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기
孫寶基
1922년 7월 7일 ~ 2010년 10월 31일
한국의 역사학자 및 고고학자로 한국 고고학의 초창기를 이끈 인물 중 한명이다. 휘문고보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기로 졸업하였다. 이후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64년부터 연세대학교 사학과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정년 퇴직 이후에는 연세대 용재 석좌교수와 단국대 석좌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부임 이후 공주 석장리에서 남한 최초로 구석기 유적을 발굴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며, 그때문에 현재 그곳에 세워진 석장리 박물관에는 파른 손보기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으며, 개관당시 기증한 유품들이 전시된 공간이 있다.[1]
또한 고인쇄에도 관심을 많이 갖고 있어서, 고활자와 인쇄술에 관한 많은 연구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직지심경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최초의 인쇄물임을 밝히는데 박병선박사와 더불어 공헌하였다. 본인이 소장하고 있다 사후에 모교인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한 삼국유사는 이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다시 국보로 격상되어 현재 국보 제306-3호이다.
그와 더불어 한글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그 덕분에 현재 학생들이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과 같이 고고학 용어들을 죄다 순우리말로 사용하게 된 것이 모두 그의 공로이다. 그전까지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한자로 된 어려운 용어를 주로 쓰고 거기에 영어, 불어등 외국어 원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일일이 순우리말로 바꾸고 이렇게 바꿔 쓰자는 것을 외롭게 주장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주로 서울대 쪽이 중심이던 고고학계에서 외면당하기도 했으나, 원로에 속하고 업적도 있는 노학자의 주장인데다 워낙에 체계적이고 치밀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고 입에도 착착 붙게 연구해 이름붙인 관계로, 점차 이것이 고고학계에 수용되어서 고고학은 우리나라 학문 분야에서 보기 드물게 순우리말 용어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분야가 되었다. 그래서 언어순화 운동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를 꼽을 때 늘 언급되는 것이 이 분 되시겠다. 덕분에 한국사를 공부하는 중고딩들이 외울 거리를 약간이나마 줄여준 분이기도 한거다.
여담으로 이 분을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들이 죄다 나비넥타이를 메고 있을 것이다. 이는 일반 넥타이를 메면 발굴할 때 넥타이가 유물에 닿아서 불편하다고 이렇게 메기 시작한 것이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 같이 된 것이다.
[1] 초창기에는 파른 손보기 기념관에 유품들을 전시했으나, 현재는 기획전시실과 맞바꿔서 석장리박물관 본관에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고 이 기념관은 기획전시실로 이용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