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
1. 사건 개요
1987년 12월 24일 수원시 팔달구 화서역 인근에서 김모양(18)이 실종 후 피살된 사건.
2. 사건 전개
당시 김양은 부모님과 싸우고 외출한 후 실종되었으며, 열흘 후인 1988년 1월 4일 수원시 화서역 인근의 논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속옷으로 재갈이 물리고 양손이 옷으로 묶여있었는데, 당시 수사팀장이었던 하승균 전 총경의 말에 따르면, 화성 연쇄살인과 수법이 너무 판박이라서 "그놈이 여기까지 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기적으로 화성 6차 사건(87년 5월)과 7차 사건(88년 9월) 사이에 일어났다. 짚단을 이용해 피해자의 시신을 은닉한 수법이 화성 4, 5, 6차 사건과 유사하며, 화성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속옷을 이용해 결박한 수법도 유사하기 때문에 6차 사건과 7차 사건 사이의 놓친 사건이 아닌지 의심받고 있다.
1988년, 용의자 중 한 명이 조사 도중 고문, 폭행 등으로 뇌사 상태에 빠져 사회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세간에는 명노열 군[1] 뇌사 사망사건으로 보도되어 있다. 당시 이 사건으로 직위해제된 형사 중 한 사람은 아직도 명군이 범인이었을거라고 확신한다고 한다. #
용의자가 사망한 이후 그 외 또다른 용의자를 찾지 못한 채 32년 내내 미제 사건이 되었으나, 2019년 9월 18일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 이춘재가 추가 자백에서 '''이 사건도 자신의 소행이라고 밝히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3. 이춘재의 자백
10월 15일 경찰의 공식발표로 이춘재가 자신이 했다고 자백한 4건의 추가 살인사건중 하나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만, 2019년 9월 19일 언론들의 보도로는 이춘재의 본적과 사건 당시 거주지가 화성이었기 때문에 수원이 거점이었을 거라는 이전의 분석과 연관된 이 사건과의 관련성은 약간 흔들릴 수 있다. 물론 화성이 고향이더라도 화성과 수원은 인접지역이기에 대중교통으로 왕래가 자유로웠고, 실제로 용의자가 수원에 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진술도 있다. 무엇보다 이춘재가 수원에서 고교를 나온 만큼 유력 용의자의 이 사건 연루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건 담당 경찰관이었던 하승균 형사는 이 사건도 화성 연쇄 살인사건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
2019년 9월 25일에 방영된 MBC 실화탐사대에 의하면, 사건 당시 이춘재가 살던 곳과 이 사건 현장이 불과 도보로 3~40분 걸리는 거리였다고 한다.
이춘재의 자백 이후, 사망한 명군의 형이 "이춘재가 자백했음에도 경찰은 사과의 말 한마디 없었다."는 인터뷰를 했고, 이에 경찰은 "결론난 일, 유족 만날 이유 없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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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
[1] 뉴스 기사링크에는 명노식 군으로 되어 있으나 구글링 등의 뉴스 검색에서는 명노열 군으로 쳐야 나온다. 뉴스 기사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