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벽
"작가에겐 소설로 말을 하게 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 문학은 한낱 소문 속의 소문이 될 수 있을 뿐이다."
1. 개요
이청준의 중편소설. 이청준은 자신의 또 다른 소설인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이 잡지사의 사정으로 인해 연재가 중단되는 일을 겪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2. 줄거리
며칠 전, 잡지사의 편집 일을 맡고 있는 나는 그날도 잡지 일로 인한 스트레스로 술을 잔뜩 마시고 집으로 가던 중 길에서 갑자기 정체 모를 사내를 맞닥뜨리게 된다. 사내는 나를 붙잡고 "형씨, 미안하지만 절 좀 도와주시오. 난 지금 쫓기고 있는 몸이오."라고 말하면서 다짜고짜 자신을 집에 숨겨 달라고 말하고,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나는 얼떨결에 그를 내 하숙방 안까지 데리고 온다.아무리 깊은 취중의 일이었다고는 해도, 그날 밤 내가 박준을 대뜸 내 하숙방까지 끌어들이게 된 데에는 어딘지 꼭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날 밤 박준이 처음 나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내게는 얼굴도 성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사내에 불과했고, 그런 그가 아무리 기괴한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하려 했다 해도 나는 다방거리나 신문 같은 데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런 돌발적인 사건들을 만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데 그런 내가 그런 박준을 하숙방까지 끌어들여 함께 밤을 지낸 것이다.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그 이유를 생각해낼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가 그를 나의 하숙방까지 끌어들일 생각을 먹게 되었는지, 스스로 납득할 만한 동기가 떠오르질 않는다.
방으로 데리고 와서 사내의 거동은 더욱 수상쩍어졌다. 도대체 누구에게 쫓기고 있느냐고 묻자 사내는 사실 자신은 쫓기고 있는 몸이 아니고, 어이없게도 자기가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내는 거동만큼이나 모습도 이상했는데, 옷차림이 매우 우스꽝스러웠고 무엇보다도 얼굴이 내가 어디서 꼭 봤던 사람 같았다. 나는 사내의 얼굴이 어디서 봤던 것인지를 떠올려보려 하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만사가 귀찮아진 나는 먼저 잠을 청하지만 사내는 잠이 들 때까지도 나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일은 잠을 자던 도중에 있었다. 내가 중간중간 잠이 깰 때마다 꺼놨던 전짓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바로 사내가 내가 잠들어 있을 때마다 꺼져 있던 방의 형광등을 켜놓은 것이었다. 내가 새벽에 마지막으로 일어났을 땐 역시 전짓불만 켜진 채 사내도 말없이 떠나버린 뒤였다.
다음 날 아침, 사내가 진짜로 미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는 집 근처의 정신병원을 찾아가고, 아니나 다를까 그 전날 밤 환자 한 명이 탈출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나는 박준일이라는 그 환자의 이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가 바로 '박준'임을 확신한다.
박준은 박준일이라는 본명을 가진 젊은 소설가의 이름으로, 근래 무슨 이유에선지 글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고, 내가 일하는 잡지에도 글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문학 면을 맡고 있는 안 형의 반대로 발표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박준의 얼굴을 실물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사내의 얼굴과 매우 흡사했다. 나는 그 병원의 원장이자 박준을 담당하고 있었던 의사인 김 박사를 만나고, 김 박사는 대단히 여유로운 태도로 박준이 자기 스스로 병원에 들어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 말해준다.
박준은 아무도 거치지 않고 불쑥 진찰실까지 들어와 김 박사에게 자신이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으니 좀 진찰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매우 꺼리고 있었으며, 검사를 하면서도 자신에 대해 도대체가 솔직하게 털어놓질 않으려 하고 거짓말로만 일관하는 진술 공포증을 보이고 있었다. 김 박사는 박준이 실제로는 미치지 않았는데도 미친 사람으로 행세하려는 일종의 강박증을 가지고 있으며, 제 발로 다시 병원을 찾아오는 일도 아마 없을 거라고 말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박준이 그렇게 된 내력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던 나는 그동안 읽어보지 않았던 박준의 소설을 읽고 싶어하지만, 그 원고는 안 형의 서랍 속에 있어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박준의 근황에 대해 물어보지만 그들도 모르기는 매한가지다. 나는 안 형에게 서랍 속에 있던 박준의 원고를 읽게 달라고 하고 안 형은 그것을 나에게 준다. '괴상한 버릇'이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나는 박준의 그 소설의 내용이 좀 엉뚱하다고 생각하고, 그것보다도 안 형이 대체 이 소설의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한사코 발표를 꺼려 왔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박준은 등단 후 처음 2~3년 동안은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때껏 우리 잡지에 글을 발표할 기회가 오지는 않았었는데, 박준의 작품활동이 뜸해질 무렵 그가 청탁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 소설의 원고를 스스로 보내온 것이었다. 그런데 안 형은 박준의 소설을 잡지에 발표하기를 별다른 이유 없이 보류하기로 한다.
나는 안 형의 태도가 좀 이상스럽게 생각되었지만 그의 결정권을 간섭하지는 않기로 한다. 그런데 그런 안 형의 보류는 거의 반 년 가까이나 계속되고, 이에 화가 난 박준은 잡지사에 좀 심한 힐책투의 항의문을 보낸다. 하지만 안 형은 그 이후에도 몇 달이 지나도록 박준의 소설을 잡지에 발표하지 않았다. 박준의 소설을 읽지 못하다가 그때 처음 읽어본 내 입장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였다.그때 안 형은 박준의 소설을 읽어 보고 나서는,
"이 소설 안 되겠어요. 그냥 내보냈다가는 공연한 말썽이 생길 것 같군요. 좀 놔두고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요."
웬일인지 한마디로 보류 결정을 내려 버렸다.
"왜 이야기가 신통칠 않습니까?"
"아니 뭐, 이야기가 신통찮다기보다……."
"웬만하면 그냥 내보내도록 하지 그래요. 우리로선 박준 씨 소설이 처음 아닙니까."
"글쎄요. 그렇긴 합니다만…… 역시 좀더 두고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나는 그날 저녁, 안 형에게 부탁해 얻은 박준의 원고료를 들고 박준의 집으로 갈 생각을 하다가 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마는데, 놀랍게도 하숙집 안에 박준이 있었다. 나는 그가 자기 이름을 일러주지도 않았는데도 그를 '박 형'이라고 부르면서 병원에 가서 김 박사를 만나 박 형에 대해 알게 된 얘기를 하고, 병원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면서 그를 병원 안으로 거의 끌고 간다. 박준은 그런 내 태도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별다른 저항 없이 병원으로 따라온다.
다시 김 박사를 만난 나는 그에게 내가 알고 있는 박준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는다. 김 박사는 박준이 진짜로 미친 게 아니라 노이로제에 걸린 것이라고 재차 말하면서, 그런 박준의 불안의 원인을 알아야 하는데 좀체 진술을 하려 하지 않아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박준에게 계속해서 진술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태도는 대단히 자신만만하다. 나는 그에게 박준의 소설을 읽어보는 것이 증세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지만 김 박사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튿날 아침 사무실로 간 나는 소설이 어땠냐고 묻는 안 형에게 왜 소설의 발표를 꺼려왔는지를 묻는다.
나는 박준의 소설을 둘러싸고 안 형과 설전을 벌이다가 박준의 또 다른 소설이 R이라는 잡지에 연재되다가 중단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날 오후 R사를 찾아가 미발표 원고까지 합쳐진 박준의 소설을 얻어내 읽는다. '벌거벗은 사장님'이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박준의 소설은 한마디로, 선량한 독자를 속이고 있다는 해석이었다. 박준의 소설에는 ‘그’라는 주인공이 걸핏하면 잠이 든 체, 또는 숨을 쉬지 않고 죽은 체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 버릇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괴상한 휴식의 방법으로 발전하여, 결국에는 주인공을 죽음으로까지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경우 주인공의 버릇은 도대체 괴상하기만 한 ‘버릇’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절대로 단순한 버릇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애초 이 세상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을 수 있는 비밀, 인간성의 어떤 불가사의한 일면인데, 이 소설의 경우 그것은 그저 단순히 인간성의 한 불가사의한 비밀로서가 아니라 현실을 외면하고 성실한 생존에의 사랑을 포기한 슬픈 습성으로 매도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매도당해야 할 우리들의 슬픈 습성으로 확인시켜 주기 위해 박준은 그의 주인공이 자주 그 몹쓸 습성 속으로 달아나게 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압박요인들을 말해 줬어야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어떤 비밀스런 속성을 만난 놀라움이 아니라, 그런 속성과 현실 사이에 꾸며지고 있는 생존의 방정식에서 보다 명확한 해답을 얻어내는 일이거든요. 분명하게 강조되어야 했던 것은 그 비밀을 만난 놀라움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하여금 늘 자신의 슬픈 습성을 택하도록 강요한 현실의 압박요인들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자꾸 그 버릇만을 되풀이 강조하고, 그 버릇에 스스로 경탄을 금치 못함으로써 박준은 독자의 관심을 엉뚱한 데로 끌고 가버렸어요. 독자를 속인 거지요."
R사에 의해 박준의 소설 연재가 중단된 시점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이어서 잡지에 발표되지 못한 소설의 원고를 읽는다.
소설을 다 읽은 나는 사무실을 나와 다시 병원으로 향한다. 김 박사는 내게 박준에게 한 가지 사고가 일어났었다는 얘기를 해준다. 박준은 평소에도 어두운 걸 싫어하는 성미였는데, 그날 밤에 병원에 정전사고가 생기자 걱정이 된 간호원이 박준의 병실로 찾아갔었다. 그런데 박준은 간호원이 들고 있던 손전등의 불빛을 얼굴에 받자마자 발작을 일으키며 간호원의 목을 난폭하게 졸라댔다는 것이었다. 김 박사는 박준의 공포의 원인이 어둠이 아니라 바로 전짓불빛이었다고 말하면서, 그 전짓불빛의 비밀을 풀어야 그의 증세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박준의 소설에 관한 내 물음에는 여전히 불필요하다고 답하면서, 정 해결이 안 되면 마지막 방법을 써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는다.
여전히 박준의 증세와 그의 소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가 쓴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고 그의 집을 찾아가보기도 하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다. 안 형으로부터 잡지사 일은 안중에도 없느냐는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된다. 화장실에서 휴지 대용으로 쓰던 신문지 쪼가리에서 우연히 박준의 인터뷰 일부를 보게 된 것이다.
우연찮게 박준의 얘기를, 그것도 바로 전짓불빛에 대한 글을 읽은 나는 매우 흡족해한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었다. 박준의 여동생으로부터 그가 써놨다가 '내가 정말 미쳐 버리게 되면 이 소설을 어디다 가져다 팔아보라'고 했다는 소설 원고를 받게 된 것이었다. 신문사로 가서 그 소설을 읽은 나는 몹시 놀란다. 그 소설은 바로 그 전짓불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당신은 아까 내가 위험한 질문이라고 한 말의 뜻을 아직 잘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좀더 설명을 하겠다……
아마 기자의 어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부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박준은 이야기를 꽤 길게 계속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겪은 일이지만 난 아주 기분 나쁜 기억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6.25가 터지고 나서 우리 고향에는 한동안 우리 경찰대와 지방 공비가 뒤죽박죽으로 마을을 찾아드는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경찰인지 공빈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또 마을을 찾아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우리 집까지 찾아 들어와 어머니하고 내가 잠들고 있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짓불을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어머니더러 당신은 누구의 편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때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경찰대 사람인지 공비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지독한 복수를 당할 것이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상대방이 어느 쪽인지 정체를 모른 채 대답을 해야 할 사정이었다. 어머니의 입장은 절망적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절망적인 순간의 기억을,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가려 버린 전짓불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요즘 나의 소설 작업중에도 가끔 그 비슷한 느낌을 경험하곤 한다. 내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마치 그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전짓불 앞에서 일방적으로 나의 진술만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문학행위란 어떻게 보면 한 작가의 가장 성실한 자기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떤 전짓불 아래서 나의 진술을 행하고 있는지 때때로 엄청난 공포감을 느낄 때가 많다. 지금 당신 같은 질문을 받게 될 때가 바로 그렇다……
이날 밤 나는 병원을 찾아가 김 박사에게 소설의 줄거리에 대해 설명하고, 박준에게 계속 진술을 시도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하지만, 김 박사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하다. 나는 김 박사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박준이 있는 병실을 찾아가는데, 그는 눈에 띄게 초췌해져 있었으며, 병실을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 자신은 미친 사람이 아니니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서도 그럼 왜 김 박사에게 그것을 납득시키지 않느냐는 내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한다.
다음 날 나는 사람을 보내 박준의 인터뷰가 실린 신문 기사의 전문을 얻는다. 인터뷰에서 박준은 작가란 전짓불의 공포를 겪으면서도 끝끝내 자기의 진술을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며, 그런 작가를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소문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날 저녁 나는 김 박사와 결판을 짓기 위해 병원으로 가는데, 거기서 나는 정말로 뜻밖의 사태를 만나게 된다.
박준은 다시 발작을 일으켜 병원을 탈출해 버렸고, 김 박사의 태도는 이전과 달리 쭈뼛거리고 있었다. 김 박사는 자신의 마지막 방법으로 아예 '''어둠 속에서 전짓불을 박준의 얼굴에 들이밀어 그를 굴복시켜 진술하게 만들려는''' 계획을 실행한 것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올라 당신이 박준을 미치게 한 것이라고 김 박사를 다그치지만, 그는 변명으로만 일관한다.
마음속으로 허탈감을 느낀 나는 그날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취한 채로 하숙집이 있는 집까지 돌아오지만 박준의 모습은 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