세는 직접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라 대중들이 보다 직접 느낄 수 있는 세금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 앞서 제정된 서부로의 확장 금지 포고로 인해 돈을 더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까지 막혀버렸으니, 두 가지의 시너지는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반대로 영국은 식민지인들이 전쟁에서 거의 한 게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공을 영국군에게 돌렸다. 때문에 인지세는 "한 게 없으면 세금이나 내라"는 의도였다.[11]
식민지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식민지 자치 및 식민지인의 권리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결국 인지세에 반대하면서 식민지인들이 내놓은 말이 그 유명한 '''"대표 없는 곳엔 세금도 없다!"'''[12] 였다.
선거와 세금 문제로 연일 격렬한 항의와 시위가 벌어졌고, 북미 식민지의 거상들은 자신들과 거래하는 영국 상인들에게 '''인지세 폐지 안 해주면 너희들과 장사 안 할 거임'''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북미와의 교역으로 이득을 많이 보고 있던 영국 상인들도 의회에 인지조례를 폐지해달라고 사정했고 결국 인지조례는 곧 철폐됐지만 불만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은 영국 의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식민지인들의 조직적 반발로 의회의 결정이 되돌려지자 영국 의회에서는 "이놈들 봐라?"라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이러자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물리는 법안을 잇달아 만들기 시작했다. 1770년에 이런 경향이 매우 강했는데 이를 "타운센드 법안"이라 한다. 타운센드 법안이 통과되자 식민지에서는 다시금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다시 법안은 폐기되었지만, 기묘하게도 '''홍차에 붙인 세금만은 폐지되지 않았다'''.
사실 위에서 말한 식민지 의회 대표를 보내는 방안이 아니더라도 식민지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예를 들어 국회에 일종의 로비 채널인 북미 식민지 대표단 같은 옵저버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외무 장관을 임명할 때 북미 식민지 여론을 고려하거나 혹은 아예 북미 식민지 장관을 신설하고 명망있는 북미 식민지인을 초빙해 임명하여 북미 식민지의 이해관계를 정부 내각에 반영할 수 있는 채널만 만들어줬어도 당장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영국은 거꾸로 '괘씸죄'를 적용하기 시작했고, 외무 장관과 주요 내각에 북미 식민지에 강경 입장인 인물들을 임명했다. 당연히 시간이 갈 수록 영국과 북미 식민지 간의 갈등이 커져서 버티기 힘든 수준에 이르게 된다.[13]
물론 이런 갈등을 사람들이 넋 놓고 바라보지는 않았다. 어쨌든 북미 식민지를 유지하는 게 영국으로서도 이득이었다. 당시 북미 식민지의 GDP는 대영제국 전체 GDP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를 자랑했다. 1772년 기준으로 대영제국 본국과 13개 식민지 GDP가 '''엇비슷한 판'''이었다. 미국이 독립에 성공하자마자, 미국이 영국의 GDP를 추월(1794년)하고 만다. 하여튼 13개 식민지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유지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영국 수상을 지낸 바 있던 윌리엄 피트는 영국에 체류중이던 식민지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과 접촉하면서 어떻게든 타협점을 모색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당시 수상이던 프레데릭 노스는 조지 3세의 동의를 얻어 식민지에 강경책을 펴려 했다.
거기다 계속 서부로 진출하려는 식민지인들과 이로 인해 벌어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충돌로 인한 비용 지출을 막기 위해 영국이 이를 저지함에 따라 갈등이 격화되는 와중 보스턴 학살 사건(Boston Massacre, 1770.3.5.)으로 인해 이때까지만 해도 소수 세력이었던 독립파들이 세력을 키우게 되었고[14] 결국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1773.12.16.)을 일으키게 된다. 이 사건으로 제대로 열받은 영국은 군대를 파병했고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 자치령 폐기 선언'''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는 1774년부터 두 번에 걸친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지금 미국 의회의 시초격이다). 대륙회의는 사실 첨엔 어떻게든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자는 입장으로 모인 자리였지만, 영국의 입장은 단호했고 독립파와 왕당파 사이에서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미국은 전혀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거친 자연환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군대를 제대로 키울 여력도 되지 않았던 데다가 식민지인들 중 독립에 반대하거나 전쟁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거기다 전쟁 상대는 대영제국이었다. 물론 19세기의 막강한 위세가 18세기에도 그러했던 것은 아니고 다른 유럽 열강의 막대한 견제를 받았으나, 이미 세계에서 전쟁을 치르던 영국군과 식민지인들의 경력 차이는 비길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영국 본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각지에서 민병대가 조직되기는 했으나 민병대는 본질적으로 '''내 고향만 지킨다'''라는 생각이 강했다. 게다가 이들을 규합해서 이끌만한 세력 주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일부에선 당시 미국인들이 일종의 '''억지'''를 부렸다는 주장도 한다. 요지는 당시 많은 영국 노동자들이 어렵던 상황에 비해 아메리카 대륙은 비교적 풍족한 곳이었다는 것. 당시 한 통계에 따르면 영국 리버풀이나 맨체스터보다 미국 식민지 사람들의 수입이 무려 20배나 높았다고 한다.[15] 랍스타가 남아돌았다는 일명 랍스타 전설도 있는데, 다만 당시만 해도 랍스타는 현재의 조리법이 널리 퍼지기 전인데다 국물을 갖다버려서 맛없는 저급 식재료로 취급받던 요리긴 했다. 지금도 미국 북동부에서는 널린 게 랍스타고, 현재도 매사추세츠나 메인 등의 지방에서는 랍스타가 매우 싼 편이다.
인지조례의 경우 단 '''한 푼'''도 걷어들이지 못했으며, 악명 높던 타운센드 법도 3년 동안 고작 265파운드 정도밖에 걷지 못했다. 거기에다 보스턴 차 사건은 항목에서도 나와 있듯 홍차조례로 낮아진 가격에 불만을 품은 밀수업자들의 불법 행위였으며, 보스턴 학살 사건도 당시 분위기상 그들이 심리적으로 몰려있어 벌어진 우발적 사태로 인식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눈뭉치를 영국군에게 던졌다고 한다. 게다가 이 영국군[16] 은 그날 밤 자신들의 몇 배나 되는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조롱과 협박을 당했으며,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당시 변호사)는 법원에서 살인 혐의로 기소된 영국 병사들을 기꺼이 변호했다. 기소자 중 두 명을 제외한 기소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두 명도 엄지손가락에 낙인이 찍히는 (당시 기준으로) 가벼운 형벌로 끝났다.
이때만 해도 미국인들은 사실 독립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었는데, 이는 토마스 페인이 미국 독립의 이득과 정당성을 주장한 그 유명한 소책자 <상식>을 내기 전까지 대중적인 분위기로 받아들여졌고, 워싱턴조차 반역은 입에도 내지 않았다. 그 유명한 "이것이 반역이라면 최대한 활용하자(패트릭 헨리)" 같은 발언은 지극히 후대에 와서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 물론 시민권 향상과 아메리카-유럽 대륙의 분리 등 역사적 흐름을 봤을 때 이때가 아니더라도 언젠간 터질 일이었긴 했지만. 원래 수많은 역사는 내면에 감춰져있던 사회, 사상적 흐름들이 우연이 겹쳐지면서 터지는 것이기도 하다.
3.2. 독립 전쟁의 시작: 계란으로 바위치기
3.2.1. 1775년, 렉싱턴-콩코드 전투
독립전쟁의 시작은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주에서 시작되었다. 보스턴 사람들은 영국의 매사추세츠주 자치령 폐기에 격분했고 영국군에게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각지에서 민병대가 우후죽순으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은 토마스 게이지가 이끄는 4개 연대가 보스턴 시내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보스턴 밖까지 통솔권이 미치지는 못했다.
결국 토마스 게이지는 보스턴을 위협하는 민병대부터 제압하기로 결심하고 1775년 4월 18일, 700명의 병력을 파견해 콩코드에 있는 민병대의 무기창고를 제압하고 민병대를 무장 해제시키도록 지시했다. 독립파에 속했던 폴 리비어는 영국군의 움직임을 알고서는 말을 타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든 채로 렉싱턴으로 가서 영국군이 쳐들어온다고 알려주었다.[17] 이에 렉싱턴의 민병대 77명이 소집되어 영국군을 기다렸다.
4월 19일 아침, 영국군이 렉싱턴의 초지에 이르러 민병대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실상 이 렉싱턴에서의 교전이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간주된다(렉싱턴-콩코드 전투). 영국군은 렉싱턴을 지나 콩코드 근처 노스브릿지에서 민병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민병대에게 밀려 보스턴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하는 영국군을 각지에서 몰려들어온 민병대들이 공격했고 영국군은 궤멸직전에 보스턴 시내에서 지원군을 보내 겨우 보스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민병대들은 이제 보스턴 시내를 탈환하려는 구상을 하기에 이르렀다(보스턴 포위전). 대륙의회도 결국 싸움을 피할수 없음을 깨닫고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을 규합하게 했다. 영국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윌리엄 하우가 이끄는 4500명의 원군을 파병했다.
3.2.2. 1775년, 보스턴 공방전
1775년 7월, 조지 워싱턴이 보스턴에 도착했다.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은 '''애국심과 총만 있던''' 오합지졸들이었고 워싱턴은 이런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최강 전력인 영국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18] 비록 우발적으로 동원된 민병대의 특성상 무기, 탄약, 식량 등의 보급 문제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포의 부족, 또한 치열한 시가전에서 발생할 여러 불확실성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보스턴 진격을 포기했지만, 민병대가 규율이나 전투 경험이 부족하긴 해도 애국심으로 강화된 숫적우세가 영국군의 숙련과 규율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증명했기 때문에 영국군 역시 보스턴에서 치고 나올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결국 지루한 장기 대치 끝에, 영국군에 대한 도발로 일어난 벙커힐 전투[19] 후 영국은 보스턴 포기를 저울질하기 시작했고, 학수 고대하던 대포를 확보한 대륙군이 다시 한 번 도체스터 고지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도발하자 영국은 마침내 보스턴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양측 사령관의 암묵적인 신사 협정[20] 에 따라 영국군이 함대를 이용해 해상으로 철수한 후 대륙군이 진입하여 보스턴을 해방시켰다.
3.2.3. 1776년, 독립선언과 연전연패의 대륙군에게 찾아온 열흘의 기적
대륙회의가 대륙군을 조직해 영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으니 정식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해야한다는 얘기가 회의 내에서도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불을 붙인 것이 1776년 1월 '''토머스 페인이 발표한 상식이라는 책'''이었다.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한 상식은 베스트셀러가 되며 13개 식민지에서 독립 여론을 불붙였고 이에 대륙회의는 격렬한 논의 끝에 1776년 7월 2일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7월 4일 발표하면서 마침내 13개 식민지는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대륙회의가 야심차게 독립을 선언한 것과 달리 1775년 말 대륙의회가 주관한 캐나다 원정이 처참한 실패로 끝난(퀘벡 전투) 후, 대륙군은 대대적으로 전력을 보강한 영국군의 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1776년 8월 27일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한 조지 워싱턴은 뉴욕을 영국군에게 내줘야 했고, 9월 16일 할렘 하인츠 전투에서 적의 추격을 격퇴했지만 10월 28일 화이트 플래인스 전투, 11월 17일 워싱턴 요새 공방전 등 연이은 전투에서 연전연패했다. 사실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기보다는, 우물쭈물 하다가 뉴욕시에서 영국군 포위망에 갇혀서 아작날 뻔했던 게 더 큰 문제였다. 처참한 패배를 한 번이라도 당하면, 국력이 미약한 미국으로서는 독립 운동을 더 이상 지속할 여력이 없기 때문. 만약 베네딕트 아놀드가 캐나다에서 남하하는 영국군을 발쿠르 섬 전투를 통해 묶어놓지 않았다면, 대륙군은 늦어도 1777년 즈음에 패망했을 것이다. 게다가 뉴욕에서 후퇴할 때도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학 수밖에 없는 행운들이 연달아 겹쳐서 무사 퇴각이 가능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 직면한 조지 워싱턴 사령관은 물자 보급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영국의 약점을 이용,[21] 전투를 피하고 계속 시간을 장기간 끄는 소모전으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조지 워싱턴에게도 큰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대륙군(민병대)의 복무기간이었다. 특히 1776년에서는 단 한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했고 1776년 12월 22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민병대는 복무기간이 정해져 있으며 그 기간이 끝나면 자신들의 고향을 돌아갔다. 그 기간이 불과 10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전황이 나빳고 당연히 복무 연장에 동의할 병사들은 없어 보였다. 따라서 "사실상 대륙군의 해산날"인 12월 31일은 독립파와 조지 워싱턴 모두에게 최후의 날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 조지 워싱턴의 과감함 +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 작전이 기적처럼 이뤄지는 운이 합쳐져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조지 워싱턴의 급박한 열흘
이 전투가 바로 트렌턴 전투로 당시에는 통상적으로 겨울이 되면 연간 전쟁 계획은 종료되어 군대는 겨울 숙영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영국군은 병력을 나누어 여기저기에 나누어 배치해 겨울 숙영 상태에 들어갔고 이 점을 이용해 조지 워싱턴은 야간에 병력을 도하시켜 트랜턴에서 주둔하던 영국군 소속의 독일 헤센 용병을 기습해 성공한다. 큰 승리는 아니었지만 연전 연패를 거두던 조지 워싱턴과 대륙군의 입장에서는 단비와 같은 승리였으며 이 승리로 인해 민병대들을 더 붙잡아 둘수 있었다. 그리고 트랜턴 전투 결과에 화가 나 병력을 집결시켜 조지 워싱턴을 쫓아 나온 주력 영국군을 본 조지 워싱턴이 그들의 뒤를 우회해 프린스턴을 수비하기 위해 남겨진 영국군을 다시 기습하게 되는데 이 전투가 바로 프린스턴 전투다.
이 두 전투들은 연이은 패배와 계속된 쫓겨다님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대륙군과 식민지인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3.2.4. 1777년, 새러토가 전투
1777년 봄, 영국 정부는 캐나다에 주둔한 군대과 뉴욕에 주둔한 군대를 연계해 대륙군을 궤멸시킬 작전을 구상했다. 뉴욕의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 소장은 대륙의회가 있는 필라델피아를 단시일에 공략하려 했고, 캐나다 방면군 사령관 존 버고인 소장은 올버니에서 뉴욕까지 이르는 허드슨 강 유역 전역을 장악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두 장성들로부터 상이한 반란 진압 계획을 접수받은 식민지 국무장관 조지 사크빌은 두 계획 모두 승낙하고 동시에 진행하게 했다.
정부로부터 승인을 얻어낸 존 버고인 장군은 1777년 6월에 캐나다에서 출발했다. 그는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채플레인 호수에서 올버니로 향했고, 베리 세인트 리저 장군이 이끄는 분견대 2,000명을 모호크 계곡을 통해 남하하여 올버니에서 자신과 합세하게 했다. 이후 그는 7월 초 전쟁 초반 상실했던 티콘데로가 요새를 탈환했다. 그러나 대륙군이 나무를 베고 길을 막았기 때문에 이동이 지연되었고, 보급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했다가 베닝턴 전투에서 대패해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한편 배리 세인트 리저 장군이 이끄는 분견대 2,000명은 모호크 고개를 지나가다가 스탠윅스 요새 공방전을 치렀다. 이에 니콜라스 허키머가 이끄는 뉴욕 민병대 800명이 스탠윅스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왔으나 8월 6일 오리스카니 전투에서 영국군의 매복에 걸려 패퇴하고 허키머는 전사했다. 하지만 그 사이 스탠윅스 요새 수비병들이 자신들을 포위하던 적 숙영지를 습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베네딕트 아놀드가 자신의 병력이 실제보다 훨씬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기만책을 쓰자, 여기에 넘어간 리저 장군은 캐나다로 퇴각했다. 이로 인해 존 버고인 장군은 아무런 증원 병력 없이 적지 한복판에 노출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 무렵, 윌리엄 하우 장군은 한동안 모리스타운에 주둔한 워싱턴의 대륙군과 대치하다가 7월 23일 뉴욕의 영국 함대에 병력을 싣고 34일 동안 항해해 필라델피아에서 남서쪽으로 90km 떨어진 체사피크 만의 엘크튼 근처에 1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워싱턴은 급히 11,000명의 대륙군을 이끌고 필라델피아로 달려가면서 존 설리반 소장의 별동대에게 본대와 합류할 것을 요구했지만, 설리반 소장은 하우가 떠난 틈을 타 뉴욕을 탈환하기로 하고 8월 22일 스태튼 아일랜드 전투를 치렀지만 패배해 뉴욕 탈환에 실패했다.
이후 워싱턴은 필라델피아로 진군하는 영국군을 저지하려 노력했지만, 9월 11일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패배한 뒤 9월 25일 영국군이 필라델피아에 입성하는 걸 허용했고, 10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저먼타운에 주둔한 영국군을 급습했지만(저먼타운 전투) 역시 패배했다. 워싱턴은 남은 병력을 수습한 뒤 포지 계곡으로 이동해 겨울 숙영에 들어갔고, 하우는 반란군의 본거지인 필라델피아를 점령한 공적을 세운 것에 만족하며 필라델피아에 머물렀다.
그러나 하우가 필라델피아에서 승리감에 취해 있을 때, 존 버고인의 영국군은 적지에서 고립되었다. 당초 식민지 국무장관 조지 사크빌은 존 버고인과 윌리엄 하우 장군이 제출한 두 계획을 모두 승인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사크빌은 정작 하우에게 버고인의 작전을 어떻게 협조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지시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협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다가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결국 존 버고인의 영국군은 9월 19일부터 10월 7일까지 진행된 새러토가 전투에서 대패한 뒤 대륙군 15,000명에게 완전히 포위되자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했다. 새러토가 전투는 일반적으로 미국이 영국과의 주력군과 회전을 벌여 거둔 첫 승리로 평가된다.
3.3. 국제전으로 확대되다
한편 이 시기 벤자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몇몇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로 건너가 영국과 전쟁 중인 미국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열강들은 처음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새러토가 전투 후 북미 식민지 독립 세력이 영국을 상대로 충분히 맞서 싸울 만한 역량을 갖췄음을 인정했다. 그 결과 영국이 7년 전쟁 후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걸 경계하던 프랑스,[22] 네덜란드, 스페인 등이 영국에 선전포고하거나 독립파를 지원하게 돼 전쟁은 북미 대륙에서 유럽과 인도 전선으로 확대되었다.
유럽 전선에서는 1778년 3월 28일 영국에 선전포고한 프랑스가 그해 7월 27일 웨상 해전에서 처음으로 영국과 맞붙었다. 뒤이어 스페인이 1779년 4월 12일 지브롤터를 탈환하고자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그해 6월 24일부터 지브롤터를 포위했지만 1780년 1월 18일 스페인 해군이 세인트빈센트 곶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참패하면서 지브롤터 공략에 실패했다. 한편 루이스 데 코르도바가 지휘하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1780년 8월 9일 서인도 제도로 향하던 52척의 영국 상선과 5척의 동인도 회사 소속 함선 및 수많은 물자와 수백명의 선원들을 포획해 영국의 해상 무역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서인도 제도에서는 부이예 후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1778년 9월 7일 도미니카 섬을 점령해 카리브 해에서의 영국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 했고, 영국은 이에 맞서 1778년 12월 15일 세인트루시아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고 12월 28일 세인트루시아 섬을 점령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한동안 증원군을 모으며 세력 확대에 골몰하다가 데스텡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1779년 6월 18일 세인트빈센트 섬을 점령하고 7월 4일 그레나다를 점령하면서부터 전황이 프랑스에게 기울기 시작하더니 7월 6일 그레나다 해전에서 존 바이런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데스탱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에게 패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이에 영국 정부는 급히 카리브 해에 더 많은 함대를 파견해 반격에 나섰고, 이후 양측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차례에 걸쳐 해전을 치렀다.
한편, 영국은 과테말라 도독령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내기 위해 1779년 10월 16일 ~ 11월 29일 산 페르난도 데 오모아 요새 공방전을 치른 끝에 요새를 공략했지만, 전염병이 돌아 병사들이 죽어나가자 요새를 도로 포기하는 바람에 전략적으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80년엔 자메이카 주지사 존 달링이 니카라과의 그레나다를 공략하여 산 후안 강을 완전히 장악하여 신대륙의 스페인 식민지를 남북으로 두동강 낼 작전을 기획했다. 이에 존 폴슨 육군 소장과 호레이쇼 넬슨 해군 대령이 이끄는 원정군이 2월 3일 출발하여 3월 17일부터 4월 29일까지 산 후안 요새 공방전을 치른 끝에 함락시켰다. 그러나 원정군은 질병과 식량 부족으로 2,500명이 사망하는 참극을 겪다가 11월 8일 철수했다.
뉴올리언스의 스페인군 사령관 베르나르도 데 갈베즈 장군은 이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미시시피강 하류 계곡에서 영국 요새 5곳을 공략했고, 스페인령 루이지애나 총독 페르난도 데 레이바는 1780년 5월 26일 세인트루이스 전투에서 영국-인디언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스페인군은 1781년 1월 7일 모빌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781년 3월 9일 ~ 5월 8일 펜서콜라 공방전에서 영국령 식민지인 웨스트 플로리다 주의 수도인 펜서콜라를 공략했다.
인도 전선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프랑스의 전쟁 개입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인도에서의 프랑스 세력을 완전히 축출할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 동인도 회사에게 고용된 영국인과 세포이 용병대는 1778년 8월 21일 ~ 10월 19일 퐁디셰리 공방전을 치른 끝에 인도에서의 프랑스 세력의 중심지 퐁디셰리를 공략했고, 1779년엔 말라바르 해안의 마헤 항을 점령했다. 그러자 마이소르 왕국의 군주 하이데르 알리가 영국이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던 마헤 항을 제멋대로 점령한 것에 분노해 1780년 7월 카르나틱 일대를 침공하면서 마이소르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하이데르 알리와 아들 티푸 술탄을 상대로 매우 고전했는데, 특히 1780년 10월 9일 폴릴루어 전투에서 인도에 진출한 이래 최악의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23]
3.4. 지지부진한 전황
이렇듯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열강들이 전쟁에 개입하고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영국 정부는 필라델피아를 장악한 영국군에게 뉴욕으로 철수하고 그곳을 요새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으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이수받고 1778년 6월 몬머스 전투에서 뉴욕의 영국군을 상대로 선전했고, 새러토가 전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윌리엄 하우 소장의 뒤를 이어 뉴욕의 영국군 총사령관이 된 헨리 클린턴 소장은 더이상 대륙군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뉴욕에 틀어박혔다. 이로서 전쟁의 양상은 미국에게 좀 더 유리해졌지만 좀처럼 끝이 나지 못한다. 이유는 양측 모두 내분이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측에서는 점차 돈이 부족해지자 군인들에게 줄 월급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탈영병들이 속출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돈에 쪼들린 대륙군을 위해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는 군수물자의 가격 통제를 실시하지만 이는 '''밸리 포지의 교훈'''을 일으키게 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반란을 일으키려 하기도 했다.[24] 베네딕트 아놀드 같은 경우는 아예 미국을 배신하게 되며 훗날 그는 미국 최악의 매국노로 낙인찍히게 된다. 거기다 장기화되는 전쟁으로 점차 반전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 또한 전쟁의 장기화로 늘어가는 빚과 미국의 근성, 군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점차 미국 독립 의견이 늘게 된다. 그럼에도 조지 3세와 영국 정부는 포기하지 않고 대병력을 보내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그런데 새러토가 전투의 결과는 한편으로는 미국에게 더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다. 영국이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정하면서 또한 전쟁의 목적을 '반란을 진압하는 것'에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면, 거기서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내는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조지 3세는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약속된 전쟁의 무한히 연장으로 그들의 불복종을 처벌할 것"이라며 뉴욕, 로드아일랜드, 퀘벡, 그리고 플로리다에 있는 요새에 3만 병력을 주둔시키고 식민지들의 항구를 파괴하고 해안을 따라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해 그들에게 반역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영국의 목적이 전자에 머물러 있을 때는, 조지 워싱턴이 그렇게 했듯이, 대륙군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넓은 북미 아메리카 대륙 여기 저기로 도망다니다가 영국군이 방심했을 때 기습하거나 혹은 유리한 조건에서만 싸우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영국의 목적이 후자로 바뀌자, 대륙군은 영국군과 정면 대결을 벌여 축출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길이 요원해졌다. 급기야 1778년 말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에 파견된 영국군이 서배너 공방전, 찰스턴 공방전, 캠던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자, 독립 세력은 이대로 전쟁이 끝나게 되면 신생 독립국 미국이 13개 주에서 세력이 더 줄어들게 될 뿐 아니라 북쪽(훗날의 캐나다)과 남쪽(이번에 점령한 조지아,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일부)에 강력한 영국의 식민지와 맞닿게 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졌다.
하지만 독립세력에겐 다행히, 워싱턴이 남부로 급파한 네더니얼 그린 소장이 군대를 잘 수습한 후 영국군을 상대로 선전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는 영국군의 추격을 절묘하게 뿌리치면서 전력을 유지하면서 별동대를 꾸준히 파견해 영국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영국군은 그런 그를 상대로 15차례의 전투를 치렀지만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1781년 3월 15일에 벌어진 길퍼드 코트하우스 전투는 이러한 그린의 탁월한 전술적 감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린은 영국군을 상대로 대단히 분전해 상대에게 큰 타격을 입힌 후 영국군이 전력을 다해 공세를 가해서 전황이 점차 불리해지자 전혀 망설이지 않고 철수했다. 전투 자체는 영국이 이겼지만, 피해는 영국 측이 훨씬 더 많이 입었다.
또한 남부의 영국 충성파 민병대는 1780년 10월 킹스 마운틴 전투에서 독립 지지파 민병대에게 괴멸되었고, 그린과 함께 영국군을 상대로 분전한 대니얼 모건 장군은 1781년 1월 17일 카우펜스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영국군은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를 석권하려던 뜻을 접고 요새화된 교두보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요새에 틀어박힌 영국군을 몰아내지 않는 이상 전쟁이 지속될 것은 자명했고, 자칫하면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반 자체을 상실하면서 영국의 위협에 맞서 계속해서 프랑스에게 의존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서 데꿀멍한 영국으로부터 13개 주 온전한 독립과 여러 기타 권리를 공식적으로 승인받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뉴욕을 점령하고 있는 영국군 주력 병력은 쉽게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고, 남부 파견 영국군을 각개격파하자니 남부 여러 지역으로 재빠르게 대병력을 수송할 수 있도록 제해권이 받쳐줘야 하는데, 상대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상대로도 전 지구적인 제해권을 잃지 않고 있는 영국이었다. 북미 대륙에 파견된 프랑스 함대는 아직 변변한 전공 하나 올리지 못하고 있었고,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영국 본토 침공과 지브롤터 포위를 시도했으나 그것 역시 영국 함대에게 막혔다. 그 외에 인도나 아프리카 등 영국 식민지에 대한 공격이나 반영 세력에 대한 지원 등을 통해 견제를 시도했지만 이 역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러 사건과 우연이 겹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3.5. 바위가 깨지다
3.5.1. 체사피크 만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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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피크 만에서 교전하는 영국 함대와 프랑스 함대. 이 전투에서 토머스 그레이브스가 이끄는 영국 해군은 패퇴했다.
1781년,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해상 수송에 앞서 제해권 확보를 위해 서인도 제도에서 프랑스 함대가 북상했으며, 프랑스 함대의 정확한 규모, 목적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출항 첩보를 입수한 영국도 견제를 위해 함대를 선제적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프랑스는 대담하게도 드 그라스 제독이 서인도 제도의 전 함대 전력을 다 이끌고 온 반면, 영국은 '미치지 않고서야 프랑스가 서인도 제도를 무방비로 비워놓고 전 함대를 이끌고 오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고 적당한 전력의 함대만 파견했다. 아래에 언급하겠지만 서인도 제도는 당시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영국의 '상식적인' 판단도 무리는 아닌 것. 그 결과 영국 함대는 체서피크 만에서 열세의 전력으로 프랑스 함대와 조우해야 했다. 또한, 그럼에도 (결과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 영국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었으나, 영국 함대 사령관 그레이브스 제독에게는 그런 열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한 차례의 체서피크 만 해전(9월 5일)을 치루고는 영국 함대는 후퇴해 버린다.
일단 체사피크 만 해전 자체는 영국 함대가 참패한 것은 아니다. 체서피크 만 해전에 실제 투입된 24:19라는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국 함대가 전열이 붕괴되면서 쫓겨간 것이 아니라 일주일 후에 스스로 퇴각 결정을 내린 것이고, 손실 역시 전투 종료 후 상태가 안 좋은 전함 한 척을 자침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참패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물론 이는 수송작전에 참여했던 바라스(Barras) 함대가 임무를 마치고 합류하면서 36:18의 압도적인 전력 우세 속에서도 프랑스 함대가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지 않았기에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국에게 닥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3.5.2. 요크타운 전투와 전쟁의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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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타운의 항복. 1797년 존 트럼블 그림.
체사피크 만 제해권이 일시적으로 프랑스 함대에게 넘어간 사이,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가 이끌게 된 요크타운 요새에서 주둔하던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가 그 2배가 넘는 대규모의 미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좀 더 부연하면, 요크타운 포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9월 20일부터고, 9월 첫째주에는 아직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필라델피아 근처에 머물러 있었고 해상 수송도 시작하기 전이었다. 게다가 8월 30일까지는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뉴욕과 아주 가까운 스태튼 아일랜드 서쪽에 있었고, 여기까지는 미국-프랑스 연합군이 뉴욕시를 공격할 때 취해야 하는 공격로와 동일하기 때문에 영국군은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즉 9월 5일 체사피크 만 해전이 일어났을 때 요크타운의 포위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이전에 요크타운 요새 주변 지역에는 라파예트 휘하의 병력에 프랑스 함대에서 상륙시킨 해병을 합쳐 고작 3,000명밖에 없었는데 그 병력으로 9,000명에 달하는 영국군을 포위한다는건 어불성설. 또한 영국 함대가 출항할 때는 요크타운이 포위될 거라는 것을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체서피크 만 해전의 패배는 결과론적으로 요크타운의 포위를 막지 못한 결과를 낳은 것이지, 요크타운의 포위를 보고 영국이 구원함대를 내보냈는데 체서피크 만 해전에서 패배한 게 결코 아니다.
체서피크 해전 및 요크타운 요새 포위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프랑스 함대 규모와 대규모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요크타운 요새임을 알게 된 영국은 구원을 위해 대대적으로 병력과 함대를 준비했지만, 10월 5일까지 도착하겠다던 구원군이 도착할 기미가 없자 희망을 잃은 콘월리스는 10월 19일에 마침내 GG를 쳐 버린다. 이 사건 이후 영국에선 전쟁 지지자들이 크게 줄게 되었고 영국 의회에서도 마침내 전쟁 반대파가 우세해졌다. 그동안 영국 의회에서도 전쟁 지지파와 전쟁 반대파 사이에서의 법안, 결의문 등에 있어서 표결 대립이 끝없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전쟁 지지파가 항상 승리했으나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국과의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조지 3세와 영국의 적이다'라는 궁극의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상황이 되었다. 국왕에게 막대한 실권과 영향력이 남아있던 전근대적 입헌군주제 시절이기는 했지만 저 결의문 하나로 모든 것이 뒤집혔고, 영국 정부는 즉시 기존의 전쟁 수행 계획을 포기하고 미국과의 평화협상과 철군 준비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다. 아울러 막후의 강력한 전쟁 지지자였던 조지 3세 역시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앞에서 '여러 사건과 우연이 겹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라고 표현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얘깃거리들이 있다.
- 원래 남부 파견 영국군은 남부 지역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는데, 만약 그 상태에서 미국-프랑스 연합군이 한 곳을 포위 공격했다면 영국군은 고작 2,000-3,000명 수준의 병력만 잃게 되므로 별 타격이 없다. 그런데 식민지 민병대 게릴라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 콘월리스가 상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병력을 이동시켰고, 상관인 클린턴은 콘월리스의 독단 행동을 묵인했으며, 그 결과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가 그것도 대규모 상륙 작전이 용이한 해안에 인접한 요크타운 요새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또한 9,000명이란 병력의 손실은 영국이 무시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게 되었다.
- 콘월리스가 독단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상황에서 이미 영국의 '남부 전략'은 수정이 불가피했다. 남부 전략은 병력을 분산해서 남부 식민지 지역을 폭넓게 점령하겠다는 것인데, 그와 반대로 병력을 한 곳으로 모으면 요크타운 거점을 제외하고는 남부 식민지 지역은 도로 식민지 민병대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그 얘기인 즉, 굳이 콘월리스가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를 데리고 요크타운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제해권을 확보할 강력한 영국 함대도 있었으니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프랑스 함대가 북상하기 전에 콘월리스의 병력을 안전한 뉴욕시로 철수시킬 수 있었고, 그럴 경우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닭쫓던 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체서피크 만 전투와 요크타운 포위 사이에는 20여 일이라는 기간이 존재한다. 그 기간 사이에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인지하고 영국군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어도 최악의 참패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구원군이 도착한 건 콘월리스가 항복한 지 단 5일 후였다.
- 조지 워싱턴은 가능성이 희박한 뉴욕시 공격에 집착했다. 당시 뉴욕시는 주둔 중인 영국군만 11,000~14,000명이고 수년 이상 요새화된 도시였기 때문에, 공성전을 하려면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최소 40,000명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프-미 연합군이 그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영국군을 쳐바르고 전쟁 끝냈을 것이다. 물론 뉴욕은 향후 협상 테이블에서 가질 가치는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상당했지만, 일단 그 시점에서 뉴욕 공격은 미친 짓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조지 워싱턴 장군에게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 목표를 정할 최종 결정권을 주라고 로상보 장군에게 지시했으나, 로상보는 조지 워싱턴의 뉴욕시 공격 제안을 끈질기게 반대했다. 마침내 조지 워싱턴은 '프랑스 함대가 지해권을 확보하는게 중요하니까 함대 사령관인 드 그라스 제독이 상황에 따라 어디로 함대를 몰고 오느냐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한발 물러섰는데, 이번에도 로상보는 몰래 드 그라스에게 체서피크 만으로 함대를 이끌고 오라고 전문을 보냈다. 로상보 장군의 오지랖이 그렇게 넓지 않았다면 역사는 바뀌었다.
- 앞에서 설명했듯이 체서피크 만 해전의 승리는 본진을 비우고 전 함대를 이끌고 나온 드 그라스 제독의 대담함 덕분이지, 북미 전역의 영국 함대가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체서피크 만 해전의 영웅인 드 그라스는 얼마 후 영국 함대에 패해 본인까지 포로로 잡히게 되는데, 만약 이런 프랑스 함대의 패전이 단 몇개월 전에만 일어났다면 역시 요크타운 전투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미국이 불리한 가운데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다른 원인에는 '''장교저격'''이 있다. 당시 미군은 관행을 무시하고, 적극적으로 장교를 저격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으며 영국군의 장교단을 약화시켰다. 현대에도 '민간인은 공격하면 안 된다' 혹은 '전쟁 전 선전포고', '포로에게는 제네바 협약에 따른 대우' 등과 같은 나름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이 당시에 유럽의 국제 전쟁의 규칙 가운데 하나는 전쟁에서 부득이한 상황(눈먼 포탄, 총탄에 맞는 경우 등)이 아니면 '''장교는 대개 귀족이니''' 포로로서 대우하고, 전쟁종료와 함께 협상 후 풀어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당시의 시대를 반영한 것인데, 귀족은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층으로서 정치가, 법률가, 군인 이외의 직에 종사하면 사실상 귀족의 신분을 박탈당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서유럽 국가의 장교 계급은 연공서열을 중시한 계급 매관제이다. 따라서 군인이 곧 정치가이며 정치가가 곧 군인이 될 수 있고, 귀족은 유럽세계에서 그들만의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 국가를 떠나 교류하였기 때문이다. 당대 독일, 러시아 등의 국가도 궁정에서 프랑스어를 사용, 귀족도 주권국, 슈탄데스헤어, 일반귀족으로 구분하여 유럽 전체에서 통혼하였고, 주권국의 경우 부계로든 모계로든 어느 왕실과도 8촌 이내로 묶여 있었다. 일반 귀족 또한 귀천상혼에 의해 각국의 귀족과 교류하고 통혼하였으니... 추가로 19세기 말에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사항과 가문 전체가 수록된 책자까지 간행되었다.
여기에 서유럽에 산업혁명이 전파되고, 유럽의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며 유럽=문명국이 사실상 공식화되던 시대였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장교 저격은 부대의 지휘계통을 마비시키는 효과적인 전략이지만[25] 위에서 언급한 당대 유럽의 분위기에서 장교저격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대에 금기시하는 '''민간인 학살인 대도시 전략폭격이나 다를 바 없는 파격적인 수'''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영국 또한 이를 '''신사답지 못한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사실 이 외에도 독립군들은 유럽의 귀족 문화를 전혀 모르던 민병대가 주축이다 보니 장교 저격 이외에도 유럽 전장에서는 통용되어 온 '관습'을 전혀 지키지 않았고 이것들이 승리와 연결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이 때문에 비신사적 행위라 비난도 많이 받았다.
4. 결과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787년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규정되었다. 한편 미국은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를 요구했고, 그 결과 투표로 인한 선출로 그 사람이 뽑혔다. 이것이 '''인류사 최초의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었다.
대통령이라는 지위가 처음 생겨서 미국 시민들 대부분도 대통령이 선거군주제와 뭐가 다른지 정확한 개념이 없었기에 조지 워싱턴은 실질적 통치행위 이외의 여러 의전의 면에서 왕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많은 미국 시민들은 조지 워싱턴에게 '종신' 대통령을 해달라고 청원했을 정도고, 따라서 만약 조지 워싱턴이 굳이 종신 대통령 하겠다고 난리칠 것 없이 계속 선거에 출마만 했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 당선되어 사실상의 종신 대통령과 동일한 지위를 누릴 뻔 했던 것도 사실이다.[26] 하지만 조지 워싱턴은 깨끗하게 8년만 하고 물러났고, 또한 워싱턴의 후임 대통령이 종신 대통령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낮았기에[27] 민주주의는 미국에서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다.
워싱턴은 7년 동안 총사령관(만약 미국 독립 운동이 실패한다면 반역죄로 사형당할 가능성이 무척 높은 자리인)으로 대륙군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7년 동안 자신의 저택은 요크타운 포위를 앞두고 프랑스 장군들을 접대하는 겸 해서 겨우 딱 한 번 들렀을 정도로 항상 대륙군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고, 종종[28] 전투가 벌어지는 위험천만한 최전선까지 달려가 병사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는 바람에 부관들이 억지로 말고삐를 잡고 끌고 나왔던 적이나 도망치려는 대륙군 병사들의 길을 가로막다가 공격당한 뻔한 적도 있었고, 전황이 나빠지자 원래 매년 받기로 했던 상당한 금액의 총사령관 급료를 미국 독립 후 총사령관 활동을 위해 지출한 경비를 실비 정산만 해서 받는 것으로 바꾼 것도 조지 워싱턴 본인이었다. 그 정도로 미국 독립운동에 독보적인 공헌을 했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될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것이다.[29]
한편 파리 조약에서 미국의 영토는 미시시피 강 동쪽까지로 인정되었다.[30] 그러나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순순히 떠날 리 없었고, 이는 결국 노스웨스트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 ~ 1795)을 유발하게 된다.
친영파(왕당파) 미국인들은 재산을 몰수 당하고 추방 당하거나 매국노로 몰려서 린치를 당했다. 그 중 상당수는 캐나다로 도피했다.
5. 프랑스의 지원: 영국에 대한 열등감이 원인이었는가?
이 당시 전문적으로 세세한 부분을 따져보지 않고 표면적인 부분만 봤다면 이렇게 '''오해''' 하기 쉽겠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프랑스가 영국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것 자체는 맞고 프랑스 자체적으로 이를 극복할만한 수단이 없던 것도 사실이며 미국의 독립 전쟁이 이 수단이 되어줄 수 있기에 프랑스가 상당히 지원해준 것도 사실이지만 오히려 협상 자체는 언제나 '''프랑스'''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프랑스에 협상가로 찾아왔던건 벤자민 프랭클린인데, 이들의 상대로 프랑스측에서 내보낸 인물은 외무장관인 '샤를 그라비에 베르젠'이라는 닳도 닳은 정치인겸 협상가였다. 이 당시 정치 초짜인 미국과 왕조가 여러번 바뀌면서도 기틀은 유지했던 정치 고인물인 프랑스의 위치를 보자면 토끼 하나 잡자고 사자를 보낸 격. 실제로 벤자민과 사절단이 울고불고 사정해도, 현 상황과 프랑스의 열등감을 꼬집어 그를 감정적으로 만들려 해도, 다 안먹히자 '''반쯤 협박인 행위'''까지 할 수 있는 수란 수는 다 쓰고도 베르젠은 끄덕도 안하고 본래 자신이 생각했던 범위인 통상 조약, 동맹, 원조, 차관만 확약하고 선을 딱 그었고 심지어 이후 이미 추가 지원군을 '''파병시켜주고 있는 와중'''에도 물질적 지원이 아닌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는 미국측에게 계속 답을 미루는 척하는등 협상 자체는 시종일관 벤자민이 베르젠에게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벤자민이 프랑스에서 영국에 대한 열등감과 친미 여론을 고조시켰던건 효과적인 한 수고 뭐고간에 '''베르젠을 상대론 아무것도 안먹혀서''' 그나마 시민들 상대로 어그로라도 끌어서 프랑스 정부를 약간이라도 움직여보자는 생각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31]
심지어 종전까지도 프랑스는 현대에서 일반인들이 착각한 것과 달리 '나라가 흔들릴 정도'의 지원을 보낸적은 없다. 미국이 처음 들고 일어날 때 부터 첩보원들을 보내 몰래 관찰한 것을 시작으로 렉싱턴-콩코드 전투 이후 미국의 독립이 아예 무리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중립'을 표방하는 한편 뒤로는 물질적 지원을 해주고 있었고[32] 트랜튼, 새러토가 전투이후 생각보다 미국이 분전하는 걸 보고 스페인까지 끌여들여 미국-프랑스-스페인 3자동맹을 결성시켰으며[33] 이 이후에 지원군을 파병시켰지만 이 조차 종전때까지 영국이 미국 영토에 보낸 군사의 절반도 안된다. 실제로 미국 독립작전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자는 '''외무장관'''이자 프랑스측의 협상가로 참여했던 '샤를 베르젠'이었는데 이는 국가의 수령이 아닌, 외무장관 선에서 처리가 가능할 정도로만 지원해줬다는 뜻이 된다.[34]
다만 이 때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예상 못한 몇가지가 있었고 이게 결국 양 국 모두에게 나름 큰 악영향을 끼쳤다.
먼저 영국은 미국의 전력을 너무 낮게 잡았다. 실제로 그 당시 미국도 여러가지 내적 문제를 품은 상황이긴 했지만[35] 영국이 그걸 알고 했는지는 몰라도 영국의 미국 독립 선언에 대한 인식은 '여느때처럼 일어나는 노예들의 발악'정도로 치부했다. 결국 강경책으로 나가면서도 처음부터 상당한 병력을 들어붇지는 않았고 그 결과 이 당시 저력으로는 세계 최상위에 속하던 영국이, 식민지가 일으킨 반란 하나를 빠르게 정리하긴 커녕 승패를 주고받으며 고착상태가 되게 만들었다. 이는 곧 기회를 보던 프랑스와 (프랑스가 데려온)스페인이 '한번 해볼만 한데?'라고 생각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고 거기에 영국측이 보낸 군대의 수뇌부인 '찰스 콘월리스'와 '헨리 클린턴'이 각각 큰 실책들을 저지르면서 패색이 짙어지고 결국 패배를 인정, 이로서 북미 13개주라는 광대한 식민지를 상실함은 물론, 프랑스와 스페인에게도 별개로 식민지를 어느정도 바치는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프랑스쪽에도 문제는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전쟁이 '지나치게' 장기화 된 것'''과 위 각주에서 상술한대로 '''미국 의회의 지배력이 각 주 정부들을 하나로 모을 정도로 강하진 못했다는 것'''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군수물자와 돈은 더욱 필요해졌는데 미국 의회가 닥달해도 주 정부들이 계속 소극적으로만 지원하니까 결국 미국 의회도 프랑스에 의존할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도 이제 와서 전쟁에서 빠질수도 없는 처지라 지원을 할 수 밖에 없게 됐는데 이게 아직 국력을 완전히 회복하진 못한 프랑스 입장에선 나름 타격이 되었다. 심지어 종전 이후에 미국에 파견되었던 프랑스 장교와 병사들이 '''자유와 박애 정신'''을 배워 프랑스 본국에 퍼트렸고 이건 '''중앙 정부도 감당할 수 없는 폭탄'''이 되었다.[36]
다만 프랑스 '왕국'은 몰라도 프랑스 입장에선 프랑스 자체의 멸망을 우려할 정도의 일은 끝내 없었고 독립 전쟁이 승리하며 영국에 엄청난 엿을 먹일수 있었기 때문에 어쨋든 참전한 목표는 100%이상 이룬 셈이다. 실제로 이 일을 기억하고 있는 프랑스는 이후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선물로 그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로 보내줬을 정도였다.
6. 혁명으로서의 미국 독립
시민 혁명이라는 관점에서는 유럽 한복판에서 일어난 프랑스 혁명보다는 인지도가 덜하지만, 최초로 근대적 공화국을, 그것도 고도의 안정성을 바탕으로[37] 수립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혁명이다.
물론 미국 혁명의 혁명성에 회의적인 의견도 있다. 이에 의하면 혁명이라고 하면 말그대로 사회적이든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무엇인가 혁명적인 전환이 있어야 하는데 미국 독립전쟁은 말그대로 일개 식민지가 경제적 원인을 주요 요인으로 한 독립 전쟁에 불과하는 것이다. 최소한 혁명으로 불리려면 영국의 청교도 혁명처럼 왕당파로 불리는 구 귀족체제에서 의회파로 대변되는 시민세력으로 정치세력이 변동되고, 이로인해 영국의 경제정책이나 기타 정책들이 바뀌었으며 무엇보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격변하는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의의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우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이 있었다고 한들 아메리카 식민지는 국왕과 귀족이라는 본토의 봉건적 계층에 예속되어 있었다는게 중요하다. 즉 철저하게 본토인들의 의지에 따라 자치권이 박탈 가능한 상태였으며, 이러한 상태를 무력으로 바꾸었다면 혁명이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세금 내기 싫어서 일으킨 전쟁이라며 미국 혁명의 혁명성이 폄하되어야 한다면, 잉글랜드 내전(이른바 청교도 혁명)이야말로 찰스 1세의 폭정은 대외적 명분이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청교도들이 자기들 기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루터파이든 국교회이든 가리지 않고 가톨릭이라 몰아붙인 수사에서 일어난 내란이니 더더욱 혁명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도 결국 이전부터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자본가들이 전통적 귀족 계급을 몰락시킨 '있는 자들의 밥그릇 싸움'이니 혁명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잉글랜드 내전은 그렇다쳐도 프랑스 혁명의 혁명성마저 완전히 부인할 사람은 적다. 미국 혁명이 대외적 명분과 실질적 이유가 따로 놀았다고 한들, 혁명성을 부정해버릴 수는 없다.
신생 아메리카 합중국은 성문헌법이 통치하였고, 혈통적 신분을 부정했으며,[38] 권력의 분립과 상호견제가 이루어졌다. 봉건적 문화가 상당한 본국의 지배를 무력으로 뒤엎고 이러한 신생 독립국이 탄생했으니 충분히 혁명이라 할 만하다. 한나 아렌트처럼 프랑스 혁명보다 미국 혁명을 더더욱 높게 평가하는 정치학 연구자도 있다.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자유(freedom)와 해방(liberty)을 혼동하였기에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전체주의의 씨앗을 남겼다고 평했으나, 미국 혁명은 자유와 해방을 구분하였기에 고도의 안정성과 민주정을 쟁취한 성공한 혁명이 되었다고 본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20세기 유럽의 지식인보다도 미국의 지식인들이 미국 혁명을 프랑스 혁명의 견지에서 해석하고, 미국 혁명이 프랑스 혁명의 교훈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 혁명을 비판하는 것이다. 슬픈 진실은 파국으로 끝난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를 만든 반면 그렇게도 성공적이었던 미국 혁명은 국지적인 중요성밖에 가지지 못한 사건으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혁명론>
7. 기타
1775-1784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기에 사진의 시대와는 무관해보이지만 놀랍게도 100세 넘게 장수한 노병들의 사진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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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인물은 레뮤얼 쿡이며 브랜디와인 전투와 요크타운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각각의 발발년도가 무려 1777년과 1781년이다. 생몰년일은 '''1759년''' 9월 10일 - 1866년 5월 20일인데 어느 정도냐면 '''나폴레옹'''보다 10년 먼저 태어난 거다. '''미국의 탄생을 위해 싸웠고 미국의 통합을 직접 눈으로 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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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더 많은 사진은 위 사이트 참고. 대부분 100살을 넘겼다!
미군이 참전한 수많은 전쟁 중에서, 미군의 사상자가 더 많은 거의 유일한 전쟁이다. 상대가 당시 세계적인 초강대국 영국을 상대로 오합지졸이 태반인 미군이 싸웠기 때문. 이 뒤로 소규모 교전을 제외하고, 양측 합쳐 100명 이상이 참전한 전쟁 중 교환비에서 미군이 적보다 불리한 적은 없다. 1차, 2차 대전은 물론 베트남전, 걸프전 등 모두 상대 군인들은 미군보다 높은 손실을 기록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군이 그나마 1대1 가까이 기록했다.(1대 1.4 정도로 독일군이 불리)
독립전쟁 당시 흑인 노예들도 참전했었다. 독립파와 왕당파로 나뉜 식민지 주인들처럼 이들도 둘로 나뉜 것. 단순히 주인을 따라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지만,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주인으로부터 도망쳐서 상대 진영에서 복무한 사례도 있었다. 미군과 영국군 양측 모두 흑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 노예 신분의 해방과 봉급을 조건으로 모병하였기 때문이다. 독립파 흑인 중 유명한 참전자로는 벙커힐 전투 때 영국군에게 포위당하자 기지를 발휘해서 영국군 지휘관을 저격하고 동료들과 함께 탈출한 피터 세일럼(Peter Salem)이 있다. 영국군에서 복무한 흑인 중 미국 노예주로부터 탈출한 노예 출신 흑인들의 경우, 본래는 종전 후 조약에 따라 미국 측이 이들을 붙잡아서 원래 노예주인들에게 되돌려주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영국군 측은 이들의 신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지켜서 이 영국군 출신 흑인 및 가족들은 영국령 캐나다 등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8. 당시를 다루는 작품
- 영화 패트리어트 - 늪 속의 여우: 2000년작. 멜 깁슨, 히스 레저 주연. 독립전쟁 당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를 배경으로 한다.
- 영화 혁명 : 1985년작. 알 파치노 주연. 불의 전차를 연출한 휴 허드슨 감독 작품으로 의미도, 목적도 모른 채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 갔던 "탐" 이라는 인물을 통해 바라본 전쟁서사시.
- 드라마 존 아담스: 2008년작, HBO. 폴 지아마티, 로라 리니 주연. 존 애덤스를 중심으로, 미국의 독립과 건국 과정을 배경으로 한다.
- 게임 어쌔신 크리드 3: 2012년작. 어떤 미친 역덕후의 살신성인에 힘입어 오히려 이 문서보다 해당 게임의 문서가 독립전쟁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더 많은 편이다(...). 일부 작중요소가 가상인 것을 제외하고 실제 있었던 일과 소소한 요소들을 보는 정도로는 괜찮은 편이다. 어쌔신 크리드 3/게임 관련 정보 참조.
- 드라마 TURN: Washington's spies: 2014년작. 미국 독립전쟁 시기 만들어진 정보 집단 Culper Rings와 첩보원의 활약이 묘사된다.
- 게임 시드 마이어의 콜로니제이션, 문명 4 콜로니제이션: 신대륙의 식민지 개척자가 되어 원주민과 싸우면서 결국엔 독립을 쟁취하는 게임. 동시기를 다루고 있다.
- 게임 유럽전쟁 4: 시나리오 모드의 일부인 미국의 굴기 편에서 미국 독립전쟁을 다루며 정복 모드에서도 1775년 편에서 다룬다.
- 뮤지컬 해밀턴: 주인공 해밀턴과 워싱턴 장군, 프랑스 소속의 지원군 라파예트 장군등 역사 속 실존인물들이 주인공인 뮤지컬인 만큼 1부는 이 독립 전쟁을 주로 다루고 있다. 뮤지컬의 메인 넘버인 Yorktown에서 마침내 요크타운 전투로 승리를 거두고 미국이 독립하게 된다.
9. 관련 문서
[1] 미국 내에서는 이렇게 불리는게 일반적이다.[2] 당시 독일 소국들중 일부는 용병산업을 국가 주요산업으로 하는경우가 있었으며 독립전쟁시기 상당수가 영국을 대상으로 장사를했다. 단 하노버 선제후령의 경우 용병보다는 영국의 동군연합 국가였기에 파병한 것에 가깝다.[3] 제2차 영국-마이소르전쟁[4] 제1차 영국-마라타전쟁[5] 아이러니하게도 양측 총 지휘관의 이름이 조지다.[6] 탈영병 대다수가 해군이기에 많아보이는 것이라고 한다.[7] 전보도 없던 시절이니, 미국에서 미국 독립선언문이 발표된 당일에 영국까지 소식이 전해졌을 리가 없다. 미국 독립 선언서가 영국 의회에 도착한 것은 1주일 뒤인 7월 11일이고, 조지 3세가 이를 접수받은 것은 다시 이틀 뒤인 7월 13일이었다고 한다. 미국 독립선언문이 영국에 도착한 날, 당연히 영국은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8]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쟁의 발발 원인은 한 식민지 출신 영국 장교가 우발적으로 '''프랑스 외교관을 살해'''한 데서 시작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정체불명의 식민지 출신 영국 장교의 정체가 조지 워싱턴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만약 조지 워싱턴이 전쟁의 발발 원흉(?)이었다면 결국 그의 우발적 살인이 미국 독립이라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셈. 한편으로 북미 원주민이나 인도 사람과 무관한 전쟁이었다는 것.[9] 2013년 9월 1파운드는 1700원 내외이니 가장 적은 숫자인 '''100억 파운드라고 하더라도 17조 2,482억 원''', '''5000억 파운드라면 862조 4,100억 원'''.[10] 심지어 플레잉 카드에도 인지를 붙여야 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스페이드 에이스만 유난히 도안을 크고 화려하고 복잡하게 그리는데, 이때 붙인 인지의 흔적이다. 다만 인지조례에서 볼수 있듯이 인쇄된 종이에만 세금을 부과할수 있었던게 함정.[11] 사실 각 주마다 공여한 역할의 차이가 있기는 했다. 버지니아나 뉴욕 같이 전방에 인접해 있었던 주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제공한 반면, 뉴저지 같은 주는 기여한 것이 영국에 비해 훨씬 적었다.[12] 원문으로는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13] 영국은 미국이 독립한 이후 식민지 경영전략을 수정해서, 식민지의 독립운동은 탄압하되 식민지에 보낸 영국인 총독을 루트로 해서 식민지의 여론을 영국 본국 정책에 반영시키는 유화책으로 돌아섰다. 나중에 가면 식민지 현지인을 총독으로 임명하기도 한다.[14] 사실 보스턴 학살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었지만 독립파들은 이 사건을 '''아주 잘 활용했다.'''[15] 땅이 넓으니 그만큼 기회가 많았을 수는 있겠다만, 이것도 상류층 얘기로 당시 미국 역시 빈부격차가 심했다. 당장 식민지 사회를 구성하던 다수의 이민자들은 빈털터리였다.[16] 당시 'lobsterback(가재 등짝)'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당시 영국군 제복이 빨간색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17] 정확히는 여기와 여기 참고. 폴 리비어가 한 말이 "The British are coming!"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는 "The Regulars are coming out."이라고 한다.[18] 심지어 장교급이라고 있는 인물들조차 '''보고서를 어찌 써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국 워싱턴이 일일이 다 가르쳐줘야 했다고... 또한 군기도 개판이라 미국 독립군의 서열 2위였던 찰스 리의 경우엔 전쟁 중에 적진 근처의 술집에서 문란한 파티를 벌이다가 다음 날 아침 영국군 순찰병에게 체포되기까지 한다. 결국 미국 측은 미인계를 써서 영국군 장교를 납치한 후 맞교환하며 그를 구해낸다.[19] 영국군이 승리하긴 했지만 피해가 더 커서 숫적열세를 더 악화시켰다.[20] 말이 신사 협정이지, 실제로는 해상 철수 중에 공격하면 보스턴에 불을 질러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21] 당시 범선 시대고 영국 본토와 미국 간의 거리는 구글 지도로 재보면 ''' 5000km 가 넘는다. ''' 그리고 전보라는 개념도 없어서 연락관이 지원 요청서를 작성하여 영국행 배에 올라 직접 전달 해야 했고. 현대의 항공기는 몆십 시간만 타고 가면 되지만 범선시대에는 한 번 보급물자와 지원군을 실어서 도착하면 과장 섞어서 달 단위로 걸렸다(...) 그야말로 거의 현지 원정군으로만 전투를 치뤄야 하는 셈.[22] 사실 이쪽은 1777년부터 비공식적으로 미국을 지원해주고 있었다.[23] 이 때 영국군에게 패배를 안긴 마이소르 왕국은 로켓병기를 적극적으로 동원했는데 이에 영국군은 감명을 받아 콩그리브 로켓을 개발하게 된다.[24] 미국은 이러한 막장상황을 타개하고자 타국에 인원을 파견하여 '''복권을 잔뜩 사오게 했다.''' 이때 사온 복권들은 미 화폐 기념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그 수가 수백장에 이른다.[25] 2차대전 이후 소위, 중위가 계급별 전사비율로 보면 압도적이며 베트남전에서 소위의 평균 생존시간은 1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장교가 저격의 제1순위이다.[26] 의회에서 독립군에게 줄 밀린 월급을 재정부족으로 줄 수 없자 화가 난 군인들이 '대륙회의를 뒤집어 엎고 장군님을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워싱턴에게 보내자 워싱턴은 군인들을 진정시키며 자신은 왕이 될 생각이 없고, 이럴 때일수록 어쩔 수 없이 의회에 따르며 차차 보상해주겠다고 애썼다.[27]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이 종신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음에도 8년만에 물러났으니 '''그 뒤로 감히 종신 대통령을 하겠다는 간 큰 자'''는 미국 역사상 단 한명이었다.[28] 특히 전열이 붕괴되려는 상황일 경우[29] 당시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이 1인당 2표씩 행사하며 투표하고 싶은 2명에게 각각 1표씩 투표하는 방식으로 1위가 대통령, 2위가 부통령으로 당선되는 방식이었는데 워싱턴은 모든 선거인단에게서 1표씩 받았다. 득표율은 50%이지만 모든 선거인단이 워싱턴에게 표를 던졌으므로 사실상 만장일치이다.[30] 기존의 '''공식적''' 영역은 애팔래치아 산맥까지였다. 물론 그 서쪽에도 이미 미국인들이 진출해 있던 상황이었다.[31] 심지어 이것도 '협상하라고 보냈는데 인기몰이나 하고있냐'라는 식으로 동료와 의원들의 거센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고 중간에 파면당하기 까지 했다. 벤자민입장에선 다행히도(?) 벤자민의 후임으로 찾아온 존 애덤스는 오히려 그 고집불통인 면모때문에 베르젠에게서 뭘 더 얻어내기는 커녕 까일대로 까이고 베르젠이 몰래 미국정부에 압박 준 것으로 인해 인사이동당해야 했다.[32] 다만 이 때는 해군전력이 영국보다 확실히 열세라 한창 해군을 키우느라 움츠리고 있던 시기인 것도 한몫했다.[33] 정확히는 미국과 프랑스 둘이 직접적인 동맹을 맺었고 지브롤터때문에 영국에게 물먹은 적이 있는 스페인은 '프랑스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참여했다.[34] 영국은 반대로 왕인 조지 3세가 직접 참여해서 인선이나 파병 병력등 전쟁에 관련된 대부분을 자기가 직접 조정했다.[35] 제일 대표적인 문제는 미'''군'''이 가난했지 미'''국'''이 가난하진 않았다는 것. 언뜻 보면 전쟁통에 이게 뭔 소린가 싶겠지만 이당시 미국은 현재같이 중앙권력이 강하기보단 어찌저찌 기워낸 것에 가까울 정도로 중앙정부가 각 주의 정부에 행사하는 그 지배력이 크지 않았다. 당장 어느날 조지 워싱턴이 의회에 가던 중에 미군이 배굶어가며 영국군과 목숨걸고 싸우는 와중에도 필라델피아의 시민들이 태연하게 사치를 즐기며 호화스럽게 사는걸 보면서 골때려하며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36] 원정 갔던 군인들의 사상수입은 특이한 게 아니어서,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 장교들 중 일부도 귀국 후 어설프게 혁명을 시도했다가 진압당했다.[37]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가 공포정치와 쿠데타, 자국민 학살, 군주정 복고 등을 겪은 것과 비교하면, 미국의 체제는 정말 기묘할 정도로 안정성있게 지속되었다. 이 정도로 안정성 있는 공화정 체제를 세운 시민 혁명은 찾기 어려운데 이는 미국 독립전쟁이 프랑스 대혁명처럼 내부의 지배구조를 근본부터 재구축해야하는 혁명이 아니라 내부의 자치정부는 유지한 채 외부와의 연결고리를 끊으려 했던 혁명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미국조차도 각자 다른 나라 수준이었던 주들간의 연맹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나라로 통합하고자 했을 때 심각한 갈등을 벌이다 끝내 거대한 내전이 발발했다는 것은 그만큼 내부의 권력구조를 바꾸는 행위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38] 물론 사회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명문가와 엘리트들이 있으나, 이건 21세기의 서방 국가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변함없다. 중요한 점은 왕족 - 귀족 - 중인 - 평민 - 노예 5단계로 구성되는 혈통적 신분을 법으로 부정했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